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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역자해설

 여기 번역하여 내놓은 글들은 바로 이 ‘자본의 본성’을 해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다루고 있다.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은 신고전파의 자본 이론도 완전히 거부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자본 이론 또한 그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 기각했다. 대신 그가 착목한 지점은 실제의 현실에서 ‘자본’이라는 이름의 제도가 작동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분석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가 찾아낸 사실은 자본이란 경제적 생산 행위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소유권이라는 법적 제도적 권력을 이용한 재분배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자본 이론에서 자본의 본질과 그 축적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자본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물질적 자본이며, 그 이윤과 축적의 크기는 그 자본재에 내포되어 있는 생산성의 발현의 결과라고 보는 신고전파 이론이다. 둘째, 생산에 들어가는 원초적 재료, 노동과 토지를 투하하여 생산을 겪는 시간이 자본이며 이윤과 축적의 크기는 그 시간적 과정을 이자율 등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보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이다. 셋째, 자본이란 불변 자본, 즉 그것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한 ‘죽은 노동’의 집적이며 , 그 크기는 원칙적으로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율의 함수라고 보는 마르크스 경제이론이다. 이 세 이론은 비록 서로 큰 차이가 있으나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으니, ‘자본이란 생산 과정에서 발현되는 생산성을 체현한 존재’이며, 이렇게 생산 과정에 뿌리박고 있는 자본이 화폐적 표현 형태로 전환된 것이 자본의 가치이자 이윤 및 축적이라는 것이다.


베블런의 자본 이론이 다른 모든 자본 이론과 애초에 갈라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바로 이러한 요소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다. 그가 보기에 ‘자본의 생산성’이란 현실의 두 가지 요소를 합쳐서 구성해놓은 신화였다. 그 두 요소 중 하나는 사회 공동체 전체가 생산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 공유하는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그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자본가의 권력이다. 즉, ‘생산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전체가 이루어내는 산업의 생산 과정 자체라는 것이다. 산업의 생산 과정이 자본, 그리고 자본의 이윤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자본을 소유한 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력에 기초하며, 따라서 자본이란 본질적으로 생산이 아닌 권력에 기초하는 존재이다.


  그는 근대 경제 사상에서 가장 초석이 되는 개념의 하나인 ‘생산성productivity'이란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로 내려온 ’정령 숭배animism', 즉 일종의 물활론적 미신이라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18세기의 중농주의자들physiocrats은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틀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physis 개념을 받아들여 이것을 ‘가치’를 낳는 원천으로서 생산성의 개념과 동일시했다. 이후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게서 시작된 가치론 논쟁사는 그러한 ‘가치’를 낳는 원천은 노동에 있는가 자본에 있는가 시간에 있는가 등의 ‘요소 생산성’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베블런은 이러한 ‘생산성’이라는 하나의 정령을 가정하는 태도가 근대 초기의 자연관에 기초한 하나의 미신이며, 더욱이 그러한 정령이 경제적 과정의 구체적인 사물에 있는 양 여기는 것은 원시인들의 애니미즘과 똑같은 선입견preconception이라고 보았다.


  그는 ‘생산성’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는 자본재이든 인간 노동이든 특정한 요소에서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공동체가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욕망을 충족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보유하는 총체적 지식만이 궁극적인 생산성의 담지자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공동체 전체의 효율적 생산 활동을 담보해 주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화폐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또 자본도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생산 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오로지 특정인이 그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볼모’로 잡아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을 뜯어낼 때에만 이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지식이 특정인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인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이러한 ‘인질극’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생산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공동체 전체의 지식은 경제 단계가 발달함에 따라 특정한 ‘사물’에 체현되기 마련이다.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게 된 19세기 중반 이후의 생산 지식은 모두 공장과 기계라는 사물에 재현된다. 여기에서 폭력을 동원한 지배 계급이 그 사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 근대적 소유권의 실질적 의미는 사실상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남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권리’이다. 한 번 더 비유를 들자면, 지배 계급이 사회적 생산이라는 흐름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기계나 장비 등의 ‘병목’을 잡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전체로서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를 그 생산 수단의 소유자에게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것이 그 장비로 생산된 재화에 대한 높은 가격과 그로 인한 높은 이윤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함의가 있다. 자본 소유자가 이윤을 높이기 위해 하게 되는 일은 산업 생산을 한없이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율적 활용을 일정한 이윤이 보장될 만큼만 가동되도록 제한하는 ‘깽판 놓기sabotage', 즉 베블런의 표현을 빌리면 “효율성의 주의 깊은 철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베블런의 차이를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이론화했지만, 두 가지 정도의 큰 차이를 보인다. 첫째, 자본이 착취하는 대상을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잉여 노동이라고 본 반면에 베블런은 노동자만이 아닌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과 복지라고 보았다. 베블런은 노동 가치론 또한 ‘요소 생산성’의 신화에 기초한 그릇된 이론이라고 보았으며, 자본이 사회 공동체 전체로부터 가져가는 잉여의 성격은 ‘추상 노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액수의 ‘화폐’로 표현되는 생산물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보았다. 둘째,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늘 가격 경쟁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이윤을 올리기 위해 항상 생산성을 극대화하려 든다고 보았다. 비록 이것이 최종적으로 과잉 생산과 이윤율 저하라는 ‘비생산적 결과’를 낳기는 하지만, 이는 생산성을 오히려 너무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 생산량이 무계획적으로 과도해지고 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과도하게 기계 중심이 된 데 따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반면에 베블런은 자본주의란 애초부터 생산성의 극대화가 아닌 그것의 제한, 즉 생산에 대한 ‘깽판 놓기’에 기초하고 있기에, 비효율적 비생산적 성격을 본질적으로 갖는다고 보았다. 결국 베블런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이 생겨나는 대립선은 자본 대 노동이라기보다는 자본 대 사회 공동체 전체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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