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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팔찌는 성폭력을 줄일 수 없다

트랙팩님의 [어찌할꼬, 전자팔찌] 에 관련된 글.

진수희 의원['전자팔찌는 너무나 '인권적'이다]에 대한 반론글.

 

지난 화요일 갑작스럽게 진수희 의원이 한겨레21에 실은 ['전자팔찌는 너무나 '인권적'이다]에 반론글을 쓸 것을 제안받았다. 마감은 목요일 오후라 했다.

사실 그날은 이미 네트워커 글을 쓰려고 전날 밤을 꼴딱 샜던 터였다. 게다가 다른 잡다스러운 일을 하느라고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은 쓰지도 못했다. 피곤으로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있었다. 거기에 감기 기운마저 오고 있었다. 

도저히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왠지 쓰지 않으면 안될 거 같아서 덜컥 받아버렸다. 그래도 그 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레이와 미류였다. 

 

레이, [범죄자 처벌에 대한 고민]

미류, [누가 나를 몰아부치고 있는 거지?]

 

둘의 이 훌륭한 글을 이미 봤던 것이다. 그래 둘 중에 하나한테 넘기자...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음날 수요일 아침 일찍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감기가 제대로 와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오후. 밥을 잠깐 먹고 잠시 쉰다고 누웠다가 잠들어서 일어났더니 헉... 이미 늦었다.

차마 넘길 수도 없고 몸은 헤롱대고... 써보려고 발악을 했지만, 평소에 글쓰는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딴 어이 없는 글에 굳이 반론하면 뭐하나?'하고 위안하려 했지만, 안 통했다.

포기하고 자학에 빠져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오후 6시까지 글을 달라고, 2시에 다시 연락이 왔다.

그래서 허겁지겁 분량부터 채우고 나서, 순서를 잡고, 주위 사람들한테 제목 내놔라, 아이디어 내놔라 해서 만든 글이다.

급하게 쓴 글이라는 티가 좀 심하게 난다.

하지만, 어쨌든 썼다는 것,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반성폭력운동에 관한 글을 썼다는 것에 자족하며 오늘은 좀 편하게 자야겠다.



전자팔찌는 성폭력을 줄일 수 없다

턱없이 낮은 신고율, 기소율, 실형율... 성범죄자 1% 전자팔찌 채워 성폭력 근절하겠다?

책임회피, 전시행정, 급조된 즉자적 대책 대신 반성폭력운동 단체의 목소리 들어라

 

가해자를 무겁게 처벌함으로써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될 수만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소수의 악질적인 범죄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이 사회의 성범죄자가 사라질 수만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기술을 통한 감시와 통제가 성폭력을 근절시킬 수만 있다면 왜 그런 기술의 도입을 마다하겠는가?


전자팔찌 효과 미미할 것

진수희 의원은 ‘가해자는 활보하고 피해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진 의원은 검경의 수사 소홀, 수사과정에서의 편파성, 부당한 합의 유도,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성폭력, 형량이 낮을 뿐더러 이마저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했다. 우리는 정말 이러한 지적에 120% 동감하며, 진 의원의 진정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 의원이 제출한 전자팔찌 법안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전자팔찌는 진 의원이 말한 바로 그 현실에 막혀 제약되어 버릴 뿐, 그 현실을 개선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성폭력 범죄의 신고율은 6%에 불과하다. 그나마 신고된 사건에 대한 기소율은 45% 미만이고, 실형율은 그보다 더 낮다. 힘들게 용기를 내서 신고를 하고, 수사의 소홀함과 편파성을 이겨내고, 부당한 합의를 거부하고, 그 오랜 과정에서의 2차 성폭력을 감내해 낸 단 1%의 위대한 피해자만이 가해자에게 형량이 가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의 가해자만이 범죄자로서 인정되고, 그 범죄자의 또 일부만이 전자팔찌를 차게 된다는 것이다.

 

진 의원은 전자팔찌법이 통과되었다면 이번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범죄자에게 전자팔찌는 채울 수 없었으며, 채웠다 할지라도 본인의 집에서 일어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었다.


