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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백 | 집행위원
제3강
§ 16. 그람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인 바와 같은 전략·전술적 양상을 정치투쟁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투쟁이 군사 전략 및 전술과 명확히 구분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군사 전쟁에서는 전략적 목표─적군의 분쇄와 적 영토의 점령─가 이뤄지면 평화가 온다. 또한 전쟁은 단지 전략적 목표가 달성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충분히 끝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정치투쟁은 훨씬 더 복잡하다. 어떤 뜻에서 그것은 식민지 전쟁이나 옛날의 정복 전쟁과 비교할 수 있다. 거기서는 승리한 군대가 정복된 영토 전부나 일부를 영원히 점령하거나 점령하기를 꾀한다. 그때 패배한 군대는 무장을 해체당하고 해체되지만, 정치와 군사적 ‘준비’라는 지형 위에서는 투쟁이 계속된다.”1
정치-군사 전술에 관한 그의 관점을 살펴볼 때, 그가 비유로써 군사 전술의 형식을 정치투쟁에 옮겨놓은 것인지, 아니면 정치투쟁에서 활용되어야 할 ‘군사 전술’을 정치적 논리의 영역으로부터 연역한 것인지는 얼핏 보기에 매우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는 그람시의 정치-군사 이론에 대한, 서로 매우 상반된 취급을 불러온다. 만약 비유에 불과하다면 현대전의 양상에 따라, 정치투쟁 영역에서 활용되어야 할 군사 전술은 대폭 교정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 반대로, 그람시의 정치-군사 전술이 정치투쟁에서 작용하는 제 원리의 안정성─즉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군사 전략과 전술의 변화무쌍함에 대비한,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속성들─에 기반하여 형성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재의 정치투쟁에도 일정 수준 하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람시의 정치-군사 이론을 현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상을 가져야 한다.
그가 정치투쟁에 군사 전술을 확립하려 한 계기는 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 진영이 파시즘에 대항함에서 행동 규율에 상당한 불일치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전투 파시스트당을 포함하는, 자유주의-부르주아 우익과 파시스트 세력의 정치적 결합체인 민족 블록(Blocco Nazionale)이 1921년 5월 15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의회에 대거 진출하였는데, 이때 범-파시스트 세력은 총 55석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파시스트들은 이로써 이탈리아의 독점 자본가들과 정치적 유착을 강화하면서 자원을 동원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자에 대한 백색 테러는 가일층 극심해졌다. 공장위원회는 파시스트 돌격대의 공격으로 연이어 붕괴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스트의 돌격대 전술에 동일한 돌격대 전술로 맞대응하였으나, 파시스트 돌격대 대부분을 인적으로 구성하던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사회주의자들이 지닐 수 없었던 탓에 별다른 대응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정치투쟁에서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곧 지배계급의 방식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흉내를 내다가는 쉽게 복병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현재의 투쟁에서 이러한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2
그람시를 비롯한 당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여된 과제에서 가장 초보적인 것은 파시스트의 테러 행위를 막아내는 데에서 어떠한 군중적, 전술적, 제도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느냐였다. 그는 같은 해 6월 11일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들은[사회주의자들] 계획을 수립했는가? 그들은 강령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과 연맹 지도자들은 혹시 어떤 ‘비합법적’ 계획이라도 확정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비합법 행동은 효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거대한 군중의 봉기만이 반동적 군중의 쿠데타를 물리칠 수 있으며, 군중 봉기를 위해서는, 비합법적 준비가 요구되지만, 민중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군중의 영혼을 인도하며 그들의 의식을 준비시키기 위해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정치선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3
1926년에 제출된 「리용 테제」는 이러한 전략·전술적 과제에 대한 해결 의지의 산물이었다. 테제의 제35절에서 마지막 절까지의 내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광범위한 부분적 투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이 투쟁들이 지닌 수동성을 활용하고, 그 활용의 성과로써 이 수동성을 전반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 체계적인 형식으로 짜여 있다. “‘통일전선’은 … 군중들이 전체로서 그 주위에 재결집하여 형식을 갖추게 되는 조직체들에 기반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들은 노조가 정상적으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제한되기 시작했으므로, 오늘날 군중들이 공장으로부터 그리고 일상 투쟁의 사건들에서 스스로 창출하는 경향이 있는 대의적 조직체들이다.”4 그렇다면 이 조직체는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가? 이 새로운 조직체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력은 여전히 발휘되고는 있지만, 수동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공산주의적 이해와 무관한, 심지어 그에 일정 적대적인 분자까지 결집한 채 존립하는 느슨한 망(網)이다. 그 초기의 단계에서 응집력이 궤도 내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 필연적일 이러한 망의 형성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데서 공산주의자의 주요 전술적 수단이 된다.
