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인간과 계획 제4장 (1)」 『총명한 유물론』 제3집 가을호
L2✬ R2
소비에트 경제에서 집단농업
제4차 5개년 계획은 그 주요 목표를 천명하면서 “소비에트 인민들의 물질적 복리를 증진하고 국내의 주요 소비재 품목들을 풍족하게 보장하기 위해” 농업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공업의 추가적인 발전을 결부시켰다. 농업은 공업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준비보다는 민생물자의 공급을 그 목표(the provision of butter rather than guns)로 삼고 있었다.
농업을 다루는 계획부문은 “집단농장의 공동경리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수치와 목표치를 제시한 계획을 수립했다. 농업의 자본발전을 위하여, 국가가 거액(199억 루블)을 지원하고 집단농장의 자체적인 자본투자로 그 2배에 달하는 금액을 충당하도록 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항목에는 대규모 관개 및 배수공사, 트랙터와 농기계 32만 5천 대의 공급, 집단농장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국영 기계-트랙터사업소(MTS) 수백 개 건설, 다수의 소규모 발전소들의 건설, 집단농장의 가축사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막대한 지출,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위한 각종 투자가 포함됐다.1
계획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1946-50년도 농업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영농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농업과학의 최신성과들을 적용함으로써 곡물수확량을 향상시키고 농업총생산량을 제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제4차 5개년 계획의 주요 농업목표들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제정 러시아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소련이 각각 도달했던 최고수준과 어떻게 대비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2
|
|
1913 |
1940 |
1950 |
|
곡물재배면적 |
9,440만 헥타르 |
1억 1,040만 헥타르 |
1억 570만 헥타르 |
|
곡물생산량 |
8,010만 톤 |
1억 1,880만 톤 |
1억 2,710만 톤 |
|
면화생산량 |
70만 톤 |
250만 톤 |
310만 톤 |
|
면화재배면적 |
1,080만 첸트네르 |
1,200만 첸트네르 |
1,840만 첸트네르 |
|
설탕생산량 |
1,090만 톤 |
2,100만 톤 |
2,600만 톤 |
|
설탕재배면적 |
1억 6,800만 첸트네르 |
1억 7,100만 첸트네르 |
2억 6,000만 첸트네르 |
|
해바라기 씨앗 생산량 |
70만 톤 |
330만 톤 |
370만 톤 |
|
감자생산량 |
2,330만 톤 |
8,420만 톤 |
1억 1,530만 톤 |
계획3은 집단농장의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집단농장의 공동경리를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집단농장의 재부, 즉 집단농장들의 수입과 불가분기금, 건물, 생축, 설비와 가축, 그리고 예비물자와 종자, 사료비축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집단농장의 공동경작지와 공동재산에 대해 제대로 된 보호가 이루어져야 하며, 집단농장 규약이나 집단농장 민주주의, 예컨대 집단농장 관리위원회의 선출과 그에 대한 집단농장원 총회의의 책임추궁과 같은 원칙에 대한 그 어떤 균열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은 노동의 올바른 조직화와 집단농장의 수입을 분배하는 데에 있어 단위 노동일의 역할을 강화하고 제고함으로써 향상되어야 한다. 집단농장 근로돌격대와 작업반 제도는 개인별, 집단 도급률의 실천을 통해 개선되어야 다. 더욱 높은 곡물수확량의 달성과 어린 가축의 육성 및 그 생산성의 증대에 대한 집단농장 농민들의 추가보상제가 널리 시행되어야 한다. ⋯ 집단농장은 농산물의 납부와 관련한 국가적 의무를 이행함에서 더욱 엄격한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
이 문장에 사용된 상당수의 용어들은 세계 농업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집단농장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농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용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소련의 개별 공민이 어떠한 정신으로 농업에 종사했는지, 그리고 그 농업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의식적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파악하는 데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집단농장이 소련 농업의 생산량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 실상을 초기에 충분히 인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4 전쟁 직전, 1,920만 농가(전체 농업 종사 가구의 97%)로 구성된 23만 6,000개의 집단농장은 2억 9,000만 에이커에 달하는 경작지를 책임지고 있었다. 4,000개의 국영농장은 (그들이 통제하고 있는 총 1억 6,800만 에이커의 토지 중에서 약 2,400만 에이커를 경작했다.5 약 50만 남짓의 소규모 개인영세농장은 150만 에이커를 차지했다. 가축을 포함한 농업총생산액 중에서 집단농장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결정적이었다. 집단농장 단위는 62.9%를 집단농장 농민의 개인 텃밭이 21.5%(총합 1,300만 에이커)를 점유했다. 다만 국영농장은 특히 공업용 작물과 축산업에 집중하기 때문에, 곡물의 생산에 있어 집단농장이 차지하는 지분은 여전히 높았다.
