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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테러, 비정규직

비정규직 차별 문제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보다 크게 볼 순 없을까요?

얼마 안되는 몇푼의 이익에 눈이 멀어 버린다면 그거 얼마나 서글픈 현실입니까??

우리는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 가지고 싸울 계제가 아닙니다. 생태 환경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연일 기상이변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재산상의 손실을 보고 있을 뿐만아니라 소중한 생명마저 앗아감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푼?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 얼마나됩니까? 그만큼 제가 보전해줄까요? 제가받는 조금의 월급으로 그게 가능할지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어쨋거나 단 한푼을 벌더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할줄 아는 넓고 깊은 마음을 가졌음 합니다. 우리가 버는 한푼은 우리 기업들이 갈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자원을 값싸게 들여오는 대신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오갈데 없음은 물론 굶어죽기 까지하는 현지 주민들이 있기에 얻을 수 있는 결코 값싸지 않은 소중한 자원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이웃과 대자연의 희생을 바탕으로 누리는 현실 세계에서의 만족(더러 불만족스럽더라도)스런 욕구를 충족 시킨다면 일말의 죄의식이나마 가져야하는거 아닌가요 그런걸 가진다면 실천 실천을 해야겠죠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거나 조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겠다 라는??

 


[한겨레] [조계완의 노동 시대] 전체 노동자 임금을 깍아내리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냉혹한 얼굴
결국에는 자본과 노동의 동거를 깨뜨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수단이 아닐까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헨리 포드는 1914년 어느 날 포드 공장 노동자의 임금을 두배로 올려줬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급 5달러’였다. 포드는 “내가 고용한 노동자들도 포드차(모델 T)를 구입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포드주의는 대량생산뿐만 아니라 ‘대량소비’에서도 자본 축적의 원천을 발견한 생산 시스템이었다. 포드의 이 새로운 질서에서 “자본과 노동자들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결합돼 있었다. 포드 공장에서 젊은 견습공으로 일자리를 잡은 노동자라면 거기서 ‘노동의 생애’를 마감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쉽게 말해 정규직 평생고용이었다. 비정규 노동의 진실은 ‘반쪽 저임금’ 그러나 이제 고삐 풀린 시장이 자본주의를 질주하면서 자본과 노동의 동거는 무너졌다. 케인스주의적 계급타협도 깨지고, 노동 세계는 이제 자본의 일방적인 지배가 판치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의 전투성은 흔히 말하듯 ‘노동운동의 힘 과시’가 전혀 아니다. 사용자의 지배·공세에 맞선 생존을 위한 방어적 투쟁일 뿐이다. 우리 시대 노동의 절반은 비정규직(2004년 전체 임금노동자의 55.9%)인데, 자본의 지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현상’이다.

비정규직 현상 뒤에 숨은 냉혹한 얼굴(자본)은 웃고 있지만, 점차 타락하고 있다. 흡혈귀처럼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할수록 더 활기를 띠는 게 자본의 혼이다. 어떤 집단적 조직도 없고 오직 개별 노동자로서 시장에서 거대한 자본과 대면해야 하는 비정규직은 최대치까지 착취가 가능하다. 그래서 자본은 “비정규직 확산이 관철되지 않으면 설비투자도 않고 고용도 늘리지 않겠다”며 ‘자본 파업’으로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 어느 기업이 비정규직을 더 많이 사용해 더 싼 가격으로 시장에 상품을 내놓을 경우 경쟁기업은 더 많은 비정규직을 써야 승리할 수 있다. 자본 분파들이 기술은 뒷전이고 오직 ‘인건비 따먹기’로 이윤축적 경쟁에 돌입해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테일러는 바닥에서 나사를 집어들어 기계에 끼우는 노동자 동작을 스톱워치로 0.01초 단위까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네가 저 무거운 철강을 들어올리면 다른 노동자보다 몇푼 더 주겠다”고 꾀어 노동자 체력의 극단까지 알아낸 뒤 이를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균 과업으로 부과했다. ‘과학적 관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테일러주의는 노동 착취를 강화한 ‘유혈적’ 테일러리즘이었지만, 오늘날 자본의 비정규 노동 착취에 비하면 차라리 인간적이고 소박했다.

물론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하다. 비정규직의 세계도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유연화니 21세기 새로운 노동 형태니 하는 여러 진단 그 너머에 있는 비정규 노동의 진실은 ‘반쪽 저임금’이란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가 노동자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숙련을 파괴해 상품을 값싸게 하고 노동을 축출했는데,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비정규직은 기계보다 더 훌륭한 ‘자본의 무기’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은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거대한 ‘고용된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만드는 훌륭한 기계’ 노릇을 하지만 ‘더 많은 임금’을 찾아 떠도는 수많은 불완전 취업자들일 뿐이고, 이들은 실업인구가 그러듯 노동시장에서 끊임없이 전체 노동자 임금을 끌어내리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건강한 노동조합운동마저 깨뜨려 거대한 비정규직은 존재 그 자체로 집단적 노동의 힘을 약화하고 기존의 건강한 노동조합운동마저 타락시킨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착취에서 발생한 독점적 지대를 정규직과 자본이 나눠갖고, 이런 노사간 물질적 배분은 노사 담합으로 이어진다. 거대한 규모의 비정규직이 ‘풍부한 노동력 저수지’ 노릇을 하는 한 조직 노동의 공장 노동력 철수(파업)도 무력해지고 만다. 개별 노동자로서는 해고될 경우 실업의 공포도 크지만 ‘비정규직 함정’에 빠져 노동 생애 내내 비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더 큰 공포가 짓누른다. 일본의 자본은 회사가 어려워지면 일단 임원들이 스스로 임금을 삭감하고, 이어 기계를 퇴출시키고 그래도 버틸 수 없으면 최후에 노동자를 해고한다.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견뎌내고 최근 새롭게 부활하는 일본 경제의 저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임금을 두배로 올린 포드의 5달러 임금제는 전후 자본주의 황금 시절의 한 축이었다. 거꾸로 임금을 절반으로 억압하는 비정규 고용은 자본의 이윤 축적에 봉사할지 모르지만, 자본과 조직노동을 타락시키고 수많은 비정규직의 삶을 불안케 해 종국에는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건 아닐까?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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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열심히 하는 대학생이 나라를 일으킨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놈이 일요일 고려대학교를 갔다왔다. 녀석은 웅장한 건물에 감탄하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에 무척 감동받은 모양이다. 아들의 기행담에 대고 기말고사 기간이니 당연히 놀던 친구들도 요즘은 공부를 하는 척이라도 할 것이고, 웅장한 건물은 사학이 벌려낸 빚잔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내 눈초리가 무서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의 방조도 잠시, 어른들 있는 자리에서 끝내 입방정을 떨고 말았다. 대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참 다행이라는 감탄사에 대고 데모안하고 취직에 매달려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놈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면박을 주고는 우리 때는 데모 열심히 하고 덕분에 취직도 잘되었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사실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대학생을 보면 우리 때(80년대)와 비교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고시바람이 대학에 분지 오래인데, 가장 비창조적인 고시공부에 매달리면서 자기 두뇌를 낭비하는 젊은이가 많은 나라는 불행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노동비용을 줄여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극심한 횡포가 수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대학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의 중심에서 대중문화의 소비지로 급변하면서 사회전체적으로 자본우위의 역관계가 지속되었기에 예비노동자인 대학생이 고달파 진 것이다.

80년대말 노학연대라 불렸던 자본에 대항한 저항전선의 확대는 남한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일련의 사태가 상황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소위 순순환(順循環)의 형태를 띠게 하였다. 자본은 위축되었고 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에 양보가 불가피했다. 임금이 오르면서 내수가 확장되고, 기술개발과 마케팅 강화 필요성도 높아지면서 고학력 인력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높아졌다. 완만한 인플레와 높은 경제성장율이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자들의 자기실현에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한 예로 그 유명한 건대사태로 수백명의 대학생이 까막생활을 하면서 정부미를 몇 개월씩 먹었지만 대부분 대기업에 취직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일자리는 풍부했다.

