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08/03/11 01:36
  • 수정일
    2008/03/11 01:36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 응답 RSS
구 소련, 중국 등 사회성격 분석에 도움이 될 만한 글이라 옮겨 봅니다. 트로츠키가 1935년에 쓴 글입니다. 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 1935년 2월 1일 씌여짐 1935년 7월 출판 스탈린주의 관료의 외교 정책들은 - 양쪽 채널 내부에서 모두: 일차적으로 외교에서 그리고 부차적으로 코민테른의 채널에서 - 국가연합(UN의 전신조직) 쪽으로, 현상유지의 보존 쪽으로, 그리고 개량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동맹 쪽으로 급선회해 왔다. 동시에, 국내 정책들은 시장과 "부유한 집산 농민들"쪽으로 선회해왔다. 동시에, 국내 정책 들은 시장과 "부유한 집산 농민" 쪽으로 돌아섰다. 반대자와 준반대자 그룹들,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비판적인 고립된 인자들에 대항한 최근의 경향과 당에 대한 새로운 대대적인 숙청은 스탈린에 우익으로의 진행에 자유를 주는 것을 목 표로 하고 있다. (쿨락, 국민당과의 동맹, 앵글로-러시아 위원회 등에 모든 것을 거는) 과거의 유기적인 진행으로의 복 귀가, 그러나 훨씬 큰 규모에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더 부담스러운 조건하에 있는, 여기에 관련된다. 이 과정은 어 디로 귀결되는가? "테르미도르"라는 말이 많은 입을 통해서 다시 들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사용으로부터 신 선미를 잃었다; 그것은 자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잃었고, 스탈린 관료가 통과하고 있는 국면이나 스탈린 관료가 준비하 고 있는 참상을 성격화하는 임무에 분명하게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반드시 우리의 용어학을 확립 해야만 한다. "테르미도르"에 관한 문제는 소련 좌익반대파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누가 처음으로 테르미도르라는 역사에 관련된 유추를 사용했는지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이더라도, 1926년에 이 문제에 대한 입장들은 다 음과 같다: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스탈린에 의한 유배에서 박해로 죽은 스미르노프, 나프로노프, 그리고 다른 이 들)은 "테르미도르는 이미 실현된 사실!"이라고 선언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 고수자들인,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자들은 분병하게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리가 있었다. 어느 쪽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 났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각각의 그룹 스스로가 "테르미도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관하여 상세히 밝혀야만 한다. 구 볼셰비키 학교의 가장 총명한 대표자 중 하나였던 스미르노프는 산업화의 지연, 쿨락과 네프맨(새로운 부르주아 지)의 성장, 쿨락, 네프맨과 관료와의 결합,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의 퇴행이 새로운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길로의 복 귀가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진행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권력을 상실했다. 좌익반대파를 분쇄 함으로써, 관료는 다시 살아나고 있던 부르주아 정권의 이해관계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0월 혁명의 근본적 성취들은 청산되었다. 위의 것들이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의 입장의 핵심적인 것들이다. 좌익반대파는 비록 이중권력의 요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라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요소 들로부터 부르주아 헤게모니로의 이행은 반혁명적 전복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이미 네프맨, 쿨 락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관료의 주요한 뿌리들은 여전히 노동자 계급 속으로 뻗어 있었다. 좌익반대파에 대항한 투쟁 에서 관료는 의심의 여지없이 네프맨과 쿨락의 형태 속에 있는 무거운 꼬리를 자신의 뒤에 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 꼬리는 머리, 다시 말하면 지배 관료, 를 강타할 것이다. 관료 대오의 내부에서 새로운 분리들은 필연적이었 다. 반혁명적 전복의 직접적 위험에 직면하여 중앙파적 관료의 기본적인 핵심부위는 성장하는 지방 부르주아지에 대항 하는 지원을 위해 노동자들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매장은 너무 이 르다. 좌익반대파의 붕괴가 "테르미도르"의 작업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후 사태 전개의 관점에서 모든 명백함 속에서 드러나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의 올바름에 관한 1926-27년 논쟁의 요지를 실제로 단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927년 초, 쿨락들이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여 관리 하고 있던 빵을 공급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관료에게 타격을 가했다. 우익은 쿨락에 더 양보를 하는 입장이었다. 우익 들과 함께 자신들이 분쇄했던 좌익반대파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던 중앙파들은 노동자들 속에서 지지를 발견했고, 우 익을 패배시키고 산업화와 결과적으로 집산화의 길를 택했다. 10월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종국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불필요한 희생들을 댓가로 지켜지게 되었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예측 - 보다 정확하게, 그들의 예측의 최대한의 변형 - 이 완벽하게 입증되었다. 이 점에 관하여 오늘날 어떠한 논쟁도 있을 수 없다. 생산력 발전이 사적 소유의 복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화의 기초에서 계 획된 관리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테르미도르의 실제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테르미도르에 관한 유추가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불분명하게 하는데 기여 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 1794년 테르미도르는 국민공회[the Convention]의 특정 그룹들로부 터 다른 그룹들로의 권력 이동, 승리한 "민중"의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계층으로의 권력이동을 만들어냈다. 테르미도르 는 반혁명적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진 경우에 "반혁명"의 개념에 우리가 얼마나 광범위한 중요성을 부가 하는가에 달려있다. 1789년에서 1793년의 전복은 성격상 부르주아적이었다. 