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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은 느림에서 온다. 느림은 관조에서 온다. 관조란 곧 감상이다. 그리하여 생활감상문.'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1/06  [블로그 파업]울 아버지는 이명박 세대 (2)
  2. 2008/12/30  [블로그 파업] 미학적 문제
  3. 2008/12/15  달콤한 겨울빵, 생강빵 굽기
  4. 2008/12/09  지혜의 산 방문 준비 시작.
  5. 2008/11/28  박귀례 전 (3)
  6. 2008/11/27  나의 한때
  7. 2008/11/23  male friends' day
  8. 2008/11/17  11월, 주말 그리고 월요일: 몇 가지 좋은 느낌들. (2)
  9. 2008/11/03  자극에 반응하자. (2)
  10. 2008/10/29  통곡물 빵 굽기 (2)

[블로그 파업]울 아버지는 이명박 세대

2009/01/06 02:12 생활감상문

6시에 일어나 옥수수 반 캔과 귤 두 개 먹고 8시에 출근해 두유 한 잔 마시고 12시 반까지 일하고, 점심[그것도 별로 맛도 없고 비싸기만 했던 프랜차이즈 해물떡찜] 한 시간 먹고, 7시 반까지 여섯 시간 일하고, 저녁[역시 맛없는 프랜차이즈 김밥에 떡볶이] 먹고 10시 20분까지 또 일하고... 그렇게 밥 먹는 시간 빼고 30분도 못 놀고 하루종일 일만 하다가... 집에 와 스트레스 해소로 H양이랑 20분 채팅하고, 20분 코미디를 섞은 곤충학 책 읽고 긴장 풀어서 겨우 잠든 내게.... 뭐 그리 큰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막냉이의 영어경시대회 전교 등수 알려주러 새벽 1시 45분에 문자 보내는 아버지는... 정말... 대처불가능한 이명박 세대[지난 금요일엔 언론악법 관련해서 촛불집회가 다시 힘을 얻는 기세니깐 데모하지 말라고 전화하시는 통에 벌써 한바탕했다. 나도 데모라도 나가고 싶다고. 책 만드느라 진빼서 살짝 대인기피증마저 올 지경인데]. 사람 정말 질리게 한다T T

적어도 잠 자는 시간만큼은 편집자도, 자식도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이고 싶다고. 뭐 다들 이러냐고? 밤이고, 낮이고, 주말이고 휴일이고 전화하는 필자에... 외부 디자이너만으로도 충분하다고.이러다 내가 심장마비 걸리지>..<

내일은 밥도 해먹고, 병원도 가고, 환약도 챙겨먹고, 영어학원도 끊고, 산책도 하고, 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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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02:12 2009/01/06 02:12

[블로그 파업] 미학적 문제

2008/12/30 21:34 생활감상문

벽지를 바꾼 때는 블로그 파업이 개시되기 직전이었다.

일단은 동참해야지 싶어 검은색 스킨으로 1분쯤 바꿔 보았다.

이상하게도 내 블로그에선 검은색 스킨이 화면 비율이 망가진 채 구현되었다.

그런 비율로 공들여 가꿔 온 내 블로그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산운동보다는 공예운동 같은 데 마음을 쓰는 인간이요,

붉은 악마들 가운데 푸른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인지라...

평소 존경해 온 윌리엄 모리스도 기릴 겸,

상복 같은 검은 스킨을 깔지 않아도 블로그 파업은 할 수 있다는 [뭐 굳이 꼭 할 필요는 없는] 소리도 할 겸

 '다크슬레이트그레이'를 주 색조로 잡았다.

(사실 인터넷에서 구한 벽지가 이 모냥이라 그냥 맞춘 거다.

아쉽지만 이 패턴은 윌리엄 모리스의 작품은 아니다.)

 

내가 2MB를 이리도 꾸준히 싫어하는 건

건설업자와 건축가를, 나팔수와 언론인을, 과거와 현재,

무엇보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못해서이지만...

그 가운데 제일 싫은 건 "하면 된다"는 그 정신이다.

세상엔 "하면 안 되는" 일이 분명 존재한다. 

바로 2MB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다.

그걸 구분할 줄 아는 건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인식 능력의 문제다.

어찌 그리 보는 눈이 없는지... 사람도, 미래도...

호르헤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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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21:34 2008/12/30 21:34

달콤한 겨울빵, 생강빵 굽기

2008/12/15 22:10 생활감상문

지난 토요일... 월인정원 님의 신작 레시피 생강빵을 따라 구웠다. 그 전날 곰샘이 봐주신 사주에 대한 복채조로다... (나는 태양의 기운이 넘치는 불의 여자. 계획성과 실행력이 강해 재복을 타고 났단다. 어디 가서든 적응하고 말발로 사람을 사귄단다. 대신 수성과 목성이 부족해 유연성 부족으로 정치력과 남자운이 없단다. 자식복이 없진 않아 결혼은 하긴 한다만... 그래서 이대로라면 돈은 많고 관계에 집착해 스스로 불행해지는 최진실 사주가 될 가능성이;; 그런데 작년부터 대운이 들어 지금부터 41살까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리더십을 키우면 40대 이후 20년 동안 연애운과 관운이 뻗친단다. 음홧홧홧... 작년에 학술서 많이 내는 출판사로 이직한 것이 나름 굿 초이스였다는 것이지...)

 

여하간 다시 생강빵으로 돌아와서...

