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밤은 춥다_첫번째 캠핑
- 반작용
- 2015
-
- 둘째날, 슈타른베르크의 부자 동네.
- 반작용
- 2015
-
- Azar강에서
- 반작용
- 2015
-
- 4월 7일. 독일, 자전거, 첫날.
- 반작용
- 2015
-
- 4월6일 인천공항에서
- 반작용
- 2015
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근대화 콤플렉스, 주체의 욕망과 타자의 공포]
황병주의 강의를 듣고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2013. 02. 20
왜 난 질문을 못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아니 그것보다는 뭔가를 지껄이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데, 질문하자! 고 생각만 하면 벌써 손이 덜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나불대는 성격이었음으로, 이것은 아마도 최근에 찾아온 어떤 변화다. 그 변화의 원인을 지금 고민하기에는 글이 삼천포로 빠질 듯하다. 그저 질의응답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나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정도의 궁시렁으로 마치도록 하자.
사실 질문이라고 해도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제대로 알아먹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러하다. 우리나라 지식인 집단에는 대대로 어떤 콤플렉스가 내려오고 있다.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것은 근본적으로 ‘근대화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묶여질 수 있다. 그 콤플렉스를 지식인 집단은 경제개발이라는 신념으로 극복해 냈다. 이것이 강의의 뼈대였다.
듣고 보니 꽤 그럴 듯 했다. 우선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나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외모에 한정시켜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에 콤플렉스가 있다든가, 다리에 콤플렉스가 있다든가. 오늘 강의는 나에게 한 단어의 확장을 보여주는 기여를 한 셈이다. 근대화와 콤플렉스가 합쳐져 이렇게 매력적인 의미를 갖게 되다니!
그나저나, 나 역시 근대화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탐구는 애초에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세상은 이미 근대화를 빨아들인,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빈약한 비유지만 강연에서 예로 들었던 ‘오렌지 주스’에 대한 김상환 스승(?)의 동경은 나에게 적용될 수 없다. 나는 이미 오렌지 주스를 물처럼 먹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오렌지 주스를 와인으로 바꾸면 어떨까? 사실, 와인도 적잖이 퍼 마신다. 와인이나 소주나 취하기 위함이라는 목적 안에서 같다. 동경 따위 없다. 뱅쇼(포도주과일끓인물, 태어나서 딱 두 번 마셔봤다)나, 모히또(라임과 민트가 민들레처럼 나지 않는 한국의 기후적 한계 때문에 비싸다. 또 비싼 돈 주고 사 마셔봤자 현지에서 먹는 것처럼 맛있지도 않다) 라면 모를까. 사실 그런 것들도 콤플렉스라고 말하긴 약하다. 그거 못 먹는다고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고 있진 않으니.
만약 나에게 근대화 콤플렉스가 없다면, 나는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까. 내가 항상 골몰해서 도대체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 속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삶이 낭비되고 있다는 불안감? 평범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평범해져 버린 일상에 대한 지겨움? 단순해져 버린 세상에 대한 증오? 그러니까, 돈과 물건의 교환이라는 이 단순한 법칙에 대한 증오? 이쯤하면 ‘콤플렉스’는 이곳저곳에 남발되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위기에 빠져버린다.
나라는 ‘개인’을 뒤지는 대신, ‘세대’에서 그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나는 ‘빈곤의 발명’이라는 구절에 밑줄을 친다. 강사가 말했던 박정희 시대의 빈곤의 발명은 ‘민족의 역사적 가난’과 현재의 눈부신 성장을 대비시켜 근대화 콤플렉스로 인해 결핍되었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과정 정도로 보면 될까? 그러나 아마 My generation(좋아하는 노래 제목이다^^)의 빈곤의 발견이란 <빈곤의 대두, 빈곤의 부각, 빈곤의 돋을새김> 정도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빈곤은 반복해서 대중에게 보여지고 부각되고 있다. ‘노년층과 편의점 알바자리를 두고 싸우는 88만원 세대’라는 기사는 편향되어 해석당하기 쉽고, 이러한 해석의 고착이 자주 읽힐 때마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꼈었다. ‘사실’ 여부와, 또 그 기사들이 가지고 올 긍정적인 효과는 제쳐두고 이것 자체가 우리의 콤플렉스를 돋을새김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것은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의 ‘자기연민’ 쯤에 속하는 반동은 아닐까.
