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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파란만장 심리공판 - '주민번호를 말할 수 없다' vs '군대는 없어질 수는 없다'

'한여름'인데도 찌부둥하면서 이따금 비가 내렸던 날씨가 이어지는 2005년의 절반이 넘어가고 또 다시 하루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래서 전 이미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가서 끝까지 저의 양심을 비추면서 행동을 한 것이 병역법 88조 의한 '정당한 사유'이다는 걸 보여주는 걸 보여주고는 싶었으나, 이미 다른 분이 그러한 행동을 진행하였던 상황이었고 이미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잠정)결론이 나온 상황이라서, 제 스스로 '양심'에 대하여 보여주는 자신이 없었기에 무리하게 말고 가는 것보다는 원하는 바를 얻는 차원에서 이런 상념을 기본으로 최후진술문을 작성하는 선에서 별다른 준비 없이 재판을 기다렸습니다.

 

그 날이 찾아오면서 어김없이 이불 개면서 청소를 하는 것부터 '인원점검 → 쓰레기 버리기 → 아침 배식 → 설거지'등의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전 재판결과에 말아 버리지 마라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느리게 먹었던 제가 빨리 먹으려고 국에 밥을 말아먹었던 다른 하루들과 달리 재판이 잘 되어가길 바라는 미신적 사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모두 다 예외 없이 맨밥을 씹다가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마셨지요.

 

물론 저로선 그런 행동을 한다면서 참 별 이상한 것이 있냐고 되묻고 싶지만, 그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고 앞서의 지문날인 문제로 내 돈임에도 내가 쓸 수가 없다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서 연소한 나이도 있지만 더욱 발언권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었지요.

 

더구더나 이후에 다른 분이 심리공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오뎅국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었는데 주위의 시선이란... 그럼에도 기결수에 되어 다른 방에 가더니 그런 건 미신이다고  추가 건에 대한 결심공판일에 밥 말아먹으라는 라는 말을 하면서 무시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검사나 판사의 말 한마디에 자기의 신분이 상승하는가-석방하는가- 아니면 하락하는가-실형이 나오는가-으로 나오기에 재소자의 입장에선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많이 주거나 담당판사와 가까울 것 같은(법원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거나 사시 동기 등으로) 변호사를 수임하는 등으로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옥문에서 나오길 바라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와 비슷한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선 뭐 1년 6월의 징역 및 금고로 판결을 받아야만 징병과 관련하여 제2국민역(전쟁이 발발할 때 강제노역을 하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에 병역면제와 동일하지요)으로 재판정을 받으면서 빠르게 사회로 복귀할 수가 있기에 그렇게 판결을 받기를 원하지요.

 

물론 집총을 비롯한 군사훈련을 거부하여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휴가'등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시간이 있는 군대와 비교해도 그러한 비극을 몸써 보여야 하는 것이 정말 우습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비극이 앞서 1930년대 말부터 시작하였다는 것과 5여 년전에는 3년형을 받아야 하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전국의 9백여명이 병역거부자가 수감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저 자신도 위해서도 있지만 후세에 저와 같은 길을 가고싶은 모든 이들을 위해 자청하여 '쇠팔찌'를 차는 것이지요.

 

그래서 별다른 고민이나 준비 없이 18개월만 받기를 바라면서 시간이 흘러갔지만 역시 중요한 관문이라서 조금은 불안했었지요.

 

그래도 봉사원은 저에게 재판 잘 받아서 평안하길 바라면서 설거지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땅이 아닌 콘크리트를 밟기에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양말에 발을 신으라고 하면서 직원의 부름을 기다렸지요.

 

아침 8시경. 직원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철문이 열리고 재판을 잘 보라는 방 사람들의 성원을 안고서 흙색 상하의를 입고서 고무신이 질질 끌며 미리 준비한 최후진술서를 들고서 몇번 차를 타라는 직원의 부름을 기억하며 몇몇 이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출정-재판에 나선다는 의미 인 듯-대기실에 이동하면서 소위 부정한 것이 들어 있어 심신에 해가 올까라는 소측의 염려에 의해 재소자의 신체를 기분 나쁘게 어루만져주고, 잠시 잊었던 쇠팔째와 앏은 동아줄을 재회하게 되어 교도경비대원에 의해 다시 착용하였지요.

 

그 후 탑승할 차량에 있을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를 잊어버리지 말고 같이 잘 지내라는 배려 차원에서 세 명씩 동아줄로 이어주었고, 잠시 후 햇살에 고립 당한 채 살다 갑자기 자외선에 쪼여 피부에 상하지 마라고 전후좌우에 작은 구멍이 있는 철창이 유리창 안에 있는 3번 버스에 몸을 실렸고 버스는 보름간 내 앞에서 굳게 닫혔던 철문은 열리면서 수원지법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면서 오랜만에 나서니 공사중이었던 원형 육교가 보이고 아주대정문에서 대학생이나 시민을 보며 나도 저 속에서 신나게 걸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이라는 탄식함이 느껐죠. 그리고 저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물음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가 수원지법 앞 사거리(고가도로가 있는)에서 좌회전을 한 후 법무법인 '다산'이 있는 법전 빌딩을 지나 정문에 들어섰고 검찰청-법원사이 길에 들어가더니 버스는 왼쪽 검찰청이 있는 쪽으로 틀어지더니 소위 '출입제한'안으로 들어 가거군요.

