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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이론의 발전과 확장 2부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이론의 발전과 확장 2부 노동자 전위 902호 2007년 11월 9일 멘셰비키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러시아 짜르를 타도했던 2월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의 시작으로서 묘사해왔다. 사실은, 2월 혁명은 1905년 레닌에 의해 개괄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급진 민주주의적 임무들 중 어떤 것도 해결하지 않았다. 1917년 1월 9일 "1905년 혁명에 관한 강의"에서 레닌은 이미 그의 1905년 공식에 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그의 강의는 제국주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있던 러시아에서 계급투쟁의 발전을 반영했다. 1907년 이후 10년 동안의 반동기가 지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1914년 전반기까지 파업 행동의 수준이 1905년 이후 보지 못했던 최고점들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80 퍼센트 정도의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들의 뒤에 있었다. 그의 강의에서, 레닌은 1905년에 관하여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용어로 말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의 냉혹한 흐름은 짜르 정부와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사이의 무장된 그리고 결정적인 전투를 향해 있다." 트로츠키와 같이, 이제 레닌은 다가오는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일 수밖에 없으며, 훨씬 더 심오한 의미에서: 그 내용에서도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혁명.... 오로지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착취당하는 광대한 다수에 지도부를 제공할 수 있으며 제공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레닌의 생각에 심오한 충격을 주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대부분의 지부들이 자기국가의 부르주아지들을 전쟁에서 지지하면서 사회적 배외주의로 무너져 들어갔다. 이것이 레닌으로 하여금 그가 1912년에 완전하게 실행했던 러시아 멘셰비키들과의 분리의 경로를 일반화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기회주의가 퇴화했거나 몇 곳에 국한 된 현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레닌이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인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1916년)에서 펼쳐 보였듯이, 식민지들에 대한 제국주의의 착취로부터 발생하는 초과 이윤들이 노동운동에서 기회주의, 친-자본주의 층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레닌은 모든 개량주의와 중앙주의 경향들로부터 완전하게 분리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투쟁했고 제3 인터내셔널 창건을 제기했다. 사회적 배외주의자들과 사회적 평화주의자들에 맞서서, 그는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정책을 주장했고 다음의 슬로건을 제기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바꾸어내자! 애국주의의 첫 번째 폭발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범람하면서 전쟁이 러시아에서의 계급투쟁의 격증을 앞질러 갔다. 그러나 반동적 분위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전쟁의 공포가 모든 성직자들과 애국자들보다 훨씬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는 5백 5십만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전쟁으로부터 이득을 보던 자들이 "돈벼락"을 맞고 있었던 반면, 군수품 공장의 여성들은 낮은 임금에 노예처럼 일했다. 2월 혁명은 더 많은 전쟁 배급을 요구하는 페트로그라드(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한 후 페테르스부르크로 개명되었다) 여성 직물노동자들의 세계 여성의 날 파업에 의해 대부분 촉발되었다. "질서"를 위한 세력들과의 거리에서의 충돌이 수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결국, 짜르는 자신에 충성하는 군대를 찾을 수 없었고 강제로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소비에트(위원회)들이 즉각적으로 공장들과 친위대와 전방의 군부대들에서 선출되었다. 지방에서는 경찰과 국가 관료들이 체포되거나 쫓겨났다. 수도에서는 노동자들 이 전제를 타도했으나 이로부터 등장한 정부는 부르주아지 정부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1932년)에서 2월 혁명은 농민에 기초한 군대의 자각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소비에트에 선출된 초창기의 군대 대표들은 농민에 기초한 사회주의 혁명가들(SRs/사회혁명당)을 주로 지지했던 글을 읽고 쓸 수 있던 소부르주아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SRs에게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한 영역과 도시 소부르주아 층들을 대표했던 개량주의 멘셰비키들에게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들에서 엄청난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최초의 우세를 부여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시가전이 여전히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소비에트 안에서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에 충성하는 SR과 멘셰비키의 대표들이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억제하면서 부르주아지에게 국가 권력을 잡을 것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부르주아지에 적대적이었고 소비에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배신적인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소비이트를 나라에서 사실상의 권력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2월 혁명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많은 수가 볼셰비키들에 의해 영감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혁명을 수행하였으나 혁명으로부터 등장한 정부는 부르주아 정부였다. 2월 혁명은 2중 권력의 상황을 낳았다. 