본질적으로 위의 전복은 "자유로운" 부르 주아의 소유에 의한 고정된 봉건적 소유의 대체에 스스로를 제한했다. 이 혁명에 "대응하는" 반혁명은 봉건적 소유의 재건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직공 [artisan]들 중에서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고, 총재정부는 중간 부르주이지 중에서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보나파르트 는 은행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중요성도 물론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모든 이동들은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와 국가의 기초 위에서 발생했다. 반동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의 중요한 단계인 보나파르트의 부뤼메르 18일이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제는 과거의 소유양식이나 과거 지배계층의 권력 복원이 아니라 승리한 "제3 계급"의 서로 다른 부위들 사 이에서 새로운 사회 정권의 성과를 나누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전유했으나(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혹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특수한 대리인들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에 대항해서는 어떠한 시 도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부르주아지는 간절하게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강화하고 조직하고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하층계급"과 몰수당한 재산소유자들의 주장들 모두에 대항하여 농민의 것을 포함하여 부르주아적 소유를 보호했다. 봉건적 유럽은 나폴레옹을 혁명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증오했으며 이것은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올바른 것이 었다. 오늘날의 소련은 1917년에 레닌이 서술했던 소비에트 공화국 타입과의 유사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상비 관료와 상비군이 없는, 모든 선출된 관리에 대하여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 개인이 누구이건 간에" 대중에 의한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 등) 국가에 대한 관료의 지배, 뿐만 아니라 관료에 대 한 스탈린의 지배가 거의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부터 출현한 실제 국가가 이상적인 중요한 규범에 조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평화적 민주주의, 해방주의자(Libertarian),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극좌 써클 들에 공통적인 정치적 속물근성이다. 한편, 이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 한 모든 비판은 신성모독이고 반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소부르주아 지식인이나 노동자 관료들 사이 의 특정 그룹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이해가 그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의 주장이다. 이들 두 타입 - 정치적 속물과 정치적 위선자 - 은 개인적 환경에 따라서 상호간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 들 두 타입을 지나치도록 하자. 맑스주의자는 현재의 소련이 분명하게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적인 규범에 가깝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강령 적 규범을 만들어낼 때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보자; 이들 왜곡이 국가의 경제적인 기초로까지 확대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보존되어 왔는가에 관하여 다시 한번 체크해보자; 만약 이것들 이 보존되어왔다면, 그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보자; 그리고 반동에 대한 진보적 발전의 경향들의 우월함을 촉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요소들을 소련에서 그리고 세계적 영역에서 획득하고 있는지 찾아보자. 이런 접근은 복잡하다. 이것은 어떠한 이미 만들어진 열쇠를 후자 쪽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들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에, 이것은 두 질병, 속물과 위선, 을 가진 사람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소련의 운명에 적극적 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이 1926년 노동자 국가가 청산되었다고 선언했을 때, 이것은 명백하게 혁명이 아직 살 아있는 동안에 혁명을 매장하는 것이었다. 이것과 다르게, 좌익 반대파는 소비에트 정권의 개혁을 위한 강령을 제출했 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특권화된 계층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좌익반대파를 분쇄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위한 투쟁에서, 스탈린주의 관료는 자기 자신들이 소비에트 국가의 사회적 기초를 지켜낼 수 있도록 하는 유일 한 모든 방책들을 좌익반대파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정치적 교훈이다! 이 것은 농민의 후진성, 프롤레타리아트의 피로, 서구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의 부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보수적인 국내의 관료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대한 억압과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쇄로 특징지워지는 혁명에서의 "두번째 장"을 준비하는 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똑같은 예가 "두번째 장"의 승자들이 "첫번째 장"의 혁명가들을 짓밟았을 때에 조차도 어떻게 올바른 정치적 노선이 맑스주의 조직들로 하여금 발전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가 를 보여준다. 기계적으로 살아있는 발전의 과정들을 이미 만들어진 규범들에 맞추면서 이 규범들에 의해 작동되는 미신적 이상주 의적 경향의 사상은 쉽게 사람들을 열정으로부터 의기소침으로 이끈다. 