때문에 어째 이야기가 시시하게 축소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나는 ‘경제적인 것의 절대화’가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이 경제적인 것의 절대화, 곧 신자유주의란, 오늘 강의의 결론과 겹치고 만다. 근대화에 대한 치유의 욕망으로 끝없는 경제 개발을 선택했던 것이 이 집단이 내렸던 결론이었고 또한,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제절대의 콤플렉스가 근대화의 콤플렉스와 전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씁쓸한 결론이다.
여기서 ‘가치’ 따지기 좋아하는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한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왔던 누군가의 질문처럼 근대화 콤플렉스는 ‘발전의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최소한 나는 이광수의 처량한 자기비하가 있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이용한 박정희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근대화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모범생처럼 반듯하게 곧추 허리를 세우고 말해보자면, 그건 또 이 책에서 저 책에서 아니라고 하더라. 경제라고 말하면 끝말잇기처럼 개발과 경쟁을 떠올려야 하는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잘난 인간들이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그 새끼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려버릴 때마다 항상 왠지 모를 석연찮음이 남아버린다. 편하긴 하지만.
따라서 어떤 질문자 분이 ‘경제 개발의 완성’이라고 말했을 때, <경제 개발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면 진작에 되었겠지요. 이 병신아.>라고 속으로 곱씹을 정도는 되었지만, 강사분이 포틀래치와 하루에 일을 두 시간 밖에 안한다는 어느 부족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을 때 희망에 부풀어 오를 정도로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공동체도 유토피아는 아니잖아요.’라는 말처럼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재미있었던 단어들을 적고 그만 자야지.
*근육질의 근대
*大한민국, 大일본제국, 大영제국 의 관계
*광개토대왕 -땅투기(ㅋㅋ 빵터짐)
*자기연민의 민족주의가 한국 민족주의의 기초
*풍경은 외부자의 시선에서만 보인다.
*근대화의 와쿠 안에서 본 ‘계약’의 의미
(저는 이 わく라는 단어가 특히 맘에 들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인프라를 ‘깐다’
*4.19와 5.16은 문제설정이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음으로 앞으로 공부해 둘 것
*테일러리즘
자자. 잘자요.
PS. 그저 모든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콤플렉스라는 것은 거울 두 개를 맞대어 놓은 것처럼 그저 계속해서 같은 결론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걸까.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혹은, [이런 생각 하는 것은 나뿐입니까]
그리고 나의 넓적다리에 애무가 구른다.
존재는 무르다. 그것은 구르고 허우적거린다.