 

재료(미니 파운드틀 2개 분량임)....

우리밀 통밀가루 200g | 유기농 호밀가루 200g | 계피가루 3g |  유기농 생강가루 1~2g

구은소금 1g | 마스코바도 설탕 80g |  베이킹파우더 10g

저지방우유 350g | 벌꿀 120g(이지만 모자라서 있는 만큼) | 유정란 1개 | 유자청 5큰술(원래는 건포도와 당절임한 레몬껍질 등을 넣으라지만 집에 있는 건 꿀유자차밖에 없어서... 부족한 꿀도 보충할 겸^ ^)

  

만드는 법...

1. 미니오븐을 180~190도로 예열해 놓고... 

2. 소금과 설탕을 제외한 모든 가루를 섞어서 1번  체를 치고,  

3. 우유에 달걀과 유자청, 꿀, 설탕, 소금을 거품기로 잘 저어서 섞은 다음에... 

4. 섞어 놓은 가루를 1번 더 체 쳐서 우유 혼합물에 넣은 후... 

5. 알뜰주걱으로 칼로 썰듯이 뚝뚝 반죽해서 

6. 미리 유산지를 넣어 놓은 파운드케이크 틀에 넣고... 

7. 예열된 오븐에서 40~50분간 구워준다. 

8. 30분쯤 지났을 때 윗면이 탈 수 있으니 호일 등으로 빵 위를 살짝 덮어준다. 

9. 다 구워지면 오븐에서 꺼내 파운드 틀과 빵을 분리하여 식힘망 위에서 식힌다.^ ^

 

설탕과 꿀은 제법 들어가지만, 유지류가 안 들어가고...

겨울철 체온을 올려주는 생강과 계피, 유자 등이 들어가니

나름 감기 예방해 주는 빵이다.

천연 방부제 꿀이 들어가니 이삼 일 정도는 보관도 끄떡없다.

 

맛있게들 드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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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謹弔 배우 박광정 선생. 당신의 연기 덕분에 오래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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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22:10 2008/12/15 22:10

지혜의 산 방문 준비 시작.

2008/12/09 16:23 생활감상문

 

1. 길동무 구하기:

M언니 확정. M선배 한 치 앞도 모르는 12월 일정 가운데 고심중.

 

2. 일정 짜기:

성탄절 밤차로 내려가 26일 트레킹. 26일 밤이나 27일 아침에 무주로 이동. 구름샘마을로 오클라샘 방문. 28일 상경.

 

3. 교통편 알아보기:

1)  동서울터미널에서 인월마을까지 시외버스 타면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빠르고(새벽4시?)  

2) 호남선 기차 타고 4시간 반 걸려 남원역 가서 버스 타고 함양까지 2시간, 함양에서 다시 인월행 버스를 타자니 차 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아무리 여행이 과정이라지만 이러면 너무 지친다).

3) 자가용을 가져가면 나야 편하지만, M언니가 운전하느라 너무 피곤할 터이고. 흠...

4) 그냥 새벽차로 내려가서 10시쯤 트레킹 시작하자니 무주 가는 시간이 불안정. 함양에서 무주 가는 저녁 차편만 확보되면... 26일 아침에 내려가는 것도 좋은 방법.

* 28일에 상경할 때는 선생님 댁 차편으로 올라올 수도 있음.

 

4. 숙소 정하기:

1) 함양에서 하루 자게 되면 숙소 구할 것.

2) 아니면 구례로 이동해서 한옥 체험도 나쁘지 않겠다.

3) 바로 26일에 무주로 가면 참 좋겠지만.

 

5. 트레킹 장비 중 안 갖고 있는 건 없나?

음, 35리터 이상 되는 등산 가방? 일단 빌릴 데 있나 알아 보지 뭐.

가벼운 목도리? 이 정도는 하나 지를 수도.

 

6. 가져갈 책?

출간 직후 구입해서는, 저자 후기만 보고 못 읽은 <밤은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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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16:23 2008/12/09 16:23

박귀례 전

2008/11/28 01:14 생활감상문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에 관련된 글.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할머니 초상을 치렀다. (아주 먼 훗날이 되길 바라지만, 어찌나 눈물이 없는지 부모님 초상 때도 안 울까 봐 사실 걱정이다.). 요새 읽고 있던 블랑쇼 소개서에서 마침 죽음에 관한 항목을 읽고 있었는데.... 할머니 살아생전 자주 찾아뵙질 않아서인지, 어쩌면 할머니 자체가 이미 내게 상실된 존재라 입관 절차를 지켜보면서도 "왜 다른 사람들 다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날까" 그런 생각만 했다. 늘 염려하듯이, 난 너무나 머리가 발달한 인간이라 그런걸까? 분하고 서러울 때는 울 줄 아는데, 슬퍼서는 못 우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래서. "울면 바보"라고 키우셔서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여하간... 살아생전 효도는커녕 손녀스러운 적은 한번도 없는 내가 나서기엔 교만스러운 생각이지만, 이번 참에 (사실 잘 모르지만) 할머니 전(傳)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역사를 문자로 남기는 게 울 줄도 모르는 손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릴 적부터 들은 온갖 단편들을 한번 모아놓는다. 사실 할머니한테 들은 건 거의 없다.

