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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0
    꽃향기(1)
    칸나일파
  2. 2009/03/23
    영리한 건가?(3)
    칸나일파
  3. 2009/03/13
    [3월] 꽃이 피나요?(4)
    칸나일파
  4. 2009/02/02
    [2월] 봄을 기다려.
    칸나일파
  5. 2009/01/19
    [메모] 1월
    칸나일파
  6. 2009/01/07
    연말 시상식 소감(3)
    칸나일파
  7. 2008/12/18
    진심이 통한다는 말
    칸나일파
  8. 2008/09/02
    의식의 밑바닥
    칸나일파
  9. 2008/06/23
    보수는 늘 날로 먹는다.(2)
    칸나일파
  10. 2008/04/01
    박스가 사라진다
    칸나일파

꽃향기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밤공기를 타고 꽃향기가 진하게 퍼진다.

이 꽃/향기에 어울리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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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건가?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겁하게 살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리한건가? 비겁한건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그냥 즐겁고 싶다.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재미있거나, 혹은 유익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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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꽃이 피나요?

3월 13일


꽃이 피는 건가요? 난 지금 술이 살짝 취했고, 그냥 꽃이 피는 건거요? 그렇게 물어요.

꽃이 피겠죠?? 누구에게나...그게 봄이잖아요. 꽃이 피잖아요.




봉중근 열사까진 참겠는데 이치로 영어 못한다고 신나서 지랄하는 것들은....븅신들....

그렇게 자랑할 게 없어서...그런 걸로 우월질이냐?? 열등감쟁이들.




진보넷 블로그가 너무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다. 이걸 옮겨야 하나??

난 자주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보길 바라면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새로운 룸메가 들어왔다. 많이 힘들어한다. 또 그 사람 덕에 많이 즐겁다.

그녀에게도 봄이 온다. 봄은 온다. 그게 봄이 아니라면. 아니, 봄 너마저.



동네 만화방에 가서 20세기 소년 마지막권은 왜 없냐고 물었다.

마지막권은 아직 안 나왔다고 말한다. 그 만화방, 자격미달이다.

20세기 소년 마지막권은 제목이 [21세기 소년]이다.

결국 나는 만화책을 사고 말았다.

나는 25권으로 완결된 만화 가운데 마지막 2권만을 소장하고 있다.

어색하고,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만화책 딱 2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칸나는 큰 활약을 못 한다.

내 블로그 칸나일파는 칸나에게 바치는 20대의 마지막 순정이었는데...

칸나....아~~ 어릴 적 듣던 칸나 앨범과는 다른 느낌. 훨씬 설레고 가슴저미는 이름이야. 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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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봄을 기다려.

10일

늦게 일어나서 늦은 점심을 먹고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한겨레 신문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30분간의 자학과 냉소. 요즘 신문을 읽는 시간은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그 만큼 신문이 보기 싫고, 신문이 보기 싫은 만큼 세상이 싫다.

그래서 신문을 봐야 한다. 그 답답한 세상을 향한 마지막 문 만큼은 닫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

열고 닫는 게 언제까지나 내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 만큼은 남겨두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는 대형 광고니까 볼 필요가 없고, 바로 그 앞 두 페이지.

그러니까 칼럼과 사설로 가득찬 그 두 페이지가 자학과 냉소의 알곡이다.

어떤 날은 너무 자세히 읽고 어떤 날은 아예 건너뛰는 그 두 페이지 상단에는 [여론]이라고 쓰여 있다.



10일자 신문,

왼편에는 김선주 칼럼 [말은 없고, 헛소리만....]

오른편에는 아침햇발 [진보가 답답하다]

제목만 읽어도 전해오는 그 가슴 답답함. 꽉 막힌 진흙 속에 쳐박힌 물고기처럼 코나 입이 아니라

아가미로 호흡해야만 하는데...숨을 쉬면 쉴수록 아가미로 진흙이 들어와 숨통이 막혀간다.

그래서 읽는다. 그 느낌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물론 이것은 현실에 등을 돌리지도 완전히 발을 담그지도 못하는 자기 연민이다.



김선주 칼럼에는 온통 자학과 절망으로 가득찬 글쟁이의 무기력감으로 가득하다.

'더 이상 말이 말이 아니고 글이 더 이상 글이 아닌 세상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글을 써야 한다면, 글로 돈도 벌고 의견도 말하고 신문사도 굴려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글밖엔 나올 수 없는 세상이다.

매일 엄청난 양의 뉴스를 본다. 용산 철거민 참사 관련 기사는 빠짐없이 본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본다. 종종 아는 사람들 얼굴도 보인다. 내가 지금 저기 같이 있어야 하는걸까?

그런데 그 곳이 무겁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말고 마음이 무겁다. 내 언어로, 내 말로, 내 열정으로

저기에 가 있어야 하는데...무언가를 아직 놓치고 있다. 아니 못 찾고 있다.



아침햇발은 최근 민주노총 사태를 중심으로 대중으로부터 괴리되어 가고 있는 대중조직의 문제점을

꼬집는 글이다. 이쯤이면 좌청룡우백호 급이 아닌가? 글 두 편이 주는 무게감은 10년의 무게를

얹어놓은 듯 버겁기만하다. 그런데 아침햇발 글은 일면 공감이 가면서도 한 편으로 불편하다.

나처럼 대중조직도 대중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란...대체 어디쯤 있어야 할까?



그 대중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군중처럼만 보인다.

