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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소수자 이야기> 발제 중

처음으로 생리를 했을 때의 당혹감과 자괴감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내게 그런 날이 올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생리 같은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은데도 그날은 왔고, 그날 들은 엄마의 한숨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겂으로 취급받던 여자 아이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며 매달 번거로운 일을 감당해내야 했다. 이것이 내가 장애 여성으로서 겪는 최초의 폭력이었을 것이다.

 

나는 장애인이긴 하지만 엄연히 여성이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키울 권리가 잇다. 하지만 아무도 장애 여성에게는 가사노동, 출산, 양육 등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무성으로 규정되고 여성성의 부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당햇기 때문에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다가 갑작스레 성인이 되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을 상상해보라!

 

- 김효진<장애인과 장애 여성의 목소리로>中

 

 

밑줄 부분을 바꿔말하면 여성은 출산과 양육 및 가사 등 돌봄노동에서 선택이 아닌 강요를 받아왔던 것이고 이를 거부하는 여성들에 대한 배척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극단적인 경우 반려자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소위 과년한 여성들은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었고, 현대의 한국의 경우 출산장려 정책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자본과 정부는 출산 이외의 인구유입 정책은 고려하지 않는데 예컨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불법화와 통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한편 가족이라는 형태 역시 자본주의가 하나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역사적 가족 형태라는 매우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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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출처는 http://blog.jinbo.net/jium/629

 

두 나무가 자라다 중간에 이어진 연리지. 연인을 연리지라고도 하지만 요즘 보면 김진숙님하고 트윗을 주고 받는 사람들의 모습도 연리지 같다.

 

크레인이란 나무와 사람이란 나무가 어느 순간 만나 그렇게 하나가 되고, 하나이다 보니 함께 울다가 웃다가, 즐겁게 의연하게 담대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 가보다. 저 지지리 못난 자본도 그걸 알랑가 모르겠다. 

 

한진중이 교섭을 파행으로 몰고간 오늘, 누군가는 85크레인을 향해백배서원을 했던 오늘, 어떤 이는 먼길을 달려 부산으로 가 크레인을 가득 눈에 담고 돌아와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오늘. 김 지도가 트윗으로 농담을 주고 받는 오늘. MB의 인권위는 우리가 한 차별 진정을 6개월이 넘게 미루고 있는 오늘. 그 오늘이 무참히 가고 있다. 

 

그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고, 오늘이라는 날이 지날수록 우리는 더 굳건한 연리지가 되고 있고 그래서 무섭고 아프다. 너무 무섭고 아파서 소리도 못지를 정도로.

트윗을 하다보면 진숙님이랑 사람들이 트윗으로 웃고 울고 소탈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크레인이란 나무와 사람이란 나무가 만나 그렇게 하나가 되고, 울다가 웃다가 즐겁게 의연하게 담대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 가
트윗을 하다보면 김진숙님이랑 사람들이 트윗으로 웃고 울고 소탈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크레인이란 나무와 사람이란 나무가 만나 그렇게 하나가 되고, 울다가 웃다가 즐겁게 의연하게 담대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
트윗을 하다보면 김진숙님이랑 사람들이 트윗으로 웃고 울고 소탈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크레인이란 나무와 사람이란 나무가 만나 그렇게 하나가 되고, 울다가 웃다가 즐겁게 의연하게 담대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 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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