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이 끝난 후

선거연령 하향 4월 통과를 외쳤던 43일간의 농성, 마지막 일정은 44일째였던 금요일에 끝났고 주말 내내 누워있으니 이제 몸은 좀 살 것 같다. 후회, 불안, 허무 같은 감정들이 밀려왔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답은 몰라도 질문이 어떤 건지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1.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선거연령 하향 조정(정치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말해왔다. 전자라면 무게가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자로 여겨졌을 때 현장 없이 당위만 있는 문제로 간주되어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참정권은 인권’임을 더 힘주어 이야기하게 될 뿐이다. ‘18세’라는 나이 기준을 요구할 것인지 아닌지, 얼마나 강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18세로의 연령 하향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정의로운 선거연령 제한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온 청소년이라는 집단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시작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며, 고등학생이 포함되는 18세 연령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면 청소년 참정권의 큰 장벽을 하나 넘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 이전까지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 참정권은 ‘18세 선거권’으로 자동 번역되어 받아들여졌고 논의는 ‘18세면 판단력이 있는가 없는가’ ‘18세는 납세, 국방 등 의무를 지는데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은가’에 기울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고민 끝에 ‘16세 선거권’ 법안을 국회에 청원했지만 논의의 지형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농성이 끝난 후 스스로 평가했을 때 우리의 농성이 이끌어낸 가장 큰 성과는 이와 관련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연령 하향 문제가 단순히 선거연령 제도를 약간 조정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삭발을 하고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며 연대하기 위해 전국에서 달려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정권은 인권’임을 이야기했던 수많은 구호들이 일조했겠지만 결국 논의의 지형을 바꾼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던 것 같다. 한국 최초로 선거연령 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 날이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다는 기대도 생긴다.

2. 농성 중 자유한국당 다음으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비청소년이면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를 되풀이해서 묻게 하는 상황들이었다. 언론이 ‘청소년 당사자’ 내지는 ‘삭발한 청소년’만 찾아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인터뷰가 소수 몇몇에게만 너무 쏠려 이들은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상황 속에서 자문하게 될 때는 너무 괴로웠다. 나 뿐 아니라 다른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은 비청소년이 되면서 스스로를 대변하는 대신 ‘청소년’이라는 이름 뒤에서 성명과 입장과 보도자료와 때론 타인(청소년)들의 발언문들을 쓰게 된다. 자유한국당 현판식에서 기습시위한 세 명 중 두 명은 만 18세가 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었지만 언론에는 ‘청소년들’로 보도되었고 홍준표는 ‘학생인지 아닌지’ 의문스러워했다. 언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 아는 우리 운동에서도 ‘청소년들의 기습시위’로 부르는 게 괴로웠다. 기습시위의 명칭 문제는 단지 한 사례이고 농성 내내 매일 이런 고민을 하게 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특정한 얼굴이나 '청소년 당사자들의 의견'이 필요할 때는 만 18세를 기준으로 당사자와 아닌 사람이 갈라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대충 ‘청소년들’로 퉁쳐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오해나 별 것 아닌 현상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이 간극이 괴로워지는 건 청소년인권운동을 앞으로의 전망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리와 역할과 미래와 내게 부여될 이름이 사회적으로도 운동적으로도 없기 때문이다. 이걸 만들어가는 일도 결국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해야겠지만.

3.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상근자(?) 같은 역할로 6개월을 좀 넘게 활동해왔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교육센터 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얻어 신세를 졌고 우편물을 받고 여럿이 해야 하는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도 사용했다. 이제 곧 이 사무실이 이사를 하면서 내가 쓸 공간도 없어질 예정이다. 청소년인권단체 몇몇이 공동으로 쓰는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기도 하는데, 동료 없는 사무실에 출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 고민을 하게 되는 건 내게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풀뿌리 청소년운동의 모델을 만들어보자고 모였던 ‘청소년인권연대 추진단’은 목표한 바를 달성하려고 시도할 주체와 역량이 부족하고 목표 자체도 지금의 운동과 사회적 상황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일인지 다시 점검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농성 때는 그래도 매일매일 보고 상의할 동료들이 있었는데.

4.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국회 대응 활동도 계속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것과(정당 간 협상과 합의), 더민주와 바른미래 등 다른 정당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우선순위 과제로 가져가게 하는 것(신속처리안건 지정) 중 어떤 게 더 현실적인지 모르겠다. 자유한국당만 타겟 삼는 운동이 훨씬 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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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15:50 2018/05/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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