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과 현대 인간학
한동백 | 집행위원
카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이 현대 인간학의 발전에서 어떠한 역할을 놓는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하였을 때 그 뜻이 그가 살았던 시기의 다른 유물론자들과 어떠한 내용적 차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예컨대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관점을 설명하는 데서 흔히 주된 것으로 거론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외부에 실재하는 환경에 지배받는 존재〉라는 테제이고, 불행히도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조명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내용이 인간과 외적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그가 가진 사유의 전부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마르크스의 작업들을 소개할 때가 되면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개개인의 주체적 실천이 강조되면서 그는 ‘실천적 유물론자’라고 칭해진다. 그리고 다시 인간학의 주제로 돌아와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다루어진다면 이내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대한 두 해석의 경향은 서로 전혀 화해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종종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인간이 환경에 지배받는다는 테제는 18세기 유물론자들이 일반적으로 제출하였던 견해이다. 예컨대 라 메트리는 인간의 사유 능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은 자신이 배운 대로 가르친다. 오류와 착오가 무한히 확산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최초의 관념에 깃든 편견이 정신의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류를 기계적으로 습득한다. 오류들과 친숙해지면서 이 그릇된 관념들이 우리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믿게 된다. 유명한 수도원장이자 일급의 형이상학자인 나의 한 친구는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모가 잠재울 때 불러준 노래를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 돌바크 역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의 삶 자체는 기다란 연속, 필연적이고 연결된 운동의 연속에 불과하며, 이는 그를 이루는 기계에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유발한다; 그 원리는 자신 내부에 포함된 원인, 예컨대 혈액, 신경, 섬유질, 살, 뼈, 간단히 말해 그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 즉 고체와 액체를 포함하거나, 그에게 작용하여 그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외부 원인을 포괄한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공기, 그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 감각에 어떠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충동을 받아들이게 하는 모든 대상과 같은 것들이다.”2
이미 마르크스가 활동하기도 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유물론자는 인간이 객관적 자연의 일부로서 작동한다는 믿음을 가졌었다. 그들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인간은 신체라는 이름을 가진 것─본질적으로는 자연에 연장된 채로 있는, 즉 자연의 부분으로 구성된 채 있는 존재로서 완벽히 해명될 수 있었다.
이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의 인간론이 단지 시기적으로 그것이 제출되기 훨씬 전에 존재했던 낡은 유물론의 핵심적인 테제와 동일시될 수는 없음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의 해명은 어떤 지점에서 그것과 다르며 또 어떻게 하여 그것을 뛰어넘는가?
이에 관한 해답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에 관한 학설이 자연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규명하고 있느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개개인과 총체성으로서 생산양식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에 관한 그의 학설이라는 두 축에 있다. 그리고 이 두 축에 관한 내용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예비적인 형태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르크스는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해 작성한 11개 절의 테제에서 개인과 역사적-사회형태의 변증법적 상관에 관한 비전을 제출한다. 매우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이 문헌으로써 우리는 그의 감성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어떻게 대립하는지 파악할 수 있으며, 다시 결과적으로 그의 유물론이 낡은 유물론과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를 이루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은 마르크스 유물론의 정수가 매우 압축적인 형태로 제시된 채로 있는 문헌이다. 이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구체적으로 그의 감성적 유물론의 어느 지점을 공격해 들어가는지, 또 테제에서 매우 축소되어 서술된, 포이어바흐가 구사하는 개념이 정확히 어떠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까지에 대한 해명이 테제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이 테제를 검토함으로써 마르크스 유물론이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유물론까지 포괄하는 낡은 유물론의 대척점에 있을 때 어떠한 근본적인 발전 지점이 있는지 해명하고자 한다.
I
마르크스는 테제의 첫 항목의 첫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Gegenstand),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 오직 객체(Objekts)의 혹은 관조(Anschauun)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감성적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3
낡은 유물론의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을 오직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하는 데에 있음은 그의 유물론과 낡은 유물론의 본질적 차이가 “대상, 현실, 감성”의 형식에 관한 취급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대상, 현실 그리고 감성은 역사적인 것이다. 역사적인 것이란 종종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곳곳에서 사유의 대립물로서의 존재─단지 논리적 범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 연장(延長)적인 것─와 동일시된다. 다시 말해, 대상, 현실 그리고 감성은 고대부터 시작되는 과거의 유물론자들 역시 오래전부터 탐구해 온, 연관의 중심으로 놓은 그 실제적인 것─눈으로 볼 수 있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 피부로 촉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관념론 철학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가변적인 것 일반으로서, 불결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 왔으며, 진리 또는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도정의 맥락에서 무실(無實)한 것, 또는 보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반대로 유물론 철학자들은 이를 선차적이며 실재의 것이라 간주하였다.