광우병 사태 때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백번 양보해서 철거민들의 저항이 너무 극단적이었다고 해도, 자기 먹는 소고기엔 그토록

흥분하면서 살 곳이 없다고 저항하다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선 어찌도 그리 이성적이고 냉철하신지....

혹여 가슴 속에 꿈틀대는 재개발과 뉴타운의 꿈이,

저 사람들도 결국 돈 때문에 저런 것이니 결국 나와 다를 게 없다는 자기 위안이,

심각한 소크라테스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배부른 돼지가 되고 말리라는 타협 정신과

자신만은 고된 된장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거라는 부푼 환상이,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못하다는 자기 기만이.......

그런 나도 나가지 않는 이유는?? 아...짜증나고 머리 아프다. 화난다.

그런데 그 대중을 사로잡겠다는 발광하는 대중조직은 대중 못지않게 대중적으로 썩었고....






결국 문제는 대중도, 대중조직도 아니고 나 자신이다.

내 글과, 내 생각과, 내 행동과, 내 삶이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올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루저의 인생을 끝마쳐야 한다. 아니 적어도 끝마치는 출발점은 되어야 한다.

이게 유일한 올해 소원이다.






2일

어른 혐오증이 있다. 더더욱 아저씨 혐오증이.

오늘도, 예의 말많은 지하철에서 진상 아저씨를 만나고 글을 쓰려 했으나...지친다.

쓰기도 전에 심리적으로 지치는 이 기분. 천천히 쓰자.

....

하루가 지났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를 읽다가 문득 아톰의 스토리가 궁금해진 나머지

웹하드를 뒤졌는데 다행히 1982년판 TV판 astro boy를 찾았다. 다운 받아서 5편까지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게 11시. 아 오늘은 정말 행복한 잠에 푹 빠질 수 있겠구나 싶어 컴퓨터를 끄고

잠을 청했는데 마침 룸메이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깼다.

그 순간 직감한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글렀구나.

꼭 11시나 4시다.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잠들어야만 하는 운명처럼. 때론 이런 것도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일반 직장인들이 잠드는 11시를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심리적으로

쪼들린다. 다른 세계다. 너무 많은 기대와 후회가 버무려진 잡념, 또 그와는 대조적으로

너무 조용한 세계. 나는 공상의 바다를 표류한다. 인터넷이나 케이블 TV 속도 표류한다.

.....


다시 아저씨 혐오증으로 돌아가자.

그 시작은 아빠다. 특별히 아빠가 나쁜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아빠였다.

가난하고, 힘없고, 그래서 조금은 비굴하고, 그래도 남자라고, 아니 그래서 더욱, 집안에서만

용감한 평범한 아빠였다.

무엇보다 아빠의 패배주의가 싫었다. 부모들은 왜 그렇게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한국 청소년들처럼 스트레스 많이 받으며 열심히 사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늘 부족하다. 모자르다. 게으르다. 배불렀다. 안 된다. 하지 마라. 그래서 늘 결론은 '되겠냐?'는

그 말. 뭘하든 안 될 것이라는 그 말. 그러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지는 꼭

알아달라는 그 짜증스런 자기연민.

그러면서 동시에 사기를 꺽는데는 세계 최강이다. 공부밖에 모르던 고등학교 때나, 운동밖에

모르던 대학교 때나, 먹고 사는 것밖에 모르는 지금이나 '니가 별 수 있는 줄 아냐?'는 그 말은

늘 나를 화나게 했다. 패배하고 사는 건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처럼 살라는

말이야?

여기에 덧붙여, 사소하지만 내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유. 담배연기가 너무 싫었다.

아빠를 욕하면서도 아들은 아빠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외모 빼고는 아빠를 닮은 구석이 없다.

아빠가 하는 정반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빠가 소심하다는 사실이다. 아빠가 골수 마초들처럼 용감하기까지 했으면

지금쯤은 이미 파국이다.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아저씨 혐오증의 씨앗은 비겁함에 있다. 조직과 권력(강자)에 약하고

가족과 여자(약자)에게 강한 아저씨. 여기에 병역거부 이후로는 한국 남성들이 대개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아저씨 혐오증을 강화시켰다. 그게 어느 정도는 이미지라해도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버렸다.


한 번 가속이 붙자 혐오증은 급속도로 확산. 별 게 다 꼴보기 싫다. 가장 예민한 장소는 지하철.

어제도 진상이 하나 있었다. 은색 플라스틱 소재로 된 지하철 의자. 끝 쪽에 아저씨가 다리를 꼰 채

신문을 좌~악 펼치고  앉아 있다. 습관적으로 조중동이 아닌가 확인한다. 한국경제다. 아쉬비~~

극도의 증오를 맛볼 수 있었는데. 당연히 옆자리 하나는 비어 있다. 그런데 그 진상이 입으로 계속

뭔소리를 중얼거린다. "의자를 왜 이 따위로 만들었어 미끌어지게~"라고 연신 투덜투덜대며

동의를 바라는 듯 곁눈질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빙신 쉐끼. 저 다리를 그냥 올미다의 예지원처럼

도끼로 날려버렸음 시원하겠는데...(휴~어렵게 수양해서 그나마 내면화된 10퍼센트의 평화주의적

심성마저 날아가는 순간.)

한 번은 밤 11시 넘어 신도림 역에서 까치산으로 향하는 곁다리 2호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한

할머니가 강남콩을 팔고 있었다. 엄마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이거 살짝 진심이다.) 너무 밤 늦은

시각에 힘들어보여서 남은 콩을 죄다 사고 말았다.(아 충동구매...그래도 그 순간 강남콩으로 지은

밥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걸 지켜 본 할아버지가 까치산 도착할 때까지 같이 타고

가는거다. 아 완죤 짜증나는 상황이다. 타고 가면서 내내 칭찬을 하는데 어디로 사라질 수도 없고.

