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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유물론에서 자유의 기초─G. Stiehler의 학설을 중심으로


철학적 유물론에서 자유의 기초G. Stiehler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동백 | 집행위원

 

자유 개념에 대한 유물 변증법적 이해는 여타 존재했던 관념론적 세계관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해명을 요구한다. 관념론적 세계관에서 세계에 대한 결정론은 추상적 관념 규정의 ‘의지’신, 절대이성, 외적 대상에 대해 초월적인 개체적 주관성 의 쓸모에 밀려 언제든 버려질 수 있지만,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결정론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결정론의 사수에서 자유는, 그것이 통속적으로 이해된 필연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중심 영역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그러한 해명에서 선진 유물론 사상가들의 서술 방식은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반격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I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관한 유물 변증법의 기반이 되는 해명 방식을 정초하기 위해선 먼저 이 주제에 관한 구 사회주의권의 일반적 논의 수준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사회주의권의 공식 자료를 참조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주의권에서 철학 논쟁이 가장 크게 발달한 나라였던 구(舊) 민주 독일의 자료에 한정히여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으로는 대표적으로 클라우스-부어(Klaus-Buhr) 감수 『철학 사전(Philosophisches Wörterbuch, 1980)』 제14개정판이 있다. 알프레트 코징(Alfred Kossing)이 책임 작성한 부분인 「자유」 항목에 실린 설명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자유 개념의 기초 내용 및 자유에 관한 당대의 철학 전선에서 선두에 선 사회주의권에서 사전적으로 일반화된, 표준 서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 사전』(이하 ‘사전’) 「자유」 항목에서 자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인간이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법칙성(필연성)에 대해 갖는 관계, 특히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적으로 지배하는 정도를 말한다. 자유는, 객관적 필연성을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얻어진 능력, 즉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성에 정통하여 이를 의식적으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늘려나가는 데서 성립한다.”1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법칙성, 즉 그것들의 운동에서 관철되는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부단히 실천으로 검증, 그것의 더욱 구체적인 필연성을 인식해 나가면서 자연과 사회를 자기 목적으로써 통제할 수 있다. 이는 인식주체의 대상적 활동이 외적인 작용력에 의해 소외되는 것, 즉 자기의 활동 근거나 목적이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정립된 것타성(他性)이기에 자기의 진정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과정이나 사태를 극복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유의 실현은 인간의 대상적 활동과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전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 하는 한, 필연성은 인간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관철한다. 우리가 필연성을 인식하고 합목적적으로 이를 이용할 때, 우리가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욕구하고 그에 맞추어 행위할 때, 필연성은 맹목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추고 자유 속에서 지양되어 보존된다.”2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필연성은 “인간이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 하는 한”에서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활동에서 자연발생성의 발로로 현상할 것이다. 반대로, 인간의 제반 대상의 합법칙성운동에서 관철되는 필연적 법칙성을 인식하고, 목적 의식적으로 그 대상을 다루면, 필연성은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길 멈춘다.

 

이러한 설명의 한계는 그 내용이 인간 자유의 해명 과정에 있어 직접적으로는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구체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자유로운 것이란 변증법적인 근거 관계를 이루는 사태이므로 추상적인 원인을 규명예컨대, “자유는 인식된 필연성”과 다르지 않다는 설명하는 것으로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직접적인 규정‘인식된 필연성’과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매개를 거쳐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체계인가를 밝혀내어야만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사전은 이어서 적대적 계급 관계와 결부하여 자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적대적 계급 사회에서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이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서 자유는 계급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시민적 자유란 무엇보다도 소유 계급이자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자유, 즉 부르주아가 노동자계급과 기타 근로 대중을 착취하고 지배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유이다.”3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관철되는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의 행위가 자유로운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세계의 역사 발전에 있어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에 이르러 그 진보성을 잃게 되면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에 의해 정립되는 자본가계급의 행위는 사회에의 완전한 소외로 전락한다. 이들이 폐물이 된 생산관계를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억압,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켜 그 결과로 자본주의적 분배 관계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그 활동이 자기 목적적인 활동, 즉 객관적 대상에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관철시키는 것으로서의 활동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강제 명령”의 결과로서, 자본의 자기 증식 도정에서 소외된 자본가계급의 행위로 표현되는 자연발생성의 가장 전형적인 예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심화함에 따라 자본가계급은 사회모순을 초보적이라도 인식하고 이를 통제할 그 어떠한 기초도 전적으로 부재하다. 이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부르주아 관리 체제가 전반적 위기의 파생 후과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여 예기치 못한 사회적 작용력의 총량을 증대하는 특히 개개인의 정신건강 파괴, 경제적 양극화의 방치 및 심화와 이에 따른 범죄율 증가, 생태 파괴, 약물 남용, 전쟁 그리고 정체적 과잉인구의 폭증 등과 신식민지국가에 전가하는 것으로 타나난다.

 

자유에 관한 부르주아적 관점 중 대표적 경향은, 생산력의 일정 발전 국면에서 생성된 형식적 자유를 본래 자유와 동일시한다는 것에 있다.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자유 자체로 여김이 그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형식적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교환관계의 개별자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재산권의 확립 과정에서 생성된 부산물이고, 생산력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형성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적·법률적 형태에 불과하다.4 이러한 ‘자유’는 생산력의 항구적 발전에 따른 자유의 확대 과정에서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소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의 자유를 보자면, 부르주아는 누구든 자의로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생산력이 발전한 미래공산제에서는 객관 사물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높을 것이기에 종교를 믿을 필요도 없어진다. 미래 사회에서 종교를 믿을 ‘자유’는 명시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에 언급되는 ‘자유’, 즉 부르주아와 봉건지주 계급 간 투쟁의 산물인 사상·양심·이동·종교·출판의 ‘자유’는 분명히 인간 자유의 확대 과정법률적 테두리 내 대상화된 관념 형태로서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현재의 역사적 발전 국면에서 그것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자유 확대를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후퇴’로서) 약소하게 보장하는 동시에 교묘하게 제한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5