마르크스는 과거의 유물론자들이 이를 단지 “객체” 그리고 “관조”의 형식으로서만 바라보았으며, 이는 포이어바흐에게서도 역시 동일하게 나타나는 한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형식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다음의 내용은 이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활동적(tätige)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추상적으로 발전하였다. 포이어바흐는 감성적인 객체들─사유 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4
사유 객체들과 구별되는 “감성적인 객체들을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마르크스가 정립하고자 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된다.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객체”와 “관조”의 형식으로서 파악함은 그것을 “활동적”인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과 대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포이어바흐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그가 인간 활동을 어떠한 방식으로써 정립하고자 하였는지 조사해야 하는 과업이 던져진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 한계를 포이어바흐만이 아니라 모든 낡은 유물론자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과거의 유물론자들 역시 대상적인 무언가, 어떠한 객관적 실재들, 즉 감각적인 사물을 활동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그러한 자체 활동이 어떠한 추상적 관념의 ‘힘’, ‘은혜’를 입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비록 엄밀하지는 못한 형식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는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가지는 잡다한 원자들이 스스로 활동하는 체계를 생각해 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학설에서 그러한 ‘활동’은 단지 대상, 현실 그리고 감성을 “객체”나 “관조”의 형식으로서 다루는 것과 전혀 대립적인 것으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재차 우리에게는, 다름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언급하는 “활동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뜻을 지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과업이 제기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수많은 논문을 작성하였다. 마르크스는 테제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을 중점으로 놓고 서술하였으나 『그리스도교의 본질』 출간 후에도 그의 유물론과 인간학의 본질적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이 여럿 발표되었다. 그가 인간의 활동 형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저술은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명제(Vorläufige Thesen zur Reform der Philosophie, 1842)』와 그 진전인 『미래철학의 근본원칙(Grundsä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184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수행된 바 있는,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가 출간되기 2년 전에 그가 작성한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Zur Kritik der Hegelschen Philosophie, 1839)』에 간결하게 제시되어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논리의 학』의 이념을 전개함에서 그 시작점을 그가 가장 추상적이라고 간주한 것, 즉 순수존재에 두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와 같은 시도 또한 결국 헤겔의 의도와 달리 또다른 전제로 될 수밖에 없다는 사상을 제출하면서 헤겔이 “존재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피히테의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을 헤겔이 행한 사유의 지성적인 계기로서 지니는 것만큼, 헤겔의 순수존재 역시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히 규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5을 간파하였다. 그러므로 “개념들을 산출함”은 다름이 아니라 “무(無)로부터의 산출이 창조가 아니라 아직 규정되진 않았으되 모든 규정을 받을 수 있는, 내 안에 있는 정신적 질료의 전개일 따름이다.”6 예컨대 “소멸이란 것도 개념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감각적 표상”7이며, 『논리의 학』에서 전제되는 동요(Unruhe)라는 범주는 “고요(Ruhe)와 같은 극히 의심스러운 표상이 전제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여지”8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결국 “철학은 입이나 펜으로부터의 출발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원천으로 소급한다.”6 ‘고유한 원천’이란 역사적이고 경험적이고 감성적인 실제, 현실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흐는, 아직은 개체적인 단위로서 인간의 주관적 총체성을 정립하면서 이에 선차적이며 또한 그런 연유로 진실되게 객관적이라 간주되는 (헤겔적) ‘개념’이 실제로는 그저 역사적인 과정에서 도출된 특수한 주관적 총체성의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표상을 시작점으로 가지고 출발하는 여정임을 폭로한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것─“즉자적인 본질”, “즉자적인 이성형식”으로서─, 신의 행정이 아니라 한 인간의 행위이며, 그러므로 그 행위의 출발점은 절대적으로 규정적일 수밖에 없다. 즉, 헤겔은 “절대이념이 (그로부터) 산출되어야 하는 대립을 이미 절대이념을 전제로 해서 생각한다.”10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을 총괄한 바 그대로 “헤겔은 실체의 소외(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무한자, 추상적 보편자), 절대적이고 고정된 추상에서 출발한다.”11 이 문헌에서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이 가지는 본질적인 것, 보편성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이라고 여겼던 것조차 다름이 아니라 지극히 현세적인 경험의 뒤얽힘의 변형일 뿐임을, 즉 감각적 대상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유’란, 그것의 존재가 증명의 영역에 서는 순간 다시 감각적 대상에 오염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헤겔의 의도에 비춰 있을 절대이념의 근본적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데에 있다. 