지금 대학이 대중문화의 중요한 소비지가 되고 대학이 이른바 한국 IT산업의 리트머스 시장이 된지 오래다. 대학축제 때 대중가수가 공연을 하고, 여성댄스그룹이 공연을 할 때 관객석의 반응은 전방위문공연과 흡사하다. 81년도에 서울대에서 어용 학도호국단(전두환이 학생회를 못 만들게 하려고 만든 단체)이 주최한 쌍쌍파티에 초대받은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이 발칙한 대학생들의 협박에 오금이 저려 오지 못하고 나중에는 무대를 완전히 박살냈던 폭력적인 일부 대학생들은 강제징집 당했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T.V로 생중계되던 고연전 농구경기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놈들 물러가라”는 플랭카드를 펼친 용공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들이 육박전을 버려, 경기중이던 운동선수들이 졸지에 관객이 되었던 이야기(무엇보다도 싸움구경이 최고인지라!)는 신화 수준이다.

21세기 대학생들은 예비노예로 전락하였다. 대학교라는 공간에서 노예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요즘 대학생은 머리가 텅 비었다. 대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 서점은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80년대에 박불똥이라는 민중화가가 그린 네컷짜리 만평에 보면 공부를 조금한 학생은 돈을 전망하고, 조금 더한 학생은 고시합격을, 그리고 그것보다도 조금 더 한 학생은 교수를, 그리고 왕창 공부한 학생은 수갑을 전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삶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기회가 박탈당한 지식인들이 의존할 것은 오로지 책뿐이다. 그런데 독서량이 적으니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창출할 능력, 자신들의 담론을 만들어낼 능력, 사회적 의제를 제시할 능력을 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중문화와 이것과 결합한 대중소비, 그리고 취업난에 의해 대학에서는 지금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 대학은 상속재벌과 결탁해 교육재벌로 성장하고 있는 사학에 의해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수탈하는 곳,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곳, 산업예비군을 양성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이를 타개하지 않고서는 황폐한 대학이 살아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지금 대학생들이 고된 취업준비와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행동이 객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무상교육을 요구하고, 자본의 무차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규탄하며 나아가 우리사회의 운영원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동력, 아카데미 군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87년 이후 몇 년 동안 보여주었던 선순환의 시기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 자본의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 이를 조만간 극복할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순환을 일으키는 자본주의에 대한 어설픈 기대보다도 차라리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대학은 이제 수년간, 저항의 부재로부터 초래된 고통을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전초기지, 사회주의자들을 양성하는 정치학교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대학이 지성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가 꿈틀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와 계급, 그리고 인간의 해방을 고민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역사적 공간으로 대학이 바로 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학생의 멋은 청춘의 빛나는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지성에 있다. 그리고 그 지성이 세상의 칭송을 받는 방법은 행동에 있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 세상을 구하는 일은 대학생들의 책꽂이에서 맑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눈빛과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김광수>

 

동감. 그런데 그게 어디 대학만의 문제일까요 하긴 때가 덜 낀 젊은 대학생들마저? 그런거라면...뭐 그런거라면 고딩에게나 기대 걸어보죠? 요즘 두발자유화 등 의식있는학생들 많던데 하긴 10대들....소비의 주체이긴 하다.. 텅 빈 호구들....쩝...암튼 자본주의 이거 한번은 죽어야할텐데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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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아, 은행가고 싶다."
  
  공공건물이라곤 조그만 우체국 하나밖에 없는 남해안의 한 포구로 여름 휴가를 온 고등학생 녀석이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는 민박집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뱉은 말이다. 나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함께 산책 갔던 주위의 어른들이 빙그레 웃다가는 이내 아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닫고는 에어컨을 켠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사람들에게 대안적 삶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째 머리를 싸매던 내게 충분한 동기유발의 계기가 됐다. 냉수 한 잔 걸치고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10분만 앉아 있으면 될 것을 도시에서 길들여진 그 짜릿한 시원함을 잊지 못해 쇳소리를 내는 억지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참을 쉬고 나서 다시 해안가로 나가려 하기에 식수는 챙겼냐고 물었더니 마을 상점에서 생수를 사기로 했다는 것이다. 땅 속에서 퍼 올린 이 집 물이 파는 생수보다 훨씬 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집 뒤에 있는 파란 플라스틱 탱크에 담겼던 물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수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와 파이프를 거쳐 나오는 줄도 모르고 단지 식품 인증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현지의 자연산 생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긴 지리산 산속에 별장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공기청정기를 팔아먹는 세상이니….
  
  문명이 지나쳐 사람들을 문맹으로 내몰고 있다. 저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똑똑한 척하지만 내가 보기엔 석유 문명이 만들어낸 물신(物神)의 주문에 사로잡힌 듯 했다. 에어컨을 켜도 석유요 생수를 사 먹어도 석유다. 집 안은 물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석유가 없이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석유 문명 시대에 석유를 잘 쓰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은 석유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이 싹트는 전환기다. 석유 문명이 종말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석유 자원이 고갈 위기에 빠진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석유 문명에 의한 온갖 공해와 자연 파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두고 미덥지 못한 정권을 두들겨 패기에만 바쁘지 그 근저에 석유 문명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당장에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만 돼도 주저앉고 마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겨우 몇 년을 맡을 뿐인 정권에 모든 덤터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진실로 국가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위기를 넘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삶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나
     
  
출근하는 시민들로 꽉찬 신도림역.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연합뉴스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모두 석유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경제부국이 된 경우다. 석유 에너지로 쌓아올린 부(富)는 예외 없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패턴을 보이고 있다. 사실 석유 문명만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게 아니다. 그 옛날 나무와 석탄을 때던 시절에도 한 문명이 몰락의 징조를 보일 때에는 반드시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이어지는 거대한 착취구조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착취의 규모와 깊이가 종의 멸절에까지 이를 정도로 악성적이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돈을 많이 벌어 풍요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면 남들이야 어떻게 되건 적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바로 이런 생각이 몰락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착취에 기반을 둔 세계화 구조 속에서 어느 한 곳으로 부가 집중되면 될 수록 다른 곳에서는 기아와 질병, 전쟁 등이 만연하게 되어 있다. 때로 강대국들은 부의 집중을 촉진하게 위해 기아와 전쟁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구라는 유기체는 이러한 쏠림과 의도적인 파괴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자연재해나 괴질 또는 사회병리 현상, 테러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체제는 규모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치밀한 감시와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잘못되면 바로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도 불안정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독재와 관료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불행한 것은 일단 이 체제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개인이건 국가건 파국에 이르지 않는 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체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고립 속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시나브로 자멸하기 십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안적 삶을 바라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대단한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
  
  대안적 삶은 당연히 석유 문명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선은 석유 문명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대량생산(유통) 시스템에 복무하는 노동자(판매원)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서서히 발을 뺄 것인지,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과연 나의 영혼과 지구촌의 모든 이웃들을 풍요롭게 하는 현명한 소비는 무엇인지, 나는 오로지 나의 편리만을 위해 스스로 치우지도 못하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사회 전체의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 등등….
  
  이렇게 석유 문명에 철저히 포박된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성찰한 다음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현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에 옮기려면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시스템이란 것이 대부분의 인구를 도시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이득을 뽑아내려고 만들어진 것이므로 도시에 살면서 그 체제를 벗어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가령 내 손으로는 아무 것도 내게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없는 도시인이 슈퍼마켓을 통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규모 발전소에서 중앙 집중식으로 공급되는 전력선에 온갖 전기 제품들을 연결해 사용하는 마당에 소규모 대안 에너지 시설을 도입한다는 것도 실현성이 별로 없는 얘기다. 그러므로 대안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에너지가 되도록 적게 들도록 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안적 삶이 가능한 직업 또는 산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저 에너지가 적게 드는 생활을 살펴보자.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은 되도록 몸의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몸을 써서 자급자족하게 되면 대량 순환 체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그만큼 몸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에너지가 적게 드는 제품을 선택하고 되도록 몸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귀찮더라도 몸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많은 가정주부들이 홈쇼핑의 광고에 현혹되어 조금이라도 편리한 가전제품을 구입해 노동력을 절약하려고 드는데, 가사 노동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생활양식을 간소화하면 웬만한 일들은 자신의 몸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큰 집을 구해 그 안에 온갖 살림살이를 잔뜩 채워놓고는 살림을 유지 관리하느라 또 다시 노동 절약형 가전제품들을 사들이는 소비의 악순환에 빠져서는 대안적 삶을 얘기할 수가 없다. 에너지 문제도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집중식 화석연료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집안에 설치 가능한 대안 에너지 시설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시민 주도형 대안 에너지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에너지의 외부 의존도를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간소한 생활 방식과 소규모 생산양식이 바람직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세계의 평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어느 구비에서나 먼저 평화를 유린하는 측은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가 큰 무기를 들고 있으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너도 나도 무기 개발에 나서기 때문에 평화는 늘 설 자리가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공원에서 칼 든 강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다수에 의해 지켜지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살상 무기와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에 대항해 소규모의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절대적 다수가 연대하여 저들의 큰 손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행복을 위해선 농업만이 대안
  
  이와 같이 지구촌의 평화와 생태계의 안정,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개인 또는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직업 또는 산업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농업이다.
  
