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남본 홍루몽을 읽기 시작하다 - 제1권의 교정과 편집 (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379쪽 15~17번째 줄
* “보옥은 향주머니가 아직 완성은 안 되었지만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고 있었고 정성을 잔뜩 들이고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속절없이 가위질된 것을 보고 오히려 은근히 부아가 돋았다”라는 문장은 사동과 피동이 일관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대단히 정교하게” 만드는 주체인 ‘대옥이’가 생략되었고, 뒤에 “가위질”되는 대상인 향주머니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기에 역시 생략된 문장입니다. 그래서 두 군데나 생략이 되다 보니 사동과 피동이 엉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경우 적당한 곳에 쉼표를 넣어주는 게 좋습니다. 딱히 오역도 아니고 문맥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사동과 피동이 일관되고 문장 성분의 생략이 가급적 적어야 이해하기 좋고 매끄러운 문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학 전공자들이 오히려 문장이 더 안 좋은 개인적 경험이 여럿 있어서 예민해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380쪽 13번째 줄
* “대옥이 입을 내밀고 뾰로통하여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안쪽을 향해 눈물을 닦았다”라는 문장에서 “안쪽”이 무엇의 ‘안쪽’인지 도무지 연상이 안 됩니다. “벌렁 드러누워”라는 표현에서 대옥이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있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렇다면 “안쪽을 향해 눈물을 닦는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역시 원문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어에서 성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별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사고체계와 문화를 반영하기에 글자의 뜻을 옮긴다고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성조는 그 다음 문제지요. 물론 이런 문제는 어느 언어라도 번역을 할라치면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383쪽 밑에서 11번째 줄
붉은붓으로 황제의 비준이 내려왔는데 - 붉은 글씨로 쓴 황제의 비준이 내려왔는데
390쪽 4번째 줄
없는가요? - 없는 건가요?, 또는 없나요?
395쪽 8번째 줄
* 원춘이 귀비가 되어 가부에 와서 대관원 낙성연을 하는 대목에서 시를 한 수 짓고는 “아름다운 경치를 마주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이 잠시 한두 글자 적어본 것이야”라고 말하는데, 이때 “지나칠 수 없이”가 문법적으로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한국어에서 이런 경우 보통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라고 해야 매끄럽습니다.
402쪽 밑에서 6번째 줄
길경유여(吉慶有魚) - 길경유여(吉慶有餘)
* 한자가 틀렸고, 그 독음도 틀렸습니다.
425쪽 밑에서 7번째 줄
주머니 속에 넣은 - 주머니 속에 넣는
* 보옥이 대옥에게서 나는 좋은 향이 주머니에 흔히 넣어두는 향과 다르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문맥상 후자가 맞습니다.
428쪽 14번째 줄
어린 어린 생쥐 – 어린 생쥐
429쪽 2번째 줄
과일 이름이 향우라는 건 알아도 - 뿌리 이름이 향우라는 건 알아도
* 향우는 토란으로 과일이라 할 수는 없죠. 구근류이므로 뿌리라고 해야 맞을 텐데, 저본에는 무슨 글자가 쓰였는지 궁금하군요. 토란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본초 인식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과일이라는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저자가 토란을 과일로 안 것인지, 가보옥이 토란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임을 나타내려 저자가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인지, 아니면 역자들이 저본의 글자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건지, 아니면 잘못 번역한 것인지 머리를 갸웃거리게 되는군요. 흔히 식물이나 동물, 색깔, 질병, 자연 현상 등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문화마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인식론에 기초하여 서로 다른 분류 체계로 그것들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번역어를 고르기 전에 매우 신중해야 하고, 가급적 오늘날의 국제 표준 명칭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식물의 경우 한국 안에서조차 지방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과 약초로서의 이름, 그리고 국제 표준의 식물학적 명칭이 또 다릅니다. 하물며 250년 전 중국 극상류층 사람의 머릿속을 이해하면서 당시의 시대상과 삶의 전반을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역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역자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함과 동시에 원작의 세계에 더욱 잘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만큼 깊은 교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435쪽 밑에서 8번째 줄
남한테서 큰 소리가 나도 나서서 말리셔야 - 남한테서 큰소리가 나도 나서서 말리셔야
* 여기서는 소리 자체가 크다는 뜻이 아니라 다투는 소리를 말하는 관용어이므로 ‘큰소리’와 같이 붙여써야 합니다.
