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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1. 나도 소설을 왜 읽는 지 많이 궁금했다


입학 당시 가입했던 문학 동아리는 이미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미나에서 다루는 소설과 평상시 즐겨 읽는 소설의 간극은, 딱 그 만큼 현실에서 욕구 차이를 드러냈다. 여전히 몇몇은 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았다. 끝끝내 지키려는 사람은 갈수록 소수였고 그나마도 소설을 매개로한 건 아니었다. 소설이 진실을 알리고, 역사를 가르치고, 현실을 비판하고,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밀알 한 톨 만큼이라도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앙 같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그래서 그랬나. 그 때는 왜 그렇게 후일담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지 이해도 못하니까, 비관이 난무해도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뭔가 잃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난 잃어버린 게 별로 없는 기분이었다. 한참 정신없이 살 때는 그런 생각이 들 틈도 없었다. 소설이 좋았고, 그래서 문학동아리를 찾았고, 그런데 재미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이해도 못하는 어려운 고전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사회과학책을 읽는 게 나았다. 그게 내게 필요한 답을 빨리 줬다. 그래서 한 몇 년 간 소설을 읽지 않았다.


‘80년대는 무엇이었나?’

분석하고, 위로하고, 극복하기 위해, 또 더러는 욕하고 비난하며 끝장내기 위해 들인 노력을 다 모아본다면 특정 시기를 ‘XX시대’로 규정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말 많던 시대가 지나가고 나니 당연히 다치기도 많이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또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위로하기도 한다.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에서, 운동권 캐릭터가 뜨는 시절은 운동권이 몰락한 시대다. 그나마 희화화되는 데도 다 까닭이 있다. 희화화조차 안 되는 존재는 완전 마이너리티다.

그런데 이제와 새삼스레 접어두었던 이야기들에 공감하기 시작하는 이유? 아마도 내가 비슷한 기분에 휩쌓였기 때문에. 위로와 자학, 인정과 비판이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첫 시간부터 ‘왜 소설을 읽는 지 내가 혼란에 빠졌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전혀 뜬금없다는 느낌 없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아무튼 나는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주로 소설만 읽는다. 그리고 나는 자문한다.

'90년대는 무엇이었나?'

사회과학책은 거짓말 같아서 접어버린 지 오래인데 이것도 분명 일시적인 ‘막대구부리기’가 분명하다. 의도적인 회피, 의도적인 냉소. 역사서에 쓰여 있는 이야기에는 ‘개인’이 없다. 사회과학서적에는 ‘우연’이 없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살아숨쉬는 인간들의 고뇌를, 우연으로 가득찬 인생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그러다 어쩌다 희망의 한 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소설은 대놓고 거짓말인데 그래서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


2.  역사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역사


역사란 지나고 나서 보면 항상 딜레마에 처해 있다. 시험처럼 합격, 불합격 혹은 몇 점 이렇게 분명하게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를 해야 한다. 더불어 과정까지 도마 위에 오른다. 최선을 다했어도 정말 최선을 다한 건지,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싶어도 정말 잘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두에게 최선인 역사가 없으니 최선인 선택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 해석을 따라 개인도 출렁출렁 댄다. 하물며 지난 시대가 총체적으로 의심받는 시대라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를 반영한다. 그 역사는 개인을 통해 구체화되고 생동감을 얻는 역사다. 역사서에 오른, 개인이 생략된 역사가 아니다. 90년대 이후 거대담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거쳐 역사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역사를 들춰내려는 소설들은 그래서 일단 재밌다. 구체적 현실을 대하는 개인의 결단과 행동은 언제나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그 긴장을 통해 소설은 더 강고한 리얼리티를 얻는다.1)

소설 속에서 개인과 역사는 대립항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훈을 얻어내기 위해 경직된 글읽기를 할 필요도 없고, 역사가 거세된 소설을 읽으며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냐’고 야유할 필요도 없다. 위인전을 읽을 때처럼 묵직한 느낌이나, <논스톱>같은 씨트콤을 보며 느껴야 하는 씁쓸함을 모두 극복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면, 적어도 소설의 존재 이유 한 가지는 분명히 찾은 셈이다. 현대 소설이 변화하는 양상 가운데 긍정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찾은 셈이다.2)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면 판단의 문제가 남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가 역사 해석 일반의 문제. 어떤 역사가 옳고 그런 것이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애매모호해 질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도 있다. 구체적 판단의 근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모든 역사는 동등한 무게를 갖는 다거나, 또는 똑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역사는 모두 후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거나 의도적으로 선택 또는 탈락된 것이라는 태도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역사해석을 둘러싼 주체의 문제. 개인의 선택이 어떤 경우든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거나, 그래서 그 나름대로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역사해석을 둘러싼 회의적 태도로 인해 역사를 해석하는 주체가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역사해석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해석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탈근대 역사학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고 있다. 집단적 주체를 제거한 역사학이 국가, 민족, 계급 같은 거대 담론에 가려져 있던 정치적 소수자들을 살려내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 멈추지 않고, 결국 역사적 가치판단과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바뀐다.

'나는 90년대가 무엇이기를 바라는가?'