 

조금씩 쓰다가 할머니 49제 때 외가에 가서 이야기도 조금 더 듣고, 글을 적으려 했는데... 49제 날이 토요일인 줄 알았는데 금요일이어서... 미리 회사에 말을 해두지 못한 탓에.... 못 갔다. 그런 채로 또 한 달 넘은 시간이 지나다... 오늘 불면의 밤에 포스팅한다. 할머니 평안하셔요.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故人 박귀례는 1922년에 태어났다. 개띠다. 제부도 근방의 남양만에 살던 부모는 땅 한 평 없이 가난했다. 염전에서 일하던 부모는 부지런했다. 딸이 여섯이나 본 다음에야 아들을 낳았다. 아들 아래 또 딸을 하나 두었다. 그리 많은 자식을 두었으면서도 염전에서 소금땀 흘려 번 돈으로 조금씩 땅을 샀다. 식민지 시대에 어찌 땅을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농사 지어 일곱 자식을 밥을 먹일 만큼 땅은 불어났단다.

넷째 딸이던 귀례는 스무 살이 채 못 되어 경성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하던 제법 유복한 집안이었다. 그녀의 큰딸이 기억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을지로 부근에서 이층집에 살았다. 남편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시누이도 곧 시집을 갔다. 귀례는 1941년부터 1949년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았다. 딸이 셋이었고, 넷째가 아들, 다섯째는 또 딸이었다. 큰딸은 꽤 똑똑했다. 해방 전에 배운 일본어를 40대까지 기억할 정도였다.

전쟁이 났다. 남편은 무슨 병인지 배에 물이 가득 찼다. 거동을 못하는 남편을 방에 눕혀두고, 인쇄소며 집 문서를 남편의 친구인 공장장과 함께 집 마당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셋째와 넷째를 잃었다. 피난 갔다 돌아오니 남편은 역시 세상을 떠났고, 집 마당에 묻어둔 집문서는 공장장이 파서 내다 팔은 뒤였다.

30대 초반의 청상, 중학생이 된 딸 둘, 그리고 또 어린 딸.... 아들이 없어서인지, 그 시절 흔치 않게도 재혼을 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터인지라 그랬겠지. 친정에서 권했는지, 시집에서 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친정 근처인 화성에 사는 홀아비와 재혼을 했다. 이미 중학교에 들어간 연년생 딸 둘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막 소학교에 들어가야 할 막내만 데리고 화성으로 갔다. 중학생이던 큰딸은 시집 가는 엄마를 배웅하는 버스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재혼은 해도 좋다. 호적만은 옮기지 마라. 생활환경조사서에 보호자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바락바락 따졌다고 한다. 그런 딸을 두고 재혼한 그녀는 평생 큰딸을 어려워했고, 이혼 후 여러 가지로 부침을 겪던 큰딸이 요양원에서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감히 어찌 죽었냐고 묻지도 못했다. 명절에 찾아간 막내딸 소생의 손녀에게 자식들 몰래 한두 마디 물어본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난했던 새 남편은 장남이었다. 전처 소생의 딸 하나, 아들 하나에, 결혼한 시동생 외에도 아직 10대인 시동생이 있었고, 서울에서 데려간 막내딸.... 재혼에서 그녀는 아들 셋을 낳았다. 살기는 어려웠다. 땅 한 평 없었다. 산에서 냉이를 캐다가 장날이면 수원에 내다 팔았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데리고 살던 막내딸은 중학생이 되자, 마을 근방에서 국민학생을 가르치는 입주 과외교사로, 고등학생이 되어선 귀례의 막내 여동생(귀례의 초혼 못지 않게 부유한 집안에, 그것도 성격 좋고, 책임은 그다지 없는 막내아들에게 시집 가서 딸 셋에 아들 둘을 두었다) 집에 사촌 동생들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간다.

초혼에서 남은 딸 셋과 재혼에서 얻은 아들 셋은 좀 서먹했다. 엄마 없이 서울에서 큰 딸아이들은 제 힘(과외 선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거나 문턱을 밟기라도 했다. 화성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아들들은 잘생기고, 기운도 좋았지만 모친과 어딘가 불화했다. 그 시절에 재가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은 큰아들을 괴롭혔다. 큰아들은 그 콤플렉스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서야 벗어났다. 운동을 잘하던 둘째 아들은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고, 운동으로 대학 입학 자격도 얻었지만, 등록금을 대줄 사람이 없었다. 이름만 누나지,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도 넘고 함께 산 적도 없는 큰누이나 결혼 직후 캐나다로 이민을 간 작은누이에게는 말도 못 꺼내고... 그나마 유년을 함께 보낸 막내누이에게 말이나 해볼까 하고 서울로 쫓아 올라왔다. 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앞날이 불안했다. 둘째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사료회사 영업부장이던 남편이 급성 간염으로 쓰러져 회사를 그만두고 살 길이 막막하던 참이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뒀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을 의붓동생에게 차마 하지는 못했다. 그 사연 역시 어머니 초상을 치르고서야.... 30년 전에 대학을 가고 싶었다는 말에... 조카가 그때 울 아버지 사경을 헤매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직장이 없을 때였어요.. 라고 말해 줄 때까지... 동생은 몰랐다.