446쪽 밑에서 5번째 줄
보옥이 나서 말리면서 대옥을 나무랐다 - 보옥이 나서서 말리며 대옥을 나무랐다
* 후자가 좀 더 입에 붙고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 작품 자체가 구어체로 쓰여졌기에 그에 맞춰 보다 생동감 있게 번역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457쪽 17번째 줄
강녕직조에서 귀공자로 태어났다 - 강녕에서 귀공자로 태어났다
* 강녕직조는 관청명이자, 관직명입니다. 명대에 강녕(남경)ㆍ소주ㆍ항주 등지에 있던 직조국 3곳을 청 왕조가 계승하였는데, 이를 ‘강남삼직조’라 합니다. 직조란 황실과 관청에 소용되는 물자를 조달하는 기구이니 지금의 조달청에 해당합니다. 문자 그대로 비단을 비롯한 옷감들을 주로 지어 바치는 것이 소임이었는데, 예로부터 양자강 이남에서 양잠이 크게 성행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여사잠도>를 그린 고개지가 괜히 강소 무석 사람이 아니죠. 당시 강녕직조가 있던 곳은 원래는 명대 초기에 한왕부가 들어서 있던 자리였습니다. 당시 수도가 남경이었는데 바로 그 지역의 왕부인 것을 감안하면 그 위세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관청이 크고 그 관사 또한 무척 넓었을 테니 강녕직조서(暑)에서 태어났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강녕직조를 관직명으로 보아 강녕직조의 귀공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역시 말이 됩니다. 어느 경우든 저 번역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옛 강녕직조 자리는 민국 시기에 남경 국민당 정부의 총독부이기도 했습니다.
468쪽 16번째 줄
가보옥과는 사촌지간이고 - 가보옥과는 8촌지간이고
* 계촌을 할 줄 모르는 요즘 세대를 위한 번역이라 볼 수 있을까요?
471쪽 밑에서 8번째 줄
가모의 질녀로 - 가모의 친정 종손으로
* 사상운은 가모(사태군)의 친정쪽으로 손녀입니다.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 가계도를 그려놓고도 조카라고 하면 인물 관계를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이 교정을 맡았다고 할 밖엔 없습니다.
473쪽 2번째 줄
가보옥에게는 사촌누이이자 형수가 된다 – 외사촌 누이이자 사촌 형수가 된다
* 희봉과 보옥이 성씨가 다르므로 위 설명에서의 ‘사촌’은 보옥 입장에서 외사촌, 고종사촌, 이종사촌 중 하나가 됩니다. 외사촌이나 고종사촌이 형수가 된다면 교차사촌혼을 했다는 의미지만, 희봉이 보옥의 이종사촌이라면 평행사촌혼을 한 것이 됩니다. 이종사촌 누이이면서 형수가 되면 그 형이나 형수의 입장에서는 서로의 이모가 시어머니이자 장모가 됩니다. 따라서 가씨 집안에 시집온 두 자매(왕부인과 설부인)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희봉이 정확히는 보옥의 외사촌 누이이자 사촌 형수이므로 가씨 집안은 왕씨 집안과 교차사촌혼에 가까운 겹사돈을 맺은 것이죠. 보옥의 입장에서는 사촌형(가련)이 외사촌 누이와 결혼해서 자신의 외삼촌이 사촌형의 장인인 된 것이고, 그 사촌형의 입장에서는 숙모(작은어머니)의 친정 오라버니가 장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왕부인과 그녀의 친정 조카인 왕희봉이 힘을 얻게 됩니다. 즉, 사촌 누이이자 형수가 된다는 말과 외사촌 누이이자 사촌 형수가 된다는 말은 그 말이 그 말인 듯하지만, 전체적인 친인척 관계 뿐만 아니라 녕국부와 영국부를 움직이는 영향력의 향방이 달라지게 되고 나아가 이야기의 흐름도 달라지게 됩니다. 왕희봉이 가씨 문중 전체를 쥘락펼락하게 된 데는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사리 분명한 일처리 때문인 듯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은 혼인 방식과 함께 친족 체계에서의 지위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475쪽 첫 줄
진가경의 남동생으로 가보옥에게는 조카가 된다
* 권말에 실린 진종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는 가보옥의 8촌 형님인 가진의 며느리 진가경의 친정 남동생이므로 가보옥의 조카라고 할 수는 없고 배분상 조카뻘이라고 해야 합니다. 조카만 하더라도 여러 부류가 있고 내외친소가 있는 법인데,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속 우리네와의 문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다싶은 설명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군데에서 자잘한 편집상의 실수들이 제법 보입니다. 가령 135쪽과 400쪽에는 이어지는 여러 편의 시가 나오는데, 편과 편 사이의 줄가름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습니다. 조판을 새로 하면서 고쳐지리라 믿습니다.