나는 집들 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 사르트르 [구토]
새벽 두시까지 일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었다. 여섯시 반 기차를 타려고 새벽 다섯시 사십분에 일어났다. 거울 속 파리한 얼굴의 내가 사랑스럽다. 표는 입석이다. 나름의 명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짐정리를 하고 있으려니, 「내년에는 표 구하지 뭐.」 라고 또 다른 입석 승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미끼삼아, 나의 머릿속에는 추석 표를 사려고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모두가 표를 사려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도 나는 표를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너무 늦지않을 정도만 느즈막히 역에 가서 남아있는 입석표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랐을 뿐이다. 경쟁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있어서라서기 보다 그저 게을렀기 때문이다. 사실 표 따위에 신경쓸 정신를 남기지 않는 삶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차안에서 볼까하고 새벽 책장에서 꺼내온 책은 졸음에 취해 비틀거리는 머리로는 좀처럼 읽혀지지 않는다. 책을 덥고, 그럼 무엇을 할까, 잠이나 청해볼까, 하고 목적없이 책의 제목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 이게 책의 요진가보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 가자는 것. 횡단의 정치란 뚜렷한 경계없이 다양한 가치가 어울릴 수 있는 정치일게다. 그건 확실히 감이 온다. 그러면 정체성의 정치는 뭐냐. 아니, 정체성의 정치가 아닌 정치는 뭐냐.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다가 나는 그동안 내가 분노한다 말해왔던 것과 내가 지향해오던 것들이 실은 같은 맥락안에서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막연한 분노. 그것은 정체성을 요구하며 나에게 너의 성적 취향과 너의 좌우파적 성향과 너의 사회적 지위를 한 단어 안에 우겨넣어 너의 정체성을 표현하라던 사회에게 가졌던 분노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거부했던가? 아니, 그러지 못하고 또한 그것에 갇힌 채 또 다른 무언가를 좇았던 것 같다. 그 어떤 것에도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나는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공허한 면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그것을 좇았다. 그래? 그것은 정말 공허하기만 한 것이었나? 이것은 나의 해체적 감성의 발동이다. 애초에 이런 생각을 시작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던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는 이런 나의 생각의 흐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답 없는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알고 있다. 뭐 어떠랴. 제멋대로 걸어가는 생각은 비틀거리면서도 즐겁다.
한달전쯤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내셔널리즘에 대한 나의 고민은 실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은 종종 우리의 실생활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거대한 맥락안에서 말해지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고민은 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맞닿아있다.'고 썼다. 이것을 쓰고 나서 나는 퍽 만족해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떤 거대한 문제를 개인 자신의 작은 문제로 가지고 왔을 때 그 문제는 더욱 진지해지고,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것에 겁부터 먹곤 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민족이라는 주어진 정체성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질문, 사람에게 진정 정체성이란 필요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애쓰는 이 인간 사유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하는. 이 질문은. 이것은 어쩌면 내셔널리즘 그 자체보다 더 깊은 핵을 겨냥하는 질문은 아닌가.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원리에서 시작된 것이 내셔널리즘이라면, 나와 너를 분리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부여하는 것을 정체성이라 한다. 그러면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개성을 말소하고 그저 뭉뚱그려 하나의 집단만 남겨두는 파시즘적 어떤 것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적어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 앞서 집단의 정체성도 부정하고 싶어하니, 파시즘과는 방향이 다르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 위로가 되는 것도 같다.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버려버려라! 그러나 그렇게 내쳐버린다고 해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딱딱한 바닥에 닿은 말랑말랑한 내 엉덩이의 불편함 같은 것에서 오는, 이곳에 내가 있다. 라는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피로감이 엄습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다 쓸모없다. 익숙한 손짓으로 스마트폰 안의 게임을 찾아 그것을 실행시켰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괴롭다. 그리고, 괴로움과 고통 만큼 내 존재를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손님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네 이름은 꽃이야. Rose of sharon. 어떤 꽃인지 본 적 있어?"
내 이름을 꽃에서 따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진으로도 그 꽃을 본적이 없다. 무슨 색인지도 어떤 모양인지도 알 턱이 없다. 이 이름을 내게 준 나의 아버지도 그 꽃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책에서 가져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논쟁을 위해서 쓰여진 책에서 가져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도대체 어떤 꽃을 가르키고 있는지, 각 언어권별로, 또는 학자들 별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나의 아버지는 그 꽃을 알수가 없었다. 그냥 어떤 꽃이겠거니 상상이나 해보았을 것이다. 몇 번 입으로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을 것이다. 샤론,샤론,샤론. 이 발음의 어떤 모양이 그를 매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그 울림을 내게 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예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책으로부터 나왔고, 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나는 본래 어떤 기록의 일부였다. 나는 단단한 제본으로 묶여진 종이들, 몇 천년 동안 종이와 종이 위를 전전하며 유랑하는 나의 이름을, 그 책갈피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아니요."
