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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오늘(9.22) 삼성 회장 이병철 (주)한비 국가에 헌납,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선언

 

1966년 9월 22일 당시 삼성 회장 이병철은 (주)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같은 날 국회에선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나는 야인이 될꼬야~’ 라며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똥물^^을 정일권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에게 선사했다.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이었다. (주)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사카린(당시 사카린은 돈 덩어리였다고 한다.)을 밀수했고 그 와중에 중앙정보부와 정부가 연루되어 같이 돈을 챙겼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고급 사치품인 양변기--;; 같은 물건도 꼽싸리로 밀수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삼성의 후계구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사건 이후 이병철이 잠깐 전면에서 물러서고 이병철의 장자인 이맹희가 사업 전면에 나섰으나 너무 나대고 아버지를 무시했는지 몰라도 결국 팽 당해서(어 김두한도 야인인데...)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현재 CJ그룹 회장 이재현이 바로 이맹희의 큰 아들이다.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셋째 아들 이건희가 이병철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2세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아들은 이창희 인데..새한 그룹 창업주이다. 지금 새한은 거의 거덜나다 시피 했지만 한 때는 비디오 테잎 같은거 팔아서 돈 좀 벌었다.)


이병철이 손을 뗀 매스컴과 학원 사업은 도대체 뭘까? 일단 학원 사업,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대구대학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 있는 대구대학하고는 좀 다르다. 당시 청구대학과 이병철이 물러난 이 대구대학이 합병되어 영남대학이 만들어졌다. 이 대구대학은 지금도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의(십대가 만석지기였다는 그 부잣집. 가훈으론 이런게 전해진다고 한다.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마라, 백리 이내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엔 절대 땅을 늘리지 마라 등등) 마지막 부자 최준이 해방직후 설립한 대학인데 최준이 재산을 설립에 다 쓸어넣은 바람에 유지하기가 힘들어 이병철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벌써 청구대학을 꿀꺽한 박정희는 대구대학까지 합쳐서 영남대학을 만들어 한방에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매스컴 사업은? 공교롭게도 이 때로부터 딱 일년전인 1965년 9월 22일 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 중앙일보의 경영은 홍진기가 맡았고(홍진기는 이병철의 사돈이다. 이건희의 장인이며 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아버지다. 홍진기는 일제때 판사를 지냈다. 그 때 얻은 딸이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다. 해방 이후에도 당연히 승승장구하여 자유당 말기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기는 315 부정선거와 419당시 학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으나 홍진기는 아주 짧은 옥살이를 끝내고 이병철에게 픽업된다. 친일하면 삼대가 잘 산다라는걸 온 몸으로 증명하는 집안이다.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는 지금 검사장을 지내고 있다.) 중앙일보 뿐 아니라 나중에 ‘전 두환이라고 해요, 두발이 없다는 뜻이죠, 환장하겠어요,’ 에 의해 KBS2 방송으로 통합되어 버린 TBC 동양방송 또한 이 때 이병철이 소유하고 있던 매스컴이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5공이  잘한게 이 거 아닌가 싶다. 지금 SBS 꼬라지만 봐도 갑갑한데 만일 TBC 까지 살아남아 있고 그거랑 중앙일보가 여전히 삼성 그늘에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 삼성은 중동고와 성균관 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이병철의 모교인 중동고를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하려고 지속적으로 모색중이다.  삼성의 성균관 대학 소유 이후에 삼성이 성대를 어떻게 컨트롤 하고 있는가를 알리는 문서를 총학생회에서 폭로했으나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총학생회를 비난했다 . 그 이후 이른바 ‘비권’(성대사랑)이 총학생회를 계속 수권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수많은 잡지들과 케이블 티비 채널 두개(큐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을 가지고 있으며 굴지의 출판사 (중앙 랜덤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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