그렇다면, 집단농장이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국가에 속한 토지 위에 조직된다. 소련의 모든 토지는 국영재산으로서 매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장은 토지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으며, 국가가 발급한 특별증서를 통해 영구적으로 토지사용권을 부여받는다. 둘째, 집단농장의 생산설비와 건물, 비축물 및 저장물은 그 일부가 집단농장 전채의 공동재산이고 나머지는 구성원 개개인의 사적 재산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개인주택, 가옥에 부속된 소규모 텃밭에서 기르는 가축과 가금류, 그리고 개인적 용도로 보유하는 소형 농기구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앞서 이러한 개인텃밭들이 전국적으로 모두 합쳐지더라도 전체 집단농장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6 셋째,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농장원들은 하나의 협동적 생산조직을 구성하며, 전 세계의 다른 협동조합과 마찬가지로 연례총회에서 의장과 관리위원회(혹은 경리위원회)를 선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무를 관리한다. 총회는 집단농장의 최고의결기관이며, 관리위원회는 총회의 동의가 없이는 어떠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집단농장 관리위원회는 의장, 작업반장, 분조장 등을 통해 농장원들에게 일감을 배분하고 그에 따라 작업반을 편성하는 일을 통제한다. 넷째, 집단농장 구성원들은 누구의 고용인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기업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국가의 고용인이 아닌데, 국가는 단지 그들이 일하는 토지의 소유주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누구에게도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므로 임금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공동으로 일하며, 그들의 노동은 화폐형태가 아니라 각자가 기여한 노동일의 숫자에 따라 측정된다.
이를 위해 집단농장에서 수행하는 모든 작업은 1933년부터 7개 등급으로 분류됐다. 가장 낮은 등급은 가장 단순한 비숙련노동을 포함하며, 이 항목에 따른 하루의 노동은 0.5노동일로 산정된다. 가장 높은 등급은 가장 복잡하고 숙련된 노동을 포괄하며, 여기서는 하루의 노동이 2노동일로 산정된다. 각각의 작업에는 할당된 작업량이 존재하며, 이는 경작지의 성격과 다루는 작물, 운용할 수 있는 기계의 상태, 취급하는 가축의 종류에 따라 총회에서 결정된다. 작업에 배정된 노동일의 전액 혹은 일부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할당량을 완수해야 한다. 할당량에 미달할 경우 개인에게 부여되는 노동일은 그 비율만큼 삭감되며, 할당량을 초과달성할 경우 그에 따른 성과급이 지급되어야 한다. 또한, 농산물의 수확량, 유제품의 생산 등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거나 기타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 추가노동일을 부여하는 형태의 성과급도 존재한다. 1945년에 전체 집단농장의 30% 이상이 이러한 성과급지불체계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매일,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작업반장은 자신이 책임진 집단농장 농민 각자의 “노동실적”을 단위노동일로 측정하여 노동수첩에 기입하며, 집단농장의 장부에도 그에 상응하는 기록을 남긴다. 최종적으로, 농산물의 일부를 매각하거나 국가에 고정가격으로 납부하여 확보한 집단농장의 현금수입과 생산물의 분배는, 각 농장원들에게 적립된 노동일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국영공장과 국영농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집단농장 농민은 그의 능력에 따라 노동을 제공하고, 그가 수행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분배받는다. 그러나 그는 임금체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농장 생산물을 각자가 기여한 노동량에 비례하여 구성원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를 실현한다.
이 독창적인 체계 속에서는7 생산물 전체가 이러한 방식으로 분배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집단농장은 국가에 대한 비용분담을 져야 하며, 하나의 기업소로서 자체적인 운영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따라서, 집단농장은 총생산물 중 법령에 의해 결정된 일정한 비율을 국가에 고정가격으로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며, 대개 농장의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추가수량을 국가와 계약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매도한다. 집단농장은 국가로부터 받은 종자 형태의 대부금을 국가에 상환한다. 연중 생산물 중 일부를 판매함으로써 집단농장은 소득세(집단경리에 사용된 생산물 및 국가와의 계약판매에서 발생하는 현금수입에는 4%, 구성원에게 분배된 생산물과 집단농장 시장에서의 판매 및 부속 기업소에서 산출한 생산물의 처분 등에서 발생하는 현금수익에는 8%를 적용)와 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건설의 용도로 국가로부터 받은 현금형태의 대부금도 상환한다.