손님은 기쁜듯이 말을 잇는다.
"미국에서 그 꽃을 키워봤어. 아침에만 피는 꽃이야. 신기하게도 해가 저물면 떨어져 버리지. 무척 예쁜 꽃이지."
"....."
"넌 언제 피지? 언제 활짝 피지?"
순간 남자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몸을 움추린다. 역겹구나. 당장 이 의자에서 일어나, 언제든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만질 수 있는 이 공간에서 벗어나, 그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벗어나버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먹을 때, 나는 먹을 때 웃어요. 다들 이야기 해요. 먹는 거 앞에서 제일 예쁘게 웃는다고."
술에 비틀러기는 몸을 겨우 가누며, 그가 가게 문을 나섰을 때 나는 무척 안심하고 있었다.
기지개를 피고 뻐근해진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뼈를 맞춘다. 에어콘 바람에 차게 식은 피부를 몇번이고 마찰시켜 조금의 열이 나게 한다. 말랑거리는 내 살의 감촉을 느끼며 또다시 살아있음을 생각한다. 나는, 삶이란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안다. 그것은 끔찍하게도 지루한 것이며, 때때로 감당 못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다. 가슴을 움켜지는 아픔과, 피로 번들거리는 칼로 베여지는 상처들을 바라보며 오열을 토해냈던 눈물이 내 삶이었다. 그럴때면 나는 살아있는 것이 저주스러워서 바듯이 몸을 웅크리고,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숨소리만 뱉어 세상의 소음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 숨쉬고 있다는 것의, 그 자체가 나에게 주는 기쁨의 감각을, 나는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추억들이 부서져가는 나를 추스린다. 추억이 만들어 낸 나의 미소는 결코 거짓도 가식도 아니다. 나는 내쉬는 숨들을 가만히 세어본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돌아갈 장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모든 언어뿐만 아니라 한 언어의 모든 단어는 그 자체가 완전한 세계이다. Mel Cuk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역사비평사, 2009
'내셔널리즘'은 우리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화제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다른 문화나 사람과의 부딪힘에서 오는 긴장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네이션'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정체성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주장하는 문제일때 ‘국적’은 우리가 가장 손쉽게 또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준비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나를 규정지을 수 있는가? ‘한국인’이란 가면은 정말 나일 수 있는가? 나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석연찮음의 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아무런 인식 없이 이미 주어져 있던 "한국인"이라는 이름 안으로 숨어버리곤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며, 진실된 삶을 살고 싶은 - 그런 삶이란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한번도 내셔널리즘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도 녹록치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고민은 차치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유치하고 지루하고 또한 단순하며, 세상을 보기 좋게 정리해주는 ㅡ 색안경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마는 ㅡ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그렇듯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진 손쉬움과 편리함 때문에 그것의 단순함과 허구성을 눈감아 버린다면, 내셔널리즘이라는 논리에 일정한 부분을 내어준 우리의 삶 역시 특별할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자유가 결핍'된 삶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어쩐지, 다시 개인적인 감각의 이야기로 돌아와 버린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
그동안 한국 저자들의 내셔널리즘에 관한 책을 읽어오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이 책들은 내셔널리즘을 부정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그 반대의 결론들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꼭 정해진 도입부처럼 거론되곤 하는 ㅡ 혹은 이 논쟁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식의 어중간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여주는 ㅡ '번역 문제'에서도 들어난다. 위키백과의 한국 내셔널리즘 페이지에서 이 시원찮은 논쟁의 단면을 찾을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내이션을 '국가'와 '민족' 어느 쪽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혹은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다른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짧은 토론글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를 따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이 이야기는 꽤나 그럴듯하다. 