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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03
    가사내 노동은 서비스가 아니다.
    flyaway.hy
  2. 2006/03/01
    strike! strike! strike!
    flyaway.hy
  3. 2006/02/28
    죄는 그 자체가 죄인 것.
    flyaway.hy

가사내 노동은 서비스가 아니다.

오랜만에 읽어볼 가치가 있는 뉴스가 나왔군요. 경제활동(물론 여기서 가사내 노동은 서비스로 취급 받기 때문에 경제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게 됩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가사내 서비스를 착취합니다)의, 아무래도 물가가 치솟고 한 가구에 한 경제원으로는 생활이 힘드니 어쩔 수 없어서 여성에게도 가정 외 경제 활동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한국의 여성이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남성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많죠. 우리나라에서 다른 국가와 달리 낙태를 금지시키지 않았던 것은 여성에게 삶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보다는 남성이 귀찮기 때문에(아무래도 호주제에 기대고 있는 우리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챙기게 되어있죠.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육아에 관여하는 것은 거의 전무하지만 말입니다) 낙태의 기회를 옛다하면서 준 겁니다. 아, 여기서 결과론적으로 취업 기회는 많아졌습니다(물론 고학력화에 따른 여성 취업이 손쉬어졌다고 해도, 전체를 따져보면 여성은 보다 더 힘들어졌죠). 하지만 그 기회에 따른 대가가 너무도 큽니다. 가부장제에서의 여성은 이제 경제력과 가정내 서비스까지 의무로 여성은 이중의 억압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여성은 가정내 서비스를 완벽히 이뤄내지 못하면 그 여성은 여성이 되지 못합니다. 여성스럽지 못하다... 이 말 자체가 갖는 모순적인 그 의미는 정말 쳐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열받지만, 이등분되어있는 "성질"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따진다면 여성이 여성일 수 없고, 여성이 인간으로서 대접 받지 못한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럼 이 악순환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하겠습니까?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가부장제를 철폐해야 합니다. 철저히 깨부셔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부터 그 아이의 인생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환경"이 "가부장제"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썩어 문드러진 교육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가부장제"를 철저히 부셔야 합니다. 그건 우리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이뤄야할 과업입니다.

의무는 NO! 권리는 OK!…간 큰 ‘얌체족 남편’ 늘어난다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개발원에 의뢰해 지난해 10∼12월 전국 2925가구 5973명(만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해 2일 발표한 2005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남성응답자(2738명)의 63.8%가 ‘오늘날에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가족부양의 책임이 있다’고 답한 반면 가사노동이나 육아 노부모 부양에는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주일간 부부의 평균가사노동분담비율을 보면 식사준비의 경우 여성 16.2회,남성 1.35회였으며 집안청소는 여성 6.9회,남성1.6회였다. 육아나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남성들의 참여율도 매우 낮았다. 12세 이하 자녀를 둔 아버지의 경우 목욕시키기(10.1%)가 비율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자녀와 놀아주기(7.7%),병원 데려가기(4.3%),숙제 봐주기(2.8%),교육시설 알아보기(0.9%) 순으로 저조했다. 청소년(15∼24세) 자녀의 경우에도 지난 한달동안 자녀와 함께 산책이나 운동을 하거나(17.7%),영화 연극 음악회 가기 등 문화생활(6.5%)을 즐긴 아버지는 매우 드물었다. 부모와 같이 살고 있는 청소년의 60.1%가 ‘아버지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응답한 반면, 어머니와의 대화에 대해선 71.1%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가족내 노인부양·환자를 돌보는 일도 거의 여성들이 떠맡고 있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인 3명 중 2명(63.6%)이 아내(26.3%)나 며느리(25.4%),딸(9.3%),손자며느리(2.5%) 등 여성이 도맡고 있다.

+ 오늘 조그마한 영상을 계속 보다보니 눈 앞이 흐려져서 오탈자, 사문 등을 신경쓰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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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ke! strike! strike!

오늘의 예정은 일찍 일산으로 올라가서 집안을 깨끗이 해놓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야지 룸메이트도 구할 것 같아서...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도루묵.

바로 철도파업 때문이다.

오늘 오전 10시 차로 표를 사두었던 나는 부랴부랴 기차 역으로 나갔더니 오늘 KTX는 3시 반 이후로 두 대를 제외하고 전부 취소가 되었단다. 그래서 3시 반 이후로 있는 기차표를 달라고 했더니, 이미 입석까지 매진. 그러니 어쩌겠어. 내일 있는 기차표 제일 빠른 걸로 달라니까, 내일도 아침 8시와 그 이후로도 두 대던가?  하나가 있다던가? 그래서 잽싸게 8시로 표를 구매해놨다. 내일도 못 올라가면 난리는 나는데.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온 몸에 온갖 무거운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왔던 나는, 거기다가 귀찮은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화라고 하기보다는 "화를 내지 않는 나의 상태"에 대해서 오히려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이 곳 버스 노선을 나는 모른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봤다.

