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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오늘(9.19)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 쿠테타로 실각

 

1955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이 쿠테타로 실각하고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1943년 대령신분으로 쿠테타에 성공해 노동, 사회복지 장관을 거쳐 46년 첫 번째로 대통령 직에 오른 페론은 55년 쿠테타로 실각했으나 73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집권했다.


우리나라에선 뻑하면 남미병 남미병 하면서 데모하면, 노조가 날뛰면 남미꼴 난다고 아무데다(심지어 노무현한테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한 때를 풍미했던  빨갱이 딱지의 시대가 가고 포퓰리즘 딱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특히 아르헨티나를 콕 집어 지적하며 후안 페론의 페론주의와 포퓰리즘 때문에 개판 난 나라라고 헐뜯는다. 과연 페로니즘이 그렇게 나쁜걸까?


모두가 인정하듯 30년대 아르헨티나는 농축산업에 힘입어 세계 7대 부국으로 까지 불렸고 잘 나가는 나라였다. 근데 왜 민중들의 분노는 들끓었으며 페론의 쿠테타가 성공했을까?

페론집권당시 아르헨티나는 참으로 왜곡된 토지소유구조를 지닌 나라였다. (물론 남미 대부분이 그러하지만..아시아 권에서 찾아보면 필리핀이 대표적인 경우고..이런 점에서 볼때 한국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온존해온 것은 해방직후 농지개혁에 힘입은 바가 큰 것 같다.) 극소수가 대부분의 토지와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상류층은 자신들의 조상 나라인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를 모국으로 생각하며 제 나라 민중들은 인간 취급조차 안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밑바탕에서 페론의 쿠테타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지주과두제의 시스템을 혁파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과 정책이 포퓰리즘이었던 것이다.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욕구가 표출되고 정부가 일정부분을 수렴해낸 것 그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만일 아르헨티나에서 페론과 포퓰리즘이 없었다면 지금 그 나라는 어떤 형국일까? 내 생각엔 콜롬비아 비슷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약 카르텔들이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페론집권기를 한 번 짚어보자. 페론집권기에 아르헨티나 국민 총생산은 127퍼센트, 개인소득은 232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역사상 최대의 산업투자를 했으며 농업 일색이었던 산업구조를 공업과 농업 양날개 체제로 재편했으며 기간산업을 국유화 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인구의 60%를 차지했던 극빈 민중들이 페론 집권기를 통해 국부의 33%를 거머쥐게 되었다.물론 이 과정에서 토호 및 제국주의적 해외자본과 마찰이 있었고 그들이 결국 군부를 움직여 쿠테타를 일으켜 페론의 일차 실각을 가져 온 것이다. 페론이 사망해 재집권이 끝난후에는 군부가 장기집권했다. 칠레 피노체트 좋아하는 작자들은 아르헨티나 군부도 칭찬한다. 국민들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을 해냈다고....그 경제 개혁이 바로 무제한 개방과 포퓰리즘에 대한  배신이었다. 외채, 빈부격차로 상징되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해악은 그 군부집권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뿐인가?


민가협 엄마들이 쓰는 보랏빛 머릿수건은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군사독재 희생자 엄마 들이 쓰고 나와 진상규명을 외치던 그 머릿수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퓰리즘과 페로니즘을 치유하겠다던 독재자들은 ‘국가전복 사범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 고문, 투옥했으며 심지어 그 희생자들의 자녀들을 불법적으로 다른 집안에 강제입양시키기 까지 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아르헨티니 민주화가 진행됐을 때 자신은 군인의 딸인줄 알았던 한 여성이 사실은 고문 희생자의 딸이며 불임한 군인에게 강제로 입양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실화에 바탕한 영화도 있었다.


에..이야기가 중구난방인데 페론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여성이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라는 유언으로 전 민중을 울린 에바 페론(이하 에비타)이다. 하긴 뭐 육영수씨 죽었을때도 우리나라 민중들은 눈물 많이 흘렸다 그러더라만--;; 심지어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도 자기를 필리핀의 에비타라 그랬다나 뭐라나. 그러나 에비타는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다. 에비타는 페론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노동조건 개선, 남녀평등, 공공 의료의 확충을 위해 몸소 뛰었던 한 사람의 정치인이다. (물론 옷이랑 신발 같은건 좀 비싼거 입었던 거 같더라. 근데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그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나? 자신들의 힘으로 잡은 권력이 아니라 아바타를 통한 혁명일 때 이런 현상은 보편적인 듯 하다.)

 사생아 출신의 무명배우 에비타는 1944년 난민구제모금 행사에서 당시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처음 만났단다. 근데 한참 연애 하고 있던 (나이차이는 좀 나지만) 도중에 후안 페론의 대중적 인기를 우려한 군부가 페론을 투옥시켜버렸다. 우리의 에비타가 이 때 나선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들 앞에서 ‘당신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 페론이냐? 다른 군부냐?’고 외쳤고 노조와 민중들은 총파업으로 화답했다. 27세에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비타는 안타깝게도 33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쩌면 페론의 실각을 보지 못했으니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비타, 체 게바라 어쩌면 리버 피닉스나 커트 코베인까지--;; 젊어서 요절 했기 때문에 이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아 아직도 추앙받는지도 모르겠다.


참 마돈나가 나온 영화 에비타는 영 ~ 파이더라.


 에바 페론과 도밍고 페론 커플.

 

첨언: 한글 폰트가 안 써져서 한글2002열어놓고 써서 복사해 붙이는데 자간, 장평이 지 맘대로다 어떻게 고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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