차악의 칭찬은 '요즘 젊은이들 중에도 아직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구먼(있구만보다는 있구먼이

상황설정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 이고 최악의 칭찬은 '그래도 아직은 한국의 미래가 밝어.'

할아버지의 므훗한 미소에 한 방 날려드리고 싶다. 난 하나도 안 착하고 할아버지같은 사람

별로 안 좋아하고 무엇보다 한국의 희망찬 미래 따윈 개코딱지만큼도 관심 없거든요.

(흠. 주제와 달리 할아버지 혐오증으로 흐르는건가?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군.)



이렇게 저렇게 자가 증식한 혐오증은 이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새로운 소재를 찾아 커나가고 있다.

등산복 입고 술마신 상태에서 얼굴 벌개가지고 술냄새, 발냄새, 땀냄새 풍풍 풍기며 지하철을 점령한

아저씨들, 그러고도 서넛만 모이면 시끌시끌 안하무인인 아저씨들, 대놓고 두 칸 걸쳐 앉아 가는

아저씨들, 남자는 원래 다리구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건지 옆에 이빠이 오므린 아줌마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 쫙벌남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나이부터 따지는 아저씨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말하는 아저씨들....들들들....




어차피 터진 입으로 쏟아낸 말들을 주워담기도 힘든 지경까지 왔으니 평소 생각을 다 쏟아보자.

난 어른들이 '예의없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게 정말 듣기 싫다.
(어른에 대한 반감은 꼭 아저씨를 향해 있다기 보다는 어른 전체를 향해 있지만 똑같이 재수없는
짓을 해도 아저씨가 조금 더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볼 때 그들은 그들이 체화한 생존방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짜증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앉을라고 떠밀면서 올라타고, 조금 사람이 많다 싶으면 밀어대고, 몸에

손대고, 줄 잘 안 서고, 새치기 하고, 그래도 싸우다 불리하면 나이로 다 해처먹으려고 한다.



또 으시대는건 좋아해서 뭐든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서 상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의 대화는 대체로 대화가 아니다. 들어주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줄줄줄.

구치소에 있을 때도 그래서 대화를 기피했다. 너 어디 나이트 가봤냐? 너 거기 몇 번 국도 따라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왕년에 내가~'로 시작해서 '~침 좀 뱉어봤다.'로 끝나는 그 대화를

듣고 있자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것도 자랑거리냐? 좀 멋있게 보이고 싶으면

노력이나 하던가...




1일


며칠째 계속 심난한 꿈을 꾼다.

어지럽고 복잡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되섞인 꿈을 꾼다.

그리고 당연히, 깬다. 꿈의 의미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집을 나선다. 내내 잊고 지내지만

마음 속에 계속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다. 대체 그 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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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월

1월 26일

연휴 때 다운받아 본 영화 목록


- 우리는 액션배우다.

흔히 스턴트맨이라 불리는 액션배우를 지망하는 젊은 남녀의 (주로 남자의) 이야기.

다큐멘터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 나래이션이 맛깔 난다.

학원 샘중에 한예종을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꽤나 깊이 관여해서 만든

영화. 놀랍다.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노래나 영화를 볼 때마다 살짝 감탄이

작품의 오라에 따라 그걸 만든 사람도 달라 보인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액션배우를 지망하게 되었고 그 결과도 제각각인, 그래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진부하면서도 하나도 진부하지 않은, 짠하고 놀랍고 서글프고 그리고

평범한 이야기. 보통 사람들의 특별했던 삶의 한 순간. 을 담은 이야기.


- 공각기동대 2

오시이 마모루가 실사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살짝 들었던 기억이. 작년 전주 국제 영화제

다녀온 친구들이 했던 말인데...그냥 신작 애니가 나왔다는 말을 잘못 들은 것인지??

공각기동대 2를 봤다. <블레이드 러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에 대한 회의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인간이 '정보의 집합체' 그 이상이 아니라면 과연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끝없는 질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섬세함의 덧칠을 가할수록 질문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제는 아예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넘어서 인간과 네트워크화된 프로그램의 차이를 묻는다.

자가 증식하면서 진화하는 단계로 들어선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자립을 원하고,

그 순간 인간은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어 버린다.

조금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전쟁과 과학의 발전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대할 때마다, 이 쯤에서 발전 따위는 아예

집어던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더 필요하긴 한가?

그냥 mp3플레이어니 인터넷이니 pmp따위 정도의 소소한 욕망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가지려 할수록 마음은 비어간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생겨난 욕망은 사라질 수 있을까?

예전에 읽었던 만화 [총몽] 생각난다.

'기억이나 관념을 빼고 나면 넌 뭐가 남지?? 기억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면 인간이란 무엇이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기억과 몽상과 사색을 빼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는 요즘이라 그런지

유난히 저런 대사들만 기억에 남는다. '넌 무엇으로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거야?'라고 재촉하는 듯

들려.



인간보다 더 인간이기를 원하는, 인간보다 무엇이 인간인지를 더 많이 고민하는, 오히려 그래서

더 인간같은 그들이 차라리 작가의 아바타 같다.



- 다세포 소녀

한국 사회에 대한 조롱인가? 현실비판적인 작품이 점점 환타지에 많이 기대는 이유는 ....

촌스럽다, 부담스럽다 따위의 비판을 빗겨가기 위한 궁여지책 혹은

상상력의 작동 혹은 아이러니나 우화 따위??