그는 이를 총괄하여 지성의 작용이 ‘자기만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그 ‘시작점’의 앞에 존재하여 ‘자기만의 근거’를 뒤얽히게 하는 것, 즉 자연을 “철학과 예술 모두의 유일한 규준”12이라 선언하고, “최고의 예술은 인간의 형태이며 최고의 철학은 인간 존재”8라는 견해를 제출한다. 우리는 “사유 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을 바로 인간적-유적 형태로서 구축함으로써 그것을 잡다한 활동─헤겔이 이념적 활동이라고 간주한 영역까지 포괄하는─의 본질적인 측면에 놓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포이어바흐의 사유에서 개체적 단위의 관념이 전달되는 방식, 즉 그것 매개의 본질은 관념 그 자체에 있지 않고 물질에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충격이나 나의 귀를 진동시키는 소리나 빛 등은 실질적 전달이다. 물질적인 것을 나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당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들 나는 오직 나를 통해서만, 자기활동을 통해서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증명하는 자가 전달하는 것도 사상 자체가 아니라 수단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자기 사상을 약물처럼 부어 넣지는 않기 때문이다.”14 그러나 그는 이 지점에서 개체적 단위에서의 주관적 총체성과 전달 도구로서 이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활동이 어떻게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다. 이는 그의 철학 체계를 비변증법적 체계라는 한계에 잠기게 한다. 예컨대 개념의 전달 도구를 개념의 주관적인 발현 방식으로서의 〈부정〉으로 본 헤겔의 제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헤겔은 말의 보편적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 존재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주관적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자를 통해 비로소 이런 〈주관과 객관의〉 결합을 해명한다. 이 존재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러한 결합을 부정적으로 표현한다.”15 이 〈부정〉은 즉자적인 것으로서의 개념의 반대편에 선 채 개념의 “내적 무의미성”16을, 동시에 개념의 자기 부정이라는 점에서 개념을 표현한다. 이 규정은 타의 주관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심”으로서의 “육체적 표시”─기호(記號)를 자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가지는─로 나타난다. 헤겔은 이어서 이렇게 적는다: “안색과 표정이 주관적 언어이듯이 육체적 표시는 객관적인 언어이다. 주관적 언어가 주체로부터 탈피하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되지도 못하듯이, 객관적 언어는 객관적인 것으로 머물고 그 주관적인 것인 인식을 직접 자기 자신에 지니지도 못한다.”8 그리고 이 두 규정은 발성어 단계에 이르러 “육체적 표시의 객관성과 표정의 주관성을 통합한다.”18 전달 수단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사상은 비록 이 수단, 도구의 능동적인 정립자가 이념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관념론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주체와 객체의 필연적 상호 연관을 확정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비연장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연장적인 것으로 자기를 발현시키며, 연장적인 것은 다시 사유에 자기를 되먹인다. 이로써 전달은 단지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관념론자 헤겔은 이러한 방식으로써 이 주관적 총체성과 저 주관적 총체성의 징검다리가 어떻게 하여 외재적인 방식이 아니라 내재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에게 이러한 변증법적 상호 연관의 사상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관념와 언어의 관계를 그저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써 다루려 한다. 즉 여기서도 마르크스가 언급한 그대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 추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특히 그가 『논리의 학』의 배후에서 그것을 안으로 받치는 『정신현상학』의 ‘스콜라주의적 공리’에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는 감각적 확신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고찰되는 ‘여기’, ‘지금’이 그저 언어에 의한 환상적인 실재에 불과하고, 더 본질적으로는 “모든 말들은 이름, 즉 고유명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살아 숨쉬는 인간은 개별자를 다음과 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써 간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의 실재성은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Blut)으로써 증명된 진리이다.”19 여기서 나타나는 그의 견해는 감각과 언어의 관계 대한 매우 모호한 입장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직접성의 의식이 언제든 실제와 불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즉 억견이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감각하는 것은 언어의 형식에 확실히 독립적이라 할 수 있는가? 사고의 초입에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비실재적이고 무실(無實)한 것”인가? 현대에 들어 언어가 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계기에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물질적인 지반을 이루고 있음이 여럿 지적되었음을 상기하였을 때, 언어 일반을 사유의 추상적 보편성에 가두는 포이어바흐보다 언어에 대한 헤겔의 관점─그것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을 살피는 것이 유물론에 더 가깝다. 