레닌이 "이중권력"(1917년 4월)에서 설명하였듯이, "부르주아지의 정부인 임시정부와 나란히, 아직은 약하고 초기단계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정부인 또 다른 정부 -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 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은 지속될 수 없었다 - 어느 한 계급이 지배해야만 했다. 레닌이 볼셰비키들을 재무장시키다 한편, 아직까지 레닌이 스위스에서 망명 중에 있던 볼셰비키 당은 경험 많은 볼셰비키들인 스탈린과 카메네프 하에서 화해주의자의 방침에서 움직여지고 있었다. 1917년 3월 시베리아 유형에서 복귀한 후 볼셰비키의 중앙 기관인 프라우다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과 카메네프는 레닌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대를 유린하기 위하여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오래된 공식을 사용했다.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수석 편집자이던 프라우다 3월 15일자는 "임시정부가 반동과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한"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볼셰비키의 혁명적 패배주의에 날카롭게 거역하면서 프라우다는 "모든 병사들은 현재의 전투지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짜르의 검열에 의해 보호받던 불철저한 신문이 그 이름으로 치장했던 모든 '패배주의'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 첫 번째 혁명정부가 등장하던 순간에 죽었다."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프라우다는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당의 통합을 주장했다. 1917년 3월 볼셰비키 당 대회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스탈린은 부르주아지를 적대시했다고 1905년 12월 봉기를 비난하는 멘셰비키 플레하노프 처럼 보였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로부터 불가피하게 후퇴하게 될 부르주아지 층들을 밀쳐내는 과정을 재촉하는 일을 강제하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 중간 부르주아지 층들의 분리에 브레이크를 걸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1917년 3월 전 러시아 당 노동자 대회의 의정서 초안") 그는 또한 "임시정부가 혁명의 단계들을 강화하는 한, 거기까지 우리는 임시정부를 지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반혁명인 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대회에서 제기된 멘셰비키의 통합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통합해야만 한다. 통합의 기초에 관한 우리의 제안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멘셰비키와 SR 지도자들은 기뻐하였으나 볼셰비키 중핵들로부터 수많은 항의가 있었다. 중앙위원회 멤버인 노동자 볼셰비키 알렉산더 실야프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 지부에서의 분노가 엄청나며, 노동자들이 시베리아로부터 돌아온 3명의 과거 편집자들에 의해 프라우다가 장악된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당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인용) 레닌은 견딜 수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프라우다 를 읽고 있었다. 심지어 4월 3일 망명으로부터 돌아오기 전에, 그는 그의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에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 정부이고 임시정부에 대한 최소한의 지지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그가 마침내 도착하여 핀란드 역에 있는 장갑차 위에서 유명한 연설을 하였을 때, 그것의 볼셰비키에 대한 효과는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과 같았다.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나온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공식 대표들의 면전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던 "사회주의자들"을 계급 배신의 범죄자들로 비난했던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를 칭송하여 말했다. 레닌에게는 임시정부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분리의 문제였다. 그의 "4월 테제"에서, 레닌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 때문에 이 단계에서 권력이 부르주아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했다.("현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들", 1917년 4월) "나라는 혁명의 첫 번째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가장 농민의 가장 가난한 부위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레닌은 썼다. 