3.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 그 가능성


이 같은 맥락에서 주목해 볼 만한 첫 번째 작품은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이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질문에 “체력이 약해졌다고 에베레스트산의 고도(高度)를 낮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3)라고 답했던 소설가 김연수. 그는 1993년 소설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부터 시종일관 역사해석의 문제, 역사적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해왔다. 성장 소설 성격이 강한 <스무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이나 로드무비처럼 길 위에서 펼쳐지는 <7번 국도>4) 역시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볼 때 김연수 소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문제의식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번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소설집 제목부터 그런 작가의 문제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대놓고 자신의 존재가 유령이라 말하는 작가, 대놓고 자기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작가.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뿌넝숴’·不能說>


대체로 소설집에 담긴 작품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한목소리를 내는 소설집도 오랜 만이다. 그는 시종일관 묻는 것이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존재하는가? 역사가 주체마다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라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지어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정립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5) 비틀고,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는 확고한 역사적 사실에까지 회의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자신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유령작가라는 명제에 충실한 셈이다. 기존에 정립된 모든 정체성을 해체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분명 작위적이고 그릇된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야기됨으로써 사건들과 낱낱의 내용, 하찮은 사실들이 사건 당시에는 갖이 않았던 움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어쩔 수 없이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그런데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면 소설집 제목 자체가 가장 강력한 역설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의지가 가장 강력한 작가다. 일관된 역사적 회의주의 그 밑바닥에는 역사적 진실과 대안적 글쓰기 그리고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지적 욕구가 깔려 있다. 그 끝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 찾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다,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 김연수에게 역사적 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91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소련의 해체와 맞물리면서 진보적 운동도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지식인들처럼 그는 거대한 시대적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거를 위무하는데서 위안을 얻거나, 현실을 합리화 시키는 데 급급했던 반면 그는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 말고 어쩔 도리가 없다6)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가 갖는 강력한 힘이다. 역사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찾아내는 힘 역시 여기서 나온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 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몰길을 한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이와 같은 글쓰기는 개인과 역사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극적 리얼리티를 얻는다. 김연수의 소설이 자칫 해체적으로 흐르기 쉬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 내용구성에서도 종래의 역사해석에 대한 해체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리얼리티나 진정성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철저한 회의주의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문제와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긴장과 떨림. 우연성과 필연성에 관한 의심은 개인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물음이다.

김연수 소설에는 새로운 역사적 진실찾기의 가능성 또한 잠재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 귀하의 미합중국과 제 미합중국이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듯, 은자의 나라에서 찾은 제 진실한 사랑 역시 사라져버린 그 하루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


이와 같이 ‘타자의 눈으로 역사 바라보기’는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소설이 구한말 초강대국 미국/인의 눈으로 조선사회를 바라보고, 중공군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듯 새로운 시선은 전혀 새로운  역사 해석을 낳는다.7)

4. 재구성인가 해체인가?


김연수의 비관적 지성을 접하다 보면 소설을 읽다 가슴이 턱턱 막히곤 한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성찰은 사람을 힘겹게 만든다.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일이 가장 힘겨운 일이듯. 그 한계까지 밀어부쳐 보려는 김연수의 지적 비관주의. 이는 역시 그에게나 독자에게나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다.

김연수 소설은 재구성인가 해체인가? 김연수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드는 의구심이다. 이렇게까지 해체하면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극단적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엔 새로운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완전연소해 버리는 건 아닐까? 김연수의 문제의식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사람조차도 힘겨울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나에게 소설읽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의문이 시작된 사람에게 보수(保收)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통적 글쓰기를 고수하는듯 하면서도 ‘사실주의’적 기법과 전혀 다른 김연수 소설이 어떤 결론에 이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험이 매우 유효하며,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은 분명하다. 21세기에도 소설이 계속 존재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김연수 같은 작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지금 여기 두 발로 발딛고 서려고 유령같은 기억, 불안, 망설임, 의심과 싸운다. 내 삶은 유령의 삶이 아니다.

 

 

1) 역사소설 중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영웅소설조차 상황이 바뀌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을 때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실존적 고뇌와 긴장이었다. 역사적 선택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냉혹한 진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조두진의 <도모유키>는 일본군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다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이런 변화들이 역사학에도 반영되어 요즘은 미시적인 세계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탈근대 역사학도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3) 2006년 7월 23일자 경향신문 [한국을 이끌 60인] 인터뷰 기사 中에서

 

 

4) 자전거 전국여행을 꿈꾸는 나에게도 로망처럼 남아 있다. 시종일관 한 편에 바다를 끼고, 그 반대편에 절벽과 산을 끼고 달리는 상상을 한다. 그 코스는 자전거 여행 경험자의 말에 의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5) 이와 같은 탈근대적 글쓰기에 대해서 김영하의 장편소설 [아랑은, 왜]도 참고할 만한다.

 

6) 최근 출간된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거대한 시대의 변화 앞에서 상처받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정녕 이것 뿐인가?

 

7) 예컨대 그가 보기에 친일문학 작품의 문학사적 성취를 찾기란 어렵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만 쓰여졌으므로 지금 이곳에서 읽으면 “웃기는 것”이다. ‘한국문학=남한문학’ 이란 등식도 통일 후 우스워 보일 만한 게 수두룩하다. 동아시아문학 또는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다시 읽으면 ‘웃기는 것’투성이이리라. 경계를 넘지 못한 문학은 시공에 갇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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