이는 그가 헤겔의 ‘사변적 신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헤겔 철학이 유물론과 생산적 연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까지 상실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20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유물론이 지니는 이러한 저속성은 그가 매 위기의 순간 사회적인 전 영역의 실제적 요소 속에서 요지부동하는 ‘인간적 본질’로 귀의함과 관련된다.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도덕적 위계, 국가, 사회 등 어떠한 보편적인 것도 인간적 본질 내부로 침식해 들어가려는 감성적 의식보다 비실재적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그가 진정으로 실제적이며 감성적이라 자부할 수 있는 류의 윤리학을 전개할 때면 이 모든 비실재적인 것의 무(無)에 한가운데에 놓인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나’와 ‘너’, 그리고 두 인격을 잇는 ‘사랑’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는 헤겔보다도 구체적인 사유에서 더 멀리 떨어져 나가는 실수를 범한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헤겔의 윤리학 또는 인륜에 관한 학설은 법철학인데, 그것은 1. 추상적인 법, 2. 도덕, 3. 인륜을 포괄하며 이 인륜에는 다시 가족, 시민사회, 국가가 속한다. 여기에서는 형식은 관념론적이지만 내용은 현실적이다. 그 내용은 도덕과 함께 법, 경제 및 정치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있어서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형식을 두고 말하면 그는 현실적이며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세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며 또 그러므로 그의 인간은 여전히 종교철학에서 설교하는 추상적 인간 그대로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은 역사적으로 발전하여 왔고 또 역사적으로 규정된 현실 세계에서는 살고 있지 않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 하더라도 그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다 그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인간이다.”21
머지않아 포이어바흐 학설에서 사물을 정신적으로 간취함에 있어 사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직접성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유와 자연의 “자립성과 자기 활동성”22에 관한 사유가 명백히 제출된다. 이제 인간 또는 인간 인식은 무한히 자기 활동적인, 즉 능동적인 자연에 대해 관조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자연의 고유한 활동력은 개개인을 어떠한 감각적인 상태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개인은 그것을 직접적인 것으로 대하며 느낄 뿐, 그 어떠한 인간적 역능(力能)이 비집고 들어간 틈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포이어바흐의 자연철학은 수동적인 자세로 자연의 영광과 전능을 숭배하며 그 앞에 황홀함을 느끼며 무릎 꿇는 것이다.”23
II
포이어바흐는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명제』에서 추상화한 인간 본질의 절대화로서의 시민사회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즉 그의 시야는 자연 일반에서 인간적 존재의 특수성으로 향한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자기의 근거로 지니는 존재인 동시에 “스스로를 자연의 자기의식적인 본질로서, 역사의 본질로서, 국가의 본질로서, 종교의 본질로서 인식”24한다. 그는 철학의 출발점을 “사유하는 인간 자체”에 두고자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인간이 없이 인간이 제외되거나 혹은 인간을 초월해서, 권리, 의지, 자유, 인격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사변은 통일성 없는, 필연성 없는, 실체 없는, 근거 없는, 그리고 실재성 없는 사변이다. … 단지 인간만이 피히테가 말한 자아의 근거이자 지반이며,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의 근거이자 지반이며, 절대자의 근거이자 지반이다.”25
철학의 즉자적인 것, 본질을 인간 그 자체에 놓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종교를 인간적 본질의 발현태로 보는 것에서부터 사변철학을 포괄하는 모든 관념적 구조물을 인간적 본질의 특수한 분화 지점으로 보고자 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정착하였다. 즉 “신학의 본질은 초월적인, 인간 밖에 정립된 인간의 본질”26이고, “헤겔 논리학의 본질은 인간의 사유가 인간 밖에 정립된 초월적인 사유”8이다.
이 문헌에서 포이어바흐의 견해는 전반적으로 “인간 없는” 개념이나 범주에서 시작하는 철학을 겨냥해 있다. 그는 철학이라는 현상이 인간에 앞서 있거나, 또는 그 앞서 있는 것에 접근하여 자기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본질을 딛고 난 후의 사태로서 놓여 있는 것임을 역설하면서 철저히 철학을 인간의 근저가 그 반대 방향에 위치해 놓으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를 전적으로 자연사(自然史)에 헌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철학이 다름이 아니라 인간적 본질의 현상형태로서 인간 인식의 한 특수한 분지임을 끝없이 강조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테제로 돌아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낡은 유물론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한 데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곱씹어 보자: 첫째로 “활동적 측면”이란 전 자연의 자기 운동의 여부를 긍정하느냐와는 확실히 무관하다. 이는 인간이 자기의 외부에 실존하는 자연에 능동적으로 반격할 수 있는가와 연관된다.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 자연을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것으로서 격상하지만, 반대로 인간은 그것에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존재로 격하되어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그는 인간의 직관에 호소하여 “인간적 본질”을 자연과 나란히 놓으려 한다. 이는 모든 정신적 구조물이 그저 관념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적 관념, 표상, 감각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적 본질은 실제 자연과 사회의 대상에 절대적으로 자립화한 추상적 본질로 ‘격상’된다; 그렇게 하여 둘째로 그의 사유 체계에서 “대상적 활동”의 부재가 해명되기에 이른다. 