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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마당 깊은 집」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봤으니까 꽤 오래된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빡빡 깍은 머리 위로 하얀 가루로 된 DDT(나도 잘 모르지만, 그 시대를 겪으신 아버지 말로는 무슨 살충제라더라. 몸에 무지 안 좋은...)를 마구 뿌리는 어머니의 모습과 전쟁으로 인해 팔 하나를 잃은 상이용사의 비참한 절규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드라마는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마당이 푹 꺼진" 주인집 뒷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들의 훈훈한 인정미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전쟁 이후의 힘든 삶을 가족과 함께 견디어 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장미희가 나와서 "똑"을 팔던「육 남매」와 같은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오발탄」이나 「잉여인간」과 같은 수많은 소설들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겪은 전쟁 체험이 비교적 보편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한국 사회가 국가 혹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과연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파멸상태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데올로기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억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했던가? 개개인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우군을 찾아야 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가 바로 "가족"이었다. 「마당 깊은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당장 내일의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으며, 등이라도 붙일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라도 마련해야했으며, 어린 자식들을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키워내야 할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족들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정글의 법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가족주의"는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을 통과한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실상은 생존의 법칙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배타적인 공동체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현재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정글의 법칙"을 몸으로 깨우치며 살아온 세대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시 자식들의 부모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황된 짓임을 아들, 딸들에게 아직도 주입하고 있으며, 단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일 뿐임을 명심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여전히 미미한 수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의 사회복지 정책의 개선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의식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그런 세금 낸다고 언제 내가 혜택을 받냐고?"라고 항상 되묻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가족주의" 속에 근본적인 이기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음에도 매체들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는 환상을 계속 심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체들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사회적 안전망을 불신하고, 가족의 이름으로서만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매체는 끊임없이 가족의 신화를 반복하고, 인정세태의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들은 특징을 하나 들어보자면, 국가는 항상 위협으로서 등장하는 대신에, 불행한 가족을 돕는 인정 많은 이웃이 하나쯤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달리 보면 개인의 시선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막고, 행복의 범위를 가족과 아는 사람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는 사람의 수준? 자 여기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걸려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가족"은 더욱더 확대되어야했는데, 그 확대된 가족 혹은 그 이웃의 이름들이 바로 "혈연"에서 "학연", "지연"이라는 이름이 된다. 요컨대 "학연", "지연"은 폐쇄된 공동체로서 "가족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자면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연줄의 연쇄고리들은 참혹한 전쟁체험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를 끊임없이 확대해온 결과이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꼬? 이런 사고방식들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처럼 한국사회에 팽배해있는 듯 하다. 무의식을 치료할 수 있는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당 깊은 집」을 볼 때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버지 없는 가족이 힘든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혜택을 받은 것인지를 나에게 자꾸자꾸 말씀하셨다. 저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살아라고 말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갑갑해진다. 똑바로 사는게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똑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가족주의"의 뿌리를 확인한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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