모든 존재를 발전의 과정과 내부적 세력들의 투 쟁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사상과 실천에 필요한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관료의 독재 과거 몇몇 저작들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의해 증명되는 경제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사회는 생활여건의 불평등과 관료의 특권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과 같이 완벽하게 모순적인 이행기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으며, 여전히 미래의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정권에 훨씬 가까이 서있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동시에, 우리는 거대한 관료적 퇴행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기초 위에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담보하고 이것에 의해서 관료와 사회적 불평등의 폐지를 통해 노동자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조건을 준비하고 있는 한 소비에트 사회는 여전히 노동계급의 역사적 기구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명제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보거나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1923년부터의 소련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레닌주의 저작들을 일반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새로운 사건에서 지도지침을 잃고 절망적인 슬픔으로 맑스주의적 분석을 포기할 위험이 있다. 소비에트(보다 정확하게 反소비에트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관료주의는 도시와 지방,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들 두 종류의 모순들은 똑같지 않다), 전국에 걸친 공화국과 지역들, 농민의 서로 다른 그룹들, 노동 계급의 서로 다른 층 들, 소비자의 서로 다른 그룹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비에트 국가 전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환경들 사이 의 모순의 산물이다. 모든 관계들이 화폐적 계산의 언어로 번역되어지고 있는 오늘날, 경제적 모순들이 예외적 중요성 을 가지고 전면에 나서게 된다. 노동 대중의 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면서, 관료는 이러한 모순들을 규제하고 있다. 관료는 스스로의 지배를 강화하 기 위하여 이러한 기능을 사용한다.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어떠한 항의도 없는 무소불위의 지배를 통해서 관료는 새로 운 모순들을 축적하고 있다. 새로운 모순들을 축적하면서 관료적 절대주의 정권을 만들어낸다. 관료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모순들이 주요 명령 직위를 자기 멋대로 선택하는 시스템의 원인이 되었다; 선택 순서 안에서의 규율의 필요성이 일인 지배로 그리고 무오류의 지도자라는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었다. 하나의 그리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장, 콜차크, 대학 그리고 정부에 만연해 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지도자; 나머지 는 지도자를 따른다. 스탈린은 결코 그의 성격상 대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될 수도 없었다; 그는 관료들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인격화였으며, 관료적 "지도자들"의 지도자였다. 경제적 임무들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커질수록, 관료정권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구들 사이의 모순이 더욱더 날카로와지고, 관료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더 거칠게 투쟁하며, 관료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폭력과 사기, 뇌물에 의존하게 된다. 경제와 문화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정치적 정권(regime)의 악화 - 이 슬픈 사실이 여기에서, 그리고 오로 지 여기에서만 설명된다: 억압, 박해 그리고 탄압은 오늘날 큰 틀에서 국가의 방어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의 지 배와 특권의 방어에 복무한다. 이것이 또한 사기와 기타 방법에 의한 억압들을 위장할 어느 때보다도 증가하고 있는 필 요성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국가가 노동자 국가로 불리 울 수 있는가?" - 그래서 도덕주의자, 이상주의자, 그리고 "혁명적" 속물 들은 분개해서 말한다. 약간 더 주의 깊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마도 이것은 노동자 국가 일 것이다. 하 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관료의 독재하 에 있는 퇴화한 노동자 국가이다." 전반적으로 우리에게는 이 논쟁을 다시 시작할 만한 이유가 없다. 이것과 관련되어 이야기되었던 모든 것들은 우리 경향의 저작들과 공식문서들에서 논의되었다. 누구도 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레닌주의의 입장에 대하여 논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보충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관료의 분파적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불리 울 수 있는가 여부의 문제에 우리 자신을 엄격하게 제 한할 것이다. 독재라는 용어가 종종 제한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보다 심오한 사회학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는 사실로부터 용어학상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우리는 "무쏠리니의 독재"에 관하여 말하는 동시에, 파시즘은 금융자본 의 기구일 뿐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무엇이 올바른가? 둘 다 맞지만, 서로 다른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집행권력이 무쏠리니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가 활동의 실질적 내용 전체가 금 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 계급의 사회적 지배(그 계급의 독재)는 극도로 다양한 정치적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부르주아지의 전체 역사에 의해 증명된다. 바로 이 똑같은 사회학적 법칙을 - 모든 필요한 변화들과 함께 -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까지 확장하는 것 역시 소 련의 경험으로 이미 충분하다. 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국가의 소멸 사이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지 배의 형식과 수단들은 내외부적인 계급투쟁의 경로에 따라서 뚜렷하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스탈린의 지배는 어쨌거나 혁명 초기 동안의 소비에트 지배를 닮아있다. 한 정권의 다른 정권으로의 대체는 한번의 타격으로 발생하지 않고, 일련의 방책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에 대항하여 관료에 의해 수행되 는 일련의 소규모 내전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최종적인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사회적 모순들의 압력에 의해 폭발했다. 