그가 인간의 지성, 표상을 언급하였을 때, 즉 이 ‘지성’과 ‘표상’은 추상적 인간 본질에서 ‘자체’ 발양하는, 발현하는 생명력으로 간주하였을 때, 이 인간적 생명력은 인간이 자기에게 마주한 현실로서 자연과 사회의 실재, 대상을 전유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그것은 시민적으로 추상화되어 있는, 또 그에 상응하여 관념적으로 신성화된 ‘인간 그 자체’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자체 운동성이 사상된 채 추상적이고 정지해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 인간 구상에 상응하는 만큼 그는 “‘혁명적’,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28 그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융해시킨다.”29 그러나 종교적 본질은 단지 ‘인간적 본질’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대상적인 것과 개인의 상호작용 결과이다. 만약 인간적 표상이 인간 의욕의 결과라면 이 의욕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는 그것을 자연의 자기활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자연, 이 감성적 객체의 자기활동에 불과하다면 왜 철학은 “사유하는 인간 그 자체”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감성적 객체의 한 영역에서 부유하는 절대적인 부분으로서의 인간과, “사유하는 인간 그 자체”라는 직관에 호소함은 서로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에 부딪혀 있다. 그러므로 W. Bialas, K. Richter & M. Thom (1980)는 이에 대해 아주 옳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르고 우수한 방법론적 접근 방식을 통해 마르크스는 헤겔과 훨씬 더 풍부한 비판적-생산적 관계에 도달한다. 마르크스는, 처음에 헤겔적 개념에서 매개적인 것, 즉 정신적 존재로서 발현하는 현존재에서 출발하면서 정신적 원리의 선차성에 대한 헤겔적 전제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포이어바흐의 관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출발점으로 삼는 현실 개념은 포이어바흐의 그것과 다르다: 그가 이 현실과 인간과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감각-지각적 요소로 환원한다면,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이와 관련한 무언가를 발견한다.”30 그리고 이 “무언가”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관계의 역사적 필연성을 생산력 발전의 필수적 단계로 파악하고 전체 운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교정한다. …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사회적 노동의 총체, 그것에 내재한 이중성의 분석을 역사적으로 일관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 즉 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의 성격 규정 간 상호 연관에 대한 이해를 예비하는 분석을 수행하는 것이다.”31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유물론에서 인간 인식의 반영론적 기초에 대한 적대는 매우 모호하게 표현된 특유의 직관적 인식론 속에서 끊임없이 추동된다. 인간이 마땅히 탐구 대상으로 놓으며 마주하는 대상은 그 전사(前史)의 측면에서 볼 때 철저히 비인간적이며, 이때문에 그것의 구체적인 전유가 보여주는 내용은 철저히 비인간적이어야 한다. 대상적 활동으로서 성립하는 지식 체계는 인간이 임의로 구현해 낸 표상에서 전적으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촉발되고, 대상의 내적 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천은 모두 대상적이며, 단지 활동의 ‘뿌리’가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은 진부한, 또 인간 인식의 지평을 협소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대상적이므로 인간은 자연사가 인간에 대해 초기에 가졌던 능동적인 지위를 능히 훔쳐 올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 사태는 역설적으로 추상적 오성에 의해 어떠한 자체 모순도 없는 것으로 취해졌던 자연과 사회가 그 자체 모순에 못 이겨 자기의 지위를 양도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인에 내재한 모순은 그 주인에 고유한 것으로 보였던 지위에 대해서도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실천은 그것이 고도화할수록 자연이 인간에 대해 지니는 외적인 합목적성은 인간의 욕구와 의도에 합리적으로 배열된 법칙성으로, 즉 인간의 자기 목적에 기초한 법칙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천은 전취할 대상을 물색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래서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28이고,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 사유의 차안성(Diesseitigkeit)을 증명해야 한다.”4
III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유물론 체계에서 나타나는 한계는 『미래철학의 근본원칙』에서도 유지된다. 그러나 앞선 문헌과 달리 이 문헌에는 사유-언어를 추상적 보편성에, 그리고 존재를 “개별물과 개체”34와 동일시하면서, 보편성이 “개별성의 상환”8을 요구하는 방식으로써 존재와 연관을 이루고 그렇게 하여 사유가 존재의 개별성을 간취해 나간다는 주체-객체 변증법이 제출되어 있다: “우리가 일단 이념의 실현과 더불어 사실주의 영역에 들어서고 이념이란 현실적이며 실존한다는 이념의 진리를 확신하면 우리는 실존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 실현된 사유로서의 사유는 실현되지 않는 단순한 사유 이상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사유만이 아니라 비(非)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그러면 이러한 비사유 즉 사유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다.”36 그렇다면 여기서 이 비사유, 즉 감각적인 것이 사유에 대해 가지는 선차성, 규정적인 지위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예컨대 그도 지적하다시피 “늘 의식적으로 사유의 진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감성의 진리가 나중에 말해지고 감성이 이념의 한 속성으로 되어”8버린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감성은 속성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사유에게 비로소 진리를 준다”8는 점이 이를 해소한다. 그러므로 감각은 “핵심인 동시에 부연이며, 본질인 동시에 속성”8이다.