뭘로 생각해도 이 작품은 실패다. 감동적이지도, 재밌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물론 중간 중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도 한 서너번 그 뿐이다.

피라미드에 빠진 엄마의 돈을 갚지 못해 모텔로 끌려간 김옥빈. 교복을 입히고는 ....

같이 여고생 복장을 하고 사진찍고 수다 떨고 노는 걸 즐기는 크로서 드레서 조폭.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하는(M to F)동생에게 포르노를 보여주고 발기하자 이게 현실이라고

외치는 상황 설정.

왕따가 된 외눈박이가 축구부 주장에게 동성애 상대로 묘사되는 장면 등등....

이건 뭐 참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묘한 서글픔이나 날카로움 따위도 없고.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고..

블랙 코메디는 더더욱 아니고. 그냥 조잡한 코드와 조합과 난기류의 연속이다.

구성도 엉망이고 서로 다른 이야기 서 너개가 중구난방으로 배치된 느낌이고...

등짝에 가난이 붙어 다니는 익숙한 코드 말고는 친밀감을 표시할 무언가가 없다.

[좋지 아니한가]를 볼 때도 그랬지만, 구질구질한 일상에 똥침을 날리고 싶어했던 영화들은

막연한 마지막 한방을 기다리게 만들다가 이도저도 아닌 허탈한 결말로 끝나버린다.

감동도, 웃음도, 날카로움도, 그 무엇도 아닌.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환타지도 아니고 뭐야??


환타지는 <지구를 지켜라>, 드라마로는 <천하장사 마돈다>





1월 23일

확률/통계 수업을 한다.

'남학생 4명과 여학생 3명이 원형 테이블에 앉는데...' '남학생 4쌍과  여학생 3쌍이

자원봉사를 하는데...' '남학생 5명과 여학생 3명이 토너먼트로 경기를 진행하는데....'  등등등.

모든 문제가 남학생이 먼저고 여학생은 나중에 나온다. 확률/통계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경우를

나누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언제나 기준이 되는 것은 남학생이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문제가 불편해서, 내 반응은,

'여학생들도 수학과에 많이 가서 문제를 바꿔라.' '왜 늘 남학생이 더 많은지 이상하지 않느냐?'

'수학 교사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라 늘 문제가 이런 식이다.' 따위의 반응을 한다.

더러는 웃고 대부분 아무 생각 없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남학생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껏

적극적인 동의를 표하는 학생은 딱 한 명 있었다. 그 학생은 영원히 까칠하단 소리를 들으며 클 것이고

그걸 즐겁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맘이다.





메일을 확인했다. 가자 지구에 보내는 2차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는 메일이었다. 1차는 대체 언제

했었지? 부끄럽고 미안하고...2차 후원금을 보내야겠다.

돈만 보태는 건 아닌데...미안하지만...마음도 보낸다.





한겨레 목요일 섹션은 고민상담 코너가 있어 즐겁다. 격주로 카운셀로가 바뀌는데 오늘 고민은

대략 이랬다. 자기는 32 여자랜다. 능력도 있고 외모도 괜찮고 20대에는 연애도 자주했고....

그런데 지금은 조금 불안하고 결혼을 할 건 아니고 그렇다고 매달리지도 않고 ...

이거 말투가 점점 .... 난 외로울 뿐이고...근데 까칠하단 소리 듣고... 타협할 마음도 없고....

뭐 이런 식이다. 카운셀러의 결로은...황당하지만...귀여운 여자가 되라는건데...

(지난 주에는 김어준이 비겁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용감한 신세대 마초가 되라하더니...)

지금 검색해보니 꼭지 제목이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이고 이번 주 제목은

<누가 귀여운 여자를 퇴짜 놓으랴> 였군.


뭐 다 공감하긴 어렵지만

"드세면서도, 머리에 든 게 많으면서도, 자립한 어른이면서도, 의식 있는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여자는 동시에 얼마든지 귀여울 수 있습니다."란 말을 들으며

이걸 남자 버전으로 바꾸면 뭘까 고민해봤다.

암튼 정말 잘나야겠군. 잘났다 잘났어. 카운셀러 잘났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일테고....

그러면서도 살짝 공감이 가는 것은... 그러면서도 참 피곤한 삶이군. 삶은 언제나....

이기적이야.




1월 19일

줄거리 전체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흐름은 기억나고 몇몇 장면이나 대사는 분명히 기억나서

꼭 본 것 같은, 근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대사는 어디 영화정보

프로그램 같은 데서 봤을 거고. 이런 영화는 미뤄둔 숙제처럼 언젠간 봐야지, 언젠간 봐야지 문득

문득 떠오르지만 막상 볼 생각을 하면 지겨워진다. 대충 알고 있어, 영화는 보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들고. 그런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이건 감상이 아니라 투자라는

기분이 든다. 숙제를 하자, 숙제를 하자. 이 영화를 봤다는 지적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뜩이나 산만한 터에. 이젠 동영상으로 다운 받아 보는 시대가 되니.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창을 조그맣게 줄여놓고 인터넷을 하기 쉽상이고 익숙하다 싶은 장면은 건너 뛰는가 하면

(곰티비 같은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은 정말 동영상 세대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
케이블 TV도 그렇고 정서안정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산만함만 더할 뿐. 너무 많고 넘쳐서
오히려 가볍고 헤프다.)

졸다가 되돌려보기 일쑤니 어지간해서 감정 몰입이 안 된다.