집단농장 자체의 운영비용에는 그 지역의 기계-트랙터사업소가 수행한 노동에 대한 대가(이는 현물로 지급된다.)와, “불가분기금”으로의 적립(공동보육원·축사·목욕탕·전력발전소 등 공동의 이익을 위한 시설의 건설 및 유지보수의 용도), 그리고 문화 및 행정비용(후자 둘은 현금으로 지불)이 포함된다. 또한 어려운 시기를 대비한 보험용이자 환자·노인·장애인·아동복지시설의 운영을 위해 모든 종류의 생산물을 비축하는 예비기금의 조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소득을 분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이 채택된다. 집단농장의 모든 구성원들이 획득한 노동일의 총합을 합산하고, 그 결과로 산출된 총수치를 순생산물의 총액으로, 현물과 현금으로 나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물과 현금 양대 측면에서 1노동일의 가치를 나타내는 몫이 창출된다.8
따라서 1노동일의 가치는, 예컨대 곡물 10파운드, 감자 20파운드, 육류 4.5파운드, 그리고 해당 집단농장의 성격에 따라 설탕이나 면화, 담배 등과 현금 2.3루블로 산정할 수 있다. 이 액수들에 각 집단농장 구성원이 적립한 노동일의 수를 곱하면, 그것이 그 농장원의 1년간 집단농장에서의 노동에 따른 최종순생산물의 분배몫이 된다. 보다시피, 이는 그가 투입한 노동량에 엄격히 비례하여 분배되는 것이다.
1940년 소련 집단농장의 분배구조는 최근의 한 저자9에 따르면 다음의 표와 같다(총액 대비 비율, %):
|
|
현물 |
화폐 |
|
국가납부금 |
13.7% |
9.4% |
|
생산비 |
50.4% |
27.7% |
|
집단농장원 분배액10 |
35.9% |
62.9% |
집단농장의 모든 구성원들이 법에 따라 연간 최소노동일수를 채워야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 전에 그 수치는 비옥도가 낮은 중부, 북부, 극동지역의 60일부터 아시아의 면화재배지역과 캅카스의 100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42년 4월에 최소노동일수는 약 50% 인상됐으며, 그 이후로도 재건의 필요성 때문에 재건의 필요성 때문에 감축되지 않았다. 건장한 집단농장 농민 1인당 평균노동일은 1940년에 254일에서 1942년에는 352일로 상승했다.11
쿠이비셰프 지역의 50가구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농장 의장이 프라우다에 보낸 서한(1946년 10월 28일자)은 좋은 사례로 삼을 만 하다. 1929년 창설 당시 이 농장은 약 1,000헥타르(약 2,50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배정받아 경작을 시작했다. 전쟁 도중에 주된 노동력이 여성, 청소년,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농장은 이전에는 불모지로 여겨졌던 땅을 개간하여 경작지를 300에이커 이상 가량 확장하였다. 1946년 가뭄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관리를 통해 1944년 대비 곡물생산량을 50% 증대시켰으며, 헥타르당 호밀 약 30첸트네르, 귀리 약 28첸트네르를 생산했다. 1940년과 1946년 사이에 대가축의 수는 69마리에서 126마리로, 양의 수는 252마리에서 462마리로 증가했다. 또한 전쟁 도중 가금사육장과 72개의 벌통을 신설했다. 이 농장은 국가에 대한 곡물, 우유, 달걀, 양털, 육류의 계획납부량을 전량 완수했을뿐만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계획을 상당히 초과달성했다. 그 결과, 이 농장은 돼지축사, 대장간, 집단농장 사무실 등 다수의 신규 생산시설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45년에 집단농장의 건장한 구성원 1인당 평균 320노동일이 적립됐고, 1노동일당 최소 곡물 7파운드를 분배받았다. 1946년에는 9달 만에 평균적립금이 이미 250노동일에 달했고, 집단농장은 1노동일당 곡물 5파운드와 양모 0.25파운드를 가불할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는 집단농장 농민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시장에서 이 생산물을 처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성과들은 보고에 언급됐듯 수많은 우수한 개인들 노력뿐만 아니라 잘 조직된 작업반들의 집단적 노동을 통해 달성됐다. 1946년 봄 파종은 7일만에 완료됐고, 유휴지의 밭갈이가 일찍이 수행됐으며 가을 파종은 8월 12일까지 마쳤고, 9월 중순경에는 곡물과 다른 작물들의 수확을 모두 마무리지었다. 10월 3째주에 모든 경작사업이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각 작업반들은 1947년의 새로운 수확을 준비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들은 눈이 내리기 전에 그루터기 갈이를 마치고, 거름과 비료를 모으고, 축사의 보수와 석회칠 작업을 마무리했으며, 연구소조를 통해 농업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10월에 해당 집단농장은 경작사업과 가축사육, 주거, 전반적인 복리의 개선을 골자로 하는 자체적인 5개년 발전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농장은 해당 계획을 통해 양봉을 확대하고 12에이커 규모의 과수원을 조성하며, 1947년에는 전기화 사업을 착수하기로 했다.
평균적인 집단농장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물론 그 초기 시절을 특징지었던 험난한 투쟁을 생략하고 있다. 집단농장이 1917년 직후 출현하기 시작했음어도 불구하고 그 절대다수는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 5개년 계획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농업부문에서 집단경리의 출현은 혁명의 훨씬 오래 전부터 주요 사회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예견됐던 바였다. 일례로 1902년에 당시 맑스주의 이론의 최고 국제적 대변자였던 카를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12