보편성으로서의 사유에 개별성이 부착됨으로써 사유가 구체적인 성격을 띠는 이 과정은 인간과 인간을 마주한 자연의 상호작용으로서 고찰되고 있다. 예컨대 “하나의 대상 즉 실제적인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나에게 작용하는 어떤 본질이 주어질 때”40이다. 즉 외적 자연은 인간에게 자기의 본질을 붓는다. 그리고 그것에 영향받은 인간─나에게는 실제적인 대상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는 “사유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나의 활동성이 다른 본질의 활동성에 제한이나 저항을 느낄 때”8이다. 그리고 이로써 나에게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활동성이나 대상성에 대한 표상이 발생”8한다. 이는 “자아로부터 타아(他我)로 변화되는 곳”8에서 내가 고통을 받기에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을 통해서만 자아는 비아(非我)가 된다.”8
자아와 비아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통찰은 반영 이론의 맹아를 보여주지만, 그의 이러한 소박한 주체-객체 변증법에서 자아는 먼저 주관적으로 전제된 자아이고, 그에 못지않게 감각 역시 주관적으로 전제된 감각이다. 여기에서 사유와 대응될 자아는 감각만큼이나 자립화된 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자아는 그 내용적 측면에서 포이어바흐가 자의로 만들어 낸 인간적 감정─완전히 자립화한 개개인으로서, 그들이 우연적인 방식으로 지닌 갖가지 관념적인 것들─의 상이 부착되어 나와 있는 자아이다. 그러므로 자아에서 비아로의 전화의 필연성, 즉 이러한 반성 작용의 필연성은 여전히 그 증명에서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변증법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존재와 사유의 상호작용이 인식이라는 틀 내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에 관한 그의 구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써는 개체적 표상이 대상의 진리성을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해명할 수 없었던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진리성을 갈구하는 방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감성의 진리를 즐거움 속에서 의식적으로 인정”45할 것을 제시한다. 이 인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철학은 감각적인 상상들을 억누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불순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감각과 투쟁하거나 모순을 이루면서 사유했다. 새로운 철학은 이에 반대 감각과 일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 사유한다.”8
그러나 이는 추상적이며, 근본적으로는 동어반복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사유가 감각과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가가 매개적인 방식으로써 철저히 규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포이어바흐가 제출한 ‘방식’은 “나를 감각에 내맡기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하여 “나를 감각에 내맡길 수”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원리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내맡기는 것에서조차 최소한의 사유가 그 매개로서 서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감각과 투쟁하거나 모순을 이루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감각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포이어바흐의 이러한 견해는 여전히 사유와 존재, 대상적 진리의 관계를 추상화된 개인의 인간적 본질을 전제함으로써, 직관에 호소하여 정당화하고 있다는 한계를 여실히 지닌다. 그는 “참되고 신성한 것은 다만 어떤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47이라고 하면서 반대로 “직접 자기 자신을 통해서 확실한 것, 직접 그 자체로 증명되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직접 야기시키는 것─철저하게 구분되고 의심할 여지가 없고 명약관화한 것”8만이 감각적인 것이라고 수없이 반복하지만, 인간 인식이 어떻게 감각적 진리와 직접성이 직관적인 방식으로 일치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다시 직관을 제출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한다. 인식 발전의 합법칙성과 의식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상승과 하강의 상호작용에 관한 학설이 부재한 탓에 그의 사상에서 자연은 인간적 본질에게 무한한 힘을, 감각을, 그가 말하는 ‘사랑’의 계기를 제공해 주지만, 인간은 그저 그런 자연을 관조할 뿐 자연의 활동에 어떠한 자기 목적을 각인할 수 없다. 자연은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러므로 인간 역시 자연이다. 그러나 이 자연은 저 자연에 시달리기만 할 뿐, 반기를 들 수 없으며, 그저 자연의 창조 행위에 대해 감동의 표상 이외의 찬사를 보낼 바 없다.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유물론에서 자연은 생산하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 생산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즉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감각 세계가 영원에서 직접 주어진, 다시 말해 언제나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감각 세계는 역사의 산물이며, 일련의 세대가 활동해 온 결과이다.”49 그가 곳곳에서 인용하는 자연과학의 성과조차 산업과 교역의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감각적 대상”으로서 파악할 뿐, “감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50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실제의 활동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한계는 대상적 존재와 그에 맞서 있는 외적 합목적성, 그리고 인식 활동, 실천 사이에 관한 그의 비변증법적인 견해를 뿌리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본질』 제1장에서 그가 인간의 유(類)적 본질을 동물의 그것과 비교해 들어가며 “인간은 오히려 실제적으로 아무 필요도 없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서 오는 빛까지도 지각”51한다고 하였을 때, 이 인간의 특성은 그가 추상화한 인간 특성일 뿐,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경로를 가지는 객관적인 활동으로서 고찰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빛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8이 인간이 유일함을, 즉 이것이 인간의 유적 본질임을 자신 있게 내놓았지만, 그 ‘인간적 본질’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또 어떻게 구축될 수 있었는지는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감성의 영역 속에서 매개된 추상적 사유를 원천적으로 소거하여 감성적 객체 그 자체로서 자기를 감성적 대상으로 놓고자 하는 이러한 충동 일반에서 인간 일반을 완성하고자 한 이러한 시도는 실제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간’을 만들어 냈다. 