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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한옥학교에서1.

한옥학교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온지 벌써.... 근데 정확히 언제지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지라 사실 정확히 얼마나 지난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1달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생전 나무와 쇠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먹물든 사람인지라... 몸을 쓰는 일들이 낯설지만 왠지 익숙하다는 느낌이다.

여기와서 내가 몸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깍아나가는 나무들을 보면, 또 그 드러나는 속살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에 비를 맞아 썪은 것 같아 보이던 낙엽송조차도 한꺼풀 벗겨내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에서는 낯설고 심하게 말해 재수없는 느낌이 들던 사람들과도 몸을 부딪혀 서로를 깍아내다 보면 그 속살이 드러난다. 하얗고 뽀얀 속살이...

 

물론 겉으론 멀쩡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은 다 썩어서 스펀지처럼 푸석푸석한 사람들도 보게된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그 속살의 아름다움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디가나 느끼는 거지만 무슨일이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일 힘들고, 그런만큼 또 제일 중요한 것 같다.

한옥학교에서 만난 좋은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 김실장님, 정실장님 등등과의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

 

또 제일 중요한 우리 29기 동기들과의 인연도 어떻게 이어질지?... 걱정대로 모두들 몸이 지쳐가는 만큼 마음도 지쳐가고 지친만큼 마음의 넓이와 폭도 좁아지는 것 같다. 나역시도 말이다.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월요일 일과의 시작이다. 맘 공부 몸 공부 제대로 함 해보자.. 홧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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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정비의 신화(최호철 글 그림)

[새책] 을지로순환선

그림 한 장에 수많은 민중 이야기

정문교 기자 moon1917@jinbo.net / 2009년02월10일 18시03분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2008, 거북이북스)

 

답답한 어둠의 터널이 대부분인 서울의 지하철. 그 안에 있다 보면 지하에 갇힌 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지하철 이용객에게 서울도심을 관통하는 2호선은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이 비교적 많은 점이 작은 위안이 된다. 그만큼 2호선의 바깥풍경은 희소가치가 있다. 창밖을 보는 순간 ‘창밖에 있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그런 궁금증이 한 장의 그림에 담겨있다.

 

한장의 그림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이다. 한 장의 그림에는 을지로 순환선에 탄 사람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선교하는 중년 남자, 책 읽는 학생, 자는 아저씨...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지만 표정은 다들 피곤에 찌든 모습이다.

 

지하철 바깥세상엔 달동네가 보인다. 아이업고 빨래 너는 엄마, 좁은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전봇대에서 일하는 노동자, 지게꾼, 빨간 띠를 두르고 사장실에 앉은 노동자와 고함지르는 사장... 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아가고 있다.

 

지하철 안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같은 시간에 있을 법한 일들이 ‘을지로 순환선’에 모두 그려져 있다. 대충 지나치면서 보면 몇 초 안 걸려서 볼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월리를 찾아라’처럼 작은 이야기를 하나씩 찾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그렇다고 최호철의 그림과 ‘월리를 찾아라’가 비슷한 종류는 아니다. 가장 큰 차이는 ‘월리를 찾아라’가 느끼한 웃음의 천편일률적인 행복한 모습의 그림이라면 최호철의 그림은 살 냄새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많은 이야기는 챙겨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만화도 회화도 아닌 그림

 

최호철의 그림이 담긴 ‘을지로순환선’은 지난해 2월 나왔다. ‘을지로 순화선’처럼 눈을 팽팽 돌려야 안에 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그림만 있는 건 아니다. 빼곡한 집들을 보면서 웅크리고 앉아 담배 피는 늙은 남자의 모습이 나오는 ‘집’처럼 한 이야기를 담았지만 울림이 큰 그림들도 있다.

 

최호철은 화가이기도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만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회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다가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생활 초기엔 민중미술을 그렸다. ‘을지로 순환선’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지금은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전태일 열사가 주인공인 ‘태일이’를 연재한다. 다양한 경력만 봐도 그의 작품을 회화 혹은 만화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림이다.

 

‘을지로순환선’은 모두 5장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사는 풍경’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삶의 풍경이, ‘일하는 사람들’엔 다양한 직업의 사람 이야기가, ‘큰 세상, 작은 목소리’엔 대추리, 고 김선일 씨의 고향 등 사건의 현장을, ‘우리집 이야기’는 소소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지만 공통점은 있다. 투박하지만 세상의 근간인 민중의 모습이 따뜻하게 담겨 있다.