  예컨대 대규모 선박 건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를 보자. 그가 열심히 일하여 최고 품질의 선박을 만들어내면 그로서는 보람 있는 일을 했노라고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는 노동의 대가로 받은 좋은 월급으로 석유 문명의 온갖 편리를 누리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가 만든 대형 선박은 대량 순환 체제를 유지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세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심지어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대량 순환 체제에서는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산업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위험성이 아주 낮다. 소규모 산업 가운데서도 지구 생태계 보전과 석유 문명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에 농업만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농업은 위에서 언급한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형태의 직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농업은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는 지금의 관행농은 물론 아니다).
  
  먼저 농업을 통해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먹을거리와 생필품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으므로 굳이 대규모 유통시스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둘째, 농사일이란 것이 주로 몸을 써서 하는 것이므로 아무래도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농업이야말로 다른 어떤 산업보다 대안 에너지를 적용하기 쉬운 분야다. 농경지의 지형 조건에 따라 소수력, 풍력, 태양열, 지열과 같은 다양한 대안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고 농업 부산물을 이용한 바이오 에너지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셋째, 몸을 많이 쓰고 계절의 리듬에 맞추어 일하기 때문에 생활이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소규모 제조업이나 상업이 농촌에서도 가능하듯이 도시에서도 텃밭이나 베란다, 지붕, 나대지 등을 이용한 소규모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도시농업과 주말농장, 계약농업 등을 잘 활용한다면 농업은 현대 산업 구조 속에서 최고의 생산적인 취미활동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유 문명에 푹 빠져 사는 현대인들이 농촌에 가서도 순간적인 더위를 참아내지 못하고 에어컨을 켜대는 것은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자연 생태계에 적응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지구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에너지마저도 이제 고갈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이야말로 이 위기 상황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소박 단순한 대안적 삶과 농업에 있음을 알고 주어진 조건에서나마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필자 소개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는 지난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 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더불어 사는 대안 문명을 일구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야생초 편지>(도솔, 2002),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두레, 2003) 등의 저서와 <새벽의 건설자들>(코린 맥러플린 외, 한겨레신문사, 2005)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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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 난동자를 살해하는건 정당한 자위권 행사

1000톤짜리의 육중한 몸무게를 자랑하며 숨을 쉴때마다 맹독성 유해가스를 쉼 없이 뿜어대며 달리는 흉기, 자동차

 

그것을 조작하며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한숨만 팍팍 쉬게 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짓을 할까요? 아니 문제는 그들이 아무 겁대가리 없이 마구 내지르는데도 누구 하나 막는 사람 없고 도리어 그들이 뭘 하든 그저 피하기에 급급하는 시민들은 뭔가요? 칼 들고 설치는 사람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국가공권력은 어떻게 하나요?  그들을 피하는 모습이 마치 강도가 무서워서 그들이 시키는대로 순순히 응한채 굴복하는거랑 뭐가 다른가요?

 

이젠 할말을 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 흉기가 우리들의 삶의 터전에서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우리들이 그 길을 빼앗아야 합니다. 빼앗긴 길에도 봄은 오는법이죠. 언제까지 그들 때문에 얼어붙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자 실천합시다. 길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법? 그딴거 필요없습니다. 자동차 재벌에게서 뇌물을 받아막고 인체에 유해한 경유차 조차 허용하는 겁을 상실한 놈이 국가권력일진데 그놈들한테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다니는 인도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자전거 주행자는 차도를 휘젓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행을 합법적으로 방해합시다. 만약 얼굴 들이밀고 쌍욕을 퍼부으면 어떡하냐고요? 상관없습니다. 본래 폭력 좋아하는 사람은 폭력을 씀으로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러는거죠 만약 절대 굴하지 않고 도리어 맞선다면 그들의 폭력성? 결코 표출할수만은 없습니다.  이런놈은 초장에 본때를 보여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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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민, 피지배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라

피지배민이 머 어때서? 너는 지금 피지배계급 아니더냐? 아님 날강도 도둑놈인 자본가??나 그 하수인??
피지배민임을 부끄럽게 여기지마라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다. 그것은..... 그리고 피지배계급은 자연과 우리의 이웃을 벗삼으나 지배계급은 그것은 착취하고 수탈한다. 피지배계급은 함께살기를 실천하나 지배계급은 홀로살기(끼리끼리)를 실천하며 그들 밖에 있는 남들은 단지 억압의 대상일뿐이다 권력으로서...때론 국가공권력의 힘을 빌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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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

해외칼럼] 지구온난화와 카트리나
제러미 리프킨 · 미국 미래·경제학자
정리=이건호기자 ghlee@chosun.com
입력 : 2005.09.06 19:24 03'


▲ 제러미 리프킨
풍속 233㎞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의 멕시코만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시신(屍身)이 해변에 널부러져 있는 사이, 이상한 정적이 흐른다. 워싱턴 관리들이 비밀이 새 나갈 것을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살인폭풍 카트리나는 늘어난 이산화탄소 방출과 지구온난화의 엔트로피 계산서라는 비밀을···.

카트리나는 앞으로 화석연료 사용이 한계점을 지나 기울기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 미국인들이 원유(原油) 시대의 종말과 지구온난화의 재해가 먼 미래의 일이라는 미신을 버린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 ‘미래’는 지난 8월29일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만(灣) 지역 저지대를 초토화시킨 거대한 파도를 타고 폰차트레인 호숫가에 도달했다.

카트리나는 단순한 불행이나 가끔 오는 자연재해가 아니다. 우리가 이 악마 같은 폭풍을 만들었다. 한 세대 동안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재앙에 대해 배워왔으면서도, 이를 막지 못한 것이다. 차량 중 52%가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SUV(스포츠형 다목적차량)인 미국 실정에서 우리가 무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장래에 미국인들은 전세계 인구의 5%도 안되는 미국이 세계 화석연료 소비량의 4분의 1을 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에너지 보전을 위해 가솔린 1갤런당 5센트의 세금을 더 내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이기적이었다고 허리케인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외국인들이 미국은 지구온난화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자는 교토 협약에 왜 서명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올 때,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한동안 미국인들은 이재민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 재정적 지원을 한다고 난리일 것이다. 미국인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지구가 도움을 호소할 때,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걸까? 결국 우리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2개의 폭풍 전선 사이에 놓여있다. 하나는 사상 최초로 세계 원유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시장의 원유 가격은 배럴당 70달러를 맴돈다. 휘발유와 난방용 기름 가격은 멕시코만 지역에 불어난 물처럼 뛰어올랐다. 지금은 원유 시대의 마지막 시기다. 다른 하나는 우리 생태 환경이 이산화탄소 증가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도망가서 숨을 데도 없다. 지구는 뜨거워지고,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갇혀 있다.

지금도 부시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제방을 새로 쌓고, 황폐화된 지역 재건에 힘써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다음에는 5등급, 아니 더 지독한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잠깐이나마 부시 대통령의 귀를 빌릴 수 있다면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태풍의 눈을 자세히 보면 지구의 종말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카트리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기름 마개에서 우리 자신들을 떼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라는 얘기를···.

대통령은 “폭풍에 맞서 싸워 이기자”는 설교는 뒤로 미뤄야 한다. 대신 카트리나가 왜 발생했는지 그 진실을 말해야 한다. 방만한 에너지 소비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미래의 에너지 활용을 위해 지금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는 희생을 감내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대통령이 지속가능한 재활용 에너지와 수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

Global Warming Hits New Orleans: The Controversy After the Storm

Jeremy Rifkin is the author of The Hydrogen Economy: The Creation of the World Wide Energy Web and the Redistribution of Power on Earth (Tarcher/Putnam: September 2002).