“농민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 농업생산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 즉 가축의 사육과 기계 및 비료의 도입, 토양의 개량을 추진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 국가는 개별 농민에게 종축(번식용 가축), 비료, 기계를 판매하는 대신 농민조합이나 협동조합을 상대하는 편을 훨씬 선호할 것이다. 이들 조합과 협동조합은 생산물의 구매자로서 더이상 사적인 중간상인을 대할 필요 없이 협동조합, 소비자조합, 지방단체 혹은 국가산업(방앗간, 제당공장, 양조장 등)을 직접 대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이곳에서도 사적 산업은 사회적 산업 앞에서 끊임없이 퇴조할 것이며 결국 사회적 산업이 농업생산 그 자체를 변혁하게 될 것이다. ⋯ 농민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을 결합하여 공동으로 경영하게 될 것인데, 특히 몰수된 대공업의 사회적 운영이 동일한 노동투입량으로도 훨씬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때 그러할 것이다. ⋯ 일단 농민이 휴식과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농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더이상 농업을 등지지 않을 것이며 단순한 소규모 생산에서 대규모 생산으로 이전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사적 소유의 마지막 보루도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 자체도 사회적 소유로 운영되는 대규모 공업이 우선 성공의 설득력 있는 본보기를 제시해야 하며, 둘째로는 농민에게 변화가 실질적으로 가치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기계, 비료, 농업과학의 기타 자원들을 제공할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이는 5개년 계획 이전에 (최소한의 규모로도) 불가능했다. 제1차 5개년 계획 이전 4년 동안 집단농장의 숫자는 15,000개에서 20,400개로 늘어났을 뿐이었고, 집단농장원들은 (총합) 80만 명 미만에서 120만 명으로 증가했으나, 집단농장의 경작면적은 소련의 전체 경작지 중 약 1%에 불과했다. 집단농장이 존재했던 곳에서 초기부터 개인경리보다 더 나은 수확고를 올렸고, 시장을 위한 잉여생산물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집단농업이 참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농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국가의 급격한 공업화 덕분이었다. 1927-8년에 개인 소농의 잉여생산물은 전체 생산량의 19%를 넘지 못한 것으로 추산됐으나, 당시 존재했던 집단농장의 경우에는 50%를 초과했다.13 그러나 이는 국가가 농민들에게 수많은 트랙터들과 상당한 자금, 그리고 기타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됐을 때 비로소 나타난 대규모 증명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바는, 트랙터의 지원이 집단농장을 조직할 만큼 충분히 각성된 개별 농민집단에게 단지 한두 대씩 분배되는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낭비적인 처사였다. 1927년 오데사 지역의 우크라이나 국영농장들 중 한 곳의 발기에 따라, 인근 집단농장의 작업을 지원하기 위한 “트랙터 종대”가 창설됐다. 그 성과는 총면적 약 6만 에이커의 토지를 관할하며 28개 마을에 복무하는 “기계-트랙터사업소(MTS)”로 재편될 만큼 몹시 탁월했다. 1928년 가을에 중앙곡물협동조합협회는 150만 루블의 비용(절반은 국가예산에서, 나머지 절반은 자체적인 재원으로 충당함.)을 투입하여 13개의 트랙터 종대를 조직했다. 이 종대들은 종전에 소규모 집단농장들에 뿔뿔이 흩어졌던 트랙터 378대와 공장들로부터 새로 받은 트랙터 20대로 구성됐다. 유럽 러시아의 주요 곡창지대─볼가 강 중류와 하류, 크림 반도, 북캅카스, 중앙흑토지대─에 집결된 이 기계화된 역량과 함께 노동의 절약과 선진적인 영농법의 장려, 기존 불모지의 활용, 낙농 및 육류생산농장을 위한 사료의 공급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실질적인 성과들이 달성됐다. 이러한 성과들은 널리 알려졌으며, 그 다음 해에 기계-트랙터사업소는 소련 전역에 조직되기 시작됐다.14
둘째로, 국가는 설비의 구매와 생산물의 판매를 위한 약 8만 개의 농촌협동조합의 창설을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장려함으로써 그 토대를 닦았으며, “이는 농민들의 정신을 집단농장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변화를 일으켰다.”15
1930년 초반에 국가가 집단농장을 지향하는 농민들을 지원한 또다른 중요 방식은 조직화의 실천적 경험을 보유한 약 25,000명의 산업노동자들을 “돌격대”로 농촌에 파견하여 집단농장의 창설을 주창하고 그 조직화를 도왔다는 데에 있었다.16
마지막으로, 대규모 국영농장은 주변 수십 마일에 걸쳐 있는 농민들에게 대규모 농업경리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실천적 교본이 됐으며, 아울러 집단농장이 결성됨에 따라 농업적 진보를 위한 지원을 제공하는 중심지가 됐다.17
1929년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은 3배로 증가했다. 1930년에, 지방 조직가들의 열의가 신중함을 앞질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집단농장이 해산될 수밖에 없었던 “성공에 대한 현훈증”의 예비적 기간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집단농장의 숫자는 6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1931년 말에 국가의 농민인구의 절반 이상이 집단농장에 있었다. 1936년에는 농민의 90%가 집단농장 농민이었으며, 1940년에는 97% 턱밑까지 도달했다. 평균적으로 집단농장마다 농가는 약 80호가 있었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6년 9월 19일
- Law on the Five Tear Plan, 1946, Passim.