 

그 후 '수용자'에게 어떠한 불편을 주기 않으려고 동행한 구치소 직원은 저희를 법정에 인도하고자 내리라고 하였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 상해를 입지 않고자 설치한 버스 안 철문을 지나 진짜 버스 문에 나선 뒤 잠시 바깥공기를 마신 후, 밧줄에 이어진 재소자와 함께 나란히 지하로 내려가서 법원으로 가는 통로로 간 후 법정에 세울 인간들이 다 왔는지 또 다른 직원의 검사에 걸쳐 지하 공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져온 인연은 경비교도대원에 의해 풀어주어서 여기서 잠시 끊어지고, 직원의 호명에 의해 각자 제 위치로 흩어졌지요. 전 양손에 쇠팔찌를 차고 2층으로 올라갔고 또다시 여닫이형 철창을 지나 같은 법정에서 설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가 아마 9시40분경 정도.

 

사실 실형을 원하고 있는 저인데도 무언가 결정이나 그러한 시험 등에 대하선 왠지 긴장감이 드는 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이 맨 앞에 교도대원에 찬 전자시계를 뚫어지도록 보며 기다리는데 이 초조함이라는 건 검판사의 말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하는 현실에 놓인 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나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면서 오전 10시는 지나가는데 동행한 직원 한 분이 절 부르면서 제가 가져온 용지에 대하 뭐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최후진술문이고 재판관에게 전달할 거라고 말하더니 그 직원은 원래 확인 받아야 한다면서 나설 때 검신 때에 어떻게 통과가 되었다는 등의 난리를 피더라고요.

 

물론 저로선 아니 외부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면회할 때 직원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는 건 알고 있고 국가에서 만들어진 문서 즉 법률상 써 있다는 건 알고 있다만 참 재판부에 제출할 때에도 그러한 검열을 거쳐한다는 건 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요.

 

그리더니 그 직원은 그 걸 가지고 있지 마라고 하더니 전 말이 어눌하고 생각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제발 소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말을 하더니 그 직원은 그 진술문 내용을 외우면 되지 않느냐고 말을 하는데...

 

아니 편지지 3페이지 분량을 그 짧은 시간에 외어지냐고요. 그래서 저 기억력 좋지 않다고 말을 하였고 결국 가지고 있기로 얼버무렸지요. 그 후 예정된 순서가 오고 저에게 마지막 장애물인 수갑이 풀려지면서 법정으로 가는 문으로 아주 씩씩하게 걸어갔습니다.

 

물론 씩씩하게 걸어가는 건 당당하게 실형을 받겠다는 다짐을 보여주면서 양심에 의하여 병역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사법의 심판에 대한 희극에 가까운 비극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그리면서 잠시나마 올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보더니 어쩌다 후원인이 된 분을 포함해 3명정도 있더군요.

 

그리면서 중앙에 있는 피고인석에 섰고 앞에서 그 권위적인 상좌에 있으면서 차림새론 '나 권위있다'라고 외치는 재판관님이 절 묻더군요. 주민번호는?

 

물론 이건 당 사건에서 피고인이 진짜 맞는지 확인하는 인정심문이었지요. 전 당당히 답했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선 주민번호는 말할 수 없다'고... 그리고 공소장에 나와 있는 인적사항이 맞다는 등을 마이크를 통해 들려 왔습니다.

뭐~ 이러한 저의 말에 재판관은 물론이고 절 도와주겠다는 변호사, 그리고 뒤에 있던 구치소/법원 직원, 방청객 모두 마음속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니 당연한 절차에 왠 거부?

 

물론 헌법상이나 형사소송법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진술거부권이 반드시 보장되어 있지만 이건 피의자 본인이 불리하다고 인지하는 진술에 대하여 발설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주민번호을 비롯한 개인정보를 진술을 거부하는가?

 

그 건 제가 예전에 다른 병역거부자가 구속하면서 재판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원래 공판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민 누구에게 공개하는 재판이다라는 의미이기에 특정한 큰 사건이 아니다면 대부분 사건의 경우 시민 누구나 아무런 부담 없이 재판에 방청할 수가 있는데도 인정신문에서 왜 주민번호와 주소, 본적을 부르고 있는 앞선 병역거부자의 반응에 '인권활동가'로서 정말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인정심문에서 피의자의 중요한 개인정보 하나가 보통의 시민들에게 알려질 우려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수가 집행유예나 벌금 등으로 석방되는 실정에서 유포할 개연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지만 이러한 정보를 악용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위반되는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별 다른 지식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아예 작정해서 불복종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더니 당연히 판사는 이러한 행위가 잘못하다는 불이익을 줄 수가 있다는 말의 협박으로 답했고, 심지어 변호사도 당황하였는지 애원하는 말을 하더군요.

