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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짧음에도 짧지 않는 2주여 이여. - 나동 8층 2사의 살이

 

기결수로 되어 달라진 건 몇 가지가 있었지요. 먼저 제가 기거하는 장소에서 창문넘어 그나마 밝아진 곳에서 앞에 아파트가 가로 막혀 햇빛이 아예 안보이는 곳으로 옳겨진 것과 면회가 매일 한 번에서 매월 4번 밖에 못하면서 면회가 있으면 이동할 때 앞서 있던 곳보다 멀리 가야 하는 것이 바꿔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사람들이고, 방을 옳김으로 인한 저의 위치의 강등 즉 막내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저를 ‘막내’로 부르고, 제 자신이 제 주변의 사람들이 나보다 상당한 연령차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와 함께 이감과 출역을 준비하는 것과 추가로 기소당해 재판을 해야하는 것이 공존하는 방 분위기인지 잠시의 인원점검 전후 이외에는 방에서 누우며 지내고 인원점검시 복종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각자가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닌 간단한 인사로 끝내고-약간의 불복종을 하는 듯한- 구매도 최소한으로 구입하는 등의 규율이 유연성 있게 운영을 하는 것 같았지요.


이러면서 이후에 몇몇이 입방하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버렸지요. 그럼에도 진로에 대한 불투명과 면회 횟수의 제한으로 하루가 지루함으로 이어젔고 이 묵직함을 편지 쓰기로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하였는데, 이따금 오는 잡지나 책 이외에는 편지는 많지 않았어요. 이러면서 서서히 내가 잊혀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언제나 감초처럼 이 지문날인 문제는 아직도 안개가 거치지 않아서 또 다시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주눅들게 하였지요.


또한 사동에 있는 보조-‘소지’라고 부르죠- 중에 한 분이 저에게 자기가 왕년에 ‘운동권’이라 말하면서 네가 말하는 이상은 옳아도 현실에 따라야 하지 않냐고 그저 물어본 투의 말한 것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저에겐 ‘병역거부’를 하는 것에 부끄러움과 후회하는 것 자체가 전혀 없었어요.


그와 함께 지문날인 거부를 하는 것도 병역거부와 일맥상통한 문제이다고 판단하기에 비록 눈앞에서 벌어진 어려움이 있음에도 나의 원칙에서 물러설 수가 없어서 그러한 말에 대수롭게 느끼지 않았지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서 사회운동을 함에도 생계라는 현실은 무시할 수 없고 주어진 시간 중에 상당수를 그에 투여하고 있지요.


하여튼 이러한 딴죽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다가 ‘전쟁없는세상’에서 보내는 수감자우편물을 보다 아크릴창이 없이 시간도 넉넉하게 면회하는 특별면회를 한다는 걸 보았고, 약속한 날 예정된 사각보다 좀 늦게 만나려 갔지요.


제가 면회장소에 들어서니 네 명이 있었는데 대화를 주로 출소한 병역거부자인 임 아무개와 제가 나눴는데, 영치금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운 반응이었어요. 전에는 지문날인이 아니고서는 영치금을 쓸 수 없다는 것만이 중점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 뿐 심각한 정도이다고 보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이다금 어머니가 면회 온 것이 전부일 뿐 지역의 활동가나 민노당 쪽 사람들은 전혀 오지 않는 등의 서서히 무심한 징후를 본 것에 화내며 제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달라고  요구했었어요. 이와 함께 제 예상에도 감안하고 있지만 이러다가 이감갈 수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러면서 면회는 30여분이 이어젔고 아쉽지만 전 악수와 인사 끝에 해여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제 뱃쪽을 건들더니 살 많이 빠졌다고 하더군요... 흐흐


그 다음날 운동시간이라 그 좁디좁은 운동방에서 있는데 누군가 절 부르고 가보았는데 구매 담당직원이 ‘가족’-실제로는 전혀 아닌데...-들의 항의로 몇 가지 생활용품을 주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에게 그 걸 주더라고요. 그런데 저로선 해결되는 정도가 아니었지만 이 것으로 어쨌든 기분은 좋았어요.


그리더니 수 없이 보내진 편지에도 묵묵부답이엇던 집에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는데 받을 예정인 날, 즉 2005년 10월 24일에 전 어쩔 수 없이 이감을 단행해 버렸고 그 편지를 받지 못한 채 출소해서야 받게 되었어요.


그 날도 약간의 걱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부쩍 싸늘해진 날씨에도 일어나 일과를 시작할 때 어느 직원이 갑자기 절 부르더니 이감이니 짐쌀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고, 제 자신은 잔류에 대한 기대는 않했지만 상당히 빨리 결정한 것에 놀라움도 느껐어요. 그리고 빨리 준비해야 한 것에 정신이 없었고요.


이러면서 제 자신도 준비하고 주변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었고, 이후 철문은 열여지고 전 그분들에게 인사하며 복도를 지나갔고 재확인을 한 후 같이 갈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치소에 입소할 때의 공간으로 이동하였지요.


그리면서 서류확인을 하면서 직원도 저에 대하여 지문날인 문제로 이감간 듯하다는 제 예상과 벗어나지 못하였고, 전 파란옷에서 벗어나 회색의 호송복으로 갈아 입었고 잠시후 원하지 않지만 한 차에 세 명의 재소자와 5,6명의 직원들 그리고 짐과 함께 ‘수원시 우만동 182번지’를 벗어나 동수원 나들목을 향하면서 또 다른 의미의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었죠.


중학교 때 수학여행이나 여행으로 지나쳤을 뿐 잠시라도 머문 흔적이 없었던 그 지역, 전 ‘김천교도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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