이어서 사전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자유 시간을 연장하고, '자기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을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전인적으로 발전된 개인이 행하는 생산 이외의 자유로운 활동, 즉 자기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을 지향하는 자유로운 활동이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필연성에 종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사회발전이 촉진된 만큼 자유 영역의 확대가 규정된다는 것은 자유에 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명 방식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생산력의 질적이고 양적인 발전을 추동하고, 형성된 생산력에서 사용가치를 소비함으로써, 즉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더욱 발전된 노동이 발생할 기틀이 마련된다. 자유는 자연적 규정력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노동은 인간과 자연적 규정력의 매개 고리이며, 그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을 갖는 그 삶의 영위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일정량의 자유로운 노동은 자유 시간 연장의 조건이기도 한 동시에, 자유 시간 연장에 의한 결과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자유로운 활동을 말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노동시간의 단축, 즉 자유 시간의 증대가 그것의 조건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노동과 욕구의 상호작용으로 표현되는, 이 서로를 풍부하게 하는 이 순환을 이루는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것의 본질적 관계를 표현하는 그 매개 규정도 이 순환 고리 내부에 있다. 이러한 이해 없이 ‘조건’에 천착할 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7​을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사전은 “자기 목적으로서 인간의 완성”을 언급하는데, 이는 『자본론』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다.8 물론 이는 자유의 본질적 관계를 해명하기에는 추상적이다. 후반부에서 사전은 자유를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 즉 의지적 선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을 부르주아적 자유론의 특징이라고 서술한다. 자유를 단순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어떠한 객관적 법칙에 의해 성립될 수 있었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배제한다. 그것은 심리철학에서 관념론적 편향이며, 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사전의 서술은 타당하다. 그러나, 자유는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와 항상 결부된다. 인식된 필연은 인식주체가 대상과 그것을 지양한 인식과 자기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며, 객관적 실재의 운동을 총체적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발생성의 발로인 욕구단지 욕구 ‘일반’이 아니라 계급사회에서는 조야한 실제적 욕구로 되는외타적인 것활동의 근거가 자기의 목적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낯선 정립 주체의 목적으로 되는 제 관계 규정으로 되는 게 아니라, 대상과 이를 이루는 관계 총체에 목적 의식적인 활동을 가함으로써 나타난다. 여기서 외적 대상의 작용력에 자유롭다는 것, 즉 그것에 대해 자율성이 있다는 것은, 외적 대상의 작용력에 아무런 연관을 지니지도 않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대상적 활동의 근원이 외적인 규정에 일방적으로 정립되지 않음을 뜻한다. 외적 작용력 그 자체에 내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필연성에 자기가 일방적으로 정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활동이 스스로 목적을 관철하는 데 가장 유리한 필연성을 선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선택이라는 문제는 자유로운 것에 대해 규명하고자 할 때 항상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로 된다.9

 

자유에 관한 사전의 서술은 그 본질상 매개된 것인 자유의 체계를 파악하기 위해 거론되어야 하는 여러 규정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 하다. 따라서 사전을 통해 자유에 관한 생동한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름을 알 수 있다.

 


II


 

자유는 생산력 발전 운동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생산력 발전과 자유가 상호 연관되어 있음은 외적 합목적성에 의한 자연발생성의 구체적 표현인 욕구와 그것의 대립물인 노동 간의 변증법적 운동 양상 속에 자유로운 것의 낮은 단계로서의 체계와 높은 단계로서의 체계 및 둘 사이 매개의 계기가 존립함을 암시한다.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점차 사회적인 것의 범주로서 고찰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의 범주도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객관적 체계는 사회가 존재하기도 전의 범주, 즉 자연 체계의 운동 방식·그 작동 과정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예컨대, 그 자체가 운동으로 파악되는 것인 자연계는 운동의 근거를 자기 내에 마련한다는 점에서 자기 운동하는 체계이다. 자기 운동이란 운동의 근거를 자기의 외부에 마련하는 게 아닌 운동을 의미한다. 행위자의 자유 역시 활동의 근거로 되는 목적이 행위자의 외부로부터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정립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을 운동 관계로서 고찰함은 그것을 전(前)-사회적 물질의 근원적인 운동 방식과 대응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이제는 물질 운동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작동 방식에서 추출되는 논리적 범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핵심적인 것으로 요구된다.

이 문제의 해명을 위한 시작 지점은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엥겔스의 언급을 통해서만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들도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고려하지 못하는 한 맹목적으로, 폭력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작용, 방향, 영향을 파악한 이상, 그것을 더욱더 우리의 의사에 복종시키며,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냐, 없냐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10​ … [공산제가 실현되면; 인용자]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배하여 온 생활조건이 이제는 인간의 지배와 통제 밑에 들어오며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 …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인 자연법칙으로서 인간과 대립해 온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위의 법칙이 이제는 인간에 의하여 능숙하게 이용될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11

엥겔스의 이 유명한 언급은 오늘날 변혁 운동에서 필연성과 자유의 공존을 해명할 때 항상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인용에 앞서 필연성과 우연성, 현실성과 가능성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필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하여 객체에 대한 단순한 인식주관이 객관적 총체성에 대한 자유로 이행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에서 개별적 객관적 사물을 관통하는 보편적 운동 방식으로서 필연과 우연의 통일을 규명해야 함을 언급하였고, 그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헤겔의 『논리의 학』을 지목하였다:

“헤겔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명제들, 즉 우연적인 것은 그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근거를 갖고, 또한 바로 그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근거도 갖지 않는다는 명제, 우연적인 것은 필연적이며, 필연성은 자기 자신을 우연성으로 규정하고, 그리고 다른 한편, 이 우연성은 오히려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등장했다.(≪논리의 학≫, II, 제3편, 제2장 「현실성」)”12

철학적 유물론의 주요 정립자 중 하나인 플레하노프는 필연과 자유에 관한 엥겔스의 입장을 정리, 1902년에서 1909년 사이 여러 문건을 작성하여 주관주의 사회학다종의 신칸트주의에 기초한 속류 사회학 일군을 신봉하던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 ‘자유’에 일말의 과학적 타당성도 없음을 폭로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문제(Основные вопросы марксизма, 1908)』에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검토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엥겔스의 말은 일반적으로 '비약'의 개념을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필연의 세계에서 자유의 세계로의 '비약'을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박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 이 엥겔스의 말은 헤겔의 학설을 이해한 자에게는 극히 명료한 것이다. … [엥겔스가 말하는; 인용자] 자유와 필연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는 결코 헤겔의 학설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13

플레하노프는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당대 신칸트주의자들의 비판 양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비판을 수행한 후, 필연과 자유의 변증법적 관계 문제에서 헤겔 철학 체계가 가진 지위를 재차 강조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헤겔이 『논리의 학』에서 필연과 우연의 변증법적 관계 문제를 어떻게 해명하였는지 파악할 것을 지시한다.

 


III


 

자유의 변증법적-논리적 구조는 오직 필연성과 우연성이라는 통일체와 현실성과 가능성이라는 통일체의 입체적 접점의 공간을 세밀하게 확대함으로써 규명될 수 있다.

 

기나긴 철학사에서 필연성·우연성, 현실성·가능성 범주는 논쟁의 주요 논구 대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철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필연성·우연성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원소론자인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단편에서 이미 다루어졌다. 플라톤 또한 『티마이오스』14와 『국가』에서 필연과 우연 문제를 전적으로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메가라학파 디오도로스는 과거의 참은 미래의 참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논증을 수반하여 항상 참인 원리는 항상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데모크리토스 철학 체계의 계승자인 에피쿠로스는 원자 이탈(clinamen)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연의 객관성을 인정하였다. 로마 철학에서 역시 그것은 주요한 탐구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예컨대,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제반 학자는 우연을 배제하였고, 세계는 오로지 로고스에 의한 필연의 원리만이 관철된다는 전(前)-기계적 결정론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세계관은 필연적 연관이 섭리에 의해 정확히 질서 지워져 있으며, 고로 필연의 종착지가 있다는, 다소 목적론적인 내용까지 포괄하였다.

 

현실성·가능성 범주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자연학』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데, 그는 현실성·가능성을 필연성·우연성 문제와 연관하여 다룬다.15

고대철학에서 필연성·우연성의 문제는 주로 형이상학의 지반 위에서 다루어졌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데모크리토스 학설을 이은 에피쿠로스는 원자 이탈을 통해 우연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에는 세계의 기본 규정이 어떠한 매개 범주를 거쳐서 원자 이탈을 발생하게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 해명 방식이 부재한다.16 그것은 다원론을 추상적으로 전개데모크리토스의 방식을 계승한 17함으로써 급조된 개념에 불과하였다. 현존하는 개별적 규정과 그것들에 있어 본질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또는 차지할 기본 규정그들이 말하는 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서로 무연고하다는 입장(또는 이 연관성을 매우 불충분하게 ‘처리’하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우연의 객관성을 해명하고자 하였던, 이와 같은 시도는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키케로가 저술한 일부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원전 2세기 로마에서도 매우 조잡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8

중세기에도 그 기조는 유지되었다. 보에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발전한 교부철학은 필연·우연,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신, 즉 자연필연성으로서 신이 아니라, 초월적 원인으로서 신목적귀속하여 다루는 길을 택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 제5장에서 인간의 의지적 행위를 필연의 연쇄와 분리하였다.19 그에 의하면 신에게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순차는 하나의 점으로 집성되기에 의지적 행위를 신이 예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20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보에티우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에보디우스가 “어떻게 하여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기 의지가 공존할 수 있으며, 신의 예지적 강제성사실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어떻게 자기 의지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악인의 악행을 알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막느냐 마느냐와는 또 다른 문제이며, 악인은 신이 그것을 아는 것과는 무관하게 자기 의지대로 범죄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다.21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 곳곳에서 신에 의한 필연적 작용을 끊임없이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두 입장의 공존은 오로지 신을 내재적 원인이 아니라 초월적 원인으로 설정할 때만 정당화될 것이다. 만약에 어떠한 작용은 신의 초월적 활동이고, 어떠한 작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변덕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증명 방식이 추가로 요구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구에 합치하기 위해선 결정론적 세계관을 부정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 후 과학 발전으로써 철저히 반박되는 이러한 입장은 중세신학에서 필연-자유 양립 문제에 관한 가장 전통적인 설명 방식이었다.

서구 유럽이 봉건제 사멸기에 진입하자 초월적 원인으로서 존재, 즉 신의 전능성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신학은 자연과학의 발달로써 큰 후퇴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필연과 자유에 관한 가장 진보적인 관점을 지녔던 유물론 철학자 스피노자 학설을 주목할 만하다. 그에 의하면 자유는 오로지 필연에 대한 인식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따라서 필연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증명 방식은 필연이 우연과 변증법적 상관을 통해서만 관철될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없었고, 그 한계는 그가 우연의 부정적 객관성을 승인할 수 없게 하였다. 그의 구상은 사유 운동을 물질 운동의 반영으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두 실재적 양상을 유일 실체의 특수자인 무한한 속성의 동일 포섭 범위를 지닌 종(種)으로서, 즉 두 양태를 단순 수평으로 나열하면서 서로 기하학적 대응 관계를 지니는 항으로만 다루었다. 부분적으로 그는 이러한 제약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이는 여전히 맹아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체계로써는 필연에 의해 부단히 이행하는 개별 물질의 현존 규정이 사유 규정으로서 필연을 인식한 사유와 어떻게 연관을 이루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서 전일적 실체는 “자기 생동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서술”22될 뿐이다.