First the deafening roar of Katrina bearing down at 145 miles per hour on the gulf coast of the United States. Now the eerie silence, as victims wash ashore and out to sea. And in the aftermath, it seems that all of official Washington is holding its breath, less the dirty little secret gets out: that Katrina is the entropy bill for increasing CO2 emissions and global warming. The scientists have been warning us for years. They said to keep our eyes on the Caribbean where the dramatic effects of climate change are first likely to show up in the form of more severe and even catastrophic hurricanes. Indeed. Over the course of the past several years, hurricane activity and intensity has picked up in the Caribbean basin. Now the killer storm Katrina has hit with a vengeance, exacting incomprehensible devastation on a wide swath of the southeastern portion of the United States.

The reality is, Katrina will be looked back on as a “tipping point” of the fossil fuel era the moment when the American public began to discard the comfortable myth that the end of the oil era and the cataclysmic effects of global warming lie far in the distant future. The future arrived on the shores of Lake Ponchartrain with a giant wave of water rushing through the streets of New Orleans, wreaking destruction and havoc on the low-lying lands of the Mississippi gulf region on Monday, August 29th and the result is that America and the world have changed forever.

Katrina is not just bad luck, nature’s occasional surprise thrust on an unsuspecting humanity. Make no mistake about it. We created this monster storm. We’ve known about the potentially devastating impact of global warming for nearly a generation. Yet, we turned up the throttle, as if to say, we just don’t give a damn. What did we expect? 52% of all the vehicles owned in America are SUVs, each a death engine, spewing record amounts of CO2 into the earth’s atmosphere.

How do we explain to our children that we Americans represent less than 5% of the population of the world, but devour more than 1/4 of the fossil fuel energy produced each year. How do we say to the grieving relatives of the victims whose lives were lost in the hurricane that we were too selfish to even allow a modest 5 cent additional tax on a gallon of gasoline to encourage energy conservation? And when our neighbors in Europe and around the world ask why the American public was so unwilling to make global warming a priority by signing on to the Kyoto Treaty on climate change, what do we tell them?

In the coming days and weeks, millions of Americans will rush to the assistance of the victims of hurricane Katrina with offerings of food, shelter and financial assistance. Natural calamities bring out the best of the American character. We pride ourselves on being there for our fellow human beings when they cry out for help. Why can’t we muster up the same passionate response when the earth itself is crying out for help?

Shame on the United State of America and the peoples of other countries we’re not alone who have put their personal short-term whims and gratifications ahead of the welfare of the planet.

Of course, now even we are paying the price. We’re caught up now between two storm fronts. On the one hand, global oil demand is,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eclipsing global oil supply. The price of a barrel of oil is hovering at $70.00 on world markets. Gasoline and heating oil are rising as fast as the flood waters in the gulf-states, in part because the storm knocked out oil rigs across the Gulf of Mexico and crippled a large portion of our gasoline refining facilities.

We are entering the last few decades of the oil era, with ominous consequences for the future of a global economy run virtually entirely on fossil fuels. While our petro-geologists are not sure when global oil production will peak the point when half the world’s recoverable oil is used up it’s clear to all but the few delusional souls in the oil industry that the beginning of the end is in sight.

On the other hand, our Biosphere is convulsing from the buildup of CO2 gases, and there is nowhere to hide or escape. Our planet is heating up, trapping all of us in an unpredictable new period in history.

There will be thousands of memorial services in coming weeks to pay respects to the dead, the missing and the injured. There will be hand-wringing and recrimination. The public will demand to know why the dikes protecting New Orleans and the gulfport region failed. Why necessary precautions weren’t taken to lessen the impact of Katrina. Why the relief effort was too little, too late. Still, what we are not likely to hear from President Bush and The White House or from business leaders, or for that matter from all of us still driving our SUVs is a collective “we’re sorry!”

President Bush has called on the American people in this hour of our grief to rally to the task, to help restore the dykes and causeways, patch up the streets, and rebuild the homes and communities lost in the devastation. To what end, if we leave the demon of global warming unchecked. The next time it will be a Category 5 storm or something even far worse and unimaginable.

If I could get the ear of President Bush, for just a moment, here’s what I would say. Mr. President, if you had looked deeply into the eye of the storm, what you would have seen was the future demise of the planet we live on. It’s time to tell the American people and the world that the real lesson of Katrina is that we need to mobilize the talent, energy, and resolve of the American people and people everywhere to weaning ourselves off the oil spigot that’s threatening the future of every creature on earth.

President Bush, spare us your homilies about American grit and determination to “weather the storm and persevere.” Instead, tell us the truth about why Katrina really happened. Ask all of us to consider a change of heart about our profligate energy-consuming lifestyles. Call on us to conserve our existing fossil fuel reserves and make sacrifices in our future use of energy. Provide us with a game plan to move America beyond fossil fuels to a new sustainable energy future based on renewable sources of energy and hydrogen power. We’re waiting.

 

 

환경칼럼] 20년 사이 100분의 1 된 제비

노영대 ·한국자연정보연구원장 · DMZ생태학교장


▲ 노영대
한국자연정보연구원장
가끔 '환경특강'이라는 이름으로 강단에 설 때가 있다. 강의에 앞서 화두(話頭)처럼 이런 질문을 꼭 던진다. “제비의 고향이 어디지요?”. 그러면 대개 ‘강남요!’라는 대답이 나온다. 틀린 답이다. 제비가 나고 자란 곳은 우리의 처마다. 처마가 바로 제비의 고향이다. ‘강남에 간 제비’라고 말할 때의 ‘강남(江南)’이란 중국 양쯔강 남쪽 아래 지방을 뜻한다. 그런데 ‘강남’은 제비가 먹이인 벌레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철에 임시로 피해 가는 피난처(월동지)일 뿐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사람 수보다 제비가 더 많았다. 집집마다 한 둥지 이상 제비집이 있었다. 그런데 20여년 전부터 제비가 번식지인 우리나라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젠 도시에선 제비를 구경하기가 어렵게 됐다. 급기야 서울시는 제비를 ‘보호야생조류’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제비가 얼마만큼 줄어들었는가는 충북산림환경연구소와 금강유역환경청에서 1980년대부터 실시하고 있는 조사 결과를 보면 안다. 매년 민가(民家)가 있는 충청도 지역의 10㏊ 면적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987년 2282마리였던 개체수가 1990년엔 1109마리, 1996년 155마리로 줄어들더니 올해에는 5월엔 13마리, 8월엔 22마리였다.

제비는 논에서 진흙과 짚을 물어다 처마에 집을 짓는다. 제비가 사람이 사는 민가에 집을 짓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새끼를 보호하자는 생각이다. 제비의 알과 새끼를 노리는 뱀이나 쥐 등 천적(天敵)의 접근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지간한 농촌에서도 주택개량이 이뤄져 제비가 집을 짓기 어렵다. 시멘트나 콘크리트 벽면에는 진흙이 잘 달라붙지 않는다.

먹이도 많이 줄어들었다. 제비는 한 해에 두 번 번식하는데 보통 1차 번식에 5마리, 2차 번식에 4마리 안팎의 알을 낳는다. 14일 정도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데 이 갓 깨어난 새끼의 몸무게는 약 1.8g. 20여일을 키워 둥지를 떠나게 하는데 이 때까지 자식들은 엄청난 양의 먹이를 필요로 한다. 약 3주 내에 몸무게를 10배 이상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너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부모 제비는 하루에 200마리 이상의 벌레를 사냥한다. 제비 가족이 월동지로 갈 때까지 약 5만 내지 6만 마리 정도의 벌레가 필요하다.

그런데 먹이의 공급처였던 농경지의 환경이 바뀌어 버렸다. 논과 농경지에 뿌려진 농약과 화학비료가 벌레들을 없애버린 것이다. 농약에 오염된 벌레를 먹게 되면 제비도 나쁜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다. ‘환경호르몬’으로 불리는 내분비교란물질의 섭취로 새끼를 제대로 낳지 못하거나 낳은 새끼도 비실비실해지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제비에게 적합하지 않게 변한 환경이 인간에게는 괜찮겠느냐는 점이다. 논은 우리의 주식인 쌀의 생산 공간이다. 제비만큼이나 사람도 논에 의존한다. 그런 논의 환경파괴로 제비가 멸종해가고 있는데 사람은 멀쩡한 것일까. 제비가 생물학적 존재라면 사람도 생물학적 존재다. 몸무게가 가벼운 제비는 좀 일찍 독성(毒性)이 나타난 것이고 체중이 더 나가는 사람은 아직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눈알에 노란 빛이 돌면 황달이라고 의심하여 진단을 받아야 한다. 안질 정도로 하찮게 생각하여 안약으로 치병(治病)하겠다면 낭패를 볼 것이다. 눈에 나타난 증상이 간의 이상을 알리는 징후인 것을 빨리 알아야 간의 병을 고칠 수가 있다. 지금 제비의 위기는 사람의 위기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증후군(症候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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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불공평한건가요??

