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벌레벌레벌

워털루 (3)

- 1815년 6월 15일의 세계

 

 

0.

 

  상브르 강을 건너 12만명의 병력으로 2배나 가까운 22만명이 짱박혀 있는 동맹국의 전진 멀티로 러쉬를 간 나폴레옹의 결단을 보면 확실히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해. 루비콘을 건넌 시저나 한강을 건넌 박정희처럼 나폴레옹도 선후배 군바리들처럼 강을 건너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하지만 나폴레옹의 선택은 그렇게 무모한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었어. 오히려 상브르 도강은 공격만이 숫적 열세를 숫적 우세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 행동이었던 거야. 뭔 말이냐고? 나폴레옹의 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구.

 

  동맹국은 60만이나 동원한다고 하고 있지만 막상 프랑스 국경에는 22만 밖에 없잖아. 그것도 영국애들 10만명과 프로이센 애들 12만명이 따로 따로 있을거고 걔들도 각각 군단별로 사단별로 나눠서 짱박혀 있을 거란 말야. 12:22가 아니라 실질적으론 12:10:12 아니 12:1:2:3:2:3... 이 될 수 있단 거지. 12명이 22명한테 이기는 건 어려워도 12명이 2-3명 패잡는 건 일도 아니거덩. 그런 식으로 약한 부위부터 박살내나가면 22만명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냐. 이 상황에서 방어한다고 짱박혀 있으면 오히려 12:22 심지어 60만명과 상대해야될 지도 모르는 거 아냐. 오히려 이럴땐 공격이 상황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책인 거지. 병력의 집중과 기동이 절대적 숫적열세를 상대적 우세로 바꿔놓는단 말야. 그게 각개격파의 기본인 거지.

 

빠른 기동과 각개격파의 명인이었던 임요환. 요즘은 공군에서 드랍쉽을 몰고 있다고 한다.

 

  총 잘 쏘는 거보단 잘 걷는게 낫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한 기동전의 황제다운 구상이었고 사실 비범하긴 해. 사실 벨기에에 주둔한 동맹군 22만명은 뭉쳐 있을 수 없었거든. 전투 때야 잠시 한 동네에 몇만씩 모여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상시에 웬만한 대도시 인구 수준인 22만명이 뭉쳐 있을 수는 없잖아. 뭐 스타라면 유닛들이 항상 뭉쳐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의 군인은 밥도 먹고 해야 되니까. 더더군다나 얘들의 보급이란게 상당부분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동네마다 퍼져서 짱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거지. 더더군다나 나폴레옹이 설마 공세를 펴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을테니 (실제로 상브르 강을 건널 즈음에 웰링턴과 영국군 지휘부는 리치몬드 공작부인이 주최한 무도회에 있었다고 해) 기습 효과도 볼 수 있을거고.

 

1.

 

  이렇게 대충 시간과 장소는 정해졌어. 6월 중순. 장소는 벨기에. 이제 잠시 시간을 멈추고 1815년 6월 15일 경 벨기에에 모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자구. 뭐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건 좀 지겹겠지만 참아줘. 이런 재미없는 부분에서도 인생의 교훈은 나오는 법이니까. 일단 대가리들부터 한번 살펴보자구.

 

1.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뭐 사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비범한 사람이야.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의 군사적인 비범함은 알렉산더 이후 최고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을 정도야. 근대전의 바이블인 클라우제비츠의 저작 역시 나폴레옹 전략과 군개혁에 기초한 거란걸 생각하면 적어도 전장에서 이 아저씨의 위상은 거의 전설적이었다고 해야겠지. 당장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만 해도 나폴레옹은 열세인 전력이었지만 그의 뛰어난 전략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시간, 장소, 규모로 싸우게 하고 있잖아.

 

  또한 이 사람은 병사들에게 인기가 좋았어. 뭐 사실 잘 이기는 지휘관은 인기가 좋은 법이기도 하지만 이 사람은 실제로는 어떠했든 간에 굉장히 소탈하고 자상한 이미지를 병사들에게 심어놓는데 성공했어. 거기에다 개그 센스도 좀 있었다고 해. 개그 센스가 인생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여튼 제국의 황제가 군복에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가끔 병영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농담도 한마디씩하는 모습에 병사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나봐. 여튼 그가 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해서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모자는 병력 4만의 가치를 가진다라고 평했을 정도야.

 

실제로도 소탈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냐하면 ... 글쎄 그런면도 있지만 어차피 이 종류 직업군의 소박함이란 내가 가끔 누리는 사치와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라구.