프라우다가 레닌의 "테제"를 4월 7일 출판했을 때, 중앙위원회 성원의 누구도 서명을 달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프라우다에 출판된 공동 작성된 글에서, 카메네프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나중에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에 반대하여 사용했던 곳과 똑같은 말들을 레닌의 "4월 테제"를 비난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레닌 동지의 총체적인 계획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이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제기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카메네프의 선언을 인용하면서,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들"(1917년 4월)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2월] 혁명 이후 권력은 부르주아지라는 이름의 다른 계급, 새로운 계급의 수중에 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지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기꺼이 '구 볼셰비키들'로 부르는 사람들로부터의 엄청난 항의를 듣는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것을 우리가 항상 고수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전체로 보아서 볼셰비키의 슬로건들과 사상들은 역사에 의해 검증되어 왔다; 그러나 구체적으 로 사태들은 다르게 해결되어 왔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며 결과적으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에 반대하여 소 부르주아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볼셰비키'의 혁명이전 유물 보관소로 보내져야 한다." 스탈린은 "4월 테제"에 대한 그의 비판을 그것들의 "비현실성"에 제한하면서 한편으로는 화해주의자들의 편을 조용하게 들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섰다. 카메네프 그리고 이후 지노비에프가 합세하여 10월의 전야에 봉기를 위한 볼셰비키의 계획을 비난하였던 혁명에 대한 공개적인 파업파괴행위에 이르기까지 레닌에 대한 비난에 앞장섰다. 레닌은 4월에 있었던 볼셰비키 전 러시아 대회에서 자기편으로 다수를 획득한 이후 쓰여진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 렸다: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에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만이 이 나라에 진정으로 강하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를 제공할 수 있다"("아주 반동적인 정권", 1917년 5월) 마침내 레닌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의 강령을 받아들였다. 트로츠키와 레닌의 재결합 같은 시기에, 트로츠키는 단련되고 강령적으로 굳건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레닌의 1903년 이래의 치열한 투쟁의 올 바름을 깨닫게 되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 사이의 분리 이전 시기에 트로츠키는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그러나 1903년에 직업적 혁명가들의 강력한 당에 관한 레닌의 주장에 주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멘셰비키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에도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은 양 분파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에서 그는 볼셰비키들과 긴밀하게 작 업하였으나 그 이후의 시기에 모든 분파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들이 기회주의자들로부터 혁명가들을 날카롭게 구별하기 위한 레닌의 투쟁을 방해했고 불가피하게 트로츠키를 볼셰비키들에 반대하는 일시적인 부패한 블럭으로 이끌었다. 1912년 8월에 트로츠키는 분리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던 - "8월 블럭"으로 악명이 높게되었던 - "친당" 멘셰비키들과 함께 비엔나에서 대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일단 2월 혁명이 짜리즘을 제거하고 소위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자 멘셰비키 지도부의 대다수가 "자기 자신의" 지배계급에 대한 "방어주의" 노선을 수용하면서 제2 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전쟁의 충격과 그의 화해주의적 노력들에 반대하는 레닌의 가차없는 논박들로 인해, 트로츠키는 기회주의와의 완전한 분리라는 레닌의 주장 쪽으로 점점 더 많이 쏠리게 되었다. 그래서 1917년에 트로츠키와 레닌은 당과 혁명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결정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동의에 이르게되었다. 5 월 4일 유배지로부터 돌아온 후 트로츠키는 즉각적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았으나 그가 볼셰비키들과의 통합으로 움직였던 좌선회하고 있던 메쯔라욘치(인터보로) 조직에서 볼셰비키들과 함께 활동했다. 통합은 7월 말 경에 시작되었던 볼셰비키들의 6번째 대회에서 완료되었다. 레닌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일단 트로츠키가 멘셰비키들과의 통합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의 볼셰비키는 없었다."(트로츠키의 왜곡을 일삼는 스탈린 파[1937]에서 인용) 1917년의 사태들에서 시종일관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 장악을 주창했다. 저주받던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하겠 다는 선언에 대한 분노의 폭발 속에 1차 임시정부가 무너진 후, 새로운 정부가 5월초에 구성되었다. SR과 멘셰비키들은 공식적으로 장관직들을 수용했다.