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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의 봉건제/CK (2)

1차 십자군 원정 직전의 예루살렘과 그 근방

 

중세와 민족주의

 

  국사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민족의 배반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데 길을 안내해 준 사람도 있고, 때로는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을 멸망시킨 나라도 있다. 심지어는 전쟁 틈을 타서 협소한(?)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민란을 일으키거나 관공서를 습격해 노비대장을 불태우는 등등. 물론 그 사람들을 체포해서 취조해 보면 그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사실동족상잔(?)을 밥 먹듯이 하며 성장하여 삼국을 정립시킨 사람들이나 기본적인 참정권은 커녕 길가다가 따귀를 맞아 턱이 돌아가도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더러 당신은 싸다구를 날린 놈들이랑 같은 민족이요 겨레요 가족이요 해봤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게임은 이 민족주의 이전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회사의 다른 게임들이나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 등에서는 타민족의 영토를 점령해도 생산 효율이 떨어지거나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는 등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에 맡기거나(문명 시리즈) 초기 자본주의와 같이 부르주아 주도 하에 일국 시장의 경계를 확장하거나(EU 시리즈) 식민 통치기구를 확립하거나(빅토리아 시리즈) 괴뢰 국가를 수립하여 신식민주의 정책을 쓰거나(hoi 시리즈) 등등의 대응이 필요하다. 반면 중세를 다루고 있는 이 게임에서 그러한 대응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노르만인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왕 노릇을 하건 프랑크인들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왕국을 건설하건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넘실넘실 넘어와도 이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간다. 종교 역시 큰 장애물은 아니다. 가끔 정신 나간 지배자들이 강제 개종을 하려고해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이슬람 신도를 제후나 관리로 임명하면 가끔 교황청에서 종교재판관을 보내곤 하는 정도. (여담으로 종교재판을 하면 90% 정도의 확률로 죽거나 불구가 된다. 법정 공방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땅을 찾아 약탈을 찾아 먼 곳으로 곧잘 떠나고 상속을 위해 대륙적인 혼맥을 만들던 사람들에게 사실 있지도 않은 일국적 경계의 민족을 상상하라는 것은 무리가 있긴 하다. 마찬가지로 자급자족적인 장원 경제 속에서 경제외적강제로 수탈당하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쓰는 말도 생활도 문화도 다른 지배자들과 민족적 일체감을 지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평생 자신의 마을을 벗어나지도 않는 사람이 딱히 이웃 영지의 사람들과 교류할 일도 드물었거니와 민족적인 연대를 이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민족의 탄생은 일국 시장형성을 위한 통일된 언어와 법률/제도, 그것을 위한 민족 국가의 성립을 기다려야 했고 그것은 이 게임의 영역이 아니었다.

 

100년쯤 후의 지도. 예수살렘 왕국과 후대 해적질로 유명해질 구호기사단이 보인다.

 

가부장적 상속과 살리카 법전

 

  민족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종류의 대전략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당주를 중심으로 한 가문이다. 이 거대한 가족은 가부장과 그에 복속된 가족과 가신들로 구성되며 당주가 죽으면 그 계승자로 이어져 게임을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상속 문제가 이 게임의 중요한 문제로 작용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통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을 지배하게 된 게르마니아 사람들에게 역시 이 상속 문제는 중요한 문제였던 듯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살리카법이란 오래된 상속법을 만들었는데 내용인즉 모든 부동산-과 생산도구들-은 남자들이 갈라먹고 남은 개인적인 물건 몇 개는 여자들이 갈라먹자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이것을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가 왕국 전체의 법으로 지정함으로써 유럽 곳곳에 퍼지게 된다.

 