이제 이 망은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한다.
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중에 등장한 군사 전술의 종류가 언급되고 각각의 특성이 구체적으로 다룬 부분, 그리고 다음에 곧바로 정치 문제로 돌아오는 부분은 그가 전쟁 일반의 공식을 정치에 그대로 끌어다 쓴다는 혼동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예컨대 돌격대 전술이 ‘순수’ 군사적인 영역과 정치-군사적인 영역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지닌 채 발휘된다고 하였다: “근대의 진지전에 연결된 특수한 세력으로서의 돌격대가 지니는 기술적 기능, 그리고 돌격대의 정치·군사적 기능을 군사적 돌격대의 현상 속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수한 세력으로서의 돌격대는 세계대전 중 모든 군대가 사용하였다. 그러나 돌격대가 정치·군사적 기능을 가졌던 것은, 정치적으로 약화되었고 비동질적이며, 따라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민군도 그다지 전투적이지 않고, 참모부는 관료화되어 복무 태도가 무뎌진 나라들에서만 있었다.”5 즉, (당대의) ‘순수’ 군사적 맥락에서 돌격대는 진지전에 연결된 “특수한 세력”으로서, 그것은 군대의 상태를 불문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운용되었다. 반면 정치-군사적 맥락에서 돌격대란 오로지 특수한 정치적 조건, 그 국가 군사적 요소의 특성에서만 유효하다.
국가의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측면─공식적인 지배력을 전 군중에 충분히 가할 실질적 수단이 미비할 때, 그리고 그 국가의 군대에서 전투 의지의 미비, 참모부가 군사 일을 돌볼 의지와 기술적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매우 불규칙적이고 재빠른 정치적 공격 행위는 그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군사적인 요소의 빈틈을 메울 수 있다. 정치적 취약성으로 행정과 입법 권력이 실질적인 작동을 하지 않았을 때 돌격대는 어떠한 반격의 위험도 없이 활보할 수 있다.
이처럼 그람시가 비록 기동전·진지전·포위전 외 여러 개념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당대의 군사 전술의 발전 양상에서 취해왔을지라도 그는 그것이 ‘순수’ 군사적인 영역에서 합당한 형식을 가지는 것과, 당면 전술로 활용하였을 때 체계화되고 형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 17. 이러한 전제 위에서 그는 먼저 돌격대 전술이 망을 운용하는 데 적합한가를 따진다. 근대적 형태로서의 돌격대 전술이란 독일군의 침투 부대인 슈투름트루펜(sturmtruppen)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참모부가 적군의 참호 밭을 뚫기 위해 고안해 낸 전술적 요소의 산물이었다. 정치적으로 돌격대 전술은 일정한 규모의 공격대가 불시에 적대 정파의 핵심 부위에 짧은 시간 내에 막강한 충격을 주어 향후 적대 정파가 정상적으로 정비를 완료하여 유효하게 반격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람시에 의하면 이 전술은 노동계급에 부적합한데, 왜냐하면 이는 “국가가 합법성의 테두리 내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면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일과,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 자체를 재조직하는 일”2에 효과적인 전술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시민사회에서 행사하는 패권적 힘은 국가의 구체적 성격을 국가의 성격을 지양해 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변화시킬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부르주아에게 기울어져 있는 폭력기구이다. 결국 부르주아 공격대의 비합법성은 합법성으로, 노동계급의 돌격대 전술은 ‘테러’로 여겨질 것이며, 부르주아 공격대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가속화할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돌격대란 불시에 다방면에 걸쳐 다수의 핵심을 불연속적으로 타격하는 전술이므로, “날마다 일정 시간 동안 노동해야만 하는 계급은, 충분한 재정적 원천을 지녔으면서 아무런 일정한 노동에 속박되지 않은 계급처럼 지속적으로 전문화한 돌격조직을 유지할 수 없다.”7 그러므로 주로 돌격대 전술의 세포는 반동적 목적에 활용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였다.
