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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2)

 

bgm.

 

워털루 전투에 영국-네델란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스웨덴 출신 의용병, 알텐 백작 휘하의 영국 육군 3사단 소속의 팰트스코크 상병과 린스테드 하사,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군단 소속의 군악대원 앤더슨과 울바에우스는 전투 직후 우연하게 만나 함께 군가를 부르던 중 의기투합하여 4인조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과 웰링턴 사이의 애틋한 연심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데뷔하게 되는데 이후 waterloo 라고 이름붙여진 이 노래는 빈 체제의 반동에 얼어붙어 있던 유럽에 돌풍을 일으키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밴드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들의 군단장 이름의 앞 머리를 따서 대충 abba라고 붙였는데 이때까지는 이 이름이 전세계 롤러장에 불멸의 존재로 남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0.

 

  사실 나폴레옹이 엘바로 끌려나기까지 손놓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는 않았어. 러시아에서 완전히 깨진 이후 나폴레옹은 나름 통박을 굴리다가 옛날에 자코뱅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프랑스 국민들의 열광적으로 혁명적인 에너지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수호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던 거야. 그래서 나름 나폴레옹은 again 1793을 위해 창고에 처박아뒀던 라 마르세예즈-대혁명 때 겁나 히트를 쳤던 민중가요-cd를 틀고 방송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어. 그리고 인터넷에 알바를 풀어 의용군 모집을 독려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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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나폴레옹이 상심했을법 해. 반응은 보다시피 신통치 않았어. 하지만 15년 동안 나폴레옹은 언론을 통제하고 민중들의 손발을 묶고 부르주아들에게 수동적 복종만을 요구해 왔었거덩. 이제와서 나폴레옹은 이들의 자발성에 기대려했지만 얘들의 조직은 폐허만 남아있었고 활동가들은 정치범으로 빵에 가 있었지. 그 15년의 결실이 나폴레옹이 가장 바라지않던 형태로 돌아오게 된 거야. 혁명을 집어삼킨 나폴레옹은 결국 반혁명군에 의해 프랑스 남쪽에 있는 쥐콩만한 엘바섬으로 귀양가게 돼. 역사는 항상 칼같이 복수를 하니까.

 

1.

 

  나폴레옹의 엘바 생활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어. 대제국의 지배자가 쥐콩만한 섬에 처박혀서 인터넷 폐인 생활을 하려니 좀이 쑤시기도 하고, 프랑스 정부가 그의 연금을 떼먹고 지급하지 않은 것도 그의 상심을 더해 주었어. 아마 마누라와 자식을 볼 수 없게 된 것도 가족적인 코르시카 섬사람인 그를 상심하게 했을거야. 또 중년들이 많이들 그러하듯 비만과 탈모 문제 역시 그에게 깊은 고뇌를 주었을 법도 해. 자료 화면을 참고하자구.

 

아 빛나는 20대

 

  나폴레옹만 유쾌하지 않았던 건 아냐. 루이 18세가 돌아오면서 프랑스는 반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거야. 매각되지 않은 국유지들을 귀족과 교회에 되롤려야 한다는 제안은 농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공화국 출신 관료들과 장교들에 대한 푸대접은 부르주아들과 장교들의 빡을 돌게 하기에 충분했지. 하지만 나폴레옹 아래 15년 동안이나 썩은 탓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어. 이들은 나폴레옹이 돌아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던 거야. 나폴레옹은 젊을 때부터 제비꽃을 좋아했었대. (뭐 안어울리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상징인 제비꽃을 달고 다니기 시작해.

 

위기의 중년

 

  당연히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부르봉 왕가와 유렵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어, 뭐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꼽고 다니니까 좀 정신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뭣보담도 그 꽃이 얘들이 싫어해 마지않는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우울해진 얘들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에서 대서양의 아조레스 군도나 서인도제도, 혹은 서 아프리카의 절해 고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지를 변경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돼. 그 소식은 나폴레옹의 근심을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었고 이대로 가면 안되겠다는 위기 의식으로 발전해. 프랑스 정세도 나쁘지 않고 이대로 가면 정말 쪽박차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올르게 돼. 뭐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 홀가분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1815년 3월 1일.