 

활자가 빽빽한 책만 보는 이, 책을 안 읽는 이, 만화책만 좋아하는 이, 모두 편히 볼 책이다. 최호철은 그림 하나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걸 그림으로 보여준다.

 

혹시 최호철의 그림책을 펼치는 당신이 평택 대추리에 한 번이라도 갔다면 조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정리, 기지 정문 마을’, ‘대추리, 기지 뒤쪽 마을’ 두 장의 그림 앞에 눈물을 글썽일 수도 있다.

 

아래 그림은 만화가들이 인터넷에 릴레이 연재중인 'MB악법 바로보기'에 최호철 화백이 참여한 그림이다.

 

최호철씨의 그림을 접할 때마다. 정말 시원하다. 그리고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 두드러진다. 역시나 4대강 정비라는 허울좋은 신화를 그림과 글로 풀어내는 방식이 아름다움 속에서도 비수를 정수리에 꽂는다.
다음 번에 책 주문할 때는 나도 볼 겸, 평생 보수적으로만 세상을 이해해온 늙으신 아버지에게 선물해야겠다. 아마도 아름다운 그림이 던져주는 효과가 선입견과 거부감을 다소 완화시켜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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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에 대한 쓴 소리

http://blog.jinbo.net/diary/?pid=251

켄 로치| 레디앙

 

말걸기[켄 로치 영화를 빌릴 수 있을까...] 에 관련된 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썼다. 레디앙의 요구였다. [영화를 무기로 대처리즘에 맞선 좌파 감독]이라는 글인데 그 제목은 편집국장이 붙였다. 요전에 켄 로치의 영화를 보고자 했던 이유도 레디앙의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 때문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글을 썼을 때와는 달리 켄 로치에 대한 글은 별 '태클'을 받지 않았다. 말걸기 또한 미야자키가 과연 사회주의자이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 있는 강한 확신이 없었으니 열나 태클 들어올만도 했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라 이 사람에 대한 글에 시비 걸 인간도 많다. 태클을 받았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큰 의미에서는 미야자키는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켄 로치가 사회주의자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에서 다루는 건 문제가 없다. 게다가 한국 운동권들에게는 꽤나 '존경' 받는 인기 감독이라 그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정리하는 것은 환영받을만도 하다. 이 글 중 약간은 한국어 텍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보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태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켄 로치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냐에 대한 의심을 품는 일은 없을 터이지만, 원래 글이라는 게 노출되면, 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켄 로치라는 인물에 대한 태클도 있을 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켄 로치를 흉보지 않으니 그게 태클 못지 않은 불쾌감을 주었다.

 

 

미야자키에 대한 글을 쓸 때 무척 괴로웠는데,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생태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세계의 사회주의자> 시리즈의 한 꼭지로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책도 여러 권 읽고 작품들도 다시 보고 이미 소개된 정보의 원천을 찾아 번역해 가며 확인하고. 무엇보다 쪽팔리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란... 게다가 미야자키는 말걸기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감독 아닌가. 누를 끼쳐서는 아니되지.

 

켄 로치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괴로웠는데, 우선 이 사람의 영화 이외의 정보는 한국어로 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지지리도 못하는 영어 실력으로 자료를 검토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피로에 휩싸인 이유는, 작품을 볼수록, 자료를 정리할수록 켄 로치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말걸기는 켄 로치가 싫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 섞인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은 무척이나 건조하다.

 

 

켄 로치가 싫어진 이유를 밝히기 전에 그가 존경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점도 밝힌다. 또한 그의 영화가 주는 의의도 퇴색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점도. 대처에 맞서, 그 검열의 칼날에 굴하지 않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넘친다. 게다가 꾸준히 실패한 혁명과 인민의 삶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 일관성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는 여지 없이 '운동권'이다. 그래서 싫다. 그는 '영화는 필름일 뿐이다. 정당이나 논문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극영화에 언제나 논문의 일부분과 정당의 주장을 담았다. 그의 '운동권식 계몽주의'가 싫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이 연설장에서 외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는 배우들의 출신 계급을 무척이나 따진다. 극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좌파적 자유'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건 못가진 자들의 정당한 배짱이라는 식이다. 확고한 계급적 경계와 그로 인한 적대적 행위로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농후하다. 그리고 꼭 혁명진영의 분열을 꼬집고 그 책임을 저 편에 떠넘긴다.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포용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에서 거의 도달한 '미학적 경지'로 보아 그는 분명히 극영화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 강박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정신세계로 인하여 자신의 재능을 깎아먹고 있다.