환갑을 앞두고 재혼한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 급작스러운 죽음에 놀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시댁 친척들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의부의 사망 소식을 서울의 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세살배기 셋째 딸의 둘째딸(어린 Y양)을 잠시 맡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장례가 끝난 후에야 큰아들 편에 아이는 서울로 보내졌다. 캐나다로 이민 갔던 둘째 딸이 강도를 만나 피해망상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남편과 별거하고 서울의 큰딸 집(셋째 사위가 급성 간염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갓 구입한 집을 세 주고 박봉의 교사로 전업하는 바람에 이미 셋째 딸이 친정살이를 하고 있던)으로 돌아온 것은 그 2~3년 뒤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세 딸은 2년여를 함께 살게 되었다.

유달리 똑똑하던 첫딸은 불임을 이유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당하며 별거중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듯싶던 셋째 딸네 가족이 남편의 직장 근처로 이사해 나가자 너무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던 직장에서 유리 천장에 부딪히고, 동생네 대신 들어온 세입자는 속썩히고, 정신병을 가진 동생과 단 둘이 살던 큰딸마저 결벽증에 피해망상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 뒤로 20년 넘도록 고인은 딸을 열 번이나 만났을까. 정신병원과 셋째 딸네 집을 번갈아 가며 살던 큰딸은 끝내 요양원에서 어머니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둘과 자식 셋을 앞세우고도, 그녀는 씩씩했다. 장날이면 산에서 나물 캐다 판 돈을 모아 땅을 샀고, 화성 지역이 개발권에 들어서자 70대에 아파트로 이사했다. 멀리 사는 딸들, 어머니와 뭔가 어색했던 아들들 대신 스물한 살 나이에 시집와 사우디아라비아로 3년 간 건설노동자로 일하러 간 남편보다 시어머니에게 유난히 살갑던 큰며느리와 정붙이고 살았다. 큰아들 내외에게서 본 유일한 손자는 할머니를 유독 따랐다. 스포츠맨 정신으로 사교성 좋은 둘째 아들은 대기업 계열 화학공장에서 10년 넘게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새침한 미인형인 둘째 며느리는 딸을 셋 낳았다. 둘째 내외는 아이 셋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빴다. 고인을 모시는 일은 고스란히 큰아들 내외의 몫이었다. 등치 좋던 셋째 아들은 40대가 되도록 자리를 잡지 못하고 주먹으로 먹고 산다거나 남의 돈을 대신 받아준다거나... 하는 소문만 도는 사이, 이혼을 했고, 계속 여자가 바뀌었다.

자식들에게만 연연했다면 그녀의 삶은 한 많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칼 같은 성격에 거침없는 입담으로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파트 노인정을 주름잡았다. 전실 자식이 있는 집에 재혼해서 들어온 큰며느리 자리... 결코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었을 텐데도... 나이 어린 동서들은 그녀를 따랐고, 그녀의 초상을 치르면서도 "우리 형님은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어."라고 기억했다.

8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력은 쇠했고, 노환성 치매가 왔다. 아들며느리 모두 직장 생활을 했고 노인정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임에도 낮에는 혼자 보내는 생활이었다. 2년 이상의 병수발에 아들내외는 힘들어했다. 함께 모시자고 나서는 형제는 없었다. 다들 자기 살기가 바쁘고 힘들었다. 사망 일주일 전 고인은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들을 모두 알아보고, 곡기를 끊었다. 하루 물 한 모금이 섭식의 전부였음에도, 엄청난 양의 대소변을 보면서 순식간에 말라갔다. 내부의 생명력을 스스로 배출하듯이. 그리고 철야 근무로 외박하다가 사흘 만에 하나뿐인 손자가 새벽 2시에 들어온 날, 그녀는 30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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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8 01:14 2008/11/28 01:14

나의 한때

2008/11/27 14:23 생활감상문

10월에 쓴 [시의 한때] 에서 나의 한때에 관한 글로 늘어났다. (회사 블로그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에 포스팅용으로 썼는데, 도판과 캡션은 횬아상이 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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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作 <자화상>
_ 화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많은 말로 그를 규정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모든 활동은 '잘 봄'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올 가을이 제겐 좀 힘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고, 연일 접하게 되는 죽음의 소식들은 그 힘겨움에 무거운 분위기를 흩뿌렸지요. 매일 커져 가는 삶에 대한 부담감은 저를 짓눌렀고, 한동안 두통과 호흡곤란, 불면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 문득 기댈 데가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그의 글이라면…… 버틸 힘을 줄지도 몰라.’ 그의 글에선 전 늘 삶에 대한 어떤 절박함을 느꼈으니까요. 어찌 되었든 ‘살겠다는 의지’(will to live, 니체가 한 말이라더군요) 말입니다. 그게 뭔지는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서둘러 그의 책 한 권을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열화당, 2004)는 본래 존 버거가 1984년에 출간한 에세이집(And Our Faces, My Heart, Brief as Photo)입니다. 존 버거는 자신이 직접 만난 사람들, 풍경의 모습을 치밀한 산문을 통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대상의 존재를 파악해서 제멋대로 분류해 버리는 폭력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성실한 관찰자로서 일차적인 묘사와 설명만을 통해서 이야기 속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줄 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가 만난 사물과 인물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느끼고,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그래서인지 그의 최신작은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는 제목을 달았더랍니다).