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1848년 이래로 수십 년 동안 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바보로 만들고, 분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했던, 예를 들면, 부르주아지의 성원들과 사회주의의 배신자들로 형성되는 연합내각 수단에 의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혁명가당과 멘셰비키 바보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장관직이라는 영광의 서광에 즐거워하면서 멍청하게 일광욕을 했다. '소비에트들의 지도자들' 속에서 인민에 반대하는 조력자를 발견했으며, 당분간 휴전하게 되었던 제국주의 탐욕의 전쟁의 재개와 같은 '전선에서의 공세적인 작전들'을 지원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자본가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두 손을 비볐다." - "혁명의 교훈" (1917년 8월) 그의 고전적 저작 국가와 혁명(1917년 9월)에서 레닌은 산더미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혼란으로부터 국가에 관한 문제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부활시켰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참하게 분쇄되기 전까지 거의 3개월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1871년 파리 콤뮨의 경험으로부터 맑스가 도출했던 핵심적인 교훈을 지지하면서 레닌은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사할 수 없다"는 프랑스에서의 내전(1871년)에서의 맑스의 선언을 인용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맑스의 사상은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 기구'를 해체하고 분쇄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단순히 한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는 고사하고 농민과의 동맹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맑스의 이해를 부활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는 작업에서 농민, 소부르주아지와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엄청난 인민 대중을 지도하기 위하여 중앙 집중화된 힘의 기관이며 폭력기관인 국가권력을 필요로 한다."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자신의 과거 공식을 버리면서, 레닌은 국가는 두 개의 다른 계급들을 대표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단일 계급의 독재가 일반적으로 모든 계급사회에, 부르주아지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뿐만 아니라 '무계급 사회' 로부터,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분리하는 전체 역사적 시기 동안에도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오직 맑스의 국가 이론의 본질에 정통했다. 부르주아지 국가는 형태에서 매우 다양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들의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이들 모든 국가들은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분명히 엄청난 풍요와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 본질은 어쩔 수 없이 똑같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볼셰비키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1917년 10월에 권력으로 이끌었을 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에 피와 살을 불어넣었다. 코민테른과 식민지 혁명 10월 혁명은 국제적으로 전기충격과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은 전쟁중인 유럽 열강들, 특히 독일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감지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만들어낸 조수의 물결은 식민지 세계 전반을 포함하여 유럽을 넘어 멀리까지 이르렀다. 뿌리깊은 사회적 억압과 전제적인 정권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나라에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추종을 극복하고 싶어했던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기치로 현저하게 이끌렸고, 이들은 그들 자신의 나약하고 부패한 부르주아지가 1789-93년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은 식민지 세계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력에 관한 문제를 선포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 중심부들에서의 노동자 혁명이 전반적으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예측했다.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코민테른의 초기 활동은 대체적으로 공산당들과 제2 인터내셔널의 배외주의적 시궁창 사이에 엄격한 강령적 라인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2 인터내셔널 내부에는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양한 태도들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지배자들의 식민지 희생자들과 연대했던 많은 이들이 좌익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 계급의" 카우츠키주의 "당들"은 또한 제국주의의 "문명화" 임무를 옹호하던 우익 분자들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그리고 이들은 종종 해외와 국내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한 인종주의자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식민지 제국들을 방어하고 확대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노력들을 위한 신병모집 책으로서 행동했다. 