<이별남녀>중
 

"아버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한건가요?" 최근 시작한 이별남녀라는 드라마에서 눈길을 끌게 하는 명 대사 하나...이것에 대해 아버지는 대답, 공평하면 재미 없으니까? 아니다.

 

세상이 불공평한 이유는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기 때문 아닐까? 가진 자의 꿈과 희망은  착취, 억압을 통해 현재의 권력을 누리며 미래의 권력의 확대재생산을 기약하는 꿈과 희망이요, 가지지 못한 자의 꿈과 희망은 언젠가는(열심히만 하면) '나'도 '가진 자'가 되어 그들(기득권자)처럼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니라........

 

결국 그런 환상 속에서 부모세대는 땀 흘려 일했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꿈을 로또,복권, 투기에 편승 한 몫 잡아서, 자식세대에겐 '사교육'이라는 마술이라는 것으로 한방에 '인생역전'을 하려는 꿈만을 꾸기에 착취와 억압이라는 잘못된 현실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이제,  할수없는건 원하지 않을거라는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의 말 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투쟁에 나서야 할 때다. 그것만이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불합리한 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까 솔직히 불의의 시대에 불의를 바로 잡기는 커녕 그것에 편승해 한 몫 잡으려는 세태. 분명 잘못되지 않았나? 불의를 통해 '성공'이라는 권력을 얻기 보다 불의의 사회를 때려 엎기 위해 나서는게 더 현명하지 않나? 설령 힘이 부쳐 그렇게 까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사회에서 부당하게 권력을 향유하는 권력자(대표적인게 경제권력)들의 모습을 더는 보기 싫어하는 태도라도 보여 그들 기업이 내놓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거야말로 개인의 이기적 선택이 궁극적으로 전체 경제를 합리적으로 끌고 가도록 하는 유인을 제공해준다는 사실....ㅎㅎㅎ 

 

그나저나 부모세대의 로또, 복권, 투기나 자식세대의 사교육은??? 로또, 복권, 투기(카지노, 경마, 경륜..)산업은 대부분 정부가 간여하고 있는 문제라는걸 감안하면 보다 명확해지지 않나?  기득권 권력을 위한 손발, 하수인인 정부가 서민들을 상대로 이런 사업을 한다는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사교육 역시  공교육 불신이 사교육을 부추겼다는 기본적 사실을 감안하면 공교육 불신. 이거 국가권력과 기득권자들의 음모 아닐까??? 따지고 보면 얼마든지 공교육을 바꿔서 학부모와 학생들로 하여금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끔 할 수도 있을텐데 도리어 학교는 사교육 따라하기(입시위주교육)에 급급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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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그 소리 없는 아우성

출산율 급감으로 야단법석으로 떱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공동체 사회 유지에 대한 기본적 철학 같은건 없고 오로지 생산 가능 인구, 소비시장으로서의 인구, 국가를 살찌우기 위한 인구 그거뿐입니다. 하긴 인구. 사람 입이죠. 사람 입이 줄어들면 당근 먹는게 줄고 먹는것만 주냐하면 갖가지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아 치울 대상자가 줄어드니 그토록 비상 걸려 하는것 어째 보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암튼 그건 그거고 하고 싶은 얘기는 좀 도발적이긴 합니다만..

자살, 간간히 뉴스를 통해 알려지는 내용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자살하려는 어떤 사람을 몸을 던져 막았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살려 줬다. 그게 과연 미담일까요 아니면 살기 싫어 죽을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살려준 철천지 원쑤일까요??

정답은 각자 판단에 맡깁니다. 허나, 하나 확실한건 자살을 선택할 자유도 인정해줘야 합니다. 왜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는 없다고 합니까?? 누구 좋으라고요?? 그럼 이렇게 봐 봅시다. 조건을 내겁니다. 이래이래 해달라 안해주면 여기서 뛰어 내리겠다. 물론 여기서 이래이래는 재벌해체, 과도한 세금 징수 억제, 생존권 보장, 깨끗한 공기 숨 쉴 권리 보장(배기가스로 부터의 자유), 구속 남발 중지 등 얼핏 혁명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회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일 수도 있는 문제 그런 문제에 대한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자살할 권리는 인정해서는 안되며 그런 행위는 억제되어야 마땅할까요? 자신이 원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 꾸는건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당연한거지요? 그렇다면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고 싫어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자살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자살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피력하시는분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까지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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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과 싸워야 한다 펌

부자 학교의 가난한 학생

부자 동네 옆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학교를 다닌 탓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들 중에 진짜 부자가 몇 명 있다. 처음에는 우리 집이 가난한 순서로 반에서 두 번째 내지 세 번째쯤 됐는데, 더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전학을 가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결국 우리 집이 반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 됐다.

반 아이들 중 몇 명은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서 기사나 ‘식모’가 싸 들고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점심을 펼쳐놓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먹기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가 싸 주신 조개젓 반찬이 냄새가 난다고 아이들이 얼굴을 돌리며 인상을 쓰는 바람에, 도시락을 창문틀에 내 놓고 고개를 창문 밖으로 빼 낸 채 혼자 점심을 먹기도 했다. 조개젓 반찬이 다 떨어질 때까지 며칠 동안이나 점심을 그렇게 먹었다. 내 등 뒤에서 “맛있는 반찬을 싸와서 혼자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못난 인간들은 그 시대에도 항상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내가 그 학교를 끝까지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어머니가 학부형회에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참석해 대의원으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결국 내 자랑이 되니 하지 않겠다. 마음대로 짐작하기를...

나이 쉰이 넘은 요즘, 그 친구들은 몇 년째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면서 나에게도 연락은 하지만, 나는 그 모임에 딱 한번밖에 가보지 않았다. 어릴 적 담임선생님이 교장선생님으로 취임하는 날, 겸사겸사 참석했을 뿐이다. 그 친구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최고급 식당 역시 어릴 적 친구가 경영하는 비싸기로 소문난 일식집이다.

요즘은, 그 친구들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과 관련된 일이 터지거나, 우리 사무실 변호사들의 급한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가끔 연락을 해오면 만날 기회가 있을 뿐이다. 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나 한 다리 건너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입이 쩍쩍 벌어진다.

부자 친구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커피를 판다고 소문이 자자한 커피전문점을 경영하는 사장님은 초등학교 때 내 짝이었던 친구다. 외국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왔다기에 만났더니 “얘, 우리나라 커피 문화가 외국과 비교해서 50년쯤 뒤진 거 아니?”라고 묻는다. 나는 “그게 500년쯤 뒤진 들 무슨 상관이냐?”고 대꾸했다.

한번 구경 가보니, 한 잔에 몇 만원씩이나 하는 커피를 마시러 사람들이 바글바글 와 있었다. 낯익은 연예인들의 얼굴도 보였다. 굳이 커피 창고를 구경시켜 준다기에 따라 갔더니, 작은 깡통을 가리키며 “이거 한 통에 200만 원쯤 하는 거야. 콜롬비아에서도 일 년에 몇 킬로그램밖에 생산되지 않지. 우리가 볼 때 ‘스타벅스’ 커피는 원가 몇 백 원밖에 안 되는 구정물에 불과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한민국 부잣집 아이들의 놀이터라는 번화가에서 커다란 미용실을 경영하는 친구도 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그 상가가 아예 그 친구 소유다. 대한민국 멋쟁이들이 다 모인다는 다른 번화가에도 역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상가를 한 채 더 갖고 있고, 그 상가에서 커다란 한식당을 경영하기도 한다. “너 요즘 돈 얼마나 버냐?”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는 표정을 하고나서 “응, 많이 벌 때는... 하루에 3천만 원쯤 벌어.”라고 했다. 매출이 그만큼 된다는 뜻이겠지, 설마 그게 순수익일라구...

