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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碩學) 증후군

  • 사회성 떨어지는 괴짜, 사회와 소통하다
  • 자서전 낸 ‘석학(碩學) 증후군’ 다니엘 타멧 인터뷰

    “나를 외톨이로 만들었던 자폐가 세상의 관심 끌게 만든 다리 돼
    부모의 믿음이 자녀 미래 바꿔”
    ‘브레인 맨, 천국을 만나다’ 한국어판 출간
  •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 “저는 인생의 아주 이른 시기부터 제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어요. 극심하게 외로웠지만, 다행히 점차적으로, 아주 힘겹게나마 자신을 그런 상태의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었어요.”

      22일 정오, 영국 켄트에 있는 자택에서 수화기를 든 타멧은 느리고 차분하게, 흡사 깊고 서늘한 자기 내면의 우물에서 한 움큼씩 물을 끌어올리듯 말을 이었다. 바로 이 청년, 다니엘 타멧(Daniel Tamet·28)은 자서전의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하며 기자와 전화인터뷰를 나눴다.

      ‘브레인 맨’은 영미권 언론이 타멧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는 자폐증의 일종인 석학(碩學) 증후군(Savant Syndrome) 환자다. 타멧은 영어 외에 불어·독어·핀란드어·아이슬란드어 등 9개 국어를 한다. 외국어를 익히고 숫자를 계산하는 능력은 천재적이지만, 남과 교감하는 사회성은 박약하다.

       

      타멧은 아침식사 때 묽은 죽을 전자 저울에 달아 ‘정확하게’ 45g 먹는다. 집을 나서기 전에는 자기가 걸친 옷이 몇 벌인지 꼭 세어본다. 그러나 자기 앞에 나열된 일상의 질서가 예고 없이 흐트러지는 순간, 불안이 그를 엄습한다.

      통화에서 타멧은 “나는 오랫동안 혹독하게 외로웠다”고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땐 내 방에서 나 혼자, 내가 하고 싶은 놀이에 몰두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행복했어요. 아홉 살쯤 되면서 ‘친구’를 원하기 시작했죠.”

    • ▲ 석학 증후군 환자인 다니엘 타멧은“저 같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북하우스 제공

    • 그러나 그는 ‘왕따’ 였다. 타멧은 책에 이렇게 썼다.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길 바랐지만 그건 물리적 거리가 아닌 정서적인 친밀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다른 아이들 가까이 가서 그 친구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를 느끼려고 했다’(145쪽). 아이들은 불쑥 튀어나와 몸을 만지는 타멧을 싫어했다. 간간이나마 어울려주는 친구는 그와 마찬가지로 외톨이인, 갓 이민 온 외국인 친구들뿐이었다.

      다행히 학교 성적은 좋았다. ‘암기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영어·불어·독어는 A, 수학은 B였다. 수학이 B라는 대목이야말로 타멧의 남다른 사고 구조를 잘 드러내준다. 그에게 수학은 대수나 기하가 아니라 일종의 ‘공감각’(synesthesia)이다. 그건 여러 감각이 신경학적으로 혼합된 현상이다. 타멧의 머릿속에선 사물과 숫자와 낱말이 제각각 색깔·형태·촉감·움직임을 갖고 있다. 그는 1부터 1만까지의 모든 숫자에 대해 고유한 시각적·정서적 느낌을 받는다. “1은 밝고 반짝이는 흰색, 5는 바위에 부딪치는 우렁찬 파도소리” 하는 식이다. ‘한국’(Korea)은 황금색 금속, ‘서울’(Seoul)은 은색 금속, 사람들이 싸우는 목소리는 짙은 청색이다.

      이 책의 원제(Born on a Blue Day·푸른 요일에 태어났다는 뜻)는 수요일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영어권 아이들이 너나없이 듣고 자라는 ‘마더 구즈’ 동화의 한 대목, “수요일의 아이는 슬픔이 많다”(Wednesday’s child is full of woe)는 구절이 겹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감각이 타멧 혼자만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거위’(geese)라는 낱말에서 녹색을 떠올리지만, 진짜 거위는 흰색이다.

      타멧은 ‘피보나치 수열’ 같은 고난도 수식을 단번에 이해하면서 숫자를 문자로 치환해서 푸는 간단한 방정식에는 서투르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군왕 수백 명의 재위 연도는 줄줄 외면서 문학적 은유,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쩔쩔맨다. 양치질하고, 신발끈 매고, 오른쪽·왼쪽을 구분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118쪽). 요컨대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갖고도 그걸 활용해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는 없는 사고 구조다.