그런 영화 리스트 제일 꼭대기에 자리한 [봄날은 간다]를 봤다.
(홍상수나 김기덕 류의 작품이 이 리스트에 많다. 왠지 봐야할 거 같고 또 보면 그러저럭 괜찮은데
마음 단단히 먹고 봐야할 거 같은 이유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제법이다. 사랑 영화를 보고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이후 처음인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둘 다 허진호가 만든 것이더라. 그 뒤로 찍은 영화들이

그다지 댕기지 않는 이유는 초반 영화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어눌한 말투와 너무 큰 키에서 나오는 싱거운 이미지에 유지태 특유의 처진 눈.

이 작품이 <주유소 습격사건>과 더불어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찌질이 역을 이보다 더 잘 소화할 순 없을 것 같은 느낌. 배우 제대로 골랐다. 완전 100%다.

이영애 역시 마찬가지다. 영원히 늙을 것 같지 않은, 젊을 때도 어려보이지 않았을 것 같은

이영애.(요새 뭐하나?) 피부가 작살이다. 남자를 요리하는 능력 또한. 쥐었다 폈다. 거두어 들이시고

다시 내팽개치시고 끝내 다시 찾아가도 하나도 찌질해보이지 않는 그 세련됨.

이와 비교되는 혼자 울고 불고...술마시고 매달리고...전화하고 버림받고...끝내 열쇠로 차를 긁다가

들켜버리는 유지태의 막장 포스. 그런데 막판에 이영애가 유지태를 다시 찾아가 찝적대는 모습은

좌절한 남성들을 향한 화해의 메세지인지 아님 감독의 환타지인지. 쩝....

'떠나간 여자랑 버스는 붙잡지 말라고 했다.'는 할머니의 유언이 무색하게스리 되돌아오는 이영애라니..

그래도 남자들은 그걸 바랄테니. 일부러 위안을 주려한 듯. 그러고보면 영화들이 죄다 순정파 남성을

앞세운 감독의 특성상, 한우물만 파는 남자에 대한 애착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아무리 허대가 좋아도 유지태처럼 말 안 통하고 답답한 사람 별루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건 하도 많이 들어서 그냥 그랬고, 오히려 유지태가 오바하고 난 다음날

헤어지면서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없지?'라고 말한 장면에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끝까지 후까시

접지 않는 남자의 오기라니. 처절하고도 처절하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쳐 운다. 빙신~~

이영애가 다시 찾아온 장면에서도 끝내 거절하더니 보내놓고 또 질질. 나 같음 낼름 붙잡을 거 같은데.

암튼 자기가 차놓고는 남자가 궁해지니 다시 연락해서 만나자 마자 '오늘 같이 있을까?'라고 직접

질러대는 이영애의 용기. 오 부러워~~

(이영애가 산다면 강릉 가서 살 거 같다.)



노망난 할머니의 처절한 남편 기다림도 상당히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 같은데. 유지태가 차인 시점과

할머니가 이뿌게 차려 입고 나가서 끝내 세상을 뜨는 시점이 일치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어떤 한 국면을 넘어섰다는 뜻인지. 남편을 기다린다고 수색역 대합실에 죽치고 있던 할머니가

유지태에게 사탕을 건내고 마루에서 혼자 울고 있는 유지태를 다독이는 등. 유지태의 상처를 가장

잘 알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할머니라는 것도 조금 애틋했다.




이 외에도 술쳐먹고 찾아가서 재워달라고 땡깡부리는 장면, 열쇠로 차를 긁는 장면 등등 유지태의

찌질이 포스가 너무 강력해서 마지막에 유지태가 갈대숲을 찾아 미소짓는 장면이나 시냇물 소리와

같이 녹음된 이영애의 허밍 따위는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빗소리는 참 이뿌게 들리더라. 누군가를 애타게 그립게 만드는 그런 소리. 듣고 싶다.

반지하를 탈출하자. 엉뚱한 마지막 교훈.





1월 14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 지구 접경 지역에서 폭격 장면을 구경한다는 뉴스를 봤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무기력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 계속 그 생각이 날 때마다 멍해진다.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수치고 모욕이다. 같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짐스럽고 역겹다.

전쟁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재미있지만 한 편으로는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는 구경꾼의 인터뷰에

토가 나오려고 한다. 욕 보이고 싶다. '너도 당해보라.'고 '너도 사람이냐.'고 ...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바닥을 보이는 인간의 추악한 심성에 절망감만 커질 뿐이다.

사/람/이/싫/다.






1월 13일

요즘 뜨고 있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와 '달이 차오른다'를 들었다. 장기하 스스로 <산울림>이

모델이라 했다. 기타 사운드는 <산울림>인데 목소리는 오히려 송창식을 닮았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노래를 자꾸 듣고 있으면 정말 어디론가 가야할 거 같다.

그런데 왠지 저 노래는 어디론가 갈 수 없는 사람의 푸념으로 들린다. 10년 전 패닉의 UFO가

버림받은 자들의 노골적인 복수를 노래한 환타지라면 '달이 차오른다'는 88만원 세대가 잠 못 드는

불면의 새벽에 읊조리는 넋두리 같다.

애초부터 되돌려 줄 생각 따위는 포기한 무기력하고 지친 자들의 긴긴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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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시상식 소감

올해는 아무래도 학원과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 계속될 거 같다.

노는 것도 해본 사람이 잘 놀듯. 취미를 가져본 적 없는지라. 시간이 나도 할 일을 못찾고.

그래서 올해는 블로거가 돼 보기로 마음 먹었다. 글쓰는 건 돈도 안 들고 몸도 안 쓰고.