§ 18. 다음으로 그람시는 기동전을 다룬다. 기동전이란 확보한 전투 병력을 일정한 목적 아래에 지속적으로 움직여 주면서 적의 허점을 치고 빠지며, 다시 여유를 확보하고 같은 양상을 반복하여 전투의 주도권을 잡는 전술이다. 이 전술이 운용되기 위해선 빠른 이동 능력이 요구된다. 정치적으로 이 전술은 적의 전략·전술적 허점이 노출된 부위에 정규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에 따르면 기동전은 다소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성공적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들 나라에서는 ‘시민사회’가 직접적인 경제적 요소─공황·불황 등─의 파국적 ‘기습’에 저항할 수 있는 복합적인 구조로 성장하였기 때문”8이다. 이런 견고한 시민사회가 격렬한 포격을 맞아서 외양상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실은 그것은 “단지 외곽 주변만이 파괴된 것”7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흔히 노동계급에 경제 공황은 이들이 전략적 여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를 들어주는 것마냥, 전광석화와 같이 그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간의 선진 유럽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예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지리멸렬이 이러한 기대 속에서 전술을 짰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전술에 이론적으로 기름을 부은 이론가로 로자와 트로츠키를 든다: 그람시가 보기에 로자는 “직접적인 경제적 요소(공황 등)”를 “적의 방어망에 돌파구─아군의 군대가 진격하여 결정적(전략적인) 승리를 얻는 데 충분한, 또는 적어도 전략적 선상에서의 중요한 승리를 거두는 데 충분한 돌파구─를 뚫어놓는 야포(野砲)로”5 오판하여 올바른 전술 이론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때 경제적 충격은 다음의 세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어진다: 1. 그 요인들은 적의 방어선을 교란시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렇게 하여 심리적인 부담감을 크게 안겨준다; 2. 순식간에 아군의 군대를 조직하고 필요한 요원을 창출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흩어진 아군을 결집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3. 이루어져야 할 공동의 목표와 직접적 연관을 가지는 이념에의 집중을 단숨에 불러온다.11 동일한 방향에서, 트로츠키는 기동전에 들어맞아 보이는 서구 ‘혁명전쟁의 서사’─“피상적으로만 서구적·유럽적”12─를 러시아 혁명에 피상적으로 적용한 이론적 사례를 보여주었다.13
결과적으로 크리스티안 뫼켈(Christian Möckel)이 언급한 바 “‘기동전’이라는 정치형태는 1918/19년과 같이, 부르주아 사회가 극심하게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특수한 역사적 조건14에서는 적합한 정치투쟁의 형태였다─그리고 이는 여전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들의 저항을 거셌지만 그것은 머지 않아 사그라들었고, 그와 함께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형태로 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도 사라졌다.”15 볼셰비키의 전술은 그람시가 언급한 그대로 기동전의 성격을 가졌으며, 또 그것은 “정치사에서 그러한 류의 사건으로, 가장 최근의 것”16이 되었다.
§ 19. 노동계급은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정치-군사적 전술 형태인 기동전에서 역량을 확보하여 진지전 전술(또는 참호전)을 채택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순수’ 군사의 영역에서 진지전은 참호로 이어진 선과 선이 대치하는 전술적 양상이다. 정치-군사의 영역에서 진지전은 이보다 더 확장된 내용을 가진다. “정치에서 기동전은 결정적이지 않은 진지들을 얻는 것과 관련해서 존속되며, 그때에는 그 국가 패권의 모든 자원이 다 동원될 수는 없다.”17 몇 가지 까닭으로 인해 이 진지 중 특별한 중요성을 진지는 주요 거점이 돼서 적에 대한 포위선을 그리게 된다. “정치에서 포위는, 그 겉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상호적인 것이며, 또 거기서는 지배자가 자신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지배자가 얼마나 적을 심각하게 생각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7
그렇다면 시민사회와 국가에서 정치적 진지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 그람시는 “이제 문제는, 시민사회의 어떠한 요소가 진지전의 방어체계에 해당하는가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일”19이 남았다고 한다. 그가 수고에서 이렇게 언급하였음은 다름이 아니라 그 역시도 지적으로, 진지전의 방어체계의 어느 정도 완성된 상을 제공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있게’ 연구하는 일”이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노동자들이 아니라 전 군중을 포괄하는 요인에 〈국민적 생활〉─자신이 겪는 모든 사회모순에 대한 협소한, ‘지방주의’적인 표상적 사취가 아니라 그것을 일국적 모순의 분지, 전체 변혁의 문제로 승화하는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상태와 운동의 기풍─을 도입하고, 〈지적·도덕적 지도〉를 매개로 지적·도덕적 생활─수많은 영역에서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그 악영향을 면역해 낼 수 있는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전체 요소─을 주입하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주어진 막중한 과제라고 여겼다. 이러한 요인들의 강화는 오직 견고한 시민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강화가 일정 궤도에 들어서면 노동계급의 〈정치정당〉은 국가와 군중의 정치적 관심을 매개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신속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러한 대응은 각각의 정치적 주제에 따라 특수한, 그리고 서로 상대적으로 외재적인 정치 전선의 장(場)들을 형성한다. 