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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의 봉건제 (1)

Crusader Kings(paradox)

 

  때로는 책 한권을 보는 것보다 잘 만든 게임 하나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패러독스의 게임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독스는 역사 전략 게임만 줄창 만드는 회사인데 (융통성 없는 코에이 정도랄까) 절대왕정/자본주의 이행기를 다룬 EU(europa universalis)시리즈, 국민국가 성립/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을 다룬 빅토리아, 2차 세계대전 및 냉전을 다룬 hoi(hearts of iron)시리즈 등 매니아 취향의 게임을 만들어왔다. 여기서 소개할 CK(Crusader Kings)는 이름 그대로 십자군 전쟁기의 유럽, 북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

 

  게임 하나 소개하는데 거창하게 책 한권 운운한 것은 패러독스의 섬세한 표현력 때문이다. 가령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나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상이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일꾼 유닛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유닛을 생산, 개개 유닛을 컨트롤 하여 전투를 한다’라는 게임의 기본 구성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패러독스의 게임들은 얼핏 보기에는 굉장히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시리즈별로 내정, 인사, 전쟁, 외교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며 그 차이를 통해 각 시대의 고유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전략 게임과 차별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상이한 시대를 화석화된 설명이 아닌 생생한 상호작용으로 체감시켜 준다.

 

신성 로마 제국. 짙은 녹색이 직할지, 옅은 녹색이 직속 봉신들, 옅은 청록색이 휘하 공작령에 속해 있는 백작령들이다.

 

쌍무적 계약관계에 의한 계서적 질서

 

  역사책 중세 파트를 읽다보면 이런 겁나게 어려워 보이는 말들이 튀어나와서 사람을 당황시키곤 한다.쉽게 말해서 지배 계급들 사이에 1. 서열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고 2. 그것이 관료제나 부족 회의 등의 형태가 아닌 1:1의 계약 관계에 의해 매개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서대문구왕은 연희동 공작에게 세금을 받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를 다른 영주의 공격에서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계약을 맺었고, 연희동 공작은 같은 계약을 굴다리 백작과 맺었다고 하자. 이런 것들이 중첩되다 보면

 

                                                                        서대문구 왕

                               +----------------------------------------+--------------------------+-------------------------+

                      연희동 공작                                   아현동 공작               독립문 백작              충정로 백작

             +---------------+--------------+                            +--------------+

로타리자치시   굴다리 백작 연희1동 백작      애오개 백작 북아현 백작

 

와 같은 피라미드가 나오게 된다. 얼핏 보기에는 관료제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관료제와는 몇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데 일단 이것은 느슨한 계약 관계이다. ‘계약에 따라’ 서대문구왕은 자신이 가진 직할지에 대한 내정통제권만을 가진다. 군무 역시 마찬가지인데 군사 양성에 관련해서 봉신들의 영토에 개입할 수 없다. 다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나 지휘관을 선임할 수는 없으며 더군다나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봉신들이 꼭 동원령을 들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마찬가지로 하급자가 전쟁을 한다고 해서 상급자가 개입해 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더더군다나 각 봉신들은 독립된 외교권한을 가지며 타국과 동맹을 맺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인사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각 영지의 관리의 선임권은 물론이거니와 서대문구왕이 굴다리 백작이 맘에 안 든다고 해서 그의 작위를 박탈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연희동 공작의 권한이므로.

 

  이 불편하고 애매한 게임 방식이 이 시리즈를 여타 패러독스 게임이나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와 구별시켜 준다. 일정 이상의 직할지는 통제할 수 없고 따라서 봉신을 둘 수밖에 없으며 이 봉신들은 독자적인 이해를 가지고 허술한 통제권 경계에서 뛰어논다. 중세 역사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봉신들의 동원령 거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독립과 반란, 주군(主君)인 프랑스 국왕의 눈치에 아랑곳 않고 잠재 적국인 영국왕과 동맹을 맺는 플랑드르 도시들과 같은 유형의 외교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책을 볼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직접 당해보면 당시 지배계급의 아픔과 배반감이 뼛속까지 전해진다.)

 

약탈 명령에 대한 설명. 설명이 살벌하다.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잉여 수취/계급투쟁

 

  경제외적 강제는 생산 양식으로서의 봉건제를 규정하는 핵심이다. 같은 회사에서 나온 빅토리아가 각지역의 특산물에서 공장에서 나오는 생산물 하나하나까지 통제하는 반면 CK에서는 기본적으로 생산 과정에 플레이어(지배계급)가 개입할 부분은 거의 없다. 가끔 생산에 도움이 될 법한 건물을 짓고 세금을 더 거두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인 생산 혁신들은 매우 느리고 제한된 형태로 직접 생산자들에 의해 추동되고 영주는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영지의 가을걷이에 대해 세금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뿌리까지 탈탈 털어 약탈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의 여지가 있을 뿐이다. 전략적 자원이나 산업 연관 관계까지 고민해야 하는 (자본주의를 다루고 있는) 다른 시리즈와는 달리 이 게임에서 확인할 것은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양 정도이다.

 

  실제로 봉건 귀족의 궁정에서 쓰이는 언어와 농노들이 쓰는 언어, 도시민들이 쓰는 언어는 달랐다고 한다. 우리가 이 게임을 하면서 직접 생산자들에게 가지는 관심만큼이나 실제 봉건 지배 계급의 관심은 가벼웠다. 당시 생산력이 그토록 비참한 수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정체한 이유와 부르주아 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생산 혁신의 비밀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게 해준다.

 

  세금은 농민/도시민/성직자/귀족에게서 다른 비율로 거둘 수 있고 세금을 가볍게 할수록 그 분파의 영향력 군대 내에서의 구성비가 상승한다. 딱히 농민이나 도시민의 영향력을 강하게 해준다고 부르주아 혁명이 유발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이행기를 다루고 있는 EU나 빅토리아에 비교해서 이 게임의 계급 간 갈등과 투쟁은 정적이며 기계적이다. 반작용이 없기에 최대한 귀족과 성직자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기사 등 고급 병과를 뽑아내고 귀족 내의 평판이나 교회에 대한 평판을 개선시키는 편이 낫다. 플레이어가 공화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이 게임을 하다보면 삼부회를 해산시키려던 루이 16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 파트에서는 민족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사회상이 게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그리고 게임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그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살리카 법으로 대표되는 상속 체계, 이 게임의 주요한 테마인 십자군 전쟁을 유럽 내부의 전쟁과 비교할 것이다. 그나저나 게임 하나에 파트까지 나눠 가며 난 뭘 하고 있는 건가 ...

 

여담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의 화면. 아래로 그의 부모 형제, 유명한 그의 부인인 여전사 시켈가이타, 보에몽을 비롯한 자녀들이 보인다. 당시 수많은 유럽 귀족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구현한 것만으로도 이 게임은 매니아들에게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유럽판 삼국지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