      타멧이 자폐를 극복한 계기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에 왔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혼자 리투아니아로 떠났다. 이 한적한 나라에서 1년간 영어 교사로 자원봉사 하면서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웠다. “우정이란 갑자기 달려들어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단계를 밟아가며 발전시키는 섬세하고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186쪽).

      귀국한 뒤엔 애인도 생겼다. 인터넷에서 메일을 주고받던 친구 닐(31·컴퓨터 프로그래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닐은 자폐증이 없는 일반인이지만 타멧과 마찬가지로 수줍고 내성적이다. 타멧은 원주율 암송의 유럽 기록을 세운 뒤 미국의 유명 토크쇼인 ‘데이빗 레터만 쇼’에 초청 받는 등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닐과 함께 켄트에 있는 조그만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마당에 야채를 키우고, 뜰이 보이는 부엌에서 글을 쓰다가, 하루 서너 번 정해진 시간에 차를 마시는 조용한 인생이다. 두 사람은 닐이 재택 근무를 해서 버는 돈, 타멧이 버는 인세와 강연료로 먹고 산다.

      타멧의 낙은 자기만의 언어인 ‘만티’어(語)를 고안하고 다듬는 것이다. 낱말의 실제 뜻과 자기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가 충돌하는 현실의 언어와 달리, 그가 만들어낸, 한 사람을 위한 언어인 ‘만티’어는 낱말의 뜻과 이미지가 행복하게 일치한다. 지금까지 낱말 1000개를 만들었고, 문법 체계를 대충 다듬었다. 그는 언젠가 이 언어를 완성하겠다고 했다.

      타멧은 “부모님은 가난하고 못 배웠지만, 남과 다른 아들을 내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해주셨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보다 통화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전달하는 뜻은 분명했다.

      “덕분에 저는 가족 품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했어요. 인세 수입으로 부모님께 조금씩 생활비도 드릴 수 있게 됐지요. 모든 자폐아가 나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의 믿음이 자녀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그는 “한때 나를 외톨이로 만들었던 자폐가 이젠 다른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다리(bridge)가 됐다”며 “저 같은 아이들에게 희망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브레인 맨’ 다니엘 타멧은

       

      원주율 소수점 이하 2만 자리까지 척척 양치질하고 운동화 끈 매는건 쩔쩔 

       

      그는 1979년 런던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아이들 숫자가 불어나자 직장을 관두고 아내와 함께 육아에 몰두했다. 가족은 사회보장수당으로 연명했다.

      타멧은 출생 직후부터 다른 집 아기들과 달랐다. 쉬지 않고 울었다. 2세 때 간질을 앓았다.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반복적으로 머리를 벽에 찧었다. 열여덟 살 때까지 동네 학교에 다녔다. 스물네 살 때 원주율 암송 기록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TV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 자폐연구센터에 찾아가 석학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2004년 3월 14일, 영국 옥스퍼드 대학 과학사 박물관에서 한 수줍은 청년이 기자들과 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시간 9분에 걸쳐 원주율 소수점 이하 숫자 2만2514 자리를 정확하게 암송했다. 유럽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가 쓴 자서전 ‘브레인 맨, 천국을 만나다’(북하우스) 한국어판이 지난주 출간됐다.

       

       

       

       

       

      석학 증후군

       

      책 7600권 통째 외우기도… 자폐증 가진 10명중 1명 꼴 특정분야에서 천재성 보여   

       

       

    • ▲ 더스틴 호프만(왼쪽)이 석학 증후군 환자로 출연한 영화‘레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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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성마비 또는 정신지체들에 대한 발달의 장애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경이로운 기억력이나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경우를 ‘석학 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고 한다.

      자폐증을 가진 10명 중 한 명, 뇌에 손상을 입었거나 정신박약인 2000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뇌의 좌반구가 손상을 입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우반구에 특수한 재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세기 말 이 현상에 대한 표현은 ‘백치 석학(idiot savants)’이었다. 미국 영화 ‘레인맨’(1988년작)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인물 ‘레이먼드 배빗’이 바로 이 석학 증후군 환자였다.

      레이먼드 배빗의 실제 인물인 킴 피크는 미국 전역의 우편번호, 7600권 이상의 책을 통째로 암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열 살 때 처음 들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을 기억해 완벽히 연주한 레슬리 렘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자폐증 소년 화가 핑 리안도 잘 알려진 석학 증후군이다.

      석학 증후군 환자들은 다른 자폐 환자에 비해 전형적인 자폐 증상이 비교적 경미하다. 반면 언어 발달 속도는 정상적인 경우가 많다. 주위에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괴짜”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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