언젠가 한때 살고 있던 한옥의 쪽마루에 앉아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기억입니다. 서너 살 무렵의 일이지요. 1분, 아니 10초쯤일까요? 기억의 지속은 그 정도뿐입니다. 날은 맑았고, 햇볕에 따끈하니 데워진 쪽마루엔 저 혼자였습니다. 열려 있던 대문 사이로 우유배달원이 슬며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피라미드형 폴리백에 담긴 흰 우유를 놔두고는 바로 사라졌습니다. ‘우유가 왔네~. 우유가 왔어!’ 왜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바람이 불었던가요? 더웠던가요? 계절은 봄이었던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고, 특별한 감정이나 인과성도 없이 순수하게 지각된 그 충족성이 그 순간을 유리구슬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기억될 만한 순간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점쟁이가 크리스털 구슬을 들여다보듯이 저는 그 기억을 봅니다. 눈 끝에 남아 있는 잔상을 긁어내 손끝에 옮기듯 한 자 한 자 글자판을 치는 지금, 쪽마루를 보고, 마루의 결과 옹이와 햇빛에 반짝이던 나무의 색깔을 보고, 그늘진 부분과 볕에 데워진 부분의 온도를 확인하던 제 고사리손을 보고, 그 좁은 시야 안쪽에 등장한 우유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그러면서 지금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제가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과, 그 감정이 섬세하게 제 목의 근육을 움직이던 그 느낌을 되살리듯 침을 삼킵니다.

어쩌면 이 기억도 조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곁에 누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순수하게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고 있는 다른 사건의 전후에 이어진 순간이 따로 분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한, 그것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는 끝없이 그 ‘봄’을 재생함으로써 제가 느낀 강력한 느낌—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아 있음만으로도 충만하다는 감각을 재생하려는 저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진난만하게 유리구슬을 들여다보이는 이가 더 들여다보면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볼 듯이, 제 마음도 그렇게 어떤 지향성으로 움직임을 갖습니다. 설령 거기에 어떠한 ‘조작’이 있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으로서의 ‘생성’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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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作 <눈>
_ 이 작품이 존 버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파울 클레의 삶과 세계가 존 버거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파울 클레는 음악가이자 화가였고, 또 미술평론가였죠. <눈>은 그의 전시회 '눈으로 마음으로'에 전시된 작품으로, 파울 클레는 마음으로 보는 세계를 그렸답니다.


존 버거는 근대(서양)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이 다른 ‘시간’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즉 시간이 진보만을 말할 때 역사는 오히려 퇴행만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시간이 분리되면서 모든 것은 덧없어지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문명과 도시화가 인간의 근원적 ‘공간’인 집을 와해시키자 영원히 떠도는 우리에겐 오직 사랑만이 소중해졌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가 연애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는 사랑마저도 측량당하는 이 광폭한 시대에 상대를 온전히 느끼고 감각하고 열망하는 ‘낭만적인 사랑’(아마도 이것은 소유하지 않고 향유하는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과 ‘시’(언어)로 다시 세워진 집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올 겨울 출간을 목표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이라는 책을 편집 중인 제게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또한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예술철학의 의미를 맛보는 중요한 친구-텍스트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그의 글이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고, 신비화하는 것이었다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얄팍한 위로였을 겝니다. 글의 첫머리에 적었던, 제가 느낀 두려움의 기반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죽음을 어찌 다뤄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한 난감함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이신 외할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제대로 울 줄도,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할 줄도, 슬픈 것인지 어떤 것인지 잘 느낄 줄도 모르는 제가 앞으로 어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편으로 했지요. 한편으론 덧없는 것이 삶이니까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식의 웅성거림 앞에서, ‘얼른 잊어버리고 산 사람은 또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조급함에 빠져서 말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살아 있는 가족들을 통합시키지만, 그 통합은 가끔은 평균적인 삶의 양식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봉합이 되기도 합니다. 그 역시 제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남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대로 살 것인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뭐 그런 생각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한 가지 삶의 양식에 저를 맞출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 앞에서 저는 이성을 잃고 눈 먼 장님이 된 같았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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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벨 게레로 作 <눈과 손>
_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 나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 시각은 눈을 의미한다. 눈은 보이는 것과 보는 존재가 만나, 관계를 이루어내는 곳이다.(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책을 생각해 내고 찾아 읽으면서, 존 버거가 제게 안겨준 ‘존재의 울림’은 언뜻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것이었지만, 꽉 막혀 있던 제 숨구멍을 열어 피가 돌고,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나 평정을 되찾게 했습니다. 그에게서 잘 보는 자, 찬찬히 보는 자, ‘봄’으로서 존재와 눈맞추는 자로서 시인의 자질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시는, 비록 해설적인 경우에라도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 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값싼 안심이나 마취에 의해서가 아닌, 일단 한번 경험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다는 약속과 인식에 따른 평화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기념비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여전히 싸움터에 있으면서 누가 기념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언어야말로, 외치고 요구하는 그 경험들을 받아들이고 깃들이게 하는 안식처라는 사실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시의 한때'_본문 29~30쪽)


시공간을 초월하고, 시각과 청각, 후각을 모두 동원하는 그의 글들은 신비롭고도 소박합니다. 거기엔 어떤 단단함과 굳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또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즐기게 하는 감각입니다. 화가로, 미술비평가로, 소설가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사회비평가로, 평화운동가로, 농부로 끊임없이 삶(생명)의 영역을 확장해 온 존 버거의 힘은 잘 봄(현상하는 세계를 제대로 지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가는 “눈 있는 자가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다루는 방법이지요. 거창한 진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찌 살지에 대한 앎이 가장 큰 진리가 아닐까요? 저도 보이지 않는 앞길을 너무 열심히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미래와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것들에서 얻은 깨달음이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가를 또한 잘 보고 느끼면서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에서 답을 찾아 가리라고 제 존재를 믿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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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14:23 2008/11/27 14:23

male friends' day

2008/11/23 00:30 생활감상문

한가하고 울적할 땐 그렇게 놀아주는 사람이 없더니 연말 앞두고 바빠지는 직업과 상관없이 최근 약속이 늘어가는 경향이;;; 오늘은 유독 '남자' 친구들과 집중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났다. 뭐 Male friends' day랄까?그리하여 간만에 친구들 소식 정리(이런 건 정말 20대에 일기장에나 하던 건데 )....