 

 

더욱 그가 말걸기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 이 이유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 한국 운동권들이 갖는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열광이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가 전해주는 진실은, 불편하지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운동권'이라는 '동질감'도 작용한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계급 적대 감수성'을 수혈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세상에 계급 적대가 없는 게 아니니 켄 로치의 영화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사회적 관계나 현상을 단순하게 보면 문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가 복잡한 진실을 담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보여주고자 하는 관계, 갈등을 부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켄 로치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추상이 심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해하기 딱이긴 하겠다만.

 

 

레닌에게서 유래했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그 이론을 세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은 사기와 사기의 결과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과장하자면, 한국의 운동권들은 레닌주의의 덫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레닌주의의 위대함을 강변할 바보를 위해서 이 말은 해 두어야겠다. 레닌주의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일 뿐이니 마치 레닌주의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말지어다.

 

또 트로츠키주의자인 켄 로치에 대해 얘기하다가 웬 레닌은 꺼내나 싶은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한통속이었다. 물론 스탈린도. 큰 사상의 궤적으로보면 셋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정치적 행적이 달랐을 뿐이지.

 

 

말걸기의 시각은 이 바닥에서는 소수 의견일 터이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레닌에 대한 생각 따위는 제껴두고서라도 켄 로치의 정치적 감수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운동권들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은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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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의 [트랜스크리틱] 비판적 읽기