 

  다만 몇가지 약점 역시 두드러졌어. 그 중 하나가 건강일 거야. 젊은 시절에도 치질에 시달렸던 그는 이번 전역에서도 그 난치병에 시달리고 있었어. 내내 말등에 매달려서 움직여야할 정도였다고 해. 거기에 그는 위장병 편두통 등 온갖 병을 달고 다니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었고, 나이들어 꽤 늘어난 체중 역시 체력 소모를 가중시키는 원인이었을 거야. 뭐 그의 후반부 인생이 안락한 궁정생활 <-> 폭발적인 업무로 가득찬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몸이 망가지는게 이상하지만은 않겠지. 평소에 건강을 챙기길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한번 이 건강이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승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눈여겨 봐 둘 필요가 있을 거야. 과거는 항상 미래에 복수하는 법이니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이 아저씨의 소인배적 마인드 역시 꼬집어야 할 거야. 혁명기 때 당시 군의 중추였던 귀족 장교들이 죄다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프랑스는 역시 혁명적인 조치로 군을 재건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3계급에서 장교들을 충원하고 능력과 실적에 따른 임관 및 승진제도를 만들었단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폴레옹은 자신과 라이벌이 될만한 장군들에게 군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를 꺼려했어. 또한 장군들이 자신의 명령과 무관하게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군을 운영하게하기 보다는 명령에 충실하게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요구해왔지. 혁명 프랑스군의 새로운 전통을 압살한 나폴레옹의 소인배적 스타일은 사실 개인적인 소인배적 품성에서도 출발하겠지만 역시 일면으론 민중 혁명을 억눌러야 했던 그의 정치에서 출발점을 찾아야겠지.

 

1.2.

 

  웰링턴 공작, 아서 웨즐리. 배경부터 성품까지 확실히 인간쓰레기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사람이야. 이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영국 육군의 임관 제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영국 육군의 기본적인 임관 방식은 계급을 돈을 내고 사는 방식이었어. 가끔 군공을 세워서 임시 계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안정적인 승진은 돈을 내야 보장되는 거지. 반면 해군은 승진 시험과 실적 중심으로 임관되었어. 그래서 영국의 지배계급 중 비교적 똘똘한 애들은 관료나 해군으로 빠지고 돈많고 무능한 애들이 무난하게 출세하기 위해 육군으로 많이 가곤 했어. 뭐 지금 기준에서야 경악스럽지만 사실 귀족의 사병들이 군의 근간을 이루던 중세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할 거까진 없었어. 영국이 해군 국가다보니 육군을 양성할 돈이 딸려서 매관이 불가피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이 불철저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사회의 봉건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았던 탓이 크겠지.

 

  여튼 이튼 스쿨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애가 좀 굼뜨고 해서 성적이 나빴던 아서 웨즐리는 집에 돈이 좀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육군 장교로 임관하게 돼. 그리고 고속 승진 가도를 달리게 돼. 한마디로 돈 좀 뿌린 거지. 그리고 형이 총독으로 있는 인도로 건너가서 식민지 전쟁에서 꽤 큰 공을 거두게 돼. 이것도 형 빽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아서 웨즐리가 나름 빼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기도 해. 재수없는 놈이 실력이 있으니 약간 더 재수가 없어졌다고 해야되나. 그는 인도에서의 군공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크게 활약해서 스페인에 가 있던 프랑스군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웰링턴 공작 작위를 따내게 돼.

 

뭐 계급 좀 사면 어떻습니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아서 웨즐리는 그 공작 작위에 그렇게 즐거워하지는 않았어. 아서 웨즐리의 가문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로 이주한 영국 귀족과 아일랜드 귀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컴플렉스였기 때문이지. 식민지 지배계급답게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에 일호만큼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누군가 당신 아일랜드 사람 아닌가라고 묻자 "마굿간에서 태어난다고 사람이 말이 되지는 않아 임마"라고 말하는 싸가지를 발휘하기도 해. 그런 그에게 아일랜드 작위-웰링턴은 북아일랜드에 있는 동네거든, 뉴질랜드에 있는 웰링턴은 짝퉁이라구-가 내려졌으니 그가 상심할 법도 하지.

 

  그의 뒷담을 까느라 제대로 분석을 못한 거 같은데 전장에서만큼은 그는 꽤나 뛰어난 지휘관이었어. 적어도 영군국의 강점을 가장 잘 살리고 약점을 가장 잘 숨기는 스타일을 가졌지. 공세에 있어서 센스가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비토리아 전투처럼 예외는 있지만-영국군 특유의 화력 집중-뒤에 설명할께-을 잘 살려 방어전을 잘했다고 해. 약간 띄어줬으니 다시 좀 더 까보자면, 그는 사병들을 굉장히 경멸했다고 해. 반쯤 사실이긴 하지만 자신의 병사들을 '술 마시러 입대한 벌레 같은 놈들'이라고 깠던 적도 있어. 그런 재수없는 놈이었지만 잘난 놈이었고 병사 개인은 벌레처럼 알아도 병력을 아낄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렇게까지 인기없는 스타일은 아니었대.