 

오늘은 학부 과동기 H군의 생일. 14년 동안 생일선물을 교환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째 좀 냉랭하다 싶기는 한데... 여하간 이 녀석과는 그렇게도 잘 지내고 있다.^ ^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일축하 문자 보내주었더니만 오후 4시에나 답장이 온다. "고맙다"고. 저녁 때 다 되어서 통화나 잠깐 했더니만... 미역국도 못 먹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저런... 내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어도 미역국 나오는 식당 가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었을 텐데... 쩝~. 다음엔 좀더 신경을 써야겠다.

 

바쁘게 지낸 후의 겨우 얻은 휴가 기간에 병 나는 게 흔한 일이긴 하지만... 어제 저녁 식사약속을 오늘 오후 다과약속으로 미뤘던 M군은 [요즘 연이은 과음과 오늘 한 끼도 안 먹은 탓에] 지병인 속병이 도져서... 약속시간보다 거의 30분 늦게 와서는(물론 나도 15분 지각해서 기다린 시간은 15분 정도) 내내 오바이트를 하다간 차 한잔도 제대로 못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얼굴은 멀쩡하고 목소리에도 힘은 있기는 했지만... 참견질이 될까 봐 그간 말을 아꼈다만... 오늘 몇 가지 대화를 나눠본 결과... 아무래도 자기 몸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런이런... 이러면 곤란하다고. 한 생명체가 오래 살든, 짧게 살든, 그거야 자기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사는 동안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생명 활동인데 말이다. 30년쯤 살았으면 건강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것.... 신체의 능력에 관한 지식 정도는 조금 알아줘도 된다 말이다. 아무래도 좀 전수해 줘야겠군. ㅉㅉ [뭐 내 자신이 워낙 골골하다 보니 얻게 된 부스러기 지식이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늘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살기가 힘들어서... 이번 주에 좀 소홀히 했더니만 오늘 기운이 좀 딸렸는데... 1월 초에 결혼식 날을 잡았다는 L군이 모처럼 저녁에 학교에 온다는 데도... 좀 누워 있고 싶어서 그냥 집으로 바로 들어왔다. '이 녀석이 전화 안 하면 좋은데, 아~ 그러면 대전 사는 이 녀석과 결혼식 전에 만날 시간 없고.... 어쩌나...' 하면서. 결국 9시에 차라도 한잔 마시자[를 빙자하여 청첩장 주려]고 전화가 와서... 다시 주섬주섬 옷 갈아입고 나가서는 왕수다를 떨다 왔다. 봄에 후배 HN양과 소개팅을 해줬는데... 그것은 잘 안 되고... 이후에 만난 대전 아가씨와 날을 잡았으니... 만남에서 결혼 결정까지 100일 정도 걸린 셈. 거, 참 인연이라는 게 엮일려면 순식간인가 보다. 지난 14년 세월 동안 나와 그 아이가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닌 데다... 결혼해서 계속 대전 살면 아무래도 지금까지보다도 보기가 힘들어질 터이니... 잘살아라 덕담도 한 10년치 해주고... "나 대학원 다니고 너 복학생 시절에 좀더 자주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참 우리가 추억이 부족하다. 아쉽다"는 소리도 해주고... 결혼식 꼭 간다는 말도 하고...(이러면 사실 대학교 동기 결혼식은 처음 가는 거다. 이상하게 선배 결혼식은 부담없이 가도, 동기나 후배 결혼식은 참 가기가 싫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야간운전으로 대전 내려가야 할 녀석이 이밤중에 분당에서 홍대까지 직접 청첩장까지 가지고 왔는데 어쩌겠는가. 보러 가야지.) 여하간... 몇 년 사이 간간이 만나거나 연락할 때마다 서로 연애 못한다고 구박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결혼한다고 하니... 참 잘된 일이다. 특히나 일등 신랑감인 L군(오죽하면 내가 "내 아까운 친구"라고 명명했겠는가)이니, 결혼해서도 이쁘게 잘살 것 같다.^ ^

 

H양이 그간 속을 끓이던 책 만드는 일이 드디어 끝나서... 약간 여유 모드로 들어가는데... 내가 연말, 아니 내년 1월 중순까지 완전 정신 없을 모드... 당분간 주말보다는 평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월평균(이제 일평균은 꿈도 안 꾼다) 수다량을 채워줘야지.^ ^

 

다음 주 금요일에는 12월 초에 결혼하는 J양 신랑 소개모임도 하기로 했는데... 과연 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야근하게 될 듯싶은데... 흠... 뭐 최선을 다해 봐야지. (모임 참석이 아니라 책 만드는 일에... 그러면 모임도 갈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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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3 00:30 2008/11/23 00:30

11월, 주말 그리고 월요일: 몇 가지 좋은 느낌들.