- V. Dmitriev, „Razvitie Selskogo Khoziaistva v Novoi Pyatiletke“, Propagandist, 11-2, 1946.에서 재인용.

- 〔역자 주〕 제4차 5개년 계획을 의미한다.

- 영미권 독자는 이러한 수치들과 다른 수많은 가치있는 지표들을 V. Karpinsky, What are Collective Farms?, London: Lindsay Drummond Ltd, 1944.; The Development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1947, 327, 333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Bolshevik, 5, 1947.에 기고된 I. 칸티셰프(Kantyshev)의 논문을 참조하라.

- 1938년에 집단농장 농민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말 이외에 다른 가축들의 전체 두수는 집단적으로 소유한 가축의 총 두수보다 (30~100% 가량) 훨씬 많았다. 정확한 수치에 관해서는 The Development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1947, 337.을 참조하라.

- 여기서 기술된 기본적인 원칙들은 집단농장 돌격대원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된 「집단농장 모범규약( Primerny Ustav)」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프라우다》, 1935년 2월 18일자). 전후 집단농장의 조직 및 운영체계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은 A. 테라예바(Teryayeva)의 논문 „Organizatsia i Oplata Truda v Kolkhozah“, Bolshevik, 9, May 1947.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V. Batov. “Co-operatives in the Soviet Union”, Soviet News, 1945, 42-4.이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 What are Collective Farms?, 1944, 34.

- 반소(反蘇)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집단농장 농민들이 스스로 일구어낸 노동의 전체 성과물 중 개별적으로 소비하는 비중이 국가 전체의 평균적인 비중보다 더 높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제2장을 참조하라.)

- “The War Economy of the USSR in the Period of the Patriotic War”, Voyennaya Ekonomika SSSR, 1947: 93.

- K. Kautsky, The Social Revolution, Chicago: Charles H. Kerr Publishers, 1902, 159-62.

- Kontrolnye Tzifry na 1927-8, 370-1, 373.

- 이 초기 단계에 관한 훨씬 더 구체적인 내용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간행물인 Puti Podyoma i Sotzialistichtskoi Rekonstrukzii Selskogo Khoziaistva, 1929.에 수록된 M. 라치스(Latzis)의 논문 280-303.에서 확인할 수 있다.

- Leninism, 1944, 274.

- 후속 연구에 따르면, 이 운동에 국가적 의의를 부여했던 1929년 11월 전연방공산당(볼) 중앙위원회의 결정서 자체가 아래로부터의 발의(發意)에 기반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농촌의 집단화를 돕기 위해 공장 간 사회주의 경쟁을 촉구한, 《망치(Molot)》, Rostov-na-Donu, 1929년 10월 5일자.에 실린 어느 노동자의 서한,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농촌으로 파견되는 노동자들의 체재비를 지원하고자 임금의 최대 1%를 각출하기로 결의한 로스토프 전기기계공장 노동자들의 결정에 기초하고 있었다.(Voprosy Istorii, 5, 1947.)

- What are Collective Farms?, 1944,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