그 친구가 “술 한 잔 사겠다.”고 했지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나는 2차 모임에 가지 않고 빠졌다. 나중에 들었더니 4명이 청담동의 한 술집에 가서 5백만 원어치쯤 마셨단다. 그런데, 한다하는 재벌 누구누구가 단골로 드나든다는 그 술집에서 하룻밤에 5백만 원어치쯤 술을 마셔봐야 ‘졸부’ 취급밖에는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을 대표하는 재벌 부자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한낱 ‘새발의 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 친구가 백화점의 명품점 앞을 지나다가 2천만 원짜리 코트가 좋아 보인다고 불쑥 들어가 걸치고 나온들 욕할 수 있을까? 하루 번 돈만큼도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봄날’에서 고현정이 입고 나왔던 옷들이 한 벌에 천만 원짜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옷들을 일상적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우리 사회 한 구석에 버젓이 있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너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족집게 과외를 받는다던데, 너희 집 아이들도 하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우리 큰 애도 했고, 막내가 지금 하고 있어.”라고 했다. 내가 “정말로 과외비가 한 달에 과목당 천만 원씩 드냐?”고 물었을 때, 친구는 “그건 옛날 얘기지.”라고 했다. 한 과목에 2천만 원씩 다섯 과목 한 달 과외비만 1억 원이 든다는 것이다. 아예 “서울대 합격할 때까지 몇 억” 그렇게 과외비를 계산하는 강사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 썩을 놈의 학벌 중심 사회에서 자기 아이들이 서울대에 들어간다는데 돈 있는 인간들이 그 돈을 내지 않을 리가 없다.

한 평에 몇 천만 원이나 하는 금싸라기 땅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친구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별로 비싸지 않은 음식을 파는 식당이라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음식 값을 지불하는 손님이 대부분이라는데, 토요일 철야영업을 하면 그날 하루에만 매상이 5천만 원쯤 오른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일요일 새벽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들을 들고 와서 돈을 가득가득 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한 채를 사고 팔았더니 “한 달에 정확하게 7억 원이 손에 떨어지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점점 늘어나는 고소득자들과 불로소득

문제는, 이렇게 노동하지 않으면서 쉽게 돈을 버는 고소득층의 소득이 증가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그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3천만 원쯤 번다.”는 친구에게 1년 전에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하루에 천5백만 원쯤 번다.”고 답했었다.  이렇게, 노동하지 않는 고소득층의 소득이 1년 사이에 1백 %나 늘어나는 동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귀족’들의 소득은 얼마나 늘었을까? 사람들에게 욕 먹어가면서 죽어라 임금인상투쟁 해 봐야 10% 인상시키기도 어렵다.

연봉 수천만 원을 받는 노동귀족들도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절대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어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파트 평수가 점점 넓어지고, 자가용 배기량이 점점 큰 차로 바뀌고 있으니 자신이 과거보다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그 지경이니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희망이 없다. 노동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버는 고소득층의 소득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붙들어 매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민들과 잘 섞이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따로 놀고 있는 부자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진짜 부자들에게는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인상투쟁에 대해서는 ‘노동귀족’의 파업이라고 분개할 수밖에 없다. 노동하지 않는 고소득층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엄청난 양극화 현상을 보지 못하는 착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내부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 현상에 가슴 아파하면서 자신의 임금인상투쟁은 한국 경제에 유익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격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들끼리 서로 정규직이네 노동귀족이네 싸우고 있는 모습을 진짜 부자들이 내려다보면서 얼마나 가소로워하고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 길을 걷다가도 이가 갈린다. 나는 평생 동안 이 부자들과 싸우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조종사들의 파업은 이러한 부자들과의 싸움의 일부로서 의미를 갖는다.

공부 많이 한 학자들에 대한 바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는, 나는 피부로만 느끼는 이런 현상들을 데이터를 사용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이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고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 차별을 설명하는 자료들은 많다. ‘근로소득 상위 몇 %, 하위 몇 %’ 등의 자료들은 언론에도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고소득층과 땀 흘려 노동하는 사람들과의 소득 차별을 설명하는 자료들을 별로 없다.

기업에 투자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 놓고 돈 먹는” 곳만 찾아 떠돌아다니는 자금이 420조원이나 되는데, 그 돈은 우리나라 연간 정부예산의 3배나 되고, 국방예산의 20배나 되는 규모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국민들 중 상위 1%가 우리나라 전체 사유지의 51.5%나 소유하고 있는 봉건적 코미디 같은 현상이 어떻게 근대국가 문명사회에서도 가능한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2004년도에 가처분소득이 기업은 41%나 증가했는데, 가계는 0.9%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기업의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대기업과 중소영세 하청업체 사이에 또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상장기업의 순익이 전년도에 비해 두 배나 늘었고, 주가는 사상 최고액을 기록하고 있고, 경상수지 흑자는 130억불이나 되고, 외환보유액이 2천억 불이나 되고, 기업의 현금 보유액은 66조원이나 되는 등 기업경쟁력은 역사상 최고 수준인데 고용증가율은 0%대에 머물러 있고 민간 소비는 오히려 0.5% 감소했다는 이 어처구니 없는 현상의 책임이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양신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때문이다. 경제학 150년의 역사를 뒤엎었다는 ‘내쉬 균형 이론’에 대해서 국내 학자들은 학위논문에서 ‘게임 이론’만 설명하고 있을 때, 양신규는 그 원리를 몇 개의 수식을 사용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소득 배분율에 따른 효용성이라고 명쾌하게 깨우쳐주었다. 그 관점은 아직까지도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내 시선의 중요한 도구이다.

나의 어릴 적 친구들이 이 글을 보게 되면, 아마 나에게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사회 부자들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잃어 버리게 되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그 통로를 마련해줘야 한다.

이 엄청난 부자들과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을 철폐하는 일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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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이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된 사연



[김미숙의 보험파헤치기] 여성부 이용 대통령표창 받고 생색낸 사건전말

벼룩의 간 빼서 생색 냈던 삼성생명-2003년 7월 사건을 되돌아 보니,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양성평등이 뭔가에 대하여 고민이 됩니다.

그리고 성차별을 누가 하는 것이며, 여성은 왜 차별을 받는 주 대상이라고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차별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나하고 똑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차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별받는 사람과 차별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양성평등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닐까 합니다. 혹 나는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차별을 받지 않고, 차별을 하지도 않는 사람일까?

차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활수준의 차이(학력, 소득, 직업 등)나 겉모습에 치중된, 그리고 직업에 대한 상하를 따져서 평가를 하고 이 기준에 따라서 나는 차별 받는 자고, 나는 차별을 하는 자로 구분이 될까?

집에서 가사일만을 하는 여성은 차별을 받는 것이고, 밖에서 자기 직업에 충실한 여성은 차별를 하는 쪽일까?

제가 서두에 이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제목에서 비춰졌듯이 여성부가 제8회 여성주간(2003.07.01∼07.07) 기간에 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삼성생명"이 이 사실을 자사를 홍보(광고)하는 수단으로 역이용을 하고 있어 그 치졸함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 글을 적습니다.

금번 삼성생명이 민간 단체로는 처음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홍보 수단으로 이용을 하고 있고, 그 주체인 여성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전혀 하자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합니다.(사실 금번 여성주간 동안의 경비를 삼성생명으로부터 지원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성부는 업체로부터 광고비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여성부의 대통령표창으로 인하여 삼성생명은 국가의 유공자가 되었고, 이 사실을 믿고 삼성생명을 선택하여 보험을 가입한 고객은 또 한번 우롱을 당하고 마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성부의 수당 대상자는 대부분이 현 공직에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 일색"으로 어쩌면 정부 부처의 집안 잔치에 민간인이 들러리가 되었던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여성은, 공직에 진출해 있는 여성만이 그 수상 대상이 되는, 그리고 그 수상 이력을 가지고 여성정치인 개발에 활용하려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훈.포장 표창을 받은 분들의 이력을 보니 이런 면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여성부는 지난 2001년 1월 출범하여 2년여 동안 모성보호관련 3법의 개정과, 여성의 공직진출 확대,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 등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다고 자평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지난 2년간의 경험과 성과를 계승하면서, 호주제폐지 특별기획단을 발족시키고, 보육의 공공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확산시키는 한편, 성매매방지대책 마련을 위한 기획단을 구성하는 등 양성평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온 국민과 함께 고민하며, 숨가쁘게 달려왔다고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삼성생명이 17개 도시에 25개 어린이집을 건립하여 운영을 하고 있고, 가끔씩 언론매체에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기도 합니다.