2008/11/17 23:53 생활감상문

토요일 방콕 모드 가운데 한참 전 내려받아 놓은  <겨울 이야기>(Conte d'hiver) 드디어 보다. 역시 겨울에 보길 잘했단 생각(그럼 <봄 이야기>는 역시 봄에 봐야 할까?). 뭔가 춥다는 기분과 완전 잘 어울림. 팰리시 말대로 "선택에 대한 선택" 조심. 기분이 내키면 겨울 휴가 때 한 번 더 봐도 좋겠다. 초반 도서관 사서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살짝 졸았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본 로메르 영화 가운데 이 영화의 프랑스어가 제일 단순해서, 프랑스어 대본이나 자막 파일을 구할 수 있다면 한글 자막 가려놓고 독학용 교재로 써도 좋겠다 싶다.(영상용 번역이어서 그런지 몇 군데 딴소리로 옮겨놓은 데 발견하기도 했지만, 대세엔 뭐 지장 없으니까)

 

4월 말 이후 6개월 이상 미뤄둔 각종 티켓 정리를 어제 드디어 했다. 여름옷도 이제서야 집어넣는 판에 화장대 위에서 먼지만 쓰고 있는 티켓들도(어차피 버릴 것도 아니니) 제자리 찾아줘야겠다 싶어서 티켓 노트로 고고씽~. 영화, 연주회, 뮤지컬, 전주, 무주, 상하이... 공짜 표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이 돌아다녔다 싶기도 했다. 중간중간 잃어버린 티켓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고. 겨우 날짜순으로 정리해서 동행인(Y군, Y양, M군, H양, SW양, J양 etc. et biensûr moi toute seule)만 적어놨으니 그 코멘트 정리는 또 언제 한단 말인가? 이것도 겨울 휴가 때? 여하간 10월 11일 이후 극장 가서 영화 본 일이 없다. 바빠서..라기보다는 개봉 영화 중에 딱히 땡기는 게 없어서...가 답이라서... 좀더 기다려보자 싶다. 그동안 10여 년 만에 성치님 옛날 모습이나 감상해 드리면서...

 

학교를 떠나기 1년 전부터 한의원 출입이 잦아지고, 수영, 동네 산보, 인라인 스케이팅, 자전거, 한강변 걷기, 재즈 댄스, 스윙댄스, 등산, 스레드밀, 웨이트 트레이닝 등 각종 운동에 입문해 저질 체력을 보강해 오긴 했지만... 역시 최고(最高이자 最故)은 입운동이다. 어제 간만에 편집자 후배 C양을 만나기 전에는 살짝 시큰둥했는데.... 만나서 세 시간 [주로 내가] 왕수다를 떨었더니 기분 완전 좋아져서 씩씩하게 일하러 갔다. 좀더 적극적으로 주말 점심시간을 활용해 사람 좀 만나야겠다 싶어졌다. ㅋㅋ

 

11월 들어서면서 요가와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오고, 영어회화 수업 때문에 일찍 나가는 루틴 속에서 홈베이킹은 당분간 포기하고, 요리도 최소화하려 했으나... 거참 이상하게도 나는 요리를 하면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요가 수업 다닌 지 한 달 반쯤 지난 지금... 몸 상태가 꽤 좋아져서 그토록 두려워하던 본격 야근 모드도 제법 잘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귀찮아도 꼬박꼬박 다니는 수밖에 없다 싶다.T T 요리는 하고 싶다고 한번에 몰아서 몇 시간 동안 이것저것 하는 버릇 버리고, 간단한 요리법으로 퇴근 후 스트레스 풀 정도의 반찬 한 가지쯤 만드는 정도로 하고.

 

얼마 전[가깝게는 한 달, 멀게는 여름]부터 [물리적으로보단 가짓수 면에서] 일을 완벽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을 대하는 내 태도를 좀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전의 내가 메쏘드 연기를 하는 배우―철저히 저자의 의도를 추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원고 속 장소를 방문한다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본다거나는 식으로 원고와 싸우고 진빼고 기어이 납득해서 내 원고라고 부르는 단계까지 가는 것―같기만 했다면 지금은 뭐랄까,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의 아티피셜한 연기를 하는 영국 배우―기본적인 편집 문법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각 원고에 합당한 방식으로 조합하면서 그 순간순간에만 원고와 접속하는 편집자―의 모드를 추가해 보자는 거다.(무슨 맥락인지 굳이 이해하고 싶은 분은 이 링크 참조) 다양한 원고를 동시에 접하고 진행해야 하는 지금 원고마다 개별적인 접신을 했다가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나가기는커녕 모든 원고에 대한 어설픈 환상 속에서 정신분열증에나 걸릴지 모른다. 이럴 때는 그저 나를 자신으로 온전히 보전할 필요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70대의 이순재처럼... 일정한 퀄리티와 무한 변신 능력을 갖춘 편집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하는 방식뿐 아니라 일하는 태도조차도 몇 가지 모드를 가지는 거랄까? 뭐 이것도 과욕이긴 하지만... 그냥 쫓기기만 하는 것보단 이런 설정을 해서 약간의 여유를 되찾는 게 나쁘지는 않잖아. 이런 생각으로 어제 C양에게도 약간 너스레를 떨고.... 내친 김에 필~ 받아 그간 '에크리 덩 에디트리스'(생각해 보니 이도 관사를 잘못 썼잖아!)라 불렀던 '분류'를 '편집자-되기'로 개명했다. ^ ^ 그랬더니만 우연의 일치로다가 오늘 조회시간에 Y사장님은 2년차 후배들에게 이런 내용을 책-기계가 되기 위해서 일단 책-세계에 빠져들라(취향을 버리기 위해 취향을 가지라)는 주문으로 내놓으신다. '하~! 어느 정도 일의 구조 때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2년차들이 이제부터 들어가야 할 단계를 난 이제 막 벗어나려 하고 있군... 방향을 아주 잘못 잡지는 않았어.' 정도의 느낌. 뭐 그래도 갈 길은 멀고, 게다가 모퉁이마다 교차로는 나타날 테지만.