몸도 쓰긴 써야 하는데...쩝.



어제 케이블 TV에서 신해철이 비를 인터뷰하더라.

마지막에 신해철이 대놓고 "국제적인 스타가 돼서 한국을 빛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거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라.'고 당부를 하더라. 좀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신해철 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느낌이랄까?
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시원스레 할 수 있는 사람이 신해철 말고 몇이나 되겠나?

예전에는 신해철 좀 짜증났는데 애가 일관되게 저러니까 괜찮다. 난 일관된 캐릭터에 후한 편이다.




연말에도 약속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이런 저런 시상식을 많이 보게 됐다.

시상식을 볼 때마다 볼까 말까 고민하는 이유. 시상식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무엇보다 이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는 판에 박힌 듯한 그 인사말이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 탓도 있지만 시상식에서 경쟁하듯 꼭 저런 말을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개인이 종교를 갖는거야 자유다. 하지만 기독교가 국교도 아닌데다 한국처럼 다종교 사회에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많은데 왜 꼭 저런 이야기를 해야 하느냔 말이다.

난 저런 게 일종의 예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뻔히 알지 않나? 한국인들의 정서가 종교 앞세우는 거

꽤나 싫어한다는 걸. 그런데 굳이 한단 말이다. 그럼 얘들이 그렇게 지조 있는 애들인가 하면

뭐 다른 문제에선 절대 다른 사람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단 말이지. 게다가 시상식에서 수상할 정도면

소속사, 방송사에서부터 시청자 반응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어차피 인기로 먹고 사는 직업이니

이해한다. 그런데 유독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다.


작년에 씨네 21에 듀나가 쓴 글에서도 봤는데 이렇게 경쟁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경은

다른 나라 시상식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많은 나라에서도

이런 풍경은 매우 드문 일.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개인주의 측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란다. 개인주의란 측면에서 보자면,

연예인들의 발언은 기댈 곳 없는 한국인들이 무엇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기도 한다.

일단 소속사, 방송사 등 돈을 대주고 있는 곳, 그 다음 국가와 가족, 그리고 하나님.

개인적인 이야기는 지극히 적고 모두 남 이야기다.

누구한테 감사하다, 누구한테 감사하다 인사만 하다 끝난다. 개인의 노력으로

얻은 성공인데 왜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지... 물론 한국인 정서상 지나치게 잘난척 하는 건 못봐주지만

계속 남 이야기만 하다 끝나는 시상식 짜증난다. 그냥 고맙다는 말은 좀 따로 만나서 하고 자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그래서 지극히 신변잡기적이고 말 많은 시상식을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지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발언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단조롭고 짜증나는

반복의 말더미 속에서도 시상식이 재미나는 이유는, 그래서 더욱 더 그런 것이겠지만,

자기만의 언어와 생각을 갖고 있는 연예인들의 발언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을 못 해서 속상한 여자가 아니라 바보 분장을 못 해서  속상한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말한

개그콘서트 박지선의 수상소감에서는 가슴이 아린 게 눈물이 날려고 하더라. 여자인 동시에

개그맨이(또는 개그우먼??) 될 수는 없는 걸까? 혹은 개그맨이 여성스러우면 안 되는

것일까? 한 편으로 자기 색깔을 찾지 못하고 금새 잊혀지는 예쁜 개그맨들도 안스러웠다. 박지선보단

조금 덜 짠하지만 말이다. 어떤 포지션을 취하든 힘들겠다 싶다. 갑자기 공대에 다니는 여학생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여학생 중에 하나가 공대에 붙어다고 좋아하는데 그녀의 환타지에 대고 그닥

해줄 말이 없는 이유는, 그보다는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이유도....



"모 단체에서 올해 최악의 예능 프로그램 1위로 개그콘서트를 선정했던데 만약 개그맨들이 방송 한

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 회의를 하며 고생하는지 봤다면 그런 선택은 안 했을 것이다.'

이 말은 개그콘서트에서 [소비자 고발]이란 꼭지에 나오는 황현희의 수상 소감이다. 내 주변에는

황현희 싫어하는 애는 별로 못봤다. 이미지가 꽤나 좋았다. 나름 말이 통하는 캐릭터라는 인상을 줬다.

그런데 저 수상소감은 좀 실망이다. 뭐 열심히 했는데 욕먹으니 조금 기분은 나빴겠지만 우선 저건

개그콘서트를 종합 평가한 것이지 황현희 개인을 평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민언련에서

개그콘서트를 최악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선정한 주된 이유는 '여성비하적 발언과 상황설정'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왠만한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쉽게 혐의를 벗어던질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개그콘서트는

여성비하적 발언이 많다. [독한놈들]의 곽한구가 절정이고, 노래 부를 때마다 여자들 외모 가지고

장난치는 일출이 역시도. 가학성을 줄이고 남을 웃길 수 있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처음 음악할 때부터 30년 동안 늘 생각해왔던 거지만 한국 사회가 너무 근엄하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이 말은 제대로 늙은 아저씨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배철수의

발언이다. 가벼워졌으면 좋겠다는 말은 전혀 가볍지 않았고, 직격탄을 날리진 않았지만 불필요한

권위가 지배하는 이 사회를 비판하는 말로 충분해 보였다. 배철수의 얼굴에서는 저런 말이 나와줘야

한다. 냉소를 빼면 그 얼굴에 뭐가 남겠나. 그 얼굴과 그 말이 인생을 대변한다.



PS. 1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연예인에 대한 이미지가 확 나빠진다. 안타깝게 그 불쾌한

연예인 리스트가 한꺼번에 확 불어나서 찝찝했다.

