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범죄

분류없음 2016/05/20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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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현지 시간으로 6월 2일) 경찰의 공식 (?) 발표를 보게 됐다. 예상한대로 정신질환에 따른 "묻지마 범죄 (random crime)" 로 가닥을 잡는 듯한데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말인즉슨 정신질환에 따른 것이니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니만큼 일반적인 살인범죄, 증오살인 범죄 (이 경우 가중처벌하는 것이 상례이나 한국에는 아직 증오범죄가 크리미널 코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웃긴 것은 "묻지마 범죄" 도 크리미널 코드에 없다는 것) 와는 달리 살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물을 수 없다. 양형의 근거로 쓰일 것이다. 경찰 스스로 검찰에 송치하면서 이의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면 역으로 정신질환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된다. 

 

앞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여성혐오 (밋쏘지니, misogyny) 범죄, 이주노동자와 비백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외국인혐오 (제노포비아, xenophobia) 범죄,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호모포비아 범죄, 그 외에 소아성애 범죄 등 사회적 소수자를 핍박하는 범죄들은 죄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일 가능성, "묻지마 범죄"일 가능성, 개인(들) 일탈일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졌다. 사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경찰의, 행정당국의 행보가 그럴 것 같다는 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updated on June 2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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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께 명복을. 가족들과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모든 희생자들-생존자들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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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기사에 따르면 2008, 2011, 2013, 그리고 2015년에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전한다. 입원 기간도 한 달에서 6개월 등 각각 한 달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기준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 곳 캐나다에서 조현병 (schizophrenia) 으로 위와 같은 입원치료 기록을 보이는 사례는 중증에 해당한다. 중증이라 함은 "각별한 치료"를 요한다는 말이다. "각별한 치료"의 내용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정기적으로 의학적 치료를 받고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에서부터 아예 보호감호소로 이송하여 신체적 자유를 제한당하는 케이스까지 다양하다. 물론 어떠한 의학적 치료도 받지 않고 침술 등의 대안치료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커뮤니티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가해자는, 기사에 나온 것으로 볼 때 망상조현 (Paranoid schizophrenia) 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망상은 조현증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다. 영화 "뷰티풀마인드" 로 잘 알려진 존 내쉬,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면서 방송국에 난입한 어떤 사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으로 예를 든다면 대표적으론 딱 두 사람이 떠오른다. 꽃개는 의학적 전문가도 아니고 정신질환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망상조현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이 사건의 가해자는 너무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이 가해자는 사건을 "준비" 했다. 미리 회칼을 훔치고 화장실에 들어가 한시간이 넘도록 기다렸다. 칼과 같은 무기를 소지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중증의 망상조현 질환자들 가운데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 외계인이나, CIA-외부의 지령을 받은 타인이 자신을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이유없이 먼저 공격하거나 타인의 신체, 재물을 손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가다 망상조현 질환자들/범죄피의자의 가방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물건들이 (예를 들면 워키토키 무전기) 발견된다. 이유를 물으면 모두들 자신을 방어해줄 물건이라고 답한다. 선제공격용으로 무기를 준비하는 경우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 시간 이상 불특정-대상을 기다렸다는 부분이다. 한 시간 (60분) 은 정신질환을 앓지 않는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60분 동안 밀폐된 장소에서 무기를 들고 대기하는 일, 그것도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을 "공격" 하기 위해 기다린다? 망상조현 질환자들이 가해자로 연루된 어떤 사건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보지 못했다. 만약, 가해자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어떤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 여성이 가해자를 공격할 것 같아, 혹은 그 여성의 얼굴이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의 얼굴과 같았다는 착란으로 칼로 찔렀다, 고 하면 망상조현을 참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불특정 개인을 밀폐된 화장실에서 60분 이상 기다렸다가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보편적인 망상조현 형사범죄 케이스를 훌쩍 넘어서는 대단히 의외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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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링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가해자의 정신감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범죄를 저지른 그 순간의 행위가 형사범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인지 (Non Criminally Responsible) 아니면 망상조현 이외의 다른 정신질환 때문인지 밝힐 수 있는 한 밝혀야 한다. 망상조현 질환자들이 사람을 막무가내로 죽일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로 알려져서는 곤란하고 이런 식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스티그마가 강화되서도 안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해자가 이미 진술한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여성을 죽였다, 는 말. 이 범죄의 성격을 가장 잘 정리해주는 말이다. 혐오범죄. 그 중에서도 여성혐오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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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원인을 "정신질환"으로 돌리면 차후 처리는 간단하다. 정신병환자 한 명의 일탈로 원인을 삼으면 그 한 사람만 처벌하면 되고 피해자 또한 "재수가 없었다" 따위로 퉁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혐오범죄로 원인을 삼으면 사후 처리가 복잡하고 담당자들이 고달퍼진다. 사회의 책임으로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 혐오범죄의 사례가 있는지, 형사범죄 케이스와 법적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차별철폐법도 수립할 수 없는 나라에 혐오범죄 케이스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이명박그녜 전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나라였으니 있을 수도 있겠다는 간절함. 찾아봐야겠다. 

 

 

 

 

 

2016/05/20 03:50 2016/05/20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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