http://blog.jinbo.net/telos/?pid=42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사정이 있어서 2부 2장까지만(3장도 조금;), 그것도 헐거운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방대한 내용을 담은 저작인데다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 정독한다고 해도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충실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의 부족과는 별개로 내가 읽었던 고진의 다른 책, <<윤리21>>과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품게된 의문들을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운 글이기도 했다. 고진의 칸트론과 그 칸트론의 필연적인 결론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실존주의에 대한 참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심들만을 피력하면서 넘어가야겠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이란 이름으로 끊임없는 시점의 이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을 추동하는 진짜 모티브는 '종합'인 것이 아닐까? <<윤리21>>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괄호론'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라 여겨진다.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의 '보편성'은 각각 다른 영역을 '괄호'쳐야지만-칸트에게서 미적 무관심성이 그러하듯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결론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정확히 '괄호'란 무엇인가, 주체는 괄호를 어떻게 닫고 열 수 있는가, 주체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등 궁금한 것이 무척 많은데도 고진이 이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문제틀 속에 마치 사례를 수집하듯이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독해를 거슬러 고진이 칸트에게서 읽어낸 '타자론' 역시 미흡하게 느껴진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타자를 고려함으로써만 구성되는 보편성에 대해서, 보편성에 대한 타자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지 타자성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타자에 대한 관점을 읽어낸 시도는 찬반 여부를 떠나서 평가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제기한 타자론이 타자에 대한 사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예컨대 고진은 자신의 칸트론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괄호론'과 그의 '타자론'의 관계-양자 모두 '보편성'의 구성에 핵심적인 요소들인데-에 대해 이렇다 할 조명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무책임한 의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약간 더 많은 말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은 고진의 <<자본>>해석이다. 여기서 고진 논의의 핵심은 노동이, 정확히 말하면 '추상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교환에서 가치의 원천을 본다는 데 있다. 가치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 해석의 특징은 가치를 일종의 실체-동질적이고 수량화가능한 인간의 '추상노동'-로 보는 것과 가치가 노동과 같은 것이기에 가치의 원천을 생산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고진은 '교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 쟁점을 새롭게 다루고 있는데, 우선 그는 노동가치설, 즉 가치를 실체로 보는 사고에 대해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를 상품들이 교환되는 비율에 불과한 것, 따라서 가격으로 환원해 버리지도 않는다. 가치란 분명히 실체는 아니지만, 마치 실체와도 같은 가상성을 갖는 것이자 인간이 가상성을 인지한다고 해서 떨쳐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써, 고진은 이를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칸트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그칠 수 없는 것이라고 설정한 신, 영혼 등의 개념들-에 비교하고 있다. 맑스주의 가치론이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제론이라는 쟁점과 연결돼 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 경제정책과 운동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으로 연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고진의 재해석은 분명히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진은 '소비자 운동'-그는 소비자 운동의 범주에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도 포함시키고 있다-의 중요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가치의 원천이 생산 과정에 있다는 사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얻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지양은 이를 종결시키는 데 있다는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운동과 소비자 운동-또는 협동조합 운동-의 관계에서 고진이 더 비중을 두는 것은 후자이다. 이는 단지 정세적 이유, 즉 고진의 글이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전통적 맑스주의 운동이 여러 방향에서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있어서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내지 못한 시대를 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는 고진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런 결론인데, 그는 현대 사회 자체를 교환 원리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항구조인데, 이 구조는 각각 세 가지 교환 양식, 네이션은 공동체의 호혜적 교환에, 스테이트는 폭력적 수탈의 형태를 갖는 교환에, 그리고 자본은 상품 교환에 근거한다. 다시 맑스주의 전통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사회 구조의 근간을 자본에 두고 스테이트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기구로, 네이션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즉 속임수로 파악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를 통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있었다. 하지만 맑스주의 역사에서 국가의 폐지인가, 국가 권력의 장악인가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폐기되기는 커녕 오히려 통치의 도구로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을 중심에 둔 전통 맑스주의의 사회 구조 인식에 대한 고진의 비판은 수용할 만 하다. 현대 사회 구조는 이 세 가지 교환 양식이 얽혀 있는 구조이므로, 하나만을 어떻게 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키메이라적인 삼항 구조에 대한 제시가 절망적이기만은 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세 가지 교환 원리 이외에 다른 교환 원리를 생각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모델이고, 따라서 고진에게서 운동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침식해 들어갈 수 있는 이 외부적 교환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소비자 운동'에 놓여 있다.-물론 고진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는 노동자 운동이 협동 조합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그 반대의 상황, 협동 조합이 노동자 운동과 맺을 수 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나는 위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해 고진의 논리에서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대체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지양'인가 자본주의의 '외부'에 의한 '대체'인가는 복잡한 문제일테고, 나는 전자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이런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근거로 고진의 주장을 물리쳐 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자본>>의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는 의문이 드는데, 나는 자본주의 '대체'에 대한 고진의 입장이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 상당 부분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가치형태절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고진은 처음의 단 한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가? 가치형태절은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등가형태, 화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2부 2장에서- 고진은 단순한 가치형태-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될 때 전자가 후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에 놓이며 후자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통해 전자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등가형태에 놓인다-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고진이 이끌어 내는 결론은 '가치'라는 것은 추상 노동이 응집된 실체도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상품과 다른 하나의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도 아닌, '상품 교환'이라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타당성과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증의 적합성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와 화폐의 비밀을 보려 하고 있고, 단순한 가치형태가 드러내는 비밀이 그에게 너무나 명료해서 다른 가치형태를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치형태에 대한 고진의 분석을 읽으면서 그가 맑스의 가치형태를 마치 칸트의 오성 범주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그가 책 어딘가에서 실제로 둘 사이에 유비를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갖고 있질 않아서 확인해 볼 수가 없다- 그가 상품이 교환되는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 고정된 위치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의 현상이 구성된다고, 따라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진에게 자본주의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 '고정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말한 대로 이 구조가 여러 가지 구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상-그에게 교환 자체는 전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환은 신비로운 가상을 생산하지만, 그 꺼풀을 벗겨낸 기저에 놓인 교환에 신비는 없다-, 다른 구조에 의한 '대체'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에서 가치형태를 결코 정태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란할 정도의 운동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을 단순히 헤겔을 본 딴 수사학적 유희로 치부하지 않으려면-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할텐데, 맑스 자신이 가치형태 절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고, 또 엥엘스에게 그 난해성을 지적 받고 쉽게 고쳐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서술의 논리, 또는 운동의 논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치형태 절을 읽다 보면 받게 되는 기묘한 느낌 중 하나는 네 단계로 운동하는 이 형태들이 무한한 순환의 논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고진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매개체가 아니라 그 성립으로 인해 시장 관계가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되는 최초의 형태 자체가 이미 화폐의 논리를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맑스가 비유한 것처럼 화폐가 사자, 공, 여우 같은 여러 가지 동물들 옆에 서 있는 '동물'이라는 동물이라면, X량의 상품 '화폐'와 Y량의 상품 B의 교환은 단순한 가치 형태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또는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고진이 말하듯이 가치가 교환 과정 이후에 전미래 시제로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교환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 원리로써 교환을 바라 보는 고진의 시점 역시 가치라는 가상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을 경유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지젝은 화폐를 주인기표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인기표에 의해 기표 체계는 소급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폐형태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오직 사후적으로, 상상적으로 가정된 것일 뿐 화폐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진의 운동론에 대한 의문이 따라 나온다. 진정한 외재적 비판이란 결국 내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텐데, 고진의 운동론은 잘해야 자본과 병존하는 자본의 외부를 창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닐까? 