번역의 어려움이나 역사적인 이유, 일본어를 그대로 차용함 따위의 여러가지 근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사정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이미 우리의 사회를 세울 때에 기본 재료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구의 '민족주의'와 프란츠 파농의 '민족주의'를, 한마디로 말해 "식민, 제국주의의 저항에서 필연적으로 시작된 긍정적인 통합의 논리"를, 함부로 나쁘다고 매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저항의 흐름'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가 내셔널리즘을 다룰 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내셔널리즘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하며, 그것들은 각자 다른 이름을 가져야할 정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논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 민족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심리 자체가 내셔널리즘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동안 이러한 나의 생각에 권위를 붙여줄 고마운 책을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니시카와 나가오의 이 책에서 그야말로 속 시원한 문단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112P) 일찍이 좋은 원폭과 나쁜 원폭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좋은 내셔널리즘과 나쁜 내셔널리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어떤 민족에 의해 만들어졌든지 국가는 국가이고 국가로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 영속적이고 진정한 연대는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발국의 내셔널리즘은 선진국의
내셔널리즘을 뒤집은 것 혹은 약간 손질한 것으로서 결국 똑같은 내셔널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30
년의 세월에 걸쳐 증명해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내셔널리즘이 좋은 표정을 보이면서 기대를 품게 했던 역
사적인 시기가 있었다. 프랑스혁명의 한 시기, 메이지의 한 시기, 혹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로 고통 받
는 제3세계의 저항으로서의 내셔널리즘 등. 그러나 이들의 좋은 내셔널리즘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의 내
적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쁜 내셔널리즘으로 전화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 아니었던가.
그의 이러한 전제는 <아시아 국가들을 연결시키는 연대의식은 민족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국민통합의 곤란함에 직면해서 '민족' 대신 '에스니시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해도, 사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도 잘 들어난다. 민족주의는 아시아를 연대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우리는 “동양의 민족주의와 서양의 제국주의적인 폭력의 그것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원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 모양을 바꾼다고 해도 그 ‘내적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의 긍정성을 바라보는 일은 좋은 핵폭탄과 나쁜 핵폭탄을 구분하려 애쓰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내셔널리즘은 통합의 이데올로기이며, 통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 배제의 논리가 내셔널리즘에 내재되어 있다. 나가오의 말처럼 이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이상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좋은 내셔널리즘도 '필연적으로' 나쁜 내셔널리즘으로 전화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현재 좋은 내셔널리즘과 나쁜 내셔널리즘을 나누려고 애쓰고 있는 논의 자체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어떤 구절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서경식의 책들과, 연세대의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자의 책들을 읽으면서 나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확실히 이런 부분이었던 것 같다.
*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내셔널리즘이 통합의 논리라면 한국에는 여전히 "통합"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것이 악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해도, 현재의 필요성에 의해 그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것은 북한과 남한이라는 한국의 상황 때문이다. 나에게는 통일을 바랄 간절한 이유가 없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회의 자유를 가로막는 ㅡ 모든 논의를 막아버리는 ㅡ 떠들고 싶은 우리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ㅡ 분단의 논리가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상황을 극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의 지성이란 명함을 내건 사람들이 내걸었던 통일의 전제란 '한민족'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흡수 통일이니, 무슨 통일이니 이름은 많았지만 통일을 해야하는 이유는 한민족이라는 연약하고, 이제는 낡은 정당성 만을 가지는 그것 아니었던가. 심지어 이것은 내셔널리즘의 언어가 아닌가. 그렇다면, 만약 내가 지금 이 '긍정적'이라는 내셔널리즘까지 부정해버린다면, 이제부터 나는 무엇으로 통일의 논리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민족이 부정된다면 통일의 이유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새로운 근거를 창출해 내야 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만 하는가.