 

2.

 

그레노블에서 나폴레옹을 막아선 프랑스 군대
하지만 각성한 나폴레옹의 강력한 눈빛 레이저 공격(←→→a+b)에
낙엽처럼 쓰러지는 수비대들
결국 수비대는 나폴레옹에게 집단 투항하게 되는데...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 그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잠시 고민해. 심야 우등을 타면 금방 파리로 갈 수 있었겠지만 우리의 나선생은 굳이 완행 열차를 타고 그것도 변두리를 빙빙 돌아가는 노선을 따라 파리로 올라가게 돼. 당장 파리로 가봤자 또라이 취급 당하고 엘바섬으로 택배에 넣어져 보내지거나 가까운 단두대를 이용하게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폴레옹은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파리의 정세가 변화하기를 기다리며 지역 유세를 겸해 파리로 느긋하게 올라가게 돼. 곳곳에서 주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고 그를 가로막는 수비대 앞으로 나아가 쏠테면 쏴봐 하고 겁도 없이 나서서 수비대를 집단 투항하게 하기도 하는 등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나폴레옹은 일군의 도망자 무리에서 돌아온 황제로 파리에 입성하게 돼.

 

인기 일간지, <르 모니퇴르> 1면 기사 표제

3/9 괴물 엘바섬 탈출

3/10 코르시카 식인귀, 주앙에 상륙

3/11 맹호, 가프에 나타나다

3/13 폭군, 리용에 있다

3/18 찬탈자, 60시간이면 수도에 도착

3/19 보나파르트, 무장군을 이끌고 전진 중

3/20 나폴레옹. 내일 파리 외곽에 도달

3/21 나폴레옹 황제 폐하, 지금 퐁텐블로궁에 계시다

 

  돌아온 나폴레옹은 당장 예상되는 동맹국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프랑스의 여력을 긁어모으기 시작해. 일단 민중들과 부르주아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은 기자들을 불러 음주운전하고 1년만에 복귀한 연예인마냥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거지.

 

  "안녕? 난 나폴레옹이라고 해.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지금까지 내가 안으로는 독재하고 밖으로는 다른 나라 침략한다고 네들이 고생한 거 다 알고 있어. 하지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서 잠시 깡촌에 있다보니, 아 지금까지 인생이 반성이 되더라구. 이제부터 의회도 소집하고 니들 하는말도 많이 들어주고 그럴께. 자코뱅파 공안탄압도 이제 작작하고 왕당파만 족칠테니까 사이좋게 지내자. 응? 정복 전쟁? 이제 안할거야. 힙합스타일로 가자구. 피-스"

 

  당시 이 아저씨가 하는 말에 얼마만큼 진정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다시 열광적으로 나폴레옹을 지지하기 시작해.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이제 반혁명을 막을 사람은 나폴레옹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자신들의 운명을 다른 누군가에게 일임한 무책임이 어떤 가혹한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프랑스 사람들은 지난 15년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던 거 같아. 뭐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지.

 

3.

 

  한편 나폴레옹이 토해놓은 유럽 영토를 재분배하기 위해 빈에 모인 유럽의 대가리들은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넋이 나가 있었어. 하지만 얘들은 재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불씨가 불길이 되기전에 파리로 몰려가서 다시한번 나폴레옹을 잡아 조져 버리기로 결심해. 동맹군은 나폴레옹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프랑스가 아닌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돼. 3월 25일의 일이야. 뭐 어떻게든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분리시키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모두가 군대를 끌고-대충 60만명 정도-몰려가서 한방 러쉬를 가자고 합의를 봤던 것이야.

 

플란더스의 개의 배경이 바로 벨기에야 ... 어?