사회적 모순들을 활용하여, 관료는 대중조직들의 수중에서 권력을 찬탈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 리는 관료의 독재와 그리고 심지어 스탈린 일인 독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찬탈은 오로지 관료 독재의 사회적 내용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가능했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 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관료독재에서 자신의 왜곡되었으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표현을 발견 하게 되었다고 완벽한 정당성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 러시아와 국제 반대파의 내부 논쟁에서, 우리는 노동자 국가의 사회적 기초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부르주아 반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테르미도르라고 가정적으로 이해했다. 비록 우리가 보아왔던 것과 같이, 과거에 논쟁의 내 용이 유추에 의해 고통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유추가 순수하게 가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 성격을 가지지 않 은 채 동원되었고, 이 가정적 성격이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최근 진화의 분석에 대한 요구와 유례없이 증가하는 모순이 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종종 국민투표 정권과 스탈린의 보나파르트 정권에 관하여 -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 이야기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티즘은 테르미도르 뒤에 왔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유추의 틀 거리 내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야만 한다: 소비에트 테르미도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보나파르티즘이 생겨난 것인가? 우리의 과거 평가에서 본질적으로 어떠한 변화들을 주지 않는다면, -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 우리는 역사적 유추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 과거 사실들 에 대하여 보다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해주며, 보다 나은 어떤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제9 테르미도르의 전복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본적인 성과들을 청산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권력을 보다 온순하고 보 수적인 자코뱅들, 부르주아 사회의 보다 부유한 부류들에게 이전시켰다. 소비에트 혁명에서도 또한 훨씬 느린 템포와 위장된 형식으로이기는 하지만, 테르미도르와 전체적으로 유사한 우익으로의 이동이 오래 전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간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좌익에 대항한 소비에트 관료의 음모는 그 음모 자체가 제9 테르미도르의 즉흥성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총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최초 국면들 동안 상대적으로 "건조"한 성격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보다 더 균일하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 뒤이어 관료와 관료와 연결된 노 동귀족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 동안에 그 자신의 내부에 모든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예외적 명확성을 가지고 분명해 진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좌익반대파의 분쇄는 혁명적 전위의 수중으로부터 관료와 노 동계급 상층부의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의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전을 의미했다. 1924년 - 이때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 의 시작이었다. 물론 역사적 동일성이 아니라 항상 서로 다른 사회 구조와 시대를 자신의 한계로서 가지는 역사적 유추의 문제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주어진 유추는 피상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 기 동안 널리 발생하는 계급투쟁에서의 극도의 긴장에 의해 결정된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관료는 새로운 정권을 위한 승리를 보증했었던 민중의 민주주의의 배후로부터 스스로를 끌어올린다. 자코뱅 조직은 서서히 교살되었다. 1793 년의 혁명가들은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외교관과 장군이 되었다; 그들은 억압의 타격 아래 쓰러졌거나.... 혹은 지 하로 갔다. 그후, 다른 자코뱅들은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나폴레옹의 장관으로 이행했다. 그들의 대오는 과거 정당들의 배산자들, 구 귀족들, 그리고 아둔한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유례가 없는 숫자로 증가했다. 그럼 러시아에서는? 130년에 서 140년이 지난 후에 생명이 넘치던 소비에트들과 당 조직들로부터 "열정적으로 추앙 받는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지 하는 서기들의 징발[commandeering]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 똑같은 퇴행의 그림이, 그러나 훨씬 더 광대한 영역에 서 훨씬 더 무르익은 배경 위에서, 재생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르미도리안-보나파르티스트 정권의 뒤늦은 안정화가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봉건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생산력의 발전 덕분이었다. 행운아들, 약탈자들, 관료의 친척과 동맹자들은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 환상에 서 깨어난 대중들은 의기소침에 빠졌다. 1923년에 시작되었고 소비에트 관료 자신에게도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던 국유화된 생산력의 급증이 관료의 안정화 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전제조건을 창출했다. 경제적 생활의 향상이 활동적이고 능력있는 조직가들, 행정가들 그리고 기술자들의 에너지를 위한 분출구를 제공했다. 고위 지배계층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광범위한 특권적 계층이 만들어 졌다. 