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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종교신문]"간디의 비폭력 시민운동은 탁월한 투쟁전략”
독립기념관 개관 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마하트마 간디 - 사티아그라하 인도의 독립운동'
 ◇마하트마 간디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8월8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세계 평화 기념관의 역할과 세계 반침략 평화선언’ 주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에는 한국 독립기념관, 인도 네루기념관, 폴란드 아우슈비츠 국가기념관 등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날 ‘마하트마 간디- 사티아그라하 인도의 독립운동’ 주제로 므리둘라 무케르제 관장(인도 네루기념관)이 발표한 내용을 싣는다.

/ 편집자 주


인도의 독립운동은 세계사에서 최대의 대중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수백만 명의 인도 국민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국가다. 인도 투쟁의 독보성은 비폭력적 방법에 근거한 투쟁전략에 있었다.

이 전략은 인도의 제1세대 민족주의자에 의해 전개되었으나 완전한 형태는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지도력에 의해 성취되었다.

인도 민족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마하트마 간디와 그의 투쟁전략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 투쟁전략을 ‘사티아그라하’라고 명명했다.

간디의 정치인생 이야기의 첫 장은 1893년 남아프리카의 가난한 계약노동자들인 인도 이민자들의 투쟁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다양한 항의 방법을 시도하였고, 이것이 결국 1906년 9월11일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한 대중 집회에서 대중 불복종 곧 사티아그라하 채택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랜 투옥기간을 포함한 많은 투쟁과 고뇌는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보낸 나머지 기간을 특징지었다.

간디는 1915년 인도로 돌아왔으며, 1948년 절명할 때까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사티아그라하 캠페인을 창안하고 지도하였다.

사티아그라하 레퍼토리는 1919년 롤래트법안 항거를 시작으로 1920∼22년과 1930∼34년 비폭력 및 시민불복종운동으로 계속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 명이 참여한 시민 불복종운동과 ‘Quit India운동 (영국인의 인도 철수요구운동)’에서 절정에 달한 범국가적 투쟁을 포함하고 있다.

비폭력운동은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여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질 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간디의 논리였다. 1930년 소금행진을 시작하기 전 날인 3월10일 수행자의 마을에 온 군중에게 간디는 비폭력이 어떻게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를 가능케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국 정부를 골치 아픈 난국에 처하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수일 후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지만 어떻게 여러분들은 두려움 없이 올 수 있었습니까? 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소총탄이나 폭탄에 직면하게 되면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살상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왜죠? 내가 폭력 캠페인(소총이 아닌 막대기나 돌 사용)을 자행한다면, 정부가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국가가 단 하루라도 권위에 대한 폭력적 도전을 용인한 역사 (영국과 미국, 러시아에서)의 예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정부는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음을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독립기념관 개관 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간디는 또 비폭력 대중 불복종의 힘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의 70만 마을에서 10사람이 소금을 만들면서 소금법에 불복종 한다면, 이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무리 최악의 독재자라 할지라도 감히 평화적인 시민들에게 대포를 쏘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더 분발한다면 이 정부를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지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간디는 정부를 승산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함으로서 비폭력 사티아그라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거듭된 운동에서 보여주었다. 이는 정부를 해결할 수 없는 궁지 속에 가두고 무력화시켰다. 법률에 도전하는 운동을 억누르지 않는다면 정부는 지배력이 약한 것으로 보이게 되며, 억누른다면 비폭력 선동가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잔인한 반시민정부로 보여 질 수 있었다.

무케르제 관장

“어떠한 경우에도 타격을 입는 것은 정부였고, 구성원의 증가를 목격하는 것은 운동이었다. 우리가 너무 심하게 한다면, 의회가 ‘억압’을 외칠 것이고, 우리가 너무 작게 한다면, 의회는 ‘승리’를 외칠 것”이라고 영국인 공무원 C. F. V. 윌리암스가 1930년 그 딜레마를 언급했다.

비폭력에 대해 간디가 강조한 것은 수단을 목적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깊은 확신에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수단이 목적을 형성하는데 결부되어 있다고 믿었다.

“여러분은 불안정한 폭력의 기반 위에 인도적인, 복지를 챙기는, 포괄적인 그리고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적에게 겨냥된 권총은 당신이 현재 동의하지 않는 동료들을 협박하기 위하여 쉽게 돌려질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벽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차이와 알력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은 의사소통을 결렬시키지 않고 정의를 확실하게 하는 그러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비폭력의 락스만 레카 (경계)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945년 미국의 일본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폭탄 투하의 비극에서 정당하게 얻어질 수 있는 도덕은 폭력이 이에 맞선 폭력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을 때, 도덕은 맞선 폭력에 의해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오로지 비폭력을 통해서만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증오는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으며, 증오에 맞선 증오는 증오의 표면뿐 아니라 깊이를 증가시킬 뿐이다.”

간디가 이미 우리 곁에 없는 그 후 수십 년간 그의 행동은 인도와 여타 세계의 다른 국가에서 위대한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인도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티아그라하 방법에 다가갔음은 물론이다. 자기 민족 중심주의에 대항했던 사람들과 비속함에 대항해 싸우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기고 의지하였다.

명확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들이 사티아그라하에서 의미를 찾으며, 그것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리=김진완기자 /kjw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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