  이 게임에서 상속법은 이 악명 높은 주자가례 ... 가 아니라 이 살리카법에 근거한 것으로 여러 차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남성상속자 이외의 상속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방계 살리카를 적용할 경우 딸들의 아들에게 상속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가끔 이것 때문에 가문의 영지가 외손자들에게 상속되어 영지가 조각나기도 한다. 즉 남자애를 낳으면 상속도 시킬 수 있고 외국으로 장가 보내서 운이 좋으면 상속도 받아오기도 하는데, 여자애를 낳으면 실속도 없고 재수 없으면 상속 때문에 땅도 뺏기고 ... 예전에 미국 드라마 Everybody loves Raymond를 보면서 쌍둥이 아들을 아내가 임신하자 딸일 것으로 짐작했던 주인공이 급빵긋하고 시아버지가 “왕조를 세워도 되겠군”이라면서 좋아하는 걸 보고 양놈들도 남아선호사상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오랜 기원 중 하나를 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과 상속 체계는 또 하나의 정신 나간 풍경을 양산해 낸다. 이 게임에도 그렇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고 암살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다른 귀족 가문에 대한 공격/보복성 암살도 많지만 반쯤은 상속 때문에 일어나는 가문 내부에서의 암살이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딸이 조카를 죽이고 심지어는 당주가 오래 살다보면 늙은 아들이 암살자를 보내기도 한다. 사랑과 우애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신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심각한 가정불화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도 유서 쪼가리 때문에 가족 팀태그 매치 심하게는 왕자의 난을 벌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게임에서는 표현되지 않지만-전에도 말했지만 귀족들에게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장원의 농민들에게 역시 가족이 사랑과 우애의 공동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 생산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가부장에 속한 경운기 이상의 위상을 갖지 못하였고 가족 생산의 기반이 성립하지 않으면 쉽게 해체되곤 하는 집단이었다. 오늘날 가족 생산이 소멸하고 상속에 목숨을 거는 재벌들과 족보 오타쿠들을 제외하고는 가족의 존재 기반이란 극히 미미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가부장주의자들의 망령과 재생산을 가족 단위에 전가시키려는 자들에 의해 사랑과 우애의 공동체로서의 가족 신화는 창조되었고 가족의 이름 아래 고통은 다른 형태로 대물림되고 있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카노사의 마틸다 공. 이 게임은 여성 캐릭터의 자식이 대를 이을 경우 가문의 대가 끊긴 것으로 처리되어 바로 게임 오버가 된다. 망할.

 

신의 평화와 인간의 전쟁

 

  물론 게임은 상속이나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보내는 우울하고 지루한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중세 기사들의 삶의 활력소인 신나는 전쟁과 약탈 없이 이 게임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 초기에는 유럽의 기사들은 서로 싸우고 약탈하는데 주된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고 한다. 지배계급 사이에서도 이것은 자기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거니와 이들의 전쟁 놀이에 약탈 방화 강간당하는 사람들 역시 이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이들의 저항이 중세 봉건제 질서를 위협할 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는지 교회의 주도로 토일월에는 전쟁을 하지 않고 전쟁을 하더라도 룰을 정해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전쟁을 즐기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신의 평화paix de Dieu.

 

  이러한 양식의 전쟁이 귀족들의 약탈 본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인지 교회에서는 곧이어 ‘놀면 뭐하나 이도교나 약탈하자’라는 포고를 내리게 되는데 이리하여 이 게임의 주된 테마인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게 된다. 이 게임에서 같은 카톨릭을 공격하면 외교관계도 나빠지고 봉신들의 충성이 떨어지는 등 여러 페널티가 있지만 이도교를 공격하면 정치적/종교적 위신도 쌓고 약탈도 하고 꿩먹고 알 먹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특히 상속 받을 땅이 없는 자식들에게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땅 한 쪼가리라도 떼 주기 위해서 혹은 소영주들이 대영주로 인생역전을 하기 위해서 종종 십자군 원정에 올인하게 된다.

 

  스포츠 정신이 가끔은 지켜졌던 유럽에서의 (귀족들 사이의) 싸움과는 달리 십자군 전쟁은 극히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고 한다. 밥먹듯이 일어나는 약탈-실제로 약탈로 군수를 조달했다고 하니 밥먹듯이 일어나야 할법도 하다-과 방화, 식인 ... 게임은 이러한 참상을 플레이어에게 여실히 전달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것이 더 리얼한 것이 아닐까. 지배계급의 입장에선 그것은 부수적인 피해이고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테니까. 지금이나 그때나.

 

나폴레옹 시대에 정리된 부르주아 법률 역시 80%정도는 상속과 재산에 대한 법이었다고 한다.

 

마치며

 

  이 게임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리얼하다. 그 리얼함은 당시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민족에 대한 신화,가족에 대한 환상, 기사도 로망스에 나올 법한 고결하고 신성한 기사의 이미지를 파괴한다. 다만 CK는 그것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 질서 위에서 살아가는 지배계급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리얼함의 끝이자 한계이다. 그렇게 오늘도 피지배 계급들은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와서 지배계급의 현실과 욕망이 투영된 게임을 하며 세계를 정복하고 가상의 피지배 계급을 약탈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여담

 

  영국은 대륙의 살리카 법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이 있어왔다. 빅토리아 사후 하노버 왕조에서 삭스 코버그 고타 왕조로 왕실의 성이 바뀌었고 (남편의 성에 따라) 그것이 1차 대전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자 독일식 성과 작위를 버리고 윈저 왕조로 바꾸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번 여왕이 죽고 나면 필립 공의 성을 따라 왕조 이름이 마운트배튼으로 바뀐다는 얘기가 있고 찰스가 엘리자베스의 성을 이어받아 윈저로 계속 간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