*
한편, '긍정적'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작은 전제였을 뿐이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단어 '문화'와 문명'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는 추적하는 과정으로부터, 그것의 이데올로기성을 추론해낸다. "내셔널리즘은 문화 속에서 생존을 이어나가고 있다. (...) 내셔널리즘은 '민족'으로부터 도주하여 '문화' 속에 몸을 감췄다. (...) 문화란 내셔널리즘 최후의 보루이다."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저자는 이 단어들이 내셔널리즘의 언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근대의 국민국가가 프랑스 혁명에서 부터 시작되었던 것처럼, '문명'이란 말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화'는 문명이라는 단어를 의식하며 프랑스에 대항에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싶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단어다. 저자는 일단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지역과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지역의 대립을 단어 의미의 대립과 연결시키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흰색과 검정색이라는 반의어가 실은 색깔이라는 하나의 범주아래 묶이듯이, 이 두 개념은 의미상에 있어서 분명 대립되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단어들인 것이다. 그 후에도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붙어 다니며 이 단어들은 때로는 혼용되어 쓰이고 때로는 다른 역할을 수행했지만 위치에 따라서 쉽사리 서로의 역할을 교환할 수 있었던 개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명이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문맥 속에서, '문화가 개별주의를' 주장하는 문맥 속에서 사용되었으나, 보편주의든 개별주의든 근대국민국가의 시각이었으며 그것은 곧 내셔널리즘의 언어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자의 논리는 보편주의 형태를, 그에 대항하는 약자의 논리는 개별주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
나 이 관계는 약자가 강자로, 혹은 강자가 약자로 전화하면 곧바로 역전될 것이다. (...) 문화 = 개별주의를
고집했던 독일 제국이 나치즘을 거쳐 보편주의로 뒤바뀐 역사, 혹은 개별주의로 출발한 일본제국이 청일
러일 전쟁을 거쳐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면서 보편주의로 변모하려 했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쓰였던 '보편주의의 맥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명은 애초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단어로, 왕정을 부정하고 '국민'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나라의 수준을 측정할 잣대가 되어 세계의 나라들을 침략해도 되는 나라, 침략 당해야 하는 나라로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보편'의 가치였던 문명이 곧 시대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국제법은 문명 - 반개 - 미개로 3분되어 있었고 ㅡ나는 이 '반개'라는 단어가 무척 재미있다. ㅡ 이 기준에 의해 줄세워지고 짝지어진 나라들은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 식민화되어야 하는 나라라는, '제국주의'의 논리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대등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만 했
다. 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이란 다른 근대적 국민국가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동일한 원리가
바로 '문명'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문명'이란 그 나라가 근대국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리
고 이러한 '문명' 이해는 그 시대 국제법의 특질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근대 국제법에서는 유럽적인 문명국
만 국제법상 주체인 주권국가로 간주되었고, 미개하거나 반미개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혹은 그에 개입할 권
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콩도르세의 책에서 사용되었던 문명의 개념, 국제법의 창시자인 그로티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제국주의적 시각, 후에 마르크스의 인도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에서 문명이란 단어의 이러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
우습게도 '문명'이 국가의 성립의 중심 요소였고, 국가들을 줄 세우는 데 사용된 단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시대와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들에게도 '나라줄세우기'의 관습은 여전히 쟁쟁하며, 그 기준이 되는 가치는 여전히 유일의 권력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제력'이라는 기준 말이다.