특히, 제5회 금릉십이차에 나오는 시사나 대련에 각주를 붙여 놓았는데, 친절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여인들의 운명을 독자에게 미리 귀띔한 꼴이 되었습니다. 요샛말로 일종의 스포일러가 된 것이죠. 여인들의 운명의 질곡이 드러난 뒤 태허환경의 시사 대련을 다시 상기시키는 각주를 달아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권별 말미에 등장인물 설명이 있지만(본문이 아니므로 그냥 지나치는 독자들도 많겠지만), 아쉽게도 이 역시 스포일러가 되고 있습니다. 책 만드는 일은, 특히나 이처럼 인물이나 사건이 많은 책의 색인을 만드는 작업은 무척 힘듭니다. 예리한 평가로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고가 물거품이 되지 않고, 더 나은 개정판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현재 읽는 나남본은 2012년에 나온 2판의 2쇄입니다. 2016년에 2판 5쇄가 나오면서 판권 및 목차 부분이 바뀌었는데, 아울러 위에 예를 든 오류들도 고쳐졌는지 모르겠군요. 별 째째한 것을 다 트집 잡는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작은 부분마저 완벽해야 명품이 되는 것이지요. 특히 위의 사례들은 비교적 큰 실수들로서 교정교열 윤문 인력을 충분히 고용하지 않은 듯합니다. 흔히 혁신만 생각하지 기존에 해오던 분야의 수준을 높이거나 마감을 잘 하는 것도 혁신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전6권 중 제1권만 대상으로 편집과 교정상 의문이 드는 곳들을 세세하게 짚은 이유는 예전에는 서점에 가서 책을 충분히 살펴보고 구입했으나 이제는 온라인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책을 충분히 보지 않고 사게 되었기에 받아보고 난 뒤에야 내용과 편집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죠. 홍루몽도 소장하면서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지만 나남본 2016년 2판 5쇄의 경우, 도서 구입 방식이 바뀐 탓에 오류가 잡혔는지 확인해 볼 길이 없어 선뜻 주문을 못하고 있습니다. 초판의 교정과 편집이 더욱 중요한 세상이 된 것이죠. 자, 이제 번역과 편집에 대해서는 그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제1권의 상태로 전체가 가늠이 되니까요.
덧붙임
* 글이 길어져서 포스트를 3개로 나누었습니다. 한자도 오교한 곳이 꽤 있지 않을까 우려되지만 대조할 저본이 없다보니 그냥 대충 넘기며 읽고 있습니다. 방대한 작품이니 하나의 번역본을 계속 교정교열 윤문편집해서 개정판을 내서 권위 있는 번역서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한 달 넘게 써온 이 3편의 게시물도 꾸준히 바로잡을 예정입니다. 줄거리도 알기 좋게 올리고 싶지만 시간도 여의치 않고 도서관에 반납도 해야 해서 훗날을 기약해 봅니다. 평은 작품을 다 읽고 올리겠습니다. (201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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