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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유조, 『중국의 충격』 발췌

미조구치 유조, 『중국의 충격』 부록 "역사서술의 의도와 객관성"에서 발췌.

 

뒤집어 말하면, 민중의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역사의 내재적인 힘이 유교에 있어서 주자학으로부터 양명학과 신주자학 그리고 예교로 이어지는 광경의 변화를 낳게 한 동력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추론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요컨대 민중의 정치참여라는 '역사적 동력'이 시간의 질적 내용의 하나로 추출된 것이다. 205쪽.

 

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역사가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요구된다. 그것은 그 허구적인 세계를 감지할 수 있는 역사적 직관력과 감성이다. 206쪽.

 

그러나 실제로는 종족제를 실리적으로 지탱해왔던 상호부조의 통념이나 시스템은, 마오쩌둥 혁명에 의해 종족제가 타도된 후에도 중국 사회주의의 사회윤리·시스템으로서 모습을 바꾸어 계속되었다. 결국 여기에서 역사의 질은 상호부조 시스템의 변화태로서 추출되고, 역사의 동력은 그 시스템의 지속과 변화를 지향해왔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반봉건=반종법이라는 중국 근대의 부분상은 그 동력으로부터 유리되었기 때문에, 전체상으로부터 어떤 왜곡을 면할 수 없었다. 208쪽.

 

마르크스주의적인 연구에서 소위 법칙성에 의거할 때, 그 서술은 법칙에 따른 객관적 의도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그 법칙성이 중국의 역사에서 추출된 것이 아니고, 다시 말해, 중국의 내부에서 떠올랐던, 중국의 내부에 원래 존재한 구도가 아니어서 중국의 역사적 실태와 맞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에 근거한 역사서술은 중국에 있어서 '법칙'이라는 이름의 주관을 강압하는 것이다. (중략) 즉 그 대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내부의 맥락을 무시하고 밖으로부터 힘을 주어 그 대상을 재단하는 것은 객관을 무시한 주관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 209쪽.

 

아울러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경우 유교(왕조의 전통)를 봉건 유물로 간주하는 관념은 소위 '서양의 충격'에 따른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생겨난 위기감의 산물로서, 그 위기의식의 관념 자체는 언설의 형태로 문헌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어서 청말민국시기 지식인의 위기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해도 결코 중국 자체의 객관적인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상의 구도는 이중의 의미에서 '외래'적이다. 하나는 지식인의 역사관이 유럽 근대의 구도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처럼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상을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210쪽.

 

민감한 지식인이 위기감을 느껴, "사람을 잡아먹는 예교"라고 절규하는 사이에도, 명말청초 이래 두드러지기 시작한 민중의 정치의식은 청말민국시기에도 계속 성장하고 있었고, 거시적으로 보아 이후의 국민혁명과 공산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다시 말해, 청대에 성장한 '민간' 사회의 기초 없이는 민국시기의 혁명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11쪽.

 

'원래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역사가는 자신의 눈을 모든 의도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목적의식이나 의도를 버리고 문헌을 꼼꼼히 읽어가고 그것을 반복한다면, 처음에는 어렴풋이 머리에 떠올랐던 '무엇인가'가, 빠르면 두 번째에는 문헌 속에서부터 어떤 영상이 떠오른다. 214쪽.

 

지금까지 한편으로는 '원래의 모습'의 발굴이라는 의도를 말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의도 없음' '무심함'의 역사의 여행을 얘기해 왔다. 여기서 확인해둘 것은 '원래의 모습'을 발굴하는 '의도'라는 것도 실은 있어서는 안 되고 있더라도 방해가 될 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215쪽.

 

'원래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본래 과거의 무언가로서 고정될 수 없고 혹은 고정물로서 객관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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