 

사유와 연장을 포함하는 전 속성 사이의 연관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명확히 표명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은 인간의 능동적 실천총체적인 필연 속에서 외적 필연성에 대한 주도성을 지니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없었다. 이로써 스피노자의 철학은 숙명론으로 퇴행할 위험성을 항시 내포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의 구명(究明) 과정은 항상 철학사적으로 필연성이라는 문제와 엮여 있다. 이는 인간 자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연성이 무엇인지 선차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필연과 우연의 문제는 규정과 규정 간의 매개 범주가 변증법적으로 연관을 이루고 있으며, 둘의 관계는, 형이상학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인식해야 비로소 옳게 파악될 수 있다. 둘을 분리하는 순간 프랑스 유물론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숙명론, 또는 모든 사건을 우연 일반으로 해소하는 극단적인 결론만을 가져올 뿐이다.

 

엥겔스가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변증법, 현실성과 가능성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론의 맹아여전히 관념론적 세계관 속에 있으므로 물질적 생산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사회계급 간 투쟁을 자유의 실현의 영역에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를 정초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그는 『논리의 학』에서 먼저 현실성을 부단한 반성 관계와 그 관계에서 산출되는 직접태, 즉자적인 것 사이의 통일23이라고 규정24하고, 이와 연관된 규정을 순차적으로 관계시킴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자기 복귀하는 체계로서의 필연성, 즉 절대적 필연성을 해명하였다.

헤겔은 현실적인 것의 존재 방식이 본래 변화·발전하는 것이며, 이 변화·발전은 외부에 어떠한 것이 부가되어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이 현실성인 이상 자체적으로 추동되는 것임을 개진하였다. 즉 현실성은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으며, 더 나아가 오직 이러한 외면성 속에서만 다름아닌 자기를 자기로부터 구별하고 또 규정하는 운동으로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25 현실성은 최초에는 외면과 내면의 직접적인 통일이다. 직접적인 규정으로서의 현실성은 “무반성적인 현실성”26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자기 내부에 두 계기외면과 내면을 포함한다. 즉 직접적인 현실성이란 어떠한 계기가 무엇으로 되는가능성이다. 여기서 가능성은 다시 계기와 이에 연관된 제 규정의 총체로 파악되므로 그것은 “단지 정립되어진 것으로 규정되거나 혹은 그에 못지않게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규정된 즉자 존재”27이다. 그것은 “지양된 것으로 정립된 형식 규정으로서, 어떤 내용 일반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28될 수 있다. 이때 이 내용은 필시 어떠한 것이 지양된 무언가이고, 따라서 그것은 “자기 지양된 반성태”29이다. 지양된 결과물은 다시 단초적으로는 직접적이므로 가능성은 “직접적인 것이며, 그럼으로써 가능성은 현실성이 된다.”20 이러한 단초적 현실성과 가능성은 각각 형식적 현실성과 형식적 가능성이며, 두 규정의 통일이 우연성이다.31 예컨대, 앞에 놓여 있는 컵이라는 현실성은, 그것이 그때 특정한 현실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 덕분에 그 현실적인 것의 모든 계기로 분해될 수도, 더 나가 그 계기의 계기로 분해될 수도, 또는 그 계기 간 관계가 표지하는 다른 규정으로 변화할 수 있는 규정이다. 컵이라는 현실성은 그 자체 내에 그와 같은 가능성, 즉 직접적인 반성태로서의 현실성 전체를 포함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것에 관한 형식적 가능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무엇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류의 현실성을 소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 가능성, 즉 “추상적 가능성은 실재적인 가능성의 직접적 대척점(Antipode)”32이며, 그것은  “환상(Phantasie)이 그렇듯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20 우연성이란 이러한 현실성과 가능성 간 상호작용이다.

헤겔에 따르면 우연성의 내부에는 필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것이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는 가운데 바로 그의 직접성이 지양되면서 근거나 혹은 즉자적 존재 및 근거지어진 것 속으로 떠밀쳐지는가 하면, 또한 현실적인 것의 이러한 가능성, 즉 근거 관계가 전적으로 지양되는 가운데 존재로서 정립되기 때문이다.”34 예를 들어, 앞에 놓여 생동하는 현실성인 컵이 계기로 이루어져 있거나, 또는 계기가 자기반성을 통해 다시 그것의 계기로 해소된다거나, 또는 그것 간 관계가 작동한다는가 하는 이 전체는 무언가가 무언가로 정립되는 것인데, 무언가의 관계로 인해 그것이 다른 무언가로 정립되는 한 그것은 특정한 운동 경로를 가지는 것이 되므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가능성 자체도 자체적인 반성태를 지닌다는 점, 그리고 가능성은 곧 현실성이며 둘의 통일이 우연성이라는 점을 종합하면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필연적인 것이다.”20 이로써 “현실성은 필연성”20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현실성은 바로 그 통일이 어느덧 두 개의 형식 규정 사이의 구별, 즉 현실성 자체와 가능성과의 구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어떤 내용을 지니는 것이다.”37 

 