노동대중은 희망에 살거나 무관심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다른 국면들을 18세기의 끄트머리에 발생했던 프랑스에서의 유사한 사건들에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 은 진부한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에트 정치 정권과 특히 제국의 시대가 가까왔었던 통령정부의 말미의 제 1 통령의 정권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가지는 글자 뜻 그대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탈린에게 승리자의 찬란함이 부 족했던 한편, 어쨌건, 그는 조직화된 굽실거림의 정권 내부의 보나파르트 1세를 능가했다. 그러한 권력은 오로지 당과 소비에트들과 노동 계급 전체를 교살시킴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스탈린이 의지하고 있던 관료는 완성된 국내 혁명 의 결과들에 물질적으로 긴박되어 있으나, 국제 혁명의 발전과는 어떠한 연결 포인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삶의 방식, 이해관계 그리고 심리상태에서, 현재 소비에트 관료들은 나폴레옹의 장성들과 장관들이 혁명적 자코뱅과 다른 것 못지 않게 혁명적 볼셰비키와 다르다. 소비에트 런던 대사 마이스키는 최근 영국 노동조합주의자들의 한 대표에게 "반혁명분자" 지노비에프주의자들에 대 한 스탈린주주의의 재판이 얼마나 필요하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 수 천가지 중 에 하나이지만 - 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지노비에프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안다. 그들의 실수와 동요 들이 무엇이건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직업적 혁명가" 형태의 대표자들이다. 세계 노동자 운동의 문제들 - 이것들 이 그들의 피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이스키는 누가인가? 콜차크의 보호하에 있던 트랜스 우랄 백색 정부에 장관으 로 들어갈 기회를 이용하기 위하여 우익으로 가면서 1918년 자기자신의 당과 결별했었던 우익 멘셰비키. 오로지 콜차 크가 절멸된 후에야, 마이스키는 자신의 얼굴을 소비에트 쪽으로 돌릴 시간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레닌 - 그리고 그와 함께 나도 - 그런 타입들에 대하여 - 경멸은 말할 것도 없고 - 가장 큰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대사의 대 열 안에 있는 마이스키는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군사적 개입을 선동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지노비에프주의자 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난한다. - 마이스키가 내전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 대항하여 방어했었던 것과 같은 바로 그 자본주의. 현재 미국의 대사인 트로이야노프스키는 젊은 시절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직후 그는 당을 떠났다; 전쟁기간 그는 애 국자였다; 1917년에는 멘셰비키였다. 10월 혁명 때에 그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맴버였고, 여기에 더해서 그후 수년 동안 트로이야노프스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항하여 비합법 투쟁을 수행했다; 좌익 반대파가 분쇄된 후 그는 스탈 린주의 당, 보다 정학하게, 외교부에 들어갔다. 파리 대사인 포템킨은 10월 혁명의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역사 교수였다; 승리 이후에 그는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구 베를린 대사 킨츄크는 10월 전복의 나날 동안 멘셰비키로서 반혁명적인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모스크바 위원 회에 현재 재정 인민위원이며 우익 사회혁명당원인 그린코와 함께 참여했다. 베를린 후임대자 슈리츠는 소비에트 초대 의장 멘셰비키 츄하이졔의 정치비서였다; 그는 승리 후에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거의 모든 외교관들이 같은 타입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 특히 베세오프스키, 디미트리에프스키, 아마베코프 등등의 경험이 있고 난 후 - 오로지 가장 의존적 인 사람들만이 지명되고 있다. 얼마 전에 소비에트 금광 산업의 주요한 성공들과 관련한 급보가 그것의 조직자인 엔지니어 세레브로프스키와 관련 된 코멘트들과 함께 세계 언론에 실렸다. 오늘날 관료 상층 부의 공식적인 대변인으로서 듀란티, 루이스 피셔와 성공적 으로 경쟁하고 있는 르 템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세레브로프스키가 1903년 이후로 볼셰비키이며, "친위대"라는 사 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히 애를 썼다. 이것은 세레브로프스키의 당적 카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는 젊은 학생으로서 그리고 멘셰비키로서 1905년 혁명에 참여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캠프로 넘어갔었 다. 1917년 2월 혁명기에 그는 두개의 군수품 공장의 정부 감독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국의 맴버였고 금속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였다. 1917년 5월에 세레브로프스키는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선언했다. 볼셰비키의 승리 이후, 세레브로프스키는 다른 전문인들[기술관련 전문가]과 함께 나 자신에 의해 기술적인 업무로 이전되었다. 레닌은 그를 전혀 믿지 않았다; 나는 그에 관하여 어떠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늘날, 세 레브로프스키는 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이다. 중앙위원회의 이론적 저널인 볼세비키(1934년 12월 31일)에 "소련에서 금광 산업에 관하여"라는 세레브로프스키의 기사가 실린다. 첫 번째 페이지를 보자: " .... 당과 노동계급의 가장 사랑하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지도하에..."; 세 줄 아래: "... 미국 특파원 듀란티 씨와의 대화에서 스탈린 동지는..."; 다섯줄 아래: "... 스탈린 동지의 간략하고 정확 한 답변..."; 페이지의 가장 아래에: "그것이 스탈린 방식의 금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페이지: "...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네 줄 아래: " 그들(볼셰비키들)의 보고에 답하면 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들의 성공을 축하한다'..."; 같은 페이지 더 아래에: "스탈린 동지의 영도에 영감을 받아 ..."; 한 줄 아래에: "...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스탈린 동지와 함께 하는 당 ..."; 두 줄 아래에: "... 우리 당과 (!!) 스탈린 동지의 영도..." 이 기사의 결론을 보자. 우리는 반 페이지에 걸쳐 읽게된다:" 당과 노동계급의 천재적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영도..."; 그리고 세줄 아래에: " ...우리의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말들..." 이런 아첨의 홍수 앞에서는 풍자라는 것 자체도 무력하다!