이는 부분적 운동까지 포괄한다. 결국 진지전이란 기본 계급과 군중의 정신적인 상호 연관 속에서 특수한 규정을 띠는 채 점차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힘으로 굳어져 정치적 압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이 발전 과정 전체를 관통하는 시민사회, 그리고 그것의 반영으로서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패권〉의 요새들이다. 요새는 군사적인 기동전에서와 같은 빠른 이동 속도와 일반적인 기습 능력을 가지지 않지만, 자체 대자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경제 투쟁적, 이데올로기적, 정치 투쟁적 작전 기능을 수행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이는 상호 구분되는 튼튼한 블록 없이 일회적이며 유목민적인 집중 공격과 기습에 머무른 수준의 정치적 경향의 대립물이다. 그러므로 이 전선은 항상 단지 경제주의적이 아니라, 전포괄적이고 국민적이며 지적인 성격을 띠며, 이 성격이 요지부동함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소홀한 계급이 이 전선에서 패배하거나 후퇴하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진지전의 수행에서 기본 계급이 지식과 지식 분자를 어떻게 이끌며, 그 결과로서 각각의 〈패권〉의 전선에서 승리를 확보하거나, 불가피하게 후퇴를 감행할 때 중핵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해명되어야 한다.
2025년 1월 17일
-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270.
- 위의 책, 273.
- 「사회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옥중수고 이전』, 2001, 260-1.
- 「이탈리아의 상황과 PCI의 과제 (리용 테제)」, 위의 책, 411.
- 위의 책, 274.
- 위의 책, 273.
- 같은 책.
- 위의 책, 276.
- 같은 책.
- 위의 책, 274.
- 위의 책, 274-5.
- 위의 책, 278.
- 번역서의 34번 주석은 그람시가 1920-3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부전선에서 군사 전략에 관한 트로츠키의 입장을 오해하였다고 적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람시가 염두에 둔 더 본질적인 것은 (1920-3년의 서부전선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트로츠키가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되기 전부터 공공연하게, 그리고 꾸준히 레닌과 대립하여 주장하였던 ‘영구혁명론’이 내포한 정치적 내용의 발전 과정이다. 그람시가 ‘기동전’과 ‘진지전’을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순수’ 군사 전술적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아군과 적군의 정치적 형세의 관계를 대상으로 삼는 정치 전술 노선의 맥락으로서 제기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1906년 ‘영구혁명론’을 제출하였는데,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농민의 필연적인 계급성 때문에 이 동맹이 깨지고 다음과 같은 상황에 의지할 수 없으리라 믿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역량에 내맡겨진 채, 농민의 도움을 잃는 순간 반드시 분쇄될 것이다. 남은 것은 그 정치적 우위의 운명,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운명과 연결하는 것뿐이다.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에서 여러 세력과 결합된 채로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여된 모든 막강한 권위와 정치적 힘은 자본주의 세계 전체 규모의 계급투쟁으로 밀어붙여질 것이다. 정권의 힘을 나눠 받은 상태에서, 후미에 반혁명이 있고 앞에는 유럽의 반동이 놓여 있는 러시아 노동자는 이제 마지막 공격의 요구가 될, 오래도록 염원하던 전투의 함성을 전 세계 모든 형제에게 외칠 것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L. D. Trotsky, Our Revolution: Essays on Working-Class and International Revolution, 1904-1917, New York: Henry Holt & Company, 1918, 144.) 러시아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 견해는 계속 유지되었는데, 하르팔 브라르(Harpal Brar)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트로츠키의 관점에서] 유럽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함에서 성공적이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만 했는가? 우리는, 서유럽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희미해지면서(우리는 여기서 곧장 유럽 혁명 실패의 이유들을 다루는 길로 넘어갈 수 없다) 트로츠키가 국제적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완전한 항복의 정책을 때때로 바꾸어 가며 절망적인 모험주의 정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H. Brar, 『트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 문영찬 역, 서울: 노사과연, 2022, 142.)
- 이 부분에 대한 그람시의 언급은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286.를 참조하라.
- C. Möckel, „Ein Beitrag Gramscis zur politischen Theorie des Marxismus-Leninismus in seinen „Gefängnishefte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6 (3), 1988: 268.
-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2006, 277.
- 위의 책, 281.
- 같은 책.
- 위의 책,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