현실성은 다시 가능성으로 전변되며, 가능성은 현실성으로 전변되는 이 부단한 도정에서 각 규정은 분명히 한쪽의 형식으로 전변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반성 자체도 현실성이라는 규정을 얻음으로써, 애당초 이 운동은 현실성으로의 복귀로 귀착된다. 즉 형식적 현실성은, 그 자신이 내함한 가능성의 표지들을 거쳐도 결국은 현실성을 유지한다. 형식적 현실성 자체가 단지 무한한 계기무한한 형식적 가능성으로 분해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현실성의 자태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 현실성을 실재적 현실성이라고 일컫는다. “실재적 현실성은 단지 실존하는 것의 다양성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며, 이때 그의 외면성은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적인 관계이다.”20

 

그러나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관계 속에 지양된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로써 현실성은 드디어 가능성과 실질적으로 구별되기에 이른다.39 이때 실재적 현실성은 다시 즉자적인 것으로 되고, 이로써 다시 가능성이 생성되는데, 가능성은 이제 단순히 현실성과 나란히 서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오로지 실재적 현실성의 즉자성을 경유함으로써만 존재하는 가능성, 즉 실재적 가능성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사상(事象)의 가능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로 그 사상의 제 규정이나 상황을 파고드는 경우라면, 더 이상 그는 형식적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실재적 가능성을 고찰하는 것이다.”20 그런데 실재적 가능성은 “형식적 혹은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그의 규정성과, 또한 추상적인 즉자 존재로서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규정성에 묶여 있는 그런 형식의 전체일 뿐”41이다. “실재적 가능성은 갖가지 조건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자체 내로 반성하지 않은 산만한 현실성”20이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의 즉자 존재성이면서 자체 내로 복귀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 그러한 현실성이다.”20 즉 실재적 가능성은 피제약적인 조건이나 근거라는 낱낱의 현실적 실존체로 집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화창한 날씨라는 현실성에서 훗날 비가 오는 현실성을 잇는 관계들의 총체는 가능성이자 모두 또다른 현실성의 집약이다. 이는 형식적 가능성과 외견상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형식적 가능성은 단순히 형식적 현실성의 외부에 대응해 있는 것으로서, 그저 현실성의 외부에 자리 잡은 그것의 부정자라는 성격을 지닐 뿐이지만, 실재적 가능성은 그것 자체가 이미 현실성에 내재한 필연 운동임을 지시한다.

이처럼 현실성과 가능성은 각자의 자기 규정성을 확보하면서도 각자 외재성을 지양하는 운동에 진입함으로써 자신이 포괄하는 현실 범위를 불려 나간다. 이러한, 현실성-가능성의 변증법에서 시종일관 수반되는 보편적인 것이 바로 실재적인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필연성은 “자기의 단초를 이루는 하나의 전제를 지니게 마련이므로, 이것은 어떤 우연적인 것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44 실제로 필연성은 즉자적인 현실성과 형식적 가능성 간 상관 과정, 즉 우연성을 거쳐서만 그 자신의 규정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즉자적 현실성이 그대로 즉자적 현실성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이라면 우리는 정해진 경로에 관해 하등 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해진 경로를 얘기할 수 없다면 필연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연성은 아직 우연성을 자기 자체의 운동으로서 정립한 게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서 있는 현실성과 가능성의 상호작용 속에서 산출된 경로 운동을 자기에게 부가할 뿐이다. 자기 자체로부터 현실성과 가능성을 산출하고, 그것 간 관계에서 드러나는 우연성까지 자기 내에 포괄하는 체계로서의 필연성을 헤겔은 절대적 필연성이라고 하였다. 이때 필연성은 우연성을 스스로 정립하고, 이로써 자기 발전을 추동한다. 우연은 필연의 추진력이다.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러서야 현실성과 가능성 각각은 비로소 “자유로운 현실성(freie Wirklichkeit)”45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며, 오직 이러한 자기 정립일 뿐”46인 것으로 된다. 즉 자기 운동의 논리적 기반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필연과 우연 간 변증법적 상관성을 논리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우리는 자유가 필연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즉 그것이 필연적 법칙성과 아무런 연관도 가지지 않은 채 그것을 초탈한 위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우연을 경유함으로써 실현되는 현실적인 필연성임을 알 수 있었다. 인간 고유의 활동을 여러 방식으로 제약하는 외적 합목적성 역시 필연성의 한 영역을 점하는 객관적 작용이며, 그것이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립되는 한에서 특정한 필연적 경로를 향해 나가는 운동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양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역시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지시되는 특정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필연 운동이다. 현실성이 다수의 필연적 경로로 중첩되어 있음의 표현이 우연성이다. 따라서 우연이 부재한다면 자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이 없다면 현실 규정이 필연적으로 작용의 방향은 오로지 하나의 경로로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이란 그저 개별적 현실성을 잇는 매개 규정 또는 그 매개 규정 자체로 표현·발현되는 원리인 필연 운동이 즉자적으로는 무한한 경로를 지닌 운동임을 뜻하는데, 필연성의 영역에서의 현실성이 자기 내에 포괄하는 중첩된 현실성인 이러한 무한한 필연적 경로라는 총체성은 규정적인 필연 운동이 개시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우연은 헤겔의 분석 그대로, 필연적 작용이 객관적인 이상 그 현존성이 필연적이다. 필연의 현존성은 곧 우연의 현존성이며, 필연은 자유와 적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 자체가 자유라는 규정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IV


 