레닌은 그런 사회적 배외주의와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그는 "분리에 대한 국가들의 권리"와 같은 자기 결정권에 대한 거부는 지배국가의 특권에 대한 방어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민족국가들의 자기결정권", 1914년) 피억압 민족들과 식민지 대중들에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지배자들과 동맹을 맺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1920년 2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채택된 "21가지 조건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있는 공산당들은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식민지들에서의 모든 해방운동"을 지지하며 "식민지 민중들에 대한 어떠한 억압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자기 자신의 국가의 군대들 사이에서 체계적인 선전"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2차 대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들"은 식민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에 종속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식민지와 후진국들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일시적인 동맹에 들어가지만 그들과 통합해서는 안되며, 모든 조건에서 심지어 공산당이 자신의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는 경 우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독립성을 고수해야 한다." 2차 대회는 아직까지 세계 전쟁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1914년 이전에는 경제가 농업과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윤을 위한 원료 추출 중심으로 건설되었던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실질적인 산업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국제무역의 붕괴와 전쟁중인 국가들에서의 전쟁관련 생산에 대한 강조와 함께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는 괄목할 만한 산업의 발전과 전투적이고 젊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빠른 발전을 경험했다. 지역의 자본주의 산업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하던 서유럽 열강들로부터의 소비재와 자본의 공급이 끊어졌다. 인도와는 달리 중국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었다. 손문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에 의해 지도되었던 1911년의 중국 혁명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던 노쇠한 청(만주)왕조를 타도했다. 그러나, 나라는 곧 군벌들에 의해 분열되었고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앞에 굴복한 채 "세력권"으로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반면, 1919년까지 몇 안되는 도시 중심지들에 있는 대기업들에 집중된 약 1백5십만의 산업 노동자들이 있었다.(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53호, 1997년 여름,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을 보라) 이러한 변화들이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거대한 잠재적인 사회적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단적인 사회적 후진성의 나라에서 극소 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국가권력을 두고 투쟁할 것인가 여부에 관한 물음에 그들 스스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1925-27년 이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되었을 때쯤, 코민테른은 질적인 퇴행을 시작했었다. "반(反)-제국주의 통일전선" 1922년 11월에서 12월에 열렸던 제4차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자신의 "동방 문제에 관한 테제들"에서 "반(反)-제국주의 통일전선"의 슬로건을 소개했다. 이것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세계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세력들과의 공동행동들에 대한 올바른 고려를 넘어섰으며 민주주의적 요구들의 최소강령에 기초하고 있는 그런 세력들과의 정치적 동맹을 의제로 삼았다. 식민지 부르주아지에 관하여 비판적인 채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테제들은 그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핵심적인 문제에 관하여 불분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력관계에서 자신의 소비에트 강령을 당장의 즉각적 임무로 만들지 못하는 한, 독립적인 민주공화국과 모든 봉건적 권리들과 특권들의 폐지 그리고 여성의 권리들에 대한 소개 등등과 같은 부분적 요구들을 지지하고 선도한다. 암묵적으로 테제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첫 번째 단계를 가지는 식민지 혁명을 위한 멘셰비키의 "2단계" 강령을 제기했다. 비록 테제들이 후진국들에서 공산주의 지부들의 작업에 관하여 모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대회 대표인 탄 말라카는 이전에 자기 당이 부르주아 민족주의 이슬람 동맹(Sarekat Islam)에 가입한 것을 공개적으로 방어했다. PKI의 행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에 관한 2차 대회의 주장에 분명하게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차 대회가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운동을 칸과 지주들 그리고 뮬라 등등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들과 결합시키려고 애쓰던 범 이슬람주의와 그와 비슷한 경향들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에 관하여, 4차 대회테제들은 "민족 해방운동이 성장하고 성숙해질수록, 범 이슬람주의라는 종교-정치적 슬로건들은 정치적 요구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라고 중립적으로 주장했다. 4차 대회 이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지노비에프는 1차 극동 노동자 대회에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으로 공산당 강령의 분리는 .... 