그에게 이 자연은 이 일반의 미지의 토대로서 다루어지지만, 또한 이 일반이 확립된 이후 자연은 이 일반을 파괴하지 않는 자비로운 신으로 될 뿐이다. 이 일반은 이제 외적 자연에 침해받지 않는 영원한 본성으로 선언된다. 그의 철학 체계에서 자연의 힘은 이처럼 일회적일 뿐이지만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다. 둘 사이에는 근본적이고도 이신론(理神論)적인 단절이 놓여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53 그가 내세우는 인간의 유적 본질은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를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54 “주지하다시피 [포이어바흐의 철학에서] 인간의 사회적 성격은 역사적으로 고정된 일반적 특성(지성, 의지, 감정)에 의해 규정되며, 포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적 내용을 분석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도출하였다.”55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자[슈티르너]가 포이어바흐의 ‘인간’,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옳다네.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신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그는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왔고, 그러므로 ‘인간’은 여전히 신학적 추상성의 후광을 뒤집어쓰고 있네. ‘인간’에 도달하는 진정한 방법은 그 반대일세.”56
* * *
직관적으로 파악된 자연은 모든 사유 활동의 세속적 기초로서 다루어지는 것을 넘어서 신비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53하는 체계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기초의 자기 분열과 자체 모순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4 즉 세속적 기초 자체의 모순은 자기의 형태를 변형시킬 계기를 개인에게 주입하고, 사회적으로 조직된 그 개인에 의해 이 과업은 완수된다. 반대로 포이어바흐에게 이 세속적 기초는 무한한 힘으로서 각 개체에 대립해 있을 뿐, 그 개체를 거쳐 어떠한 자기 변화도 이루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는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는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59
사회적 생활로서의 실천은 그 실천에 대한 개념적 파악의 재료를 제공한다. 재료는 가공되고, 실천에 스며 들어 있는 자연과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을 획득한다. 정신의 면으로서 존립하는 이 연관은 사변을 고이게 하는 신비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을 우리에게 준다. 반대로 “관조하는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이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정점은 각각의 개체 및 시민사회에 대한 직관이다.”4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양상은 개인을 둘러싼 실제적인 것들, 그 개인을 형성한 사회를 망각한 속에서 원자적 개체를 상정하고 그것에서 추상적이고 ‘자주 독립적인 ’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그 반대로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이다.”4
마르크스가 테제의 마지막 절에서 “철학자들이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4이라고 하였을 때 이 “해석”은 객관적 실재를 향한 해석 일반─구체적인 정신적 구조물을 쌓으려는 노력, 대상에 대한 개념적 파악 등─이 아닌, 그 어떠한 인간적 실천에도 요지부동한 것으로 상정한 영원한 추상물이라는 모래성을 쌓는 사변적 활동을 뜻한다. 포이어바흐는 사변철학을 경계하였지만, 그도 관조, 직관이라는 특수한 사변 형식에 얽매였다. 그보다 앞선 기계적 유물론자들 또한 추상적인 우주적 섭리라는 이름의 죽염(竹鹽)을 강단이라는 시장판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현실적인 생산력을 구성하는 여러 사건에 접근하고자 하려는 노력은 경시되었다. 이 구조물들은 현실을 해명해야 할 때라면 극단적인 무능을 보였다. 오늘날에도 지배적인 강단 철학은 갖가지 파생 상품을 만들어 내려 애쓴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관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4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의식적인 것, 사유 일반에 대한 적대가 아니라 사유의 날이 인간의 생활 영위를 둘러싼 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함을 뜻한다.
이 테제가 인간학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영감을 부여한다면 이는 다음의 보편적 연관을 발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α. 자연사─자연 및 역사적-사회형태를 포괄하는 보편적 실재의 자기 전개 과정, 그 역사─와 인간은 상호작용하므로 인간에게는 자연사의 낙인이, 자연사에는 인간의 낙인이 찍혀 있다. 자연사는 인간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정립자이다; β. 상호작용 형태에서 관계는 두 추상적 자립체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 체계가 지니는 모순이 다른 하나를 형성해 낼 뿐이고, 이 하나의 다시 자기를 형성한 하나에 반기하는 것은 이 하나의 자체 모순에 달려 있다; γ. 상호작용의 추이는 자연사와 인간, 두 규정 모두를 변혁한다. 영원불멸하는 자연적- 그리고 사회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불멸하는 인간 형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δ. 그러므로 인간의 구체성은 그 시작이 본디 자연사에 대한 탐구로써, 지적인 형태로 획득된다. 인간의 구체성을 각 개채에 고정불변의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간주되는 어떠한 보편성의 형식을 찾아내는 식, 또는 개개인을 묶어 추려낸 추상적 보편으로써 얻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체성을 파악할 수 없는 길로 탐구자를 인도한다. 인간적 본질은 개개인의 내부가 아니라 개개인의 외부에서 그를 둘러싸 대상적 작용을 가하며 자체 모순으로 인해 생겨난 역능을 자기 내에 포괄하며 변화·발전하는 총체성에 있다; ε. 자연사의 자체 모순으로써 인류는 매개 자연사의 형태에 반역하므로 이제 이때는 인류의 투쟁이 자연사에 대한 탐구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적 형태에 관한 연구에서 인류의 반기에 대한 역사 연구가 부재하면 그것은 인류 과학의 속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꾸준히 ‘인간 본성’을 찾기 위한 부르주아적 시도가 감행되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그릇된 상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핵심적으로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뚜렷한 반공주의적 의도를 지니며 재생산되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 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노력은 그러한 시도들을 여전히 정면에서 공격하고 있는 논리를 노동계급이 습득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이 테제는 현대 인간학, 더 엄밀하게는 현대의 계급적 인간학의 발전에서 갖는 위치는 여전히 중요하다.<끝>
2024년 9월 20일
- J. O. La Mettrie, 「영혼론」, 『라 메트리 철학 선집: 인간기계론·영혼론·인간식물론』, 여인석 역, 고양: 섬앤섬, 2020, 263.