성폭력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일 수 있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언론 보도에서 알려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다. 일부는 평범한 신발가게 아저씨가 범죄자라는 사실에 놀랐다. 또 일부는 몇 차례 이상한 행동을 목격했지만 무심코 넘어갔다. 다시 말해서 이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이번 사건 전까지는 단지 무수히 많은 ‘평범한’ 가해자 중에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행위를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고, 신고했으나 소홀히 다뤄졌고, 형이 확정됐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다음 사건을 보자. 그는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주위의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이다. 전자팔찌 법안을 낸 그 정당의 사무총장이다. 잘 모르지만 성폭력상담소 이사장까지 맡았다고 하니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가해자로 돌변했다. 피해자의 용기에 힘입어 사건이 문제화 됐지만, 그가 범죄자가 될지 아닐지는 모른다. 진 의원도 이 경우는 전자팔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번에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 걸까?

 

성폭력은 어떤 특정한 선천적인 악인에 의해 자행되는 우연적인 행위가 아니다. 성폭력은 성억압과 성차별, 성폭력을 구조화시키고 있는 현 사회가 전면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 의해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성폭력의 가해자는 80%가 피해자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며 그 중에서 30%는 가족 중 한 명이다. 바로 옆의 사람이 흉악한 범죄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성폭력의 현실이며 성폭력이 진정으로 두려운 이유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범죄자들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 만을 논하는 것은 성폭력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관련 정부 부처와 정치권 등에서 누가 더 가혹한 형벌을 생각해 낼 것인가를 경쟁하듯이 내놓았다.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신상 공개 제도는 물론 야간 외출 제한, 유전자 정보은행, 전자팔찌 제도, 거세약물 투여에 거세수술까지. 그러나 그것은 다만 즉흥적인 발상으로 국민들의 정의로운 공분을 아전인수하려는 것일 뿐 성폭력을 줄이고자 하는 진지한 대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은 모두 절대적이다.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범죄자를 가혹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가해자의 인권과 충돌하고 조정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폭력상담소 등 반성폭력 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를 주장해왔다. 성폭력의 신고율과 기소율을 1%라도 올릴 수 있는 법안, 수사과정에서의 2차 성폭력을 엄중히 벌하는 법안, 피해자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은 왜 연구되고 있지 않은가? 왜 이러한 법안은 뒷전인 채 전자팔찌만 대안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가?

 

인권단체가 인권을 말하는 것은 국가와 범죄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결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가해자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피해자는 절대 약자이며, 여기서 가해자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가장 반여성적이고 가장 반인권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에 반해 범죄자는 이미 형이 확정된 경우다. 남은 것은 국가와 범죄자의 관계다. 범죄자는 당연히 죄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로부터 필요 이상으로 인권을 침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권 국가의 기본 원칙 아닌가? 인권을 보장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인권이 있고, 보장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는 인권이 없다면, 그게 어디 인권인가? 특권이지.

 

결국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은 모두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 인권단체가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보호에 힘을 싣지 못했다는 비판은 얼마든지 달게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인권침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을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를 옹호한다는 억지스럽고 악의적인 비난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감시 기술에 대한 맹신은 오히려 위험하다.

감시 기술은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범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전자팔찌는 미미한 효과만을 가질 것이다. 물론 아주 작은 효과라고 해도 의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를 결코 과장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전자팔찌 법안만 통과되면 안심하라고 선전해서는 안 된다. 안심은 곧 방심이다. 만약 1%의 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웠다고 자랑하며, 99%의 가해자들의 존재를 은폐하게 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끔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강남구가 CCTV를 설치해서 치안을 강화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충분히 검토된 후 도입돼야 한다. 어떤 범죄자에게, 어떤 기능의 전자팔찌를, 어떤 과정에서, 어떤 기간동안 착용시켜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에서의 어떻게 실효성과 인권의 균형을 맞출 것인지는 대단히 세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형사법학계에서는 전자감독에 관한 깊은 연구를 차분히 진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자팔찌 논의는 다분히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따라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성폭력에 대한 성찰의 부재, 즉자적으로 급조된 정책, 감시 기술에 대한 맹신. 이러한 흐름은 성폭력도 줄일 수 없고, 인권 침해만을 양산하고, 감시 통제 사회를 불러올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 결단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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