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해 만들어지는 사 랑의 선언들이, 그리고 한편으로 지도자에 대한 축사가 아닌 금광에 관한 기사에서 한 페이지 마다 5번씩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한편, 그런 아부의 능력을 가진 기사의 저자는 분명히 그 자신의 속에 혁명가의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했고 오늘날 정권의 보루요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100% 스탈린주의자인 과거 짜르 시절 대공장의 감독관, 부르주아지 그리고 애국자가 바로 이들이다. 또 다른 예. 오늘날 프라우다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자스라프스키는 올해 1월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적 소설들 을 출판하는 것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반혁명적 저작들"을 출판 하는 것만큼 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자르라프스키는 누구인가? 아슴프레한 과거에는 분트주의자[유대인 분트의 멘셰비키] 였고, 이후에는 1917년에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항하여 독일의 첩자라고 가장 경멸적인 캠페인을 벌였던 자. 1917년 레닌의 글들에서, 자제된 표현으로서, "자스라프스키와 그와 같은 다른 건달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자스라프시키는 당 문헌에 극 단적 타입의 부패한 부르주아 중상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반혁명분자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 프로부터 스탈린주의를 사수하고 있다! 소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스탈린의 언론은 이런 인간들로 채워져 있 다. 구 볼셰비키 중핵들은 분쇄 당했다. 혁명가들도 분쇄 당했다. 혁명가들은 유연한 등뼈를 가진 관료들로 대체되었다. 맑스주의 사상은 공포와 아첨과 음모에 의해 제거되었다. 레닌의 정치국원들 가운데 오직 스탈린만이 남아있다: 정치국 원 중 두 명은 정치적으로 박살났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아첨하고 있다(리코프와 톰스키); 두 명은 감옥에 있다(지노 비에프와 카메네프); 한 명은 국외로 추방되어 시민권을 빼앗겼다(트로츠키). 그룹스카야 스스로가 말한 것 처럼, 레닌 은 오로지 그의 죽음 때문에 관료의 억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를 감옥에 가두고, 무덤 속에서 그의 입을 닫게 할 기회 를 잃었다. 지배계층의 전체 토대가 퇴행했다. 자코뱅은 테르미도르와 보내파르티스트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볼셰비키 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크건 중간이건 작건 간에 보수적이고 결코 청렴하지 않은 마이스키, 세리브로프시키, 자스라프스키 등의 광대한 계 층에게 스탈린은 정의의 심판관이고, 모든 특혜의 원천이며, 있을 수 있는 반대로부터의 방어자였다. 이것에 대한 대가 로, 관료는 가끔 스탈린에게 전국적인 국민투표에 의한 찬성을 선물한다. 소비에트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 대회들은 단 하나의 기준에 따라서 조직된다: 스탈린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오로지 "반혁명 분자들"만이 반대할 수 있으 며,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다루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지배의 메카니즘이다. 이것은 보나파르티스트의 메카니즘이 다. 이것 외에 어떠한 정의도 정치사전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다. 우리는 역사적 유추없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유추는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유사성의 모습들 뒤에 있는 비유사성의 모습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두 혁명들 모두 봉건주의와 농노제도를 끝장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극단적 진영의 모습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헛되이 노력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 유추에 필수적인 물질적 한계를 부여하는 이 근본적인 계급의 차이가 예측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농노제로부터 농민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땅을 제공하는 심원한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봉건적 반혁명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타도된 왕국은 스스로를 권력에 재 설립할 수 있고 스스로를 중세의 유령들로 둘러싸게 될지 모른다. 그러 나 이것이 봉건주의 경제를 재 설립하기에는 이미 힘이 없다. 일단 봉건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자 부르주아적 관계 가 자동적으로 성장한다. 그것들은 외부적 힘에 의해 정지될 수 없다; 그것들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매장자를 만들어내면 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이것과 다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적소유의 구속으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국가의 직접적 폐기로 그것을 이행시킨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국가가 시장을 그 자신 의 법칙에 맡겨 두면서 경찰의 역할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반면, 노동자 국가는 경제가와 조직가의 직접적인 역할을 떠 안는다. 한 정치 정권의 다른 것에 의한 대체는 오직 시장 경제에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다. 반대로,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정부에 의한 노동자 정부의 대체는 필연적으로 계획화 초기단계의 청산과 계속해서 사적 소 유의 복구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르게,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는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혹은 사회주의를 갈망하도록 강제되는 국가권력과 분리될 수 없 다. 사회주의는 그것의 생산력이 자본주의를 훨씬 추월했거나, 개인과 모두의 인류욕구가 충분한 만족을 얻을 때, 그리 고 국가가 사회 속에 해소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그 발전의 매우 높은 단계에서만 오직 불변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먼 미래에 있다. 주어진 발전의 단계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자 국가와 함께 유지되거 나 넘어가게 된다. 