우리는 단순한 결정론이 아닌 변증법적 결정론에서 말하는 필연과 우연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필연과 우연의 변증법적 상관이 곧 “인간이 진정 능동적일 수 있는 존재냐”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관념론자 헤겔은 『논리의 학』 「개념론」에 이르러서야 주체와 객체 간 무한한 상호 연관과 자유로운 활동의 통일인 개념을 다루면서 주체의 자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유물론자가 인간의 진정 능동적인 실천 행위에 대해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적 합목적성이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시작점으로서의 사태가 어떻게 하여 인간 고유의 활동을 통해 그것의 맹목성을 지양한 것으로 전화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 행위는 행위자로 향하는 대상적 총체성그 자체로 자기 재생산하는 자연적·사회적 실재으로서의 외적 합목적성과 단절될 수 없다. 욕구의 형성은 일차적으로 자연발생적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대상적·감각적 존재인 인간”47은 “[외적 자연에; 인용자] 시달리는 존재이다.”48 인간은 무엇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또한 저마다의 개별적 존재 양식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아 나가기를 희구한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적인 것, 즉 생물학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지만,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그것은 사회적인 것으로 전화된다. 예컨대, 초보적인 수준의 식재료를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고자 하는 것, 더운 날에는 시원한 곳, 추운 날에는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자 하는 것 등은 일정 수준까지 인간의 생물학적 제 조건의 작용력의 발현이다. 그러나 사회를 이루게 되면서 이러한 욕구는 그보다 높은 단계로 이행하고, 이러한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의 욕구 충족과 그것의 발전은 사회적인 것엄밀한 노동이 추동한다.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범주들이 매개된 형식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는 분리될 수 없다. 이는 사회발전 법칙의 내재적 속성이다.

이처럼 인간의 대상적 실천 행위인 노동은 (인간에로의) 외적 합목적성의 관철로서 발현되는 인간 욕구로부터 시작한다. 즉 “노동과정은 원래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강요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반응에 불과했다. 이러한 반응은 인류의 최초 욕구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식량 생산과 사람들 자신의 생산으로 시작되었다. …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활동적이었어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상적인 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객관적 실재를 변형하는 방향으로 지향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49 인간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동하는데, 그것은 또한 의식적으로 자기의 욕구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서 그 필연적 매개를 이룬다. 그런데 이 욕구에는 최대한 적은 수고를 들이거나, 아예 어떠한 노력도 들이지 않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까지 함유한다이는 노동 실천의 부정항이다. 그러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욕구가 목적으로 설정된 이 실천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처럼 본래 노동은 합목적적이며,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욕구의 대립물로서 야기되는 것이다.

 

욕구가 노동으로써 풍부한 복귀를 이루는 데서 전제되는 것은 노동 도구이다. 노동 도구와 이것의 지속적 발전이 없다면 욕구의 발전 수준은 생물학·동물적인 수준을 초과할 수 없다. 이 단계에서의 욕구가 가져오는 ‘노동’은 단순히 동물적 반사 작용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렇듯, 노동의 발전은 곧 노동 도구 및 욕구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이는 생산력의 발달, 즉 생산적 노동 능력을 지닌 인구의 증가, 사용가치의 양적·질적 발전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욕구의 내용은 생산력 증대로 발전한 사회의 힘을 통해 갱신된다. 이렇게 형성된 피정립태로서의 인간 욕구는, 생산력이 증대하기 전의 인간 욕구보다 상승한 것이다. 발전한 욕구는 다시 노동을 통해 풍부화를 거듭하며, 이 욕구의 부정, 즉 그것을 반영한 노동은 자연과 사회의 필연성에 대한 더욱 높은 이해를 보장한다. 자연을 자기의 방식대로 더 많이 전유한 인류에게만 더 발전된 노동이 보장된다. 인간은 아무런 생산적 기반 없이 자신의 조야한 욕구를, 사회의 재생산에 합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욕구로 전화시킬 수 없다.

 

자연발생적인 것과 대응되는 욕구와 목적 의식적인 것과 대응되는 노동 간 변증법은 곧 인간 자유 증대 변증법의 가장 추상적인 관계 형태이다.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노동 그 자신에 부가된 소외 규정을 점차 극복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목적적인 활동, 즉 복원된 노동에 가까워지는, 이러한 노동의 질적 발전이 필연성에 대한 인식의 확대·발전이다. 이 상승한 노동으로써 “이루어진 환경의 변화는 다시 그 변화를 일으켰던 추진자에게 반작용하여 이를 변화시킨다.”50 변증법적 결정론에서 말하는 외적 필연성, 즉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종속되지 않는, 즉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 활동은 필연적 법칙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활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 존재 양식을 필연적 법칙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으로 취급하는 견해는 비결정론으로 귀결된다. 외적 합목적성에 지배되지 않는 인간은 필연적 법칙성의 운동을 스스로 구현하며, 특수한 필연성의 구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필연성의 구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대상적 현실성의 내적 연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이 내포한 실재적으로 가능한 영역을 인식하고, 그 실재적 가능성을 자신의 목적에 합치하는 실재적 현실성으로 화하는, 즉 자기 힘으로써 실재적 필연성을 이루는 활동이다. 인식주관이, 규정된 현실에 관한 실재적 가능성을 외적 합목적성의 객관적 작용으로서의 실재적 가능성과 연관하여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실재적 가능성에서 실재적 현실성으로의 전화는 인류의 목적·욕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그 반대일 때 인식주관은 자기 외부 규정의 외적 합목적성이 생성한 자기 욕구에 합치하는 실재적 현실성을 택할 수 있다. 이 사태 속에서 외적 합목적성은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춘다.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인간 활동은 자기 운동적 성격을 지니지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상대적인 자기 운동이다. 의식적 변증법으로 구현되는 자기 운동은 객관적 실재의 자기 운동, 즉 절대적 자기 운동의 산물이다. 즉 상대적 자기 운동 도정은 절대적 자기 운동에 근거한다. 자연과의 물질대사로 규정된 관계에 독립한 인간 활동이란 상상할 할 수 없다. 따라서 인식주체로서 인간의 상대적 자기 운동은 총체적으로 볼 때는 물질의 자기 운동의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태들의 실재적 필연성을 인식함은, 객관적 사태의 실재적 필연성이 선재(先在)한 다음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유물론은 데카르트나 칸트가 전개하였던, 인식론에서의 선험주의적 관점을 비과학으로 간주한다. 철학적 유물론은 인간 자유의 근거, 다시 말하여 인식주체로서 인간 활동의 상대적인 자기 운동의 근거를 인간 의식의 발생·소멸에 대해 독립적인 사태의 집적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운동, 즉 물질에서 찾는다.51