여성부에 삼성생명이 대통령상을 수상하게된 수상 기준이 있었을텐데, 이를 공개해 줄 수 있느냐고 질의를 하였습니다. 자세한 답변은 담당 심의위원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린이집 운영]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습니다.

삼성생명이 지난 50여년간 여성설계사들에게 일자를 제공해 주고 여성의 사회진출에 이바지한 공로도 인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삼성생명이 여성설계사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여성설계사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노력해 왔기에 대통령표창을 받을 만큼의 공로가 있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절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설계사는 스스로가 투철한 직업관을 가지고 선택하여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라기 보다는 주변 설계사들의 끈질긴 권유에 따라서 마지 못해 선택하고, 교육 조금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계약을 권유하여 몇 건 체결하여 수당을 받다가 대다수 설계사는 1년을 활동하지 못하고 그만 두는 식의 일자리를 제공받아 왔습니다.

삼성생명은 장기간 보험영업을 하는 여성설계사는 별로 달가워 하지 않고, 1년 이내의 신인설계사만 좋아합니다.

그들은 보험에 대하여 잘 모를뿐더러 회사가 시키는데로 반항하지 않고 따라해 줄 뿐만 아니라, 부당한 회사의 처우에 대하여도 불만을 가지지 않을만큼 삼성생명의 외형에 심취해 있기도 합니다.

삼성생명을 미처 다 알지도 못한채 회사를 떠나게 되고, 그 설계사를 통하여 보험 상품을 선택하였던 가입자들은 설계사가 그만 둠과 동시에 계약을 해약하는 등의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설계사를 믿고 가입하였던 보험가입자는 마지못해 보험을 가입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보험 상품에 대하여도 잘 모르므로 중도에 해약해서 손해 보더라도 계약을 중도에 해약 처리하는 것입니다.

보험사는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험설계사가 장기간 영업을 하다보면 가입자의 유지 관리를 철저히 하게 되고, 가입자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기도 합니다.

보험사는 보험가입자가 장기간 보험을 유지해 가면 불편해 합니다. 보험사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입자 취급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수시로 기존 계약을 해약하도록 종용을 하기도 합니다. 오래 활동하는 설계사는 어떤 선택이 가입자에게 유리한지 여부 등을 알려 줄 수 있지만 갓 입사한 설계사는 삼성생명에서 교육시킨 내용만이 옳은 줄 알고 보험가입자의 손해에는 아랑고 하지 않은 채 신계약으로 인한 수당을 받고 영업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금번 수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삼성생명은 재작년과 작년, 그리고 현재까지도 자사의 설계사를 교육시켜 기존 계약의 해약을 종용하고 새로운 종신보험을 가입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교사"를 한 것이지요. 삼성생명의 기존 계약 해약 신규 종신보험 체결을 합법화로 가장하기 위해서 사전에 가입자의 동의를 받았다고 "동의서"를 받아 놓고 혹 있을 소송에까지도 대비해 놓는 치밀함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기존 계약을 부당하게 해약시키고 새로운 보험을 가입케 하는 것은 보험업법에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가입자의 사전 동의를 받았다 하여 "불법"을 "합법"으로 가장해 설계사를 교육시키고 이를 이행하여 부당한 이익을 편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삼성생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복지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고, 부패 양성소(현금이 많기 때문에)인 보험회사의 불법.편법 영업 행태를 바로 잡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공개 사과와 형사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서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이렇게 중간 교육을 시킨 삼성생명의 내근직 임직원들은 "남성"이 대부분입니다. "여성"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영업 정책을 세우고 이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들입니다. 이들에 의하여 삼성생명 설계사들은 지난 2년여간 수당 100만원을 받지 못하면 강제 해촉을 하고 그동안 일해 놓은 수당마저도 몰수를 하는 제도를 운영해 왔습니다.

삼성생명은 이 제도를 1996년 11월부터 이행해 왔으며, 삼성생명을 따라서 다른 보험사들이 똑 같이 이 같은 파렴치한 영업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계약 체결을 한 건 하면 보험료가 매월 수금이 되고 수금된 보험료에는 2년 내지 4년 동안 받아야 할 설계사 수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월 수금은 되었는데, 설계사가 삼성생명을 그만 둔 상태라 하여 수금된 보험료에 포함된 설계사 수당을 계약자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는커녕, 해약을 할 경우에는 설계사에게 지급한 수당과 회사에서 미래에 추가로 써야할 사업비가 있으므로 이를 원금에서 삭감하고 지급해 주는 것이 "해약환급금"입니다.

설계사에게 주지도 않은 수당을 보험가입자에게 받고, 해약시에는 지급한 것으로 간주하여 또 다시 차감하는 등 이중 삼중으로 설계사와 가입자에게 손실을 안겨 주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생명의 영업 방법입니다.

이렇게 미지급된 수당은 수당을 받지 못한 설계사의 소득이 발생치 않고, 이는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금 포탈"의 수단으로도 악용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삼성생명은 지난 5년 회계기간(1998.04.31~2003.03.31) 동안 2만 6천 7백여명을 해촉시켜 부당한 수당을 편취한 회사입니다.

지난 5년 회계기간 동안 보험가입자에게 삼성생명의 운영에 필요한 사업비라 하여

16조 4천 955억원을 받아서 설계사와 임직원 그리고 중도 해약한 보험가입자에게 해약 손실을 입히고 10조2천444억원의 사업비 차익을 남겼습니다.

삼성생명 운영비에 쓰겠다고 받았던 5년 동안의 사업비 16조 4천 955억원의 보험료를 보험가입자가 왜 내야 했는지도 의문이며, 보험사의 사업비를 보험가입자가 내야지 누가 내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학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68,000여명의 임직원과 설계사에 1인당 5,000만원이 가까운 사업비를 집행하겠노라고 보험가입자에게 받은 보험료를 임직원과 설계사에게 1800여만원을 지급한 셈으로 그 차액을 남겨 먹은 회사가 삼성생명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한번 체결된 계약에 대하여 사업비만 받아도 삼성생명은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누차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낸 바 있지만, 오히려 삼성생명은 대통령 표창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보험사가 어렵다고 하니까 보험료 인상을 하면 될 것 아니냐고 그냥 가볍게 대답을 한 분도 계신다고 합니다.

설계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게 아니라 보험일을 하기 싫어 하는 여성들을 보험회사에 입사케 하여 그 지인들에게까지도 못할 짓을 시켰던, 그리고 남아 있는 설계사들을 교사하여 삼성생명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삼성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여성부에서 그 회사를 칭찬하는 상을 수여해 주었습니다.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제8회여성주관 대통령 표창수상 기념으로 [여성가장 창업지원 이벤트] 내용입니다. 삼성생명이 추진해온 여성들의 사회적역할 증진을 위한 다양한 사업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는 여성가장 창업지원을 매월 1분께 지원해 주던 것을 표창를 기념하여 7월 한달간 10분에게 지원해 드린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지원되는 자금이 이건희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설계사들이 계약을 1건 체결할 때마다 200원을 갹출하여 모아진 금액이라고 합니다.

삼성생영의 계약건이 2,000만건을 넘어서고 있는데 어림잡아 40억원의 돈이 모아집니다. 1인당 1,500만원의 창업지원자금이 지원된다고 하는데 1년 해보아야 1억8천만원이 지원되는 셈이더군요.

나머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리고 그 수입이자는요? 그리고 임원진과 회사가 6억원을 추가로 조성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원진과 회사가 받은 돈도 보험가입자가 낸 보험료의 일부이고, 설계사가 받은 수당도 보험가입자가 낸 보험료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모아진 보험가입자의 돈으로 공익사업이다, 사회봉사단이나 여성가장 창업지원을 한다하면서 생색은 삼성생명이 내고, 그 홍보효과로 더 많은 계약이 체결되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겠지요.

삼성생명의 이익 분배 형태는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유배당 가입자 이외에는 "배당"을 받을 수가 없고, 유배당 가입자는 무배당 가입자에 비하여 추가 보험료를 납부하고도 배당받는 금액은 추가 보험료에 훨씬 못미치는 배당금을 지급 받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된 제도에 의하여 부당한 보험료를 납입하고 손실을 입고 있는 것이죠.