 

1.3.

 

  분량도 빡빡한데 프로이센 대빵 블뤼허 원수에 대한 설명은 생략할께. 간략하게 추리면 예전에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어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72살 먹은 노땅 할아버지야. 이상.

 

왕년에 한 성질 하셨을 것처럼 생긴 영감님.

 

  남은 분량은 역시 웰링턴을 까는데 쓰자구. 벨기에 전역에서 특히 워털루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존재 의의나 비중은 크지만 활약은 딱히 적을 게 없어. 왜냐면 웰링턴이 프로이센군은 워털루 전투 때 저녁 먹을때쯤 되어서 설렁설렁 나타났고 딱히 싸우지도 않았다고 공식 보고에 써 올렸기 때문이야. 대부분 워털루 전투 관련 서적들은 그걸 기본 사료로 삼고 있고. 근데 사실 최근 연구 결과는 프로이센군이 그보다 일찍 전투에 나타났고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는 쪽을 지지하고 있대. 근데 나한테는 그 자료들이 없고 그래서 딱히 프로이센 군에 대해 주절주절 쓸 꺼리도 없어. 결론은 웰링턴=소인배라는 거지.

 

2.

 

2.2.

 

  전술했다시피 영국 육군 장교진은 비교적 사회의 인간쓰레기들을 온전하게 보존해왔기 때문에 평균 이상의 무능함을 유지할 수 있었어.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 웰링턴은 꽤나 괜찮은 수준의 장교진을 휘하에 둘 수 있었어. 이는 지극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혹은 15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나름 검증이 된 애들이 가려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 유일한 예외가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가한 네델란드의 오렌지 공 정도일거야. 얘는 갓20살 넘긴 경험도 재능도 없지만 네델란드군의 총지휘관이었고 불운하게도 그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거덩. 한편 부사령관인 욱스브릿지 백작은 나름 뛰어난 지휘관이었는데 웰링턴과는 좀 껄쩍지근한 관계였어. 왜냐면 욱스브릿지가 웰링턴의 동생의 부인과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했던 전적이 있거덩.

 

뭐 야반도주 좀 하면 어때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웰링턴은 욱스브릿지를 볼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욱 치밀어올랐겠지만 그래도 나름 대인배였던 웰링턴은 욱스브릿지를 중용했어. 물론 대인배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인선권 자체가 웰링턴에게 없었으니까 별 수 없었겠지만. 한편 웰링턴 공작은 오렌지 공으로부터 지휘권을 어떻게든 뺏어내려고 공작을 펼치게 되지. 공작의 공작에 대한 공작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워털루 전투 때 웰링턴은 오렌지 공의 보병들에 대한 지휘권을 양도받게 돼. 결론적으로 벨기에 전역에서 영군군의 지휘부는 영국 육군 역사상 유래없이 비범한 상태였다는 거지.

 

2.1.

 

  반면 프랑스 대육군(grand armee)의 장교진은 뭐 당대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비범한 집단이었어. 철저하게 검증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지. 실력 위주의 승진이다보니 병사 출신 원수들도 여럿 있었다고 해. 다만 나폴레옹이 돌아온지 얼마 안된지라 많은 장군들이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어. 거기에 나폴레옹의 소인배적인 인선이 효율적인 인력 배치를 가로막게 돼.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폴레옹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람이거덩. 뭐 그래서 더 그렇겠지만 군사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높은 군사적 업적을 세우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더 나아가 군사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작풍을 군 조직 내에 심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 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미셸 네 원수. 생각해보면 전쟁에 피로나 공포를 느끼는게 정상인 거 같긴 하다.

 

  이번 벨기에 전역에서도 나폴레옹의 인선은 다분히 그러한 의도가 관철되었어. 그는 참모장으로 니콜라 술트, 좌익 지휘관으로 미셸 네, 우익 지휘관으로 엠마뉘엘 그루시가 임명한 거야. 술트는 참모장 경험도 거의 없는데다 몇 안되는 경험에서도 특별한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어. 오히려 야전 지휘관 타입이었던 그가 참모장을 맡게 된 것은 나폴레옹이 루이-가브리엘 쉬셰를 참모장으로 기용하기 꺼려했기 때문이야. 그의 많은 경험과 실적이 나폴레옹에게는 그의 입지를 위협할 라이벌로 보이게 한 것이겠지. 결국 쉬셰는 전역 내내 후방인 리옹에 배치되었어.