*
'문화'는, 프랑스에 대항할 개념이 필요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문명에 反하여 만들어낸 단어이다. 문명이라는 단어 안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제국주의'와 동반되어, 혹은 보조되어 쓰이고 있다면, 문화에는 조금 더 내셔널리즘 적인 성격이 뻔뻔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초반에는 '문명'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던 문화는, 칸트와 피히테를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별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노라면, 나는 역시 내셔널리즘이란 "저항의 이데올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개별이라는 것은 보편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와 닿아있다. 각 인간집단들이 세계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규정할 것을 요구하는지, 혹은 “규정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인 것이다. 정의니, 규정이니, 한계니 통합이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언어의 불완전함과, 그 애매함에서부터 출발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하나, 우선 이 글부터 끝내야겠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칸트를 보자. 저자가 문화라는 단어가 '칸트를 거쳤다'라고 한 것은 곧 문화 개념의 개념을 칸트가 차용해 자신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논의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읽어낸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입장에 주목한다면, 거기에서 국가를 틀로 삼는 문명 혹은 문화라는 개념에 의해 국가
에고이즘을 비판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길을 찾고자 하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 공통의 패러독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형태의 국가(국민국가)와 내셔
널리즘으로 가는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문화의 '내셔널리즘'적인 속성은 피히테를 거치면서 확실한 방향을 잡게 된다. 그것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익숙한 제목의 저서를 통해 드러난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독일 국민의 유구함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독일어의 순수성과 결부'시켰다. 물론 피히테 자체가 내셔널리즘적이었다기 보다는 그 후에 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적 요소가 강조되었다는 저자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
책의 제목은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지만 저자는 사실 그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무책임하게도 국민을 그만둔 뒤에는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알수 없는 것을 억측으로 꾸며 이야기 하지 않고, 알수 없으니 알수 없다고 말하는 이런 태도에 나는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먹음'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노학자의 이런 태도에는 고개가 숙여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책의 초반부에서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대해 유럽을 무대로 해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개해나가던 생각들이, 그 최근의 발전과정을 분석한 후반부에서는 '일본'에 국한되어 서술되고 있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식민지배로 인해 '저항의 가치'에 매료된 다른 나라들로 그 시각을 넓혀 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민족분쟁들과 저자의 논의를 접합하는 것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명'과 '문화'에 관한 저자의 분석은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분석인가 아니면 전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분석인가. 즉 이제 문화와 문명이라는 단어는 정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실제적인 대상을 가르키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보통 내셔널리즘을 논의하는 책들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에 갇혀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점이나, 공유되는 속성들 같은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곤 하는데, '세계주의'에서 끌어낸 '내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도록 독자를 이끌었던 부분도 좋았다. 여러모로 읽기에 즐거운 책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생각들을 나열했더니, 서평을 쓰기보다 다듬는데 적잖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니시카와 나가오가 반복해 인용하는 루소의 글로 급했던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라는 루소의 문학적인 표현은 한번쯤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이라는 것은 아마도 나와 저자에게는 내셔널리즘이, 누군가에게는 국가의 권력이 또는 때로는 종교가 될테다. 그 꽃장식이라는 것은 쇠사슬을 보조하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게 혹은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문학 예술은 그만큼 전제
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
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욕구가 왕좌를 축조하고 학문과 예술이 그것을 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자의 논리는 보편주의 형태를, 그에 대항하는 약자의 논리는 개별주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
나 이 관계는 약자가 강자로, 혹은 강자가 약자로 전화하면 곧바로 역전될 것이다. (...) 문화 = 개별주의를
고집했던 독일 제국이 나치즘을 거쳐 보편주의로 뒤바뀐 역사, 혹은 개별주의로 출발한 일본제국이 청일
러일 전쟁을 거쳐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면서 보편주의로 변모하려 했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이 쓰였던 '보편주의의 맥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명은 애초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단어로, 왕정을 부정하고 '국민'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나라의 수준을 측정할 잣대가 되어 세계의 나라들을 침략해도 되는 나라, 침략 당해야 하는 나라로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보편'의 가치였던 문명이 곧 시대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국제법은 문명 - 반개 - 미개로 3분되어 있었고 ㅡ나는 이 '반개'라는 단어가 무척 재미있다. ㅡ 이 기준에 의해 줄세워지고 짝지어진 나라들은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 식민화되어야 하는 나라라는, '제국주의'의 논리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대등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만 했
다. 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이란 다른 근대적 국민국가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동일한 원리가
바로 '문명'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문명'이란 그 나라가 근대국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리
고 이러한 '문명' 이해는 그 시대 국제법의 특질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근대 국제법에서는 유럽적인 문명국
만 국제법상 주체인 주권국가로 간주되었고, 미개하거나 반미개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혹은 그에 개입할 권
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콩도르세의 책에서 사용되었던 문명의 개념, 국제법의 창시자인 그로티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제국주의적 시각, 후에 마르크스의 인도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에서 문명이란 단어의 이러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
우습게도 '문명'이 국가의 성립의 중심 요소였고, 국가들을 줄 세우는 데 사용된 단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시대와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들에게도 '나라줄세우기'의 관습은 여전히 쟁쟁하며, 그 기준이 되는 가치는 여전히 유일의 권력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제력'이라는 기준 말이다.