 

솔직히 제가 1심으로 종결하고 싶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하였는데 제가 '다산'에 있다보니 알아서 법무법인와 상의해서 무료 변론을 해주었지만, 이러한 재판의 경우 지금까지 사실상의 양심검증의 장으로 가는 이상 본인의 병역거부의 사유와 군복무의 의지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 변호사는 정말 필요함이 적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면서 지루한 신경전을 지나더니 판사 왈 서면으로 주민번호를 쓰라고 하더군요. 사실 거부만 밝혔지만 그 대안에 대해선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잠깐의 잔머리를 굴린 끝에 전 내이라고 답했고, 긴급히 준비한 이면지에 주민번호를 쓰더니 판사는 '주소/본적'을 불렸고 뭐 알아서 써서 법원 직원을 통해 제출하였고 저의 재미있는 투쟁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공판담당 검사의 진술과 질의를 하였는데 그 중 왜 입영을 거부(기피)하였다는 질문에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에 대한 고민'과 '국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에 의하여 거부하였다고 마이크를 통해 답했고, 변호사의 변호진술을 하면서 '내 그렇습니다'의 되돌이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판사의 발언이 참 나의 가슴에 사정없이 흔들었지요. 지금 생각하니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 핵심은 '군대는 있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더군요.

 

참 저로선 아니 저의 양심에 대하여 좀 사상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사실상 이 한국사회에서 검증의 장이 된 법정에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함에도 저로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판사가 던졌는지...

 

그런데 한 국가의 시민의 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출발하였지만 내부에게 폭력을 가하면서도 '국가주의'나 '군사주의'를 양성하고 시민의 삶에 피해를 주면서 사실상 어느 특정한 '국가권력체'를 호위하는데 앞장서는 '군대'는 당연히 사라져야 할 집단이었기에 두말 없이 그렇다는 답을 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책에선 평화주의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자신 스스로에게 함정을 빠뜨리기 위한 술수이다는 걸 안다면 무시하거나 딴 소리를 하라고 조언을 보았지만, 그 대 당시에는 어차피 실형을 받을 각오이어서 갈 때까지 가는 일념에 휩싸였지요.

 

그런데 전 이후에 또 다른 병역거부자의 판결에서 징역 1년 6월이 아닌 1년 8월을 받았다는 걸 듣은 후로는 '십년감수'한 심정이었지요.

 

그리더니 그 판사는 앞선 저의 투쟁에 대한 반격인지 몰라도 절 설교하게 하는데 이건 저의 상상이지만 '넌 아직 어리니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생각 좀 하라'라고 하는데 아니 3년 넘게 끝없이 고심하다가 작심하고 수의를 입는 인간에게 생각 좀 하라니...

 

물론 그 판사는 그러한 설교에 대꾸를 수시로 말하였지만 역시나 뭔가 아는 건 많다는 걸처럼 개무시하고 끝내 자기 하는 말 다하였지요. 그래서 전 어쩔 수 없이 생각 좀 하라는 말에 응했지요.

 

그러나 만약 '병역거부'라는 길을 포기하고 다른 이의 삶처럼 살아도 무조건 집행유예로 주는 상황에선 몸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고, 다시 거부하면 앞선 형량을 더해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심지어 병역면제가 안 될 수가 있는 문제가 있기에 전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면제'를 바라고 수감을 자처하는 건 아니고 살다온 경험으로는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밝히고 싶네요.

 

그 다음 최후진술을 하라고 하는데 이 판사가 시간 좀 적게 쓰라고 말한 듯 진술문 쪽수를 물으면서 계속 딴죽을 걸었더니 평상시대로 미리 적혀진 글을 낭독한 후 판사는 그 내용이 궁금해서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문을 전달하였더니 다시 되돌러 주더니 나중에 보내라고 말하는 절 끝까지 걸더군요.

 

끝으로 검사는 담당검사의 측은함이 배인 듯 1년 6월을 구형하였는데, 변호사는 당연히 무죄이라고 변론을 해야 함에도 저의 입장 그대로 밝히는 건 좋아도 알아서 주어 달라는 듯한 말을 하는데 좀 기분이 좀 그랬습니다.

 

결국 이런 파란만장한 심리공판이 끝난 후 테이프에 되감는 것처럼 내가 사는 큰집으로 돌아왔고 이미 점심식사 시간이 끝나가서 어쩔 수 없이 광복절 때 특식으로 준 컵라면과 밥, 단무지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구형량에 대하여 저와 같은 이가 수원구치소에 온 경우가 없었는지 주위에선 적었는지 뭐 집행유예나 1년 6월을 안 준다고 말이 나왔습니다. 물론 전 전국적으로 앞선 병역거부에 대하여 선고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줄꺼이라고 답했지만 하루들이 지루한 것인지 이러한 심리를 즐기는 듯 싶었네요.

 

그리고 이번 공판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투쟁을 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복을 입고 출정을 하였으면 더욱 의의가 있었을 것인데 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지요.

 

그리면서 이 다이나믹한 하루는 저물어 가면서 전 저의 입장이 증명하길 바라면서 9월 1일 선고공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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