- P. T. d'Holbach, The System of Nature of Laws of the Moral and Physical World, Kitchener: Batoche Books, 2001, 42.
- K. Marx, “Thesen über Feuerbach”, MEW, Bd. 3, Berlin: Dietz-Verlag, 1978, 5.;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최인호 역,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1, 185.
- Loc. cit.; 같은 책.
- A. N. Feuerbach,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차인석 역, 서울: 민음사, 1986, 180.
- 위의 책, 183.
- 위의 책, 189.
- 같은 책.
- 위의 책, 183.
- 위의 책, 193.
- K.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MEW, Bd. 40, Berlin: Dietz-Verlag, 1968, 570.; 『경제학-철학 수고』, 서울: 이론과실천, 2006, 185.
-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86, 209.
- 같은 책.
- 위의 책, 186.
- G. W. F. Hegel, 『인륜성의 체계』, 김준수 역, 서울: 울력, 2007, 35-6.
- 위의 책, 36.
- 같은 책.
- 위의 책, 37.
-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86, 196.
- M. Thom, „Ein Vergleich der Hegel-Kritik von Feuerbach und von Marx (1843)“,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1 (6), 1983: 689.
- F. Engels, “Ludwig Feuerbach und der Ausgang der klassischen deutschen Philosophie”, MEW, Bd. 21, Berlin: Dietz-Verlag, 1962, 286.;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서울: 돌베개, 1987, 52.
-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1986, 208.
- F. Engels, “Feuerbach”, MEW, Bd. 3, 1978, 541.; 『독일 이데올로기』, 제2권, 서울: 먼빛으로, 2019, 1126.
- A. N. Feuerbach,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명제」, 위의 책, 224.
- 위의 책, 226.
- 위의 책, 213.
- 같은 책.
- “Thesen über Feuerbach”, MEW, Bd. 3, 1978, 5.;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991, 185.
- Ibid., 6.; 위의 책, 186.
- W. Bialas, K. Richter & M. Thom, „Marx - Hegel - Feuerbach Zur Quellenrezeption in der Herausbildungsphase des Marxismu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8 (3), 1980: 344-5.
- Ibid., 344.
- “Thesen über Feuerbach”, MEW, Bd. 3, 1978, 5.;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991, 185.
- Loc. cit.; 같은 책.
- A. N. Feuerbach, 『미래철학의 근본원칙』, 강대석 역, 대구: 이문출판사, 1983, § 29.
- 같은 책.
- 위의 책, § 31.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 위의 책, § 32.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 위의 책, § 36.
- 같은 책.
- 위의 책, § 38.
- 같은 책.
- K. Marx & F. Engels, “Die deutsche Ideologie”, MEW, Bd. 3, 1968, 43.; 『독일 이데올로기』, 제2권, 2019, 1267.
- Ibid., 44.; 위의 책, 1269.
- A. N. Feuerbach, 『기독교의 본질』, 김쾌상 역, 서울: 까치, 1992, 77.
- 같은 책.
- “Thesen über Feuerbach”, MEW, Bd. 3, 1978, 6.;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991, 186.
- Loc. cit.; 위의 책, 189.
- „Ein Vergleich der Hegel-Kritik von Feuerbach und von Marx (1843)“,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1 (6), 1983: 693.
- F. Engels, „Engels an Marx in Paris [Barmen, Anfang Oktober 1844]“, MEW, Bd. 27, Berlin: Dietz-Veralg, 1963, 11-2.
- “Thesen über Feuerbach”, MEW, Bd. 3, 1978, 6.;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991, 186.
- Loc. cit.; 같은 책.
- Ibid., 7.; 위의 책, 189.
- Loc. cit.; 같은 책.
- Loc. cit.; 같은 책.
- Loc. cit.; 같은 책.
- Loc. cit.;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