부르주아("무정부적인")와 사회주의("계획된") 경제 형성의 법칙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 한 이후에야 비로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유추가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1917년 10월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러시아에서의 농경- 민주주의 전복을 뒤로 돌릴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코뱅 혁명에 대한 완벽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콜차크 의 전복은 그것의 모든 힘을 보유한 위협이며, 이것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이 로마노프 왕조 로의 후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반혁명은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재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블럭 의 권력 복귀는 사회주의 건설을 말살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두 혁명과 결과적으로 그들에 "조응하는" 반혁명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스탈린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반 동적인 정치적 이행들의 중요성을 이해하는데 극도로 중요한 것이다. 농민 혁명은, 농민혁명에 의존했던 부르주아지 또 한, 나폴레옹 정권과 쉽게 평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루이 18세 하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미 현재의 스탈린 정권 하에서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우익으로의 이 행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는 - 그것의 전통에서는 "볼셰비키"이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것의 전통과 절연했었던, 그것 의 구성과 정신에 있어서 소부르주아인 -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 노동자 국가와 세계 제국주의 사이의 적대를 규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관료적 중앙주의, 관료의 지그재그 행보들, 권력, 약점, 그토록 중요했었던 세계 프롤 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의 사회적 기초이다. 관료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될수록, 권력이 점점 더 한사람 의 손아귀에 집중될 수록, 점점 더 관료적 중앙주의는 보나파르티즘으로 바뀌어 갔다. 너무도 넓게 이해되고 있는 보나파르티즘의 개념은 구체화가 필요하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이 용어를 프롤레타 리아와 파시스트 캠프 사이의 적대주의를 이용하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군-경찰 기구에 의존함으로서 "민족 통일"의 구세주로서 의회와 민주주의 위에 스스로를 올려 세우는 자본주의 정부들에 적용했었다. 우리는 항상 쇠퇴하는 보나파 르티즘과 부르주아 혁명의 정치적 원칙들의 매장자였을 뿐만아니라 그 사회적 성과들의 방어자이기도 했던 젊고 전진 하는 보나파르티즘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우리는 이 두 표현들에 같은 이름을 적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같은 자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한 세월의 자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를 80대와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크레믈린의 보나파르티즘을 쇠퇴하는 것이 아닌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보나파르티즘과 동렬 에 놓는다: 나롤레옹 3세, 더 나아가, 슈라이허[Schleicher]나 도머규[Doumergue]가 아닌, 통령정부와 제1제국의. 이 러한 유추의 목적을 위하여, 나폴레옹 1세의 특징들을 스탈린의 것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사회적 상황이 요구하는 경 우 언제든지, 보나파르티즘은 가장 다양한 직경의 축 주변에서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부터, 자코뱅과 소비에트 기원의 두 보나파르티즘의 사회적 기초에서의 차이는 훨씬 더 중요하다. 자코뱅의 경우, 관련된 문제가 자신의 원칙과 정치적 기구들의 해체를 통한 부르주아 혁명의 강화였 다.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의 경우, 관련된 문제가 자신의 국제 강령, 지도 정당, 소비에트를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노 동자 농민 혁명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테르미도르의 정책들을 더욱 더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은 봉건적 세계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층계급"과 소부르주아, 중간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써클들에 대항하는 투쟁도 수행했 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혁명으로부터 태어난 정권의 과실들을 새로운 부르주아 상층계급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스탈 린은 봉건적-부르주아 반혁명에 대항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그들의 조바심과 불만의 주장들에 대항해서도 10월 혁 명의 성과들을 방어한다; 특권이 없는 노동 대중들의 질서정연한 역사적이고 진보적인 경향들을 의미하는 좌익을 분쇄 한다; 그는 임금과 특권, 서열 등이 극단적으로 다른 새로운 지배귀족을 창조한다. 최하층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적 지배계층의 최상층 부위에서 지지를 구하면서 - 때로는 반대로 - 스탈린은 자기 자신의 손에 권력의 완전한 집중을 확 보했다.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이 아니면 이 정권은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 수 있는가? 보나파르티즘 - 바로 그것의 본질에서 - 스스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꼭지점 위에서 균형이 잡 힌 구는 반드시 한쪽 또는 다른 쪽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 처럼 - 역사적 유추 가 자신의 한계와 충돌하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추락은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손대 지 않은 채로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핵심에서 프랑스의 사회적 피라미드는 자신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계속 유지했다. 피할 수 없는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붕괴는 즉각적으로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성격에 문제를 제기 할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는 사회주의 권력이 없이는 건설 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의 운명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 즘을 대체하려고 일어서게 될 정치적 정권에 달려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자신의 주변에 도시와 농촌의 노동 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면,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만이 소비에트 시스템을 재생시킬 수 있다. 