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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오늘(9.15) 케렌스키,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 선언

1917년 러시아 혁명 지도자 케렌스키가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짜르 체제를 타도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온건 사회주의자'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과정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짜르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화파,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주의자 순으로 권력이 차례 차례 넘어가고 그 다음에 마침내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천하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2월 혁명에 대해 잠깐 되짚어 보도록하자. 1917년 일차대전 중 페테스부르크는 러시아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군대 집결지였다. 식량난과 연료난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1917년 2월 14일 국회로 시위 행진 할 것을 결의했다. 볼셰비키등의 반대로 그 행진은 무산되었으나 마침내 23일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하고 남성노동자들도 흐응했다. 25일에는 파업이 전역으로 확산되고 26일에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있었으며 마침내 27일 노동자들의 아들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감옥의 정치범들을 해방시켰으며 병사와 해방된 정치범들이 페테스부르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한 것이다.

 

정부는 진압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그 부대는 출동중에 소멸되 버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의회가 혁명을 대표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노동자대표와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소비에트 결성회의를 여는 것을 보고 잽싸게 국회임시위원회의 권력장악을 선포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민중들의 손에 들어가는 걸 불안해 하고 어떻게든 체제내화 하려는 작자들이 있는 법인게다.

 

이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희한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따를 것을 천명했으나 관리와 장교는 국회 임시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계속 진행을 외치는 국회임시위원회(관리와 장교도 포함)와 침략반대를 내건 병사들은 충돌했고 이 때 레닌이 귀국했고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소비에트는 비로소 정권 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멘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참가해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육해군 장관을 맡고 있던 케렌스키는 황당하게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전선에서의 공세를 준비하려 했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뭉쳤다. 멘셰비키가 이 민중들을 비난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민중들은 연립의 중단과 소비에트 권력의 실현을 요구하며 무장시위를 감행하기 이르렀고 멘셰비키는 이에 볼셰비키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레닌은 다시 지하로 스며들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케렌스키는 전쟁의 공세 수준을 높였고 열린정부 수반 자리를 꿰차기 까지 했다. 엎친데 덮친다고 군사령관 코르닐로프는 군사독재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역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를 저지시켰다.

 

지지 기반을 찾아 헤메이던 케렌스키는 9월에 민주주의파 회의를 열어 이른바 예비 의회를 발족시켰고 3차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연립 정부가 15일에 임시정부 수준을 벗어나 러시아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1917년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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