즉각적인 미래에 이들 국가들의 다음 단계 발전이 민주주의적 전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 계급 조직이라는 정도까지 특히 극동 국가들에게 유효한 것으로 고려되어야만 한다"("극동에서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들", 1922년 1월)고 선언했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성원이며 미래의 좌익반대파인 조페(A.A. Joffe)가 손문의 국민당(민족주의 정당 -GMD)과 협상하기 위한 수석 소비에트 외교 사절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중국에 있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윈회의 밀사들에 의해 당시에 밀어 부쳐지고 있던 정책들에 반대하여 2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던 원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에 보내는 1922년 7월 22일자 편지에서 조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계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우리의 정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목적을 수행해야 만 한다..... 중국 내부 정치에서, 민족해방과 중국의 재통일을 위한 노선의 정립, 그리고 진정으로 통일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자유 민주주의(소비에트?) 중국 공화국의 수립 ..... 사절단에 대한 손문의 공개적인 친밀감을 염려하지 않으면서 [손문에게 보다]훨씬 더 한 중국공산당(CCP)에 대한 지지. 중국 공산당의 허약함과는 무관하게, 공산당의 완전한 독립은 필수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공산당을 손문의 당과 통합시키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중앙집행위원회[ECCI]의 특정 요원들의 노력들은 완전하게 잘못된 것이다. - 볼셰비키 지도부, 서한집(Correspondence) 1912-1927 에서 번역 조페가 언급하고 있는 ECCI 요원은 PKI가 Sarekat Islam에 가입하도록 공작했던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매링(G. Maring)이었다. 1922년 8월에, 매링은 젊은 CCP를 GMD로의 부분적 가입으로 강제했다. 매링은 ECCI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매링의 행보에 대한 대안이 부족했고, 중국에서 제국주의자들에 반대하는 행동으로 손문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조페는 1923년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하기 위한 시도들을 결단코 부인했던 GMD와의 "비 적대 조약"에 사인했다. 그해 8월, 손에 대한 정치 고문관으로 미하일 보로딘을 임명하는 스탈린에 의한 정치국 제안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손문과의 활동에서 중국 민족 해방 운동의 이해에 따르도록 그리고 중국에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목표들에 의해 조금도 혼란스럽게 않게 되도록 보로딘 동지를 지도하는 것"(강조는 첨가). 스 탈린은 자신의 길을 택했다. 그해 3차 전국 대회에서 CCP는 부분적 참여에서 완전한 참여로 전환하는 결정을 했고, "GMD가 민족혁명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며 운동의 지도력을 맡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4차 대회의 시기까지, 레닌은 병으로 인해 점점 더 주변부에 있게 되었고 스탈린,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반트로츠키 "트로이카"(triumvirate)가 연합했고 소비에트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CCP 중앙위원회의 5 성원 모두가 처음에는 GMD 참여에 반대했다. 그들의 반대가 코민테른 내부에서 완전하게 토론되고 논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차이들은 소비에트 국가와 코민테른의 최고위직들에 얼어붙으면서, 관료도당에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1923년 정치국에서 투표에 상정되었을 때와 그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GMD 참여에 관하여 트로이카의 노선에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 내부에서 그의 트로이카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를 계속하는 한편, 이와 동시에 트로츠키는 GMD와 같은 민족주의 정당 속으로 그들의 강령들을 섞는 것에 반대하여 동방의 공산당들에 경고함으로써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그는 지노비에프와 스탈린에 의해서 미국, 폴란드 및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추진되었던 두 계급의 "노동자와 농민" 혹은 "농민과 노동자" 당들의 개념에 반대했고 - 재앙적인 결과들에 관하여 - 국민당은 부르주아 당이라고 주장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배반의 "이론" 1922년 가을에 마비증세에서 회복되자,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와 당에서 점증하고 있던 관료계층 압력들이 정치국에서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고 소름이 끼쳤다. 그는 집산화된 경제의 핵심적인 보루인 외국 무역에 관한 국가 독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스탈린과 다른 자들이 추진하던 제안에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와 협력했다. 