 

아, 이렇게 주절거렸더니 12시가 목전이다.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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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7 23:53 2008/11/17 23:53

자극에 반응하자.

2008/11/03 14:03 생활감상문

 

10월 중순 이후의 자극들: 존 버거의 글쓰기 방식, M군의 격려(?), M선배 신간 출간, Y양의 박사과정 지원 그리고 난데없이 날아온 초대메일에 대한 호기심…….

 

성취욕은 없고, 질투심만 많은 성격 타령은 좀 그만. 삶의 영역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습관도 당분간은 좀 떨궈 놓고. 새로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극에 반응한다는 기분으로. 딱 그만큼만. 자극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변화도 없다면 더 우울해지지 않을까. 뭘 좀 거창하게 의지를 불태울 기운은 없다. 다만 어느 스타일의 옷을 입을지 기억해 냈다는 정도지만, 자극에 반응해 보자. 무슨 일이 생길지.

 

 

 

니키 드 생팔, <화장실>, 1978, 종이 찰흙에 채색, 160x150x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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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3 14:03 2008/11/03 14:03

통곡물 빵 굽기

2008/10/29 18:58 생활감상문

상반기부터 나름 연구와 실험 끝에 통곡물 빵 굽는 과정이 상당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1. 현미 빵

- 무농약 현미가루 270g(이거 꽤 힘들게 구했다. 방앗간에서 파는 쌀가루완 다름)

- 글루텐 30g(없으면 현미가루를 300g으로)

- 물 170g

- 유정란 1개

- 마스코바도 설탕 2큰술(필리핀에서 전통 방식으로 제조되어 공정무역으로 수입되는 유기농 설탕)

- 구은 소금 2작은술

- 이스트 2작은술

- 현미유(or 포도씨유 or 올리브유) 2큰술

 

현미유를 제외한 재료를 섞어(이스트와 소금이 직접 닿지 않도록 주의!) 덩어리를 만든 후 현미유를 넣고 30분 이상 조물락조물락 반죽(힘들면 제빵기 기운을 빌려서)한다. 빵틀에 넣고 비닐 봉지를 씌워 봉한 후(김치 냄새 조심!) 냉장고에 넣는다.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내고 오븐을 180도로 예열시키고 세수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 등 딴짓을 한다. 오븐이 예열되면 반죽을 가만가만 조심해서 넣고(쌀빵은 조직이 약해서 함부로 다루다간 공기가 빠져 버린다) 40분간 굽는다.

 

2. 통밀 빵(일명 게으른 시골 농부 빵)

- 우리밀 통밀가루 400g

- 따끈한 물(or 우유 or 두유 or 유청 or 요구르트 등...을 각각 쓰거나 혼합하거나) 350~400ml(통밀의 건조 상태에 따라 가감)

- 구은 소금 3작은술

- 마스코바도 설탕 2큰술

- 이스트 4작은술

 

우리밀 통밀에 소금, 설탕, 이스트를 각각 넣은 후 따끈한 액체를 조금씩 부어 가면서 숟갈로 섞는다. 후딱후딱 대충대충 한 2분쯤 섞으면... 너무 되게 쒀져서 숟갈이 잘 안 움직이는 밀가루풀 같은 상태가 된다. 반죽의 2배 용량이 되는 밀폐형 용기에 옮겨 냉장고에 넣는다. 아침에 일어나 오븐이 [200도로] 예열되는 동안(스텐리스 컵에 물을 반쯤 채워 같이 넣어둔다) 차디찬 냉장고에서도 이스트들의 놀이터가 되어 2배로 부푼 반죽을 슬쩍 꺼내 살살 모양만 [마음대로] 만들어서 40분간 굽는다.

 

 

냉장 발효(게다가 둘 다 1차 발효만)를 하니까 빵에 신경 쓰는 시간이 줄어들어 한결 편하다(게다가 냉장고를 한결 정리된 상태로 이용하게 되니까 안 먹을 요리재료도 안 사게 되고, 사놓은 재료는 빨리 요리해서 도시락이라도 싸가니 일석삼조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씻고, 옷 입고, 화장품 바르고, 아침 먹고, 시간이 남으면 설거지를 한다. 뜨끈한 그대로 봉투에 넣어 공기가 통하게 해서 후닥닥 회사 들고와... 아침 거르고 출근하는 동료들을 시식단 삼아 평가를 받는다. 확실히 반응은 통밀 빵보다는 백밀로 구운 모닝빵이 좋다- -;; 그래도 남김 없이(특히 오전에) 빵이 사라지면 기분이 좋다. ^ ^

 

 

이 어설픈 레시피를 보고 성질이 나서 

한번 제대로 배워 보실 분이라면...  월인정원 님의 계수나무 점빵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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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8:58 2008/10/29 1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