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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공책] _ 2005 구정 연휴의 기억 2

구정 연휴를 맞아 세 권의 책을 장만했다.

폴 오스터의 에세이집 [빨간 공책],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집 [도마뱀],
민정이 언니가 강추했던 보통 씨의 [여행의 기술].

명절 선물 세례들을 뚫고 연휴가 시작되는 날 무사히 손에 들어온 애들이 얼마나 기특하던지... 일단 [여행의 기술]은 주말 춘천 여행을 위해 잠시 미뤄두고, 남은 두 권 중 [빨간 공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두개 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고, 매우 얇지만 예쁘게 디자인 된 양장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막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흥미진진하게 끝낸 터라 - 작년에 늦은 생일 선물로 받아서 너무 재미있게 읽다가 끝내기가 아까웠던지 마지막 몇 챕터를 한참 묵혀두었다가 최근 마무리를 지었던 것이었다.- 또 다른 작가의,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책을 바로 읽는다면 흥미롭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표지가 아주 멋있었다. 심하게 얇은거 아냐 하고 생각했지만, 요즘 출판의 경향이 다 그러니 어쩔 수 없겠거니 했다 (나는 이런 예쁜 양장본 책들을 좋아하기 까지 하는 편이다.). 하지만, 책을 펴보고는 경악!! 본문 전체에 빨간 밑줄을 그어놓은데다가 글자체는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필기체류로, 정말이지 뜨문뜨문 써있다고 할 수 밖에... 정말 팬시한 책이긴 했지만, 그것이 마치 카페나 술자리에서의 잡담 같은 이 책의 내용에 어울리는 것인지도 의문이고, 여하튼, 나는 "출판사의 사기극"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기극은 대체로 나 같은 독자를 타겟으로 할 것이 분명한데, 폴 오스터의 신작이라면 무엇이든 읽고싶어하고, 예쁜 책 표지를 선호하며, 할인 폭이 크다는 이유(외에도 앉은 자리에서 책을 고를 수 있다거나, 너무 바쁘다는 등의 이유도 있지만)로 사무실 바로 옆의 대형 서점을 두고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특징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서점에서 이 책을 한번 들춰보기만 했어도 가격이 너무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선 자리에서 정독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지갑 속의 지폐들을 지킬 수도 있었을 터였다.

물론,[빨간 공책]에 쓰여있던 글들은 무척 좋았다. 술자리 잡담 같은 것이라고 해도, 폴 오스터의 장황하고 기이한 잡담이라면 얼마나 훌륭한가! 게다가 20년 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친구 W(웨인 왕이 분명했다!)가 "어머니와 청소년 딸이 겪은 모험을 다룬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최신작 ([여기보다 어딘가에 Somewhere Not Here]가 분명하다!!)을 촬영하던 도중 어머니 역할을 맞은 유명한 여배우 (수잔 서랜든이 아닌가!!!)와 감독이 겪은 기막한 우연의 이야기 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래도 사기는 사기다. 산뜻한 문고판으로 3,000원에 판매했다면, 이 책의 가치는 훨~신 높아졌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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