이에 관하여 구 민주 독일의 철학자인 고트프리트 슈틸러(Gottfried Stiehler)는 『변증법과 실천(Dialektik und Praxis, 1968)』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8세기 유물론은 인간을 자연에 의해 결정되고 의존하는, 여러 면에서 자연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자연은 모든 존재의 생산적 기초를 형성했다. 의식, 도덕, 정치 등은 그것의 속성이자 산물로만 간주되었다. … 이 사상은 인간의 행동에서 자의적인 것을 배제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근거로부터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 그러나 인간 존재 양식은 객관적 결정 작용으로 끝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모순적 매개로부터 추동력을 얻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dialektischen Selbstbewegung)의 전개이다. 기계적 유물론은 객관성에 의한 물신화의 주문을 깨뜨릴 수 없었다.”52

객관적인 일정 단계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전화한다. 이와 같은 변증법은 서로 변증법적 연관을 이루며 각자에 관해서 더더욱 풍부화하는 관계를 이룬다. 여기서 객관적인 것의 본질적 범주인 필연적 법칙성은 그대로 지양·보존된다. 주관적인 것은 객관의 존재 방식 중 일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거대한 자동화 채굴 기계를 통해 지상에서 몇 마일 아래에 있는 광물을 인간은 노동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분별하고 무정부적인 생산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급격히 배출시킬 수 있고, 이산화탄소가 일정량이 되면 지구의 기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은 서로 연관을 이루며, 전자가 후자가 지니는 특정한 규정의 계기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인 것에 의해 객관의 자기 운동이 제약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객관의 절대적인 자기 운동의 일면이며, 이 전개의 특수한 양상으로 된다. 이산화탄소가 급격히 증가하고 기상 운동의 객관적 연관이 지는 체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객관적인 운동일 뿐이다.

슈틸러는 객관의 산물이자 그것의 대립물 주관에 관한 엘베시우스의 견해그것이 객관적 총체성에 대해 지니는 이질성을 완전히 사상한, 즉 그것을 물질과 완전히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기계론적 관점을 비판한다.53 이어서 그는 엘베시우스와 톨런드의 철학적 견해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부정하는 숙명론으로 귀착하게 됨을 그는 지적한다.54 슈틸러는 인간 활동에 관한 기계론적 견해만을 지적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가 그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편향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55

객관적 실재의 절대적 자기 운동은 내적 부정성에 기반하여 내부 모순을 심화·발전하여, 그것의 해소점(解消點)을 상대적으로 독립된 외부로부터 구하고, 모순이 해소된 체계는 다시 같은 방식으로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재차 자기 운동을 전개한다.56 해소점으로서 외적인 규정은 절대적 자기 운동의 주체에 의해 분화되어 나온 규정들이며, 운동의 주체가 지니는 자기 운동의 내적 추동력이 될 수 있는, 자기 운동의 내적 모순을 구성한다. 사회발전에서 그 특수한 형태로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 내적 모순의 자기-능동적 전개는 불가피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형성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는 잔존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내적 모순을 추동하는 외적 요인이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는 자본주의의 체계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 외적인 규정이다. 동시에 사회주의 세계라는 규정은 자본주의 사회 노동계급의 의식화를 추동함으로써 자본주의 내적 모순의 추동인(推動因)으로 된다.

이렇게 주체는 그 주체의 체계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타자를 산출하고, 그 규정은 그 주체의 체계 내 모순을 가일층 심화·발전하는 추동력이 된다. 객관에 대한 주관의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객관적 총체성은 그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주관적 총체성을 산출57하며,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의 내적 모순을 심화·발전하는 규정성으로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은 특정한 원소의 내적 모순을 심화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까지 활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제 인간은 원소에 내재한 모순을 가용 에너지로 삼는, 원자력 발전의 상용화를 이룬 단계에 와 있다. 원자력의 이용은 지구 전 영역의 물질적 흐름을 급격하게 바꿀 수 있는, 추가적인 인간 행위를 산출할 수도 있다. 이렇듯, 필연성을 인식한 인간의 활동은 객관적인 것의 발전에서 지대한 변수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현 단계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상대적으로 자기-목적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러한 거대한 인간 활동은 단지 자본의 피정립태로서 거대한 ‘인간’ 활동에 불과하다. 이 활동은 오로지 가치 증식이라는 목적에 귀속되므로 그 활동이 인류에게 가져오고 있는, 그리고 가져올 막대한 피해는 일반적으로 전혀 계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다.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은 객관과 주관을 넘나드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의식의 변증법, 즉 주관적 변증법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내적 모순과 상대적인 외적 모순의 연관체인 물질 운동을 반영하는데, 이렇게 반영되어 형성된 관념은 객관적 형식이 아니라 주관적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주관적 형식은 개념, 판단, 추론, 법칙58, 표상, 주관적 범주 등이 있는데, 각자의 형식은 그것이 반영한 물질 운동 과정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형식들은 연관을 이루어 의식적인 내용을 이룬다. 그리고 연관을 이루는 내용은 다시 하나의 형식으로 지양되고, 생성된 형식은 다시 이를 반영한 내용을 구성한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문제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관적 형식이 사념 수준에 머문 표상에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리고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인 개념으로 상승으로 전개되는 인식의 발전 방식을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로 간주한다.59 이 상승은 주관 상에서의 내용과 형식이 자신에 내재한 모순을 인식했을 때 추동되는데, 이 추동은 기존의 주관적 내용과 형식을 검증하기 위한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60 부단히 운동하는 객관적인 현존재 규정의 생성·소멸 및 변화·발전과의 근사적 일치를 주관적 형식으로 구현한 의식의 내용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객관 사물에 관한 상대적 진리를 획득하게 된다. 상대적 진리란 반영의 근거인 객관적 운동 연관과 발전 연관을 파악한 것으로, 인식주체는 대상 사물의 내적 연관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물의 필연적 법칙성을 상승하는 욕구에 조응시켜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때 외적 합목적성은 인식주체에게 맹목적으로 작용하길 중단하고, 인식주체가 필연적 법칙성을 통해 사물을 능동적으로 개변한다. 주관적 형식이 그것이 지니는 내용의 발전을 추동하고, 그 내용이 객관적 실재의 운동과의 일치로 나아갈 때 상대적으로는 불철저한 능동성이 성립한다. 인간은 이러한 낮은 단계의 능동성을 획득하여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 인식주관이 지닌 모순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할지(이렇게 하여 인식주체는 대상에 대해 과거보다 한 단계 발전을 이룬 인식 지평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올바르지 못한 실천, 즉 맹동하여 인식주관이 지닌 모순을 계속 간직하고 추상적인 사고 단계에 머무를지, 그 향방에 대해 주체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