 
 
 
  이해를 얼마나 했느냐에 관계 없이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사상들이 있다. 나는 고진을 <<근대 일본 문학의 기원>>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를 알게 된 기쁨은 사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많이 옅어 졌었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문학 평론가로써의 고진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여전히 <<근대 문학의 종언>>은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사 볼 책 중 하나다- 철학/운동 이론가로서의 고진과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감히 그 이유를 "고진의 이론은 나이브하다"고 댈 수는 없을 것 같고-비록 내 글이 건방지긴 하지만, 이건 관용을 기대하는 초심자의 어리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굳이 찾자면 지젝이 말하듯 고진이 '아나키스트'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낡은 편가르기에 더 이상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덧.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지젝의 비평이 올라와 있는 페이지를 링크해 둔다. 요약이 중심이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비판을 하고 있는데, 내게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맑스의 화폐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일반 개념을 설명한 사상가로 참조한 바 있는 알프레트 존 레텔Alfred Sohn-Rethel을 <<트랜스크리틱>> 비판을 위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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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아이가 쓴 동화(엽기?동화)

아주 옛날 오래 전에 2000년 쯤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서울에 동생은 미국에 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가난했었지만 아이가 많았고, 동생은 돈이 많았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니는 생각을 했습니다.

 

'갓나은 아이를 주면 어떨까?', '그래!!'

 

언니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갓나은 아기를 택배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택배가 동생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편지) 택배를 꺼내기 전에 이걸 읽거라

            '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다.

              너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놀라지 마라'

             - 언니가 -

 

"이제 열어봐야 겠다." 동생이 말하였습니다.

"어머!, 갓나은 아기잖아?"

"언니가 왜 아길!!"

"어!, 안에 편지가 또 있네!"

 

(편지) 이 아기 이름은 안데르센이다.

            내가 아기한테 물었다.

            이 아인 커서 만화가가 되도록 키워라.

           - 언니가 -

 

"꼭 그렇게 할께요."

 

--- 10년 뒤 ---

 

"어머니 다녀올게요."

"어디?"

"미술학원요."

"그래."

 

그런 뒤로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다네요. ㅋㅋ...

 

 

지은이 : 우리 딸.  참고로 이제 초등2년 되네요..  (2008.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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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눗셈 사회

   나눗셈 사회

 

                                                          만년초보

  

 

   온통 나눗셈 천지다.

   미래와

   노후의 삶을 위한

   지금 삶의 나누기.

 

 

   젊음은 미래를 위해

   늙어가는 젊음은

   노후를 위해

   자신의 꽃다운 삶을

   끊임없이 나눈다.  

 

  

   허나 삶과 행복과

   사랑의 강렬함은

   미래를 위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나눌 수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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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어떤 별을 품고 살까나 1

불질을 처음 해볼 요량으로 블로거를 개설해 놓고 보니..

더구나 블로그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가슴에 별을 품고'라고 지어 놓고 보니..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요동친다.

 

난 맘 속에 어떤 별을 품고 살아온 걸까? 또 앞으로는 어떤 별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나?

또 왜 굳이 별을 품고 살고 싶을 걸까? 그리고 대체 우리들이 가슴에 하나씩은 품고 있을 그 별이란 건 대체 뭘까?

 

한때는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내가 바라던 별이었더랬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게된 이후..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는 부조리하고 엿같은 세상을 알게 된 이후에는

가슴 속에 또 다른 별이 떠올랐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외치는 별.

 

그때 좀 태어나서 첨으로 뭔가를 깨우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지금도 그 비스무레한 별을 가슴 한 곁에 품고는 있으나..

이제는 또 다른 별도 떠올랐으면 싶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 함께 있으면 즐겁고 모두에게 따듯한 온기를 전해주는 마음.

그런 마음의 별을 품고 싶다...

 

그런데 제길.. 아주 가까운 그곳에서도 별이 아니라 뜨거운 장작불처럼

아니 가스 토치처럼 누군가를 또 지지고 있는 나를 본다.

 

어찌할까나.. 제길..

 

당신은 나는, 그리고 우리는 가슴 속에 어떤 별을 품고 살고 있는가? 또 어떤 별을 품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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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기형도)

전문가(專門家)

 

기형도( [잎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 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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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퇴임을 앞 둔 나의 지도교수와 패밀리의 관계도 생각나고, 내 모습도 아른거린다.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카리스마, 혹은 사탕발림, 아니 오히려

그 사람을 끌어당기는 진지함..

그것이 오히려 골목의 어둠과 모순을 가리는 유리담장이 될 수도 있을 터!!!

주의하라! 주의하라!!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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