우리의 분석으로부터 아래에 간략하게 적시하는 몇 가지 결론들이 도출된다. ·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테르미도르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훨씬 뒤에 있다. 트르미도리안들은 대략 10주년째 승리를 기념 할 수 있을 것이다. · 소련의 현재의 정치적 정권은 통령정부보다는 제국의 형태에 더 가까운 "소비에트"(혹은 反 소비에트") 보나파르 티즘이다. · 그 사회적 기초와 경제적 경향에서, 소련은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다. · 보나파르티즘의 정치적 정권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구들 사이의 모순이 내부적 위기들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의 미하며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존재 자체에 직접적인 위험이다. · 여전히 낮은 생산력의 수준과 자본주의적 환경 때문에, 현재 약화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는 계급들과 계급모순 들은 세계의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승리가 있을 때까지 어떤 경우든지 불확정적으로 긴 기간동안 소련 내에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는 또한 미래 소련에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독 재의 보나파르트적 퇴행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성과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을 의미한다. · 공산당 청년 대오내의 테러주의적 경향들은 보나파르티즘이 자신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두 소진했으며 자신의 존 재를 위한 가장 무자비한 투쟁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의 가장 해악적인 증상들 중의 하나이다. · 스탈린주의 정치적 정권의 불가피한 붕괴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적 실천에 의한 보나파르티즘의 제 거의 경우에만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모든 다른 경우, 스탈린주의 진영에서 파시스트-자본주의 반혁명이 올 수 있을 뿐이다. · 어떠한 슬로건 하에 그것이 진행되건 개인적 테러리즘의 전술은, 특정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최악의 적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다. · 공산당 청년 대오 내의 테러주의의 발단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당의 매장자 - 스탈린에게 있다. · 보나파르티즘에 맞서는 투쟁에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트의 계속되는 패배이다. ·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맹목적인 종복인 동시에 개량주의 관료들의 최고의 동맹이면서 방어자인 코민테른의 범죄적 정책들이다. · 국제적 차원에서의 성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사기를 저하시키는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으로부터, 예를 들면 소위 코민테른의 타락한 관료로부터, 국제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해방이다. ·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의 구조를 위한 투쟁은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과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 우리의 반대자들은 -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고 있다 - 우리의 "자기비판"을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들은 테르미도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입장을 바꾸었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테르미도르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제 당신들은 갑자기 테르미도르는 이미 뒤쪽에 있다고 선언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덤으로 우리가 더 쉽게 군사적 개입을 유발하기 위하여 우리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추가할 것이다. 한편으로 브랜들러와 러브스톤 도당들과 다른 한편으로 "극좌"의 아는 체 하는 자들은 똑같은 음조로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테르미도르에 대한 유추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결코 지적하지 못했다; 그들 은 우리가 오류를 우리 스스로 드러냈다고 목청껏 소리지를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이 오류의 입장을 위에서 밝혔다. 그것은 여러 개의 공식문서들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원칙적 입장 변화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 단지 그것에 보다 정확함을 부여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자기 비판"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나 소련의 퇴행화의 원인과 조건들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 라 단지 잘 알려진 대 프랑스 혁명의 단계들에 대한 유추의 확립에 의한 이들 과정들에 대한 역사적 명확화로까지 확 장되는 것이다. 비록 중요하한 것이더라도 부분적 오류의 교정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기본적 입장을 확고하게 둘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보다 정확하고 보다 현실성 있는 유추로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확립할 수 있도 록 해준다. 토론 중에 있는 정치적 퇴행화의 과정들 바로 그것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 이 오류의 발견(disclosure)을 매우 촉진시켰다는 것이 또한 추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경향은 모오류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고위 성직자들 처럼 묵시와 같은 이미 만들어진 진실들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의 관점에서 우리의 결론을 학습하고 토론하고 체크하며 공개적으로 인정한 실수들 을 정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진한다. 과학적 의식성과 개인적 엄격함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최고의 전통이다. 우 리는 또한 이러 측면에서 우리 스승들에게 올바랐던 것으로 남기를 원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