 

  미셸 네는 후대의 관련 학자들이 진단서라도 끊어본 것처럼 입을 모아 전투 피로증 환자였다고 입을 모으는 아저씨인데, 확실히 이번 전역 내내 그는 충동적인 격렬함과 무기력한 소심함의 양극단을 반복하게 돼. 네는 과감함과 용감 무쌍함이 인정되어 일개 기병 병사에서 프랑스군 원수까지 진급한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독자적인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할 전략적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어.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거 그를 배반하고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던 지휘관들을 포용하는 제스쳐를 취해야했고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네를 좌익 지휘관에 임명하게 돼.

 

  엠마뉘엘 그루시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으로 나폴레옹이 가장 마지막으로 임명한 원수야. 그런데 기병 외에 다른 병과와의 연계 작전의 경험이 없고, 더더군다나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하기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존적이었어. 뭐 나폴레옹은 그런 결점을 참 좋아했기 때문에 황제와 코드가 맞는 그루시는 중용되게 돼. 프로이센과 맞붙게 될 우익 지휘관으로 적합한 인물은 니콜라 다부 원수라고 다들 입을 모으는데, 이 사람은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지휘한 경험도 풍부하고 거기에 프로이센군을 여러차례 박살낸 전력도 있어. 물론 나폴레옹은 그를 파리에 국방장관으로 짱박아두게 돼. 이유야 뭐.

 

  결과적으로 당대 유럽 최강의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군 장교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다소 언밸런스한 선발이 결정되었어.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장교진은 우수하니까 다소 부적합한 인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넘치는 센스로 그들을 컨트롤하면 적당히 문제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그 판단에 의해 프랑스 장교진은 혁명 이후 두드러지게 부적절한 상태로 전역에 돌입하게 돼.

 

2.3.

 

  프로이센군이라... 뭐 여기서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라고 하려다 사족으로 좀 덧붙이면 프로이센은 옛날에 나폴레옹한테 대들다가 베를린까지 털리면서 크게 당한 적이 있어. 우울한 일이지만 나름 좋은 일이기도 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독일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크게 발흥했고, 정부를 구성하던 귀족들이 나폴레옹에 의해 깨진 덕에 신정부 구성을 상당부분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문호를 열 수밖에 없었지. 얘들이 나름 농노 해방도 하고 (물론 성과는 한심했지만) 군사 부분에 있어서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제도와 전략전술을 도입하게 돼. 이번 전역에서 프로이센군의 참모장을 맡은 그나이제나우가 그 주역 중 하나였지. 1815년의 프로이센 장교진은 무능한 봉건왕정군에서 근대 군대로 변신 중인 상태라고 해야될거야. 이 변신의 결과로 도출된 군사 전통과 장교진의 역량은 클라우제비츠에 의해 이론적으로, 보불전쟁과 양대 세계 대전을 통해 실천적으로 검증되게 될거야. 물론 1815년엔 딱히 그 성과라고 할만한 걸 보여줄 상황은 아니었어.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 저작권 수입이 신통찮았는지 창세기전에도 출연한 듯.

 

3.

 

3.3.

 

검은 제복의 프로이센군.

 

  아까도 말했지만 프로이센의 군개혁은 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어. 하지만 반쯤 프랑스의 지배권 안에 있었던 14년 이전까지는 대규모 군대를 둘 수 없었기도 했어. 나름 통박을 굴려서 예비군 체제를 도입하면서 동원력을 높이려고 노력해왔대. 1814년 나폴레옹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프로이센은 대규모 예비군 동원과 징병을 실시하였고 군의 양적 팽창을 도모하였고 결과 이번 원정에 12만의 나름 대군을 투입할 수 있었어.

 

  다만 질적으로는 급격한 양적 팽창 때문에 다소 장비면이나 훈련, 경험면에서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사명감에 활활 불타는 프랑스의 징집병들과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 프로이센의 부르주아 개혁은 굉장히 온건한 것이었고 농노 해방 등은 철저하게 융커(지방 지주)들의 이권을 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결정되었어. 봉건적 약취에서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은 농민들과 사실 농노에서 농민으로 바뀐 이름만 지키기 위해 총을 잡은 사람들의 사기 차이란 꽤나 큰 것이었지.