좀체 대중가요를 듣지 않는 나 마저도 혹했던 원더걸스의 Nobody.

그런데 원더걸스 다섯 명이 모두 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묘한 절망감, 혹은 분노. 또는

어떤 위기의식. 배후설 따위의 구린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느낌.

그 어두운 느낌은 한국 사회를 향해 있다. 정확히 분석은 안돼지만 느낌상으로는 이미 교회가

출세나 성공을 위해 권력에 줄대기 위한 수단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 혹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구축해 나간다는 느낌.

신봉선 때문에 한 번 좌절했는데 김명민마저 "하느님이 내게 이 정도 탈렌트밖에 주지 않아서 이렇게

정말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는 연기자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는 짜증 정도의

감정이 아니었다. 김명민 너마저. 2008년을 빛낸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전부 하느님의 후광으로

만들어진듯한 이 찝찝한 느낌이란. 강마에의 편집증적인 연기를 빼면 뭐가 남겠나?



PS. 2

mbc 파업에 대해 언급했던 이문세, 문소리 멋지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그렇다. 좀 그런 얘기 해주는

사람도 있으면 안 되냐?? 나경은 아나운서가 파업을 해도 심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유재석이야 국민

엠씨 꼬리표를 달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라디오에서 만나던 문지애도 느낌 좋고....

연예인이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산다는 그 놈의 대의 좀 그만 듣고 막나가는 무식하고

싸가지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제대로 된 애가 한 둘 쯤 나오기를 기대하는 심정이 비단

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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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통한다는 말

믿는다. 그런데 너무 더디고 힘들다.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 너무 드물다.

그냥 콱~정신놓고 막 살고 싶다.



어제 도쿄 3부작을 봤다.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를 보다가 10년 만에 집을 나서려고 결심한

히키코모리가 햇빛을 보며 주저하는 모습에 눈물이 나려 했다. 이런 이런~ 공감하는건가?

왜 이렇게 봄날 햇빛이 그리운건지...

자신도 조금 놀랐다. 그 정도였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졸다가, 슬프다가, 분석하다가, 아프다가, 잠이 깼다.

그랬던가? 이렇게 가슴 아픈 느낌도 졸음 속에 감지한 듯 만 듯 한낮의 꿈처럼 여길 수 있는....

You said I'm not free라고 반복하던 허클베리핀 노래가 계속 '내사랑 나비'로 들렸던 이유는...

이 새벽의 넋두리가 차마 언어로 형상을 찾지 못하고 그저 희뿌연 구름처럼 뭉개 뭉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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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밑바닥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며 가며 생각했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학원에서, 잠자리에서. 음악을 듣다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의식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을까? 지금도 검열하고, 감추고...

쓸까 말까를 고민하다 결국은...

육하원칙에 따라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은 하고 있을 것인가?


사람이 너무나 그립고,

그렇지만,

그래서,

늘 사람을 피하고 싶은...

나는 나를 아는데, 나를 이해하는데 평생을 다 보내려나보다. 지독한 이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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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늘 날로 먹는다.

1.

처음부터 광우병 쇠고기는 관심도 없었다. 쇠고기를 자주 먹는 것도 아니고, 광우병 아니라도 이미 식품 안전에 대한 환상은 깨진지 오래. 요즘 세상에 내가 길러 먹지 않는 이상, 아니 설사 내가 길러 먹는다해도 식품 안전을 어디까지 보장받을 수 있을지...배불리 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는 서민 정서를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터라 그냥 그런가부다 했다. 이런 헝그리 정서가 발전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머리보다 몸이 더 정직하게, 늘 먼저 움직인다.

 

그,럼,에,도

내가 촛불집회에 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보수의 천박함 때문이다.

광우병을 중심으로 대립이 생겼지만 사태가 발생하고 진화,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이 땅의 보수는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도 갖추지 않은데다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래서 나는 흥분하고 또 촛불집회에 나간다.

 

2.

이 사회는 늘 보수에게 관대하고 결국 버티고 뻥치고 시간끌고 둘러대다보면 어느새 보수가 원하는대로 된다. 어제는 택시를 타고 오는데 택시기사가 촛불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두서없이 노무현도 씹고 이명박도 씹다가 갑자기 '민주당도 인제 국회 들어가야지. 언제까지 저 지랄을 할라고.'이런다.

그래...바뀐 거는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장관 몇 바꾸는 시늉하고 되도 않는 추가협상 던져주고 시간 질질 끄니까사람들은 어느새 실증내고 짜증내고 ... 언론은 계속 촛불집회 관두라고 부채질하고 검찰은 조중동 광고 거부 운동은 언론 탄압이라 되도 않는 말을 씨부리고...이게 다 매번 이런다.

 

이런 꼬라지를 10년 넘게 보고 있지나 솔직히 사람에 대한 신뢰, 특히나 대중에 대한 신뢰는

별로 없고 저 거대했던 촛불의 물결은 대체 뭘 원했던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중심리가 발동한 게 아니라면 진지하게 증명해야 할 것 아닌가!! 대체 여론이란 놈은 버티기만 하면 안정희구 심리로 돌아가버리니....

 

3.

최근 몇 달간 광우병 사태와 촛불집회의 향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 현상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스멀스멀 짜증이 밀려 온다. 그 짜증은 대부분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보수를 향해 있다. 근데 그게 나에게도 내성화되어 이제 지레 포기하고 세상은 뭐 원래 그런건가부다 자포자기하는 심정까지 생겨난다.

