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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에 대한 쓴 소리

http://blog.jinbo.net/diary/?pid=251

켄 로치| 레디앙

 

말걸기[켄 로치 영화를 빌릴 수 있을까...] 에 관련된 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썼다. 레디앙의 요구였다. [영화를 무기로 대처리즘에 맞선 좌파 감독]이라는 글인데 그 제목은 편집국장이 붙였다. 요전에 켄 로치의 영화를 보고자 했던 이유도 레디앙의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 때문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글을 썼을 때와는 달리 켄 로치에 대한 글은 별 '태클'을 받지 않았다. 말걸기 또한 미야자키가 과연 사회주의자이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 있는 강한 확신이 없었으니 열나 태클 들어올만도 했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라 이 사람에 대한 글에 시비 걸 인간도 많다. 태클을 받았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큰 의미에서는 미야자키는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켄 로치가 사회주의자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에서 다루는 건 문제가 없다. 게다가 한국 운동권들에게는 꽤나 '존경' 받는 인기 감독이라 그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정리하는 것은 환영받을만도 하다. 이 글 중 약간은 한국어 텍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보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태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켄 로치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냐에 대한 의심을 품는 일은 없을 터이지만, 원래 글이라는 게 노출되면, 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켄 로치라는 인물에 대한 태클도 있을 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켄 로치를 흉보지 않으니 그게 태클 못지 않은 불쾌감을 주었다.

 

 

미야자키에 대한 글을 쓸 때 무척 괴로웠는데,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생태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의 한 꼭지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책도 여러 권 읽고 작품들도 다시 보고 이미 소개된 정보의 원천을 찾아 번역해 가며 확인하고. 무엇보다 쪽팔리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란... 게다가 미야자키는 말걸기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감독 아닌가. 누를 끼쳐서는 아니되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괴로웠는데, 우선 이 사람의 영화 이외의 정보는 한국어로 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지지리도 못하는 영어 실력으로 자료를 검토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피로에 휩싸인 이유는, 작품을 볼수록, 자료를 정리할수록 켄 로치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말걸기는 켄 로치가 싫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 섞인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은 무척이나 건조하다.

 

 

켄 로치가 싫어진 이유를 밝히기 전에 그가 존경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점도 밝힌다. 또한 그의 영화가 주는 의의도 퇴색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점도. 대처에 맞서, 그 검열의 칼날에 굴하지 않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넘친다. 게다가 꾸준히 실패한 혁명과 인민의 삶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 일관성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는 여지 없이 '운동권'이다. 그래서 싫다. 그는 '영화는 필름일 뿐이다. 정당이나 논문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극영화에 언제나 논문의 일부분과 정당의 주장을 담았다. 그의 '운동권식 계몽주의'가 싫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이 연설장에서 외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는 배우들의 출신 계급을 무척이나 따진다. 극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좌파적 자유'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건 못가진 자들의 정당한 배짱이라는 식이다. 확고한 계급적 경계와 그로 인한 적대적 행위로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농후하다. 그리고 꼭 혁명진영의 분열을 꼬집고 그 책임을 저 편에 떠넘긴다.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포용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에서 거의 도달한 '미학적 경지'로 보아 그는 분명히 극영화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 강박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정신세계로 인하여 자신의 재능을 깎아먹고 있다.

 

 

더욱 그가 말걸기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 이 이유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 한국 운동권들이 갖는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열광이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가 전해주는 진실은, 불편하지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운동권'이라는 '동질감'도 작용한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계급 적대 감수성'을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세상에 계급 적대가 없는 게 아니니 켄 로치의 영화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사회적 관계나 현상을 단순하게 보면 문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가 복잡한 진실을 담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보여주고자 하는 관계, 갈등을 부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켄 로치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추상이 심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해하기 딱이긴 하겠다만.

 

 

레닌에게서 유래했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그 이론을 세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은 사기와 사기의 결과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과장하자면, 한국의 운동권들은 레닌주의의 덫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레닌주의의 위대함을 강변할 바보를 위해서 이 말은 해 두어야겠다. 레닌주의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일 뿐이니 마치 레닌주의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말지어다.

 

또 트로츠키주의자인 켄 로치에 대해 얘기하다가 웬 레닌은 꺼내나 싶은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한통속이었다. 물론 스탈린도. 큰 사상의 궤적으로보면 셋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정치적 행적이 달랐을 뿐이지.

 

 

말걸기의 시각은 이 바닥에서는 소수 의견일 터이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레닌에 대한 생각 따위는 제껴두고서라도 켄 로치의 정치적 감수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운동권들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은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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