 

  더더군다나 독일 민족주의의 느린 성장은 당시 프로이센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 제후국 군대들의 신뢰도를 낮게 만들었어. 1814년에 이미 러시아 국경 출신의 고참병들이 집단 탈영한 적도 있고, 벨기에 전역이 시작될 즈음에는 라인 연합 출신의 1만명이 부대를 이탈하고 작센과 실레지아 병사 1만 4000명이 집단 항명으로 무장해제되는 등의 헤프닝이 연출되게 돼. 얘들이 프랑스처럼 국민국가의 군대로 결집하기까지는 보불전쟁과 독일 통일까지 기다려야할 거야. 봉건적 사회를 유지한 채 부르주아 혁명의 군사적 성과만을 거두려는 시도는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었던 셈이지.

 

3.2.

 

레드코트로 유명한 영국애들. 근데 아까 그림에서 색깔만 바꾼거 같기도 하고

 

  영국의 육군 장교들이 귀족과 부르주아 사회의 막장들을 모아놓았다면 일반 민중 중에서 상당한 말종들로 구성된 것이 영국 육군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유럽이 부르주아적 국민개병제와 짝퉁 징병제의 열풍으로 뜨거웠던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도 영국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육군을 유지해 왔어. 그러니까 건강한 노숙자들과 범죄자, 유랑 농민, 아일랜드 식민지 민중, 허위 광고에 속아서 전화한 삐리한 애들로 육군을 구성하고 걔들에게 푼돈과 술, 그리고 채찍질로 규율과 기강을 유지해 온 거지.

 

  채찍질을 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막장 군대였지만 그래도 나름 얘들은 강점들을 가지고 있었어. 사실 영국은 대규모 육군을 가질 필요가 없는 나라라서 소수정예의 육군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결과 얘들의 훈련 수준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준이었어. 당시 세계에서 실탄을 가지고 사격 훈련을 하는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다고 해. 프랑스의 경우 머스켓에 달아둔 부싯돌이 닳을 까봐 그것까지 빼서 사격 훈련을 한 걸 생각해보면 영국애들이 총을 쏴도 더 잘 쏠 거 같지 않아? 실제로 1분에 프랑스군이 2발 정도 쏠 때 얘들은 3발 정도 쐈다고 하니까. 더더군다나 채찍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얘들은 노련하고 적의 총검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하지않고 철저하게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당시 가장 잘나가던 자본주의 국가답지 않은 구시대적인 군사 패러다임, 이걸 당대최고의 경제력과 가장 야만적인 전근대성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거야.

 

  한편으로 영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건너온 애들과 당시 하노버 왕가의 영지였던 북독일 지방의 KGL(king's german legion)-얘들의 장교진은 유일하게 영국 군대에서 실적으로 진급했다고 해-및 동맹제후국들, 글고 네델란드와 벨기에 연합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부족한 규모를 늘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결과 다소 미덥지 않은 동맹국들-북독일 제후, 벨기에. 네델란드-과의 공동 행보는 피할 수 없었지. 이걸 보고 웰링턴은 '불명예스러운 군대'라고 투덜거렸다고 해.

 

3,1,

 

제국근위대 아저씨들. 프랑스 군복은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야. 요즘은 아니지만.

 

  설혹 워털루의 패전을 두고 당시 프랑스군에 정예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다들 죽어버리고 신병들이 대부분인 오합지졸만 남아있어서 나폴레옹이 결국 패했다 ...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랄까 좀 과장된 측면이 있는 얘기야. 나폴레옹 귀환 이후 조직된 프랑스군의 주력은 징집된 신병들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많은 고참병사들 역시 복귀하였고 포로로 가 있던 병사들 역시 나폴레옹 퇴위 후 귀환하였고 이들이 나폴레옹 육군의 정예인 제국근위대 재구성의 중심에 서게 돼. 나름 높은 숙련이 필요한 기병이나 포병의 경우, 모두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각각에 숫적/질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

 

  더더군다나 이번 원정군은 국적적으로 단일한 군대였고 프랑스 방위의 사명감에 기꺼이 징집된, 혹은 지원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어.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 사람들의 사기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고 아까 설명한 영국-프로이센 동맹군과 좋은 비교가 될 거야. 전반적으로 다소 훈련과 장비가 부족하긴했지만 전반적으로 나폴레옹이 지금까지 지휘해온 군대 중에 질적으로 꽤 높은 수준이었다고 평해야 할 거야.

 

  나폴레옹이 대담한 공격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지. 벨기에 전역에서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의 전체에 비하면 절반정도의 규모에 불과하지만 그 각각에 대해서는 양적/질적 우위는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둘의 협공만 당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다고 나폴레옹은 판단했고 사실 그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어.

 

워털루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