*
'문화'는, 프랑스에 대항할 개념이 필요했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문명에 反하여 만들어낸 단어이다. 문명이라는 단어 안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제국주의'와 동반되어, 혹은 보조되어 쓰이고 있다면, 문화에는 조금 더 내셔널리즘 적인 성격이 뻔뻔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초반에는 '문명'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던 문화는, 칸트와 피히테를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별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노라면, 나는 역시 내셔널리즘이란 "저항의 이데올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개별이라는 것은 보편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 서평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와 닿아있다. 각 인간집단들이 세계 속에서 혹은 다른 나라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규정할 것을 요구하는지, 혹은 “규정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인 것이다. 정의니, 규정이니, 한계니 통합이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언어의 불완전함과, 그 애매함에서부터 출발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충분히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하나, 우선 이 글부터 끝내야겠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칸트를 보자. 저자가 문화라는 단어가 '칸트를 거쳤다'라고 한 것은 곧 문화 개념의 개념을 칸트가 차용해 자신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논의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읽어낸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입장에 주목한다면, 거기에서 국가를 틀로 삼는 문명 혹은 문화라는 개념에 의해 국가
에고이즘을 비판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길을 찾고자 하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 공통의 패러독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형태의 국가(국민국가)와 내셔
널리즘으로 가는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문화의 '내셔널리즘'적인 속성은 피히테를 거치면서 확실한 방향을 잡게 된다. 그것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익숙한 제목의 저서를 통해 드러난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독일 국민의 유구함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독일어의 순수성과 결부'시켰다. 물론 피히테 자체가 내셔널리즘적이었다기 보다는 그 후에 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적 요소가 강조되었다는 저자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
책의 제목은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지만 저자는 사실 그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무책임하게도 국민을 그만둔 뒤에는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알수 없는 것을 억측으로 꾸며 이야기 하지 않고, 알수 없으니 알수 없다고 말하는 이런 태도에 나는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먹음'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노학자의 이런 태도에는 고개가 숙여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책의 초반부에서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대해 유럽을 무대로 해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개해나가던 생각들이, 그 최근의 발전과정을 분석한 후반부에서는 '일본'에 국한되어 서술되고 있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식민지배로 인해 '저항의 가치'에 매료된 다른 나라들로 그 시각을 넓혀 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들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민족분쟁들과 저자의 논의를 접합하는 것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명'과 '문화'에 관한 저자의 분석은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분석인가 아니면 전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분석인가. 즉 이제 문화와 문명이라는 단어는 정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실제적인 대상을 가르키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보통 내셔널리즘을 논의하는 책들은, 내셔널리즘 그 자체에 갇혀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접합점이나, 공유되는 속성들 같은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곤 하는데, '세계주의'에서 끌어낸 '내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도록 독자를 이끌었던 부분도 좋았다. 여러모로 읽기에 즐거운 책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생각들을 나열했더니, 서평을 쓰기보다 다듬는데 적잖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니시카와 나가오가 반복해 인용하는 루소의 글로 급했던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라는 루소의 문학적인 표현은 한번쯤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이라는 것은 아마도 나와 저자에게는 내셔널리즘이, 누군가에게는 국가의 권력이 또는 때로는 종교가 될테다. 그 꽃장식이라는 것은 쇠사슬을 보조하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게 혹은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인 것이다.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문학 예술은 그만큼 전제
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
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욕구가 왕좌를 축조하고 학문과 예술이 그것을 강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댓글 목록
비밀방문자
관리 메뉴
본문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