레닌은 이후 1923년 12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서 스탈린을 제거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을 것을 결의했는데 이것은 적지 않게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이 코카사스에서 비 러시아 민족들에 대하여 추진했던 대 러시아 배외주의를 연상케 하는 폭력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3년 3월 레닌은 다시 질 병으로 인한 마비증세로 아팠고, 그 이후 트로츠키는 강력한 투쟁으로부터 물러났다. 트로이카가 책임을 맡은 상태에서 12차 대회는 특별 아젠다가 오랜 경제주의자였으며 멘셰비키였던 마르티노프를 자신의 대오로 환영하는 것을 언급하도록 만들었다. 마르티노브는 중국과 관련하여 트로이카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중심이 된다. 예를 들면, GMD 부르주아 민족주의 당으로의 CCP의 청산을 합리화사기 위해 사용되었던 "4개의 계급들(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와 민족 부르주아지)의 동맹"으로서의 GMD의 성격을 만들어 냈던 자가 마르티노프였다. 트르츠키가 나중에 "누가 오늘날 코민테른을 지도하고 있는가?"(1928년 9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던 것 처럼: "마르티노프는 단지 당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갔을 뿐만 아니라, 그는 코민테른에서 '영가'의 주요한 근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로지 그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로 더 가까지 다가갔고, 그에게 굴복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가 지난 20년간 했었던 것처럼, 간단하게 '영구혁명'과의 투쟁을 계속했다." 12차 당대회 이후 몇 달만에 독일에서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1923년 혁명이 패배했다. 독일에서의 패배는 지노비에프 하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무능력과 독일에서 충분하게 단련된 공산당의 부재 때문이었다: KPD[독일 공산당]은 사민당에 순종했으며, 10월에는 심지어 사민당이 주도했던 부르주아지 지방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 "볼셰비즘을 재무장하며: 1923년 독일과 코멘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평"을 보라) 이미 후퇴를 시작하고 있던 전쟁 후의 혁명적 파도가 멈추었고 전세계적인 부르주아 질서가 안정화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이 열성적으로 독일 노동자 혁명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독일 혁명의 패배는 노동자 국가의 고립이 길어지고 초기의 소비에트 관료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정 치권력 찬탈을 위한 길을 닦는데 도움을 주면서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엄청나게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도시 중심지들과 적군으로부터의 광범위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와 협력하고 있던 반대파의 느슨한 조직들에서 단지 3명의 대표만이 허용되도록 1924년 1월 13차 당대회 선거가 조작되었다. "트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와는 정반대의 이단으로서 비난을 받았다. 레닌은 대회의 결과를 알게 된 다음 날인 1월 21일 죽었다. 1924년 1월 이후, USSR를 지배했단 자들과 USSR이 지배되던 방식, 그리고 USSR이 지배되는 목적들이 모두 번했다. 1924년 가을에, 스탈린은 계급들이 사라지고 국가가 사라진 질적으로 더 높은 생산력 수준에 기초한 사회인 사회주의가 단일 국가에서 건설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피폐화된 러시아에서도 가능하다고 하는 자신의 "이론"으로 10월 혁명의 프롤레타리아트적이고 혁명적이며 국제주의적인 강령에 대한 보수적인 관료의 반감을 일반화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후퇴의 강령이었으며 소비에트 사회가 수 년 동안의 전쟁, 혁명, 그리고 궁핍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낸 이유인 안정에 대한 거짓 약속이었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재 안정화의 국면에서 소비에트 당 뿐만 아니라 신생 공산당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보수주의적 분위기를 구체화했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 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세계 체제로서만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분명히 했던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실천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수 없이 많은 혁명적 기회들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배신당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기구로부터 외교책략의 도구로의 이행이 하룻밤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 먼저 지노비에프가, 그리고 뒤에 스탈린이 부르주아지 세력들과 의 다양한 동맹을 실험했는데, 결국 이것은 1925-27년 2차 중국혁명의 살인적인 파괴로 귀결된다. 1933년이 되면서, 트로츠키가 "파시즘의 천둥번개"라고 불렀던 즉, 강력한 독일 노동자 운동에 의해 전혀 저지되지 못한 히틀러의 나찌의 승리조차 스탈린의 코민테른을 자각시킬 수 없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을 위한 세력으로서 완전하게 죽었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1935년이 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계급협조(인민전선)의 강령을 분명하게 성문화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떠받치기 이하여 적극적인 반혁명적 역할을 했다. 스탈린주의화된 코민테른은 트로츠키가 묘사했던 것처럼, 참으로 "패배의 거대한 조직자"였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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