결국 보험사가 1년 장사해서 발생시킨 "이익금"은 보험사 대주주의 몫이 될 뿐인데, 입만 열만 계약자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떠들어 댑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챙긴다는 말 삼성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까요?

삼성생명의 파렴치함은 이미 극에 달해 있습니다. 2001년 4월부터인가는 [요실금 수술비] 관련 여성시대 가입자(단일 상품으로 200만건이 넘게 가입을 하였고, 수입보험료만 1조4천억원이 훨씬 넘습니다.)들을 "보험금을 노리고 수술"을 하여 보험금 청구를 한 것으로 간주하여 여러 여성 가입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은바도 있습니다.

보험금을 주지 않으려는 삼성생명 창구에서 여성 가입자가 치마를 들춰보이면서 진짜로 수술한 자국을 보여 주어야 하겠느냐고 강하게 항의했던 가입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삼성생명은 연세대 교수와 금융감독원을 들먹이면서 이 상품 한건으로 삼성생명이 파산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언론 홍보 문건까지 돌리는 등의 파렴치함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급된 수술비는 겨우 5∼60억 정도에 불과하였다면 믿기십니까? 1조4천억 중에 5∼60억원 지급된 보험금 때문에 학계, 언론, 금융감독원까지 총 동원되어 엄살을 떨었던 삼성생명에 대하여 악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보험금 지급을 적게 받았거나 아예 받지 못하였을 가입자를 생각하면 진짜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분이었더라면, 그리고 각 소비자단체에 민원을 제기해 보려하는 소수의 가입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500만원도 안되는 수술비 때문에 그 고통을 당하기 보다는 주는데로 받은 경우가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현재도 여러 여성 가입자들이 1,000만원도 안되는, 소송을 제기하고 싶어도 소송비용이 더 많이 발생하는 1,000만원 이하의 보험금에 대하여는 의사의 진단서 마저 부정하면서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은 사례들이 속속 접수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도 부족하여 다건의 보험을 가입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여러번 보험금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사기꾼"으로 구속되는 사건까지 발생되어 있고, 삼성생명의 보험심사부서가 바로 그 선봉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이러고도 여성부의 대통령표창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여러번 곱씹어 보아도 여성부의 의중을, 그리고 지은희 장관님의 의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 행위를 알고 있는 몇몇 분들은 삼성생명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삼성생명의 해체를 부추기고자 이러한 내용의 글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삼성생명이 주식상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 또한 보험가입자인 삼성생명 보험소비자들과 설계사들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채 금융감독원과 삼성생명이 자웅하여 이를 결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상장회사가 최우선으로 해야할 덕목은 "도덕성"에 있습니다. 투명성을 보장 받는 회사만이 상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삼성생명이 불법. 편법의 성과로 오늘날의 외형을 키워 왔고, 이러한 회사가 상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삼성생명은 상장도 아니요, 해체도 아닌 실제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상호회사(계약자가 주주인 보험회사-보험업법에 명시되어 있음)를 가장하여 주식회사로 영업을 하였던(보험가입자는 삼성생명에 납입한 보험료를 자신의 재산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주식회사인 삼성생명은 한번 납입된 보험료에 대하여는 어떠한 권리 행사를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단, 중도 해약과 보험 사고가 발생해야만 가입자의 채권에 대한 권리가 발생할 뿐입니다.) 삼성생명에 대하여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원주인인 보험가입자에게 돌려 주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삼성생명 보험가입자는 그저 보험료만 낼 뿐 가입된 보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한달에 400여만원을 납입하는 보험가입자가 삼성생명에 매달 400만원이 납입되면 그 이후 삼성생명에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질의를 하였더니 잘모른다가 다였습니다. 그것을 알려줄 시스템이 없고, 극구 원한다면 수작업을 하여 알려 줄 수 있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입니다.

이마저도 여러 영업소에서 가입된 보험에 대하여 각각의 영업소를 전전하면서 알아봐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수십년 후에 받게 될 [연금보험 증권]은 [백지상태]였습니다.

노후가 되어서 얼마의 연금을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험가입자는 매달 통장에서 빠져 나가는 보험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삼성생명이 이렇게 커 왔겠지요.

이쯤에서, 삼성생명에 수여 되었던 [대통령표창장]은 철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자가 갖은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여성의 권익을 유린하였던 삼성생명에 전달된 상장에 새겨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오점이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 주시기를 강구하는 바입니다.

그저 아는 지인을 통하여 몇 만원 내고 말지 식으로 모아진 보험료가 1년에 100조원이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십시일반이 모여져 대한민국 1년 예산과 맞먹는 민간보험료를 20조원도 안되는 국민건강보험료와 비교하여서 너무 과다하게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주는 상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당하다고 생각을 하였고, 어쩌면 양성평등에 대하여 막연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기도광역의원이자 시인인 모여성교수님이 모생보사의 현직 설계사인데, 도의원이 된 후 소외계층을 위해 정책을 개발하고 자치단체장을 상대로 꾸준히 여성권익향상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기사(2003.05.23 매경)를 접해 보았습니다.

올해 설계사들이 한번쯤 도전해서 타 보고 싶은 여왕상을 수상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1년에 수억원의 수당을 지급 받았다고 한들, 내일이라도 보험사에서 그만 두라고 한다면 그 동안 일해 놓은 수당(매달 받는 수당에 몇배에 달하는)도 받지 못한채 쫓겨나야 하는 현직 설계사로서의 여성권익향상에 대하여는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소외계층를 만들어 놓고 자신은 소외 받은 계층이 아닌 소외계층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소외계층과 비소외계층의 선을 그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혹 대안만 내 놓고, 실행은 전혀 하지 않은, 그리고 그 신분을 이용하여 보험에 대한 진짜 지식도 없이(보험 상품에 대하여 제대로 알면 절대로 그 상품 판매 못하죠.) 계약고만 올리고 수당을 받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문짝만하게 광고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구요.

삼성생명이나 그 설계사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라고 하였던 성경구절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요즘은 드러내 놓고 선행을 베풀고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챙겨야 그것이 선행이 되는 세상인 것 같아 씁씁할 따름입니다.

보험가입자라면 누구나 본인이 가입하고 있는 보험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달에 400여만원을 납입하고 있는 가입자가 백지증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확인해 보지 않으면 노후에 쪽박 차고 소송하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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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수상자 명단 중 삼성생명의 이력입니다.

삼성생명이 과연 "여성에 대한 양성평등"을 일구워 낼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지..

- 2003년 7월 4일 기념식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개최 -

(주)삼성생명보험 대통령상 등
대통령표창 : 7명 중 단체로는 삼성생명이 유일

- '94년 삼성서울병원 개원 국내 생명보험계 1위의 기업으로 기업의 건실한 운영과 고객만족을 통한 사회적 기여는 물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위한 다기능적인 여성관련 공익사업을 추진

- '03년 현재 17개 도시에 25개 어린이집 건립 운영

- 아동 성폭력 피해 가족들의 법적 사회적 대응을 공동체적으로 감 당할 수 있는 아동 성폭력 피해가족 상담소 설치

이런 일들을 굳이 삼성생명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이건희 회장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기부를 하면 더 좋을텐데 말이죠..

보험가입자에게 받은 보험료로 삼성생명이 왜 생색을 내고, 보험설계사 등골을 빼서 삼성생명 치부를 덮으려 하느지..이를 잘했다고 표창을 해 주는 정부부처는 무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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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에 썼던 글인데, 이제 다시 읽어 보니, 또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벌써 2년이 지났군요. 아마도 2004년, 2005년에도 삼성생명의 생색내기용 이런 행사는 있었을텐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더 급하게 꺼야할 경악할 문제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지요.

앞 뒤 가리지 않고 겉으로 '나는 선하다'만 연발하면 대통령도 상을 주는 세상이니, 삼성의 이면을 똑똑히 알려 주었고, 상을 준 대통령의 얼굴에 떡 칠해도 아랑곳 하지 않던 공무원들..삼성생명 가입자를 기망한 삼성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아 보입니다.

*필자는 보험소비자협회 회원이며, 본문은 8월 24일 민주노동당 웹진 <판갈이>에도 송고한 기사입니다.  

*본문은 폴리티즌과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마당 대자보'(www.jabo.co.kr)에서 제공한 것으로, 다른 사이트에 소개시에는 원 출처를 명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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