며칠 전, 용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 놓여져있는 선전지를 보았다. 그나마 적은 인원으로 힘들었던 KTX 승무원들의 숫자를 두명으로 줄인다니(물론 기차 한대당) 당연히 승무원 노조는 일어설 수밖에 없지 않는가. 여객기 한대당 어탠던트가 몇 명이던가? 내 기억으로는 6명은 넘을 것이다. 그런데 KTX 승무원은 2명이라니. 거기다가 간당 간당한 계약직이니 당연히 이들은 파업으로서 자신을 알려야 한다.

물론 승무원 노조 뿐만 아니라, 기득권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은 결속하여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파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정당성에 대해서 이야기들 하는데, 정당성은 누구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건가? 휴가 나온 오빠와 본 영화가 바로 무니치, 뮌헨이었다. 뮌헨 올림픽 사건. 정당성을 이야기하자면 누구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검은 7월단이 자신의 민족을 위해(여전히 탄압받는) 한 일이다. 만약에 어딘가로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이스라엘 정부도 신문에 터뜨리기 위해 일부러 폭탄을 썼다)는 자신들의 취지와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테러"를 어떻게 이야기해야할 것인가? 이것이 테러라면, 우리나라의 위대한 열사들은 전부 테러범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업도 마찬가지다. 지금 기득권에 향한 감시견이 아니라 기득권의 개가 되어버린 언론은 끊임없이 머리 속에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 있다. 파업은 죄악이라고.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죄악이라고.

웃기고 있네!

파업이야 말로 기득권이 주도하는 파멸을 그나마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파업이(테러가) 목적이 되어선 안되지만, 이를 방법으로 사회 모순을 헤쳐나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대학에서 사회학 과목을 배우게 된다면 맨 처음 배우는 것이 바로 결속을 해체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건 바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이간질시키면 그 결속은 바로 해체될 것이며, 그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은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뻔한 일 아니겠는가. 돈이 권력이 되고 힘이 권력인데, 그나마 인원수로 몰고 갈 수 있는 쪽이 그 결속을 해체 당한다면ㅡ 참담한 결과만을 가지고 올 것이다. 언론은 그 이간질의 수단을 자처하고 있다.귀족노조 귀족노조... 우리가 노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언론에서 떠드는 정도? 그 정도 밖에 알 수 없잖아. 간접경험으로 모든 것을 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삼성은 귀족노조라고 얼마나 욕을 먹더냐? 그런데 삼성 SDI는 노조 단체를 형성하는 것 자체를 막고 있다. 노조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롯데는 어떻고 CJ는 어떠드냐. 전부 노조 단체 형성 자체를 막고 있다.

언론은 어서 정.경과 헤어져야 한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점점 더 간접경험으로 밖에 세상을 볼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위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용자들 역시 "권위에 대한 신앙심"을 해체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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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그 자체가 죄인 것.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할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랜다.
16세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법정에 출두했다.
그 이유는 성폭력의 피해자로서 법정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 의해서 성폭력을 당했다.
당연히 이탈리아 법전에는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성폭행을 한 죄인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
소녀도 자신에게 치욕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벌할 수 있는 법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범한 죄인은 아주 경미한 벌을 선고 받았다.

왜냐고?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기 전에 이미 성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여서이다.
이미 처녀성을 잃은 소녀에게 성폭행이란 그저 얼굴을 얻어 맞은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니, 처녀성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소녀에게 악몽으로 남겨질 범죄를 제대로 벌할 수도 없다는 것인가.

이는 전부 가부장제에 의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의한 법제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 여성 재소자가 교도관에 의해 성추행을 꾸준히 당하고, 결국 그에 못이겨 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뉴스에 나오고 있다.
내가 기가 막혀하는 것은 이러한 기사에 대한 정부와 교도소의 입장에 대한 기사이다. 어제 밤에 본 뉴스에서 교도소장이 말하길, 이 여성 재소자는 이미 여러번 정신과 상담을 받던 재소자이고, 그런 이유로 자살이 성추행에 의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기사 내용은 기자가 맘대로 잘라서 붙일 수도 있으니 곡해할 여지가 있더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실 권력 구조상, 재소자는(여성이든 남성이든) 교도관 아래에 놓이는 위치이다. 당연히 그녀로서는 교도관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범해진 성추행을 그녀는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살의 원인은 어떻게든 자살한 사람의 유서에서 찾는게 옳지 않는가?
그녀의 유서는 그 정도의 가치도 없나?

결국 교도소인 "권력"은 한 여성의 죽음을 자신들이 범한 죄가 아니라 "그녀의" "정신 상태"로 책임 전가하고 있다.

그녀의 정신상태가 어찌되었든 그녀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전부 가부장제에 의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의한 법제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성추행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바로 한나라당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다. 뉴스에 대서특필되고 헤드라인으로 나오는 이 사건은 자본주의 사회의 피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자와 재소자"

왜?
여성들이 다 성추행을 받은 것이 아니더냐.
물론 여기자가 직업 특성상 언론에서 보다 더 크게 다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문제는 한나라당과 언론이 보여주는 행동이 교도소와 언론이 보여주는 행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당대표가 나와서 사과하는 것, 그것으로 한나라당을 봐주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그들이 보여주는 차별성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이다. 여당이 하는 일, 정부가 하는 일, 전부가 못마땅해서 반대하는 야당들이 왜 이 재소자 문제를 가지고는 한마디 말도 없는 건지.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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