 

먼저, 폭력성에 대한 이중잣대.

보수세력의 집회를 보자. 군복 입은 아저씨들이나 가스통 들고 위협하는 HID 대원들은 공포 그 자체다. 성조기 흔들며 울어대는 보수 기독교 광신도들이나 종로에서 정세분석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들은 언제나 막무가내다. 게다가 언제나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가공할 공권력. 폭력 시위, 폭력 시위 백날 떠들어봐야 폭력의 강도나 위용으로 보자면 죽었다 깨어나도 보수를 능가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쪽은 늘 폭력이라는 굴레와 멍에를 들고 다닌다. 그나마 사람들이 현명해져 촛불시위가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 있었는데 그 약발도 다 떨어져가는지 보수 언론은 신나서 촛불이 변질되고 있다 그런다. 자꾸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냥

정말 그런가부다 한다.

 

둘째, 각종 자유에 대한 이중잣대.

촛불시위 반대 1인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조롱을 당한다. 하긴...MBC, KBS가 친북좌파세력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다는 허접한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욕을 먹는 건 당연한데...더 짜증나는 건 그들이 토론에서 밀릴 때마다

'우리들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엄연히 민주주의 사회인데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도망칠 구멍을 찾는다는 거다. 표현의 자유 좋다. 그런데 왜 약자들이 짓밟히고 있을 때는 그런 말을 안하나??

자기들이 한 번도 소수였던 적이 없으니 이런 상황 자체도 피곤하긴 하겠지만...이 땅을 50년 동안 지배해 온 우파가, 전쟁 경험 세대의 과거지향적 사고에 기대 살던 사람들이, 군대와 조직과 명령과 복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하니까 조금 역겹다.

조중동이 언론의 자유를 말하고, 검찰이 언론탄압을 규탄하고, HID가 가스통들고 촛불집회를 력시위라고 욕하니...쓴 웃음만 나온다.


얼마 전에는 동생이 이런 말을 다 하더군.

'오빠, 요새는 뉴스가 제일 재밌어. 왜 이렇게 웃겨.'

 

셋째, 이명박을 바라보는 이중잣대.

사람들은 협상 과정이 불만족스럽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제 그만하자고 말한다.

적어도 국제관제에 있어서만큼은 뿌리깊은 패배주의 앞에 할 말이 없다.

이 만큼 먹고 살면 달라지겠지 싶은데도 한 편으로는 그 놈의 경제적 욕심 때문에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한겨레 생활광고를 보다가 '이 손으로 이명박을 찍었습니다. 잘라버리고 싶습니다.'란 문구를 봤다.

자기 손목을 잘라서 피가 철철 흐르는 강풀 만화도 봤다.

이런 식의 자기 고백은 좀 짜증난다. 이명박에 대한 환상은 온전히 환상에 불과한가?? 어차피 그 욕심이 자기 것인 이상, 그게 일시적으로 이명박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 쉽게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먹고 사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욕구는 온전히 제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르긴 뭘....그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며 촛불시위에 나왔다. 그래서 이젠 후회하지 않을까?

그 때는 자른 손을 다시 붙여야 하나? 그리고 그 자기 모순적인 욕망 때문에 이쯤하면 그만하고 경제나 살리자는 욕구가 피어오를 때쯤 보수 언론은 이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출 것이다.

이명박이 대운하를 쉽게 포기 못하는 것은 사둔 땅이 아까워서 그렇다 치자. 그럼 뉴타운에 열광해서 한나라당을 압도적 다수로 만들어준 대다수 사람들은 뭐 그들과 욕망이 많이 다른가?

난 사실 정권 퇴진 구호 재미없다. 별로 동의하지도 않고. 이명박은 엄청 싫지만 그래서 뭐?? 이명박 물러나면 민주당 뽑아주나??

정치공학적인 해법으론 답이 없어 보인다. 힘으로 권력구도를 바꾸자는 목소리도 지겹다.

 

그래서 그런지...

 

이명박 퇴진을 외치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의 이명박

 

이라는 시사인의 어느 글귀가 마음을 싸하게 만든다.

저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그걸 못찾아서 촛불시위에 나가면 늘 정처없다.

우리 안의 이명박. 그게 늘 보수를 승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시간만 흐르면, 참고 기다리면, 적당히 둘러대고 돌아가면, 온갖 흑색비방과 억지로 일관하면

결국엔 자기들이 늘 승리한다는 보수의 강력한 믿음.

 

그래서 보수는 늘 날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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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가 사라진다

1.

새로 이사온 집, 같이 사는 친구는 처음 생긴 자기방을 제대로 꾸미고 싶은 마음에 이 것 저 것 산다. 택배가 올 때마다 빈 종이 박스가 쌓인다. 박스를 내놓고 장을 보러 나갔다. 10분만에 종이 박스가 모두 사라졌다.
아빠도 고물상에 자주 갔었다. 용돈 버는 재미에 폐지가 쌓이면 고물상에 갔다. 소리없이 빈 박스를 들고 사라진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고 사람들은 너도 나도 경제, 경제 외쳐대고 엄마는 매일 부동산 채널만 보고 있는데...세상이 코딱지 만큼도 이뻐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2.

투표를 안하신지 몇 년 된다. 이 번 총선 때도 할까 말까 고민 중이다. 매일 집에서 YTN을 보고 있자니 총선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데 정작 사람들은 총선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하긴 한나라당이 되나 민주당이 되나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다. 경제결정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이미 대통령 한 명이나 특정 정당이 시스템을 바꾸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고 경제구조가 미치는 힘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이 참 건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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