 

  벨기에하면 파트라슈와 걔가 데리고 다니는 네로가 떠오르는 평화로운 동네가 흔히 연상되는데, 사실 역사적으로 그동네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아르덴 숲이라는 거대한 숲이 있어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거나 쌈박질하기엔 불편했다고 해. 반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던 벨기에는 탁트인 평원지대라서 교통도 편리하고 싸울만한 공터도 많고 농사도 잘되는 곳이라서 약탈하기에도 좋았대. 그래서 유럽의 깡패들은 군대를 이동시키거나 싸움을 하고 싶으면 벨기에를 자주 찾곤 했어. 이번에 이야기할 워털루도 그렇고 1, 2차 대전 때도 그랬듯이 벨기에는 인기 있는 전쟁터였어. 뭐랄까 유럽의 공설운동장이라고나 할까. 여튼 좀 살만하면 웬 미친놈들이 와서 멋대로 자고 가고 냉장고에 있는 걸 꺼내먹고, 가끔 싸운답시고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곤 했으니까 동네 사람들 입장에선 참 괴로웠을 거 같아.

 

  뭐 이때도 마찬가지라서 영국 애들과 프로이센 애들은 일단 결집지를 벨기에로 잡고 진군하기 시작해. 일단 모여서 여차하면 프랑스를 치고 뭣하면 오스트리아애들과 러시아애들을 기다리기로 하고 말야. 프랑스의 바로 면전인 벨기에에 22만명의 동맹국 군대가 자리를 깔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과연 프랑스에선 어떤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4,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평화 제안을 동맹국에게 했지만 당연히 씹혔어. 유럽의 봉건 왕국들에겐 부르주아 프랑스 존재 자체가 자국의 동요과 혁명을 유발하는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이었으니까. 유일한 예외인 영국도 자신들과 경쟁할 자본주의 국가가 대륙 유럽에 나타나길 그닥 원하지 않았고. 하지만 이 평화 제안의 거절은 나폴레옹에게 우리는 전쟁을 회피하려 했지만 부득이하게 방어 전쟁이 필요하다 ... 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가능하게 했고, 다시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징병이 시행되기 시작해.

 

  15년에 걸친 전쟁에 피폐해져 있던 프랑스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군다나 바로 2년여 전의 러시아에서의 처절한 궤멸을 생각하면 더 싸울 사람이 있냐 싶기도 해. 사실 0.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를 메꾸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대규모 징병 캠페인을 벌였다가 개쪽을 당했었거덩. 30만명을 목표로 영장을 날리고 방송차에 라 마르세예즈를 틀고 다니면서 홍보도 하고 했지만 12만명 정도밖에 못 모았던 우울한 과거가 있었단 얘기지. 하지만 봉건 반동의 쓴 맛을 살짝 본 프랑스 민중들의 지지덕에 1815년 6월경 나폴레옹은 국경 지대에 배치할 10만명에 즉각 움직일 수 있는 12만명, 그리고 파리로 소집 중인 12만명, 신병보충대에서 훈련을 받을 15만명 등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뽑아내는데 성공해.

 

  물론 보기에 그럴듯하기도 하고 실제 괜찮은 성과지만 결국 당장 나폴레옹이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건 6월 현재 상황에선 12만명 정도가 고작이었단 얘기야. 당장 벨기에에는 영국 애들과 프로이센 애들이 22만명이나 바글바글 거리고 있는데 말야. 7월이 되면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 역시 국경에 도착할 것이고 상황은 더 우울해 질 거 같았어. 이런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나폴레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의외로 나폴레옹의 선택은 12만 8000여명의 휘하 병력을 모두 모아서 벨기에를 향해 상브르 강을 건너는 것이었어. 22만명이 죽치고 있는 곳에 과감한 공격을 가기로 한 것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건 말이야 ...

 

 

예고.

 

베일을 벗는 전설의 스카치 테이프, 아니 댄스

 

  상브르 강을 건너 웰링턴과 대치하게된 나폴레옹. 웰링턴은 나폴레옹에게 댄스 배틀을 제안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 치마 입은 아저씨들이 펼치는 압도적인 스코틀랜드 폴크 댄스에 맞선 나폴레옹의 선택은? 과연 제국근위대는 캉캉 댄스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워털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