의식의 변증법에서 의식은 내적인 성찰 수준과 낮은 단계에 머문 능동적인(단지 능동적인 게 아니라 상응하는 실천 단계에 제약된 능동적인 것) 실천을 통해 그것의 발전을 위한 낮은 수준추동력을 얻는다. 이 추동력을 통해 형성된 발전한 의식의 제 형식과 내용은 그에 대응되는 것인, 대상의 총체성을 형성하고, 이는 다시 이전보다 높은 실천을 산출한다. 의식의 변증법은 객관과 분리된 과정이 전혀 아니며, 객관적 변증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의식의 변증법은 그것의 가장 초보적인 과정에서도 객관적 실재의 과정, 운동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상대적이지만 그것의 발전 추동력을 그것이 자신의 초보적인 단계에 형성한 주관적 내용과 형식에서 얻는다. 사유가 지니는 모순의 근원은 객관적 변증법의 산물이지만 사유의 발전 계기인 의식의 모순은 객관적 총체성만이 아니라 주관적 총체성으로부터 그 추동력을 얻는다.

 

내적 추동력을 통해 상승한 구체적인 사유는 존재와의 일치성, 즉 상대적 진리를 획득하게 된다. 인식의 시작 단계에서 변증법은 구체적 객관에서 (낮은 단계의 인식·추상적 사유·추상화를 통해) 주관으로 옮겨가는, 구체에서 추상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인식의 발전은 추상에서 구체로 진행된다. 이론적 성찰과 실천의 부단한 통일을 통해 형성된 구체적인 사유는 자연을 개조하는 주관을 형성하고, 그것은 객관적 총체성의 구성물이 된다. 이 과정은 인식의 가장 낮은 단계, 그러나 시초 단계인 감응의 단계에서 추상적인 사유의 단계인 감각적 인식과 지각적 인식, 그리고 오성적 인식, 그리고 구체적인 사유 과정인 이성적 인식61​으로의 발전 순서를 밟으며 진행된다. 전 과정은 낮은 수준의 실천에서 높은 수준의 실천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구체성을 얻은 정신은 객관과 일치성을 이루는 구체적인 개념을 통해, 자기 생산적인 필연 운동으로 구조화된 대상의 시작-끝-복귀 체계를 파악한다. 구체적 관념으로서의 이 자기 재생산 체계는 외적 합목적성의 맹목성이 작용하는 경로를 구성하는 본질적 관계들까지 포괄한다. 사유 주체는 이 정신적 체계객관적 대상과 일치성을 지닌에 기초해 실천함으로써 외부 작용력을 통제한다. 1930년대 이후 소비에트 심리학의 발전 성과는 인식 과정에서 사유 주체가 필연성을 정신적으로 획득해 나가는 경로를 심리학적으로도 탐구할 수 있음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의식의 변증법이 지니는 상대적 자기 운동은 낮은 단계 및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계획을 통해 비로소 실재적 필연성으로 전화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라는 과도기에서 추동되는 의식의 능동성과 경제 계획의 조화에 관해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관적 요인이 지니는 창조력(die Schöpferkraft des subjektiven Faktors)과 의식의 능동적 역할(die aktive Rolle des Bewußtseins)은 사회주의 건설의 과학적 계획의 발전과 완성에서 표현된다. … 계획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의식적인 창조 과정이 전개되는 필수적인 형태이다. 계획 기구는 사회적 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집단적 주체의 도구이다. … 의식의 변증법(Die Dialektik der Bewußtheit)은 새로운 경제 체제에 의해, 경제 계획 분야에서 새롭고 더욱 높은 방식으로 실현된다. 기본적인 경제 과업들에 관한 중앙계획은 개별 경제 단위에서 주요 생산업과 생산 부문의 독립성을 고려한 계획을 포함하하여, 그것들을 유의미한 단위로 병합한다. 의식은 자기 조직화된 변증법적 체계로 생성되는데, 이것은 심급에 의해 미리 질서지어진 조절 메커니즘의 경직된 선형성이 아니라 체계의 변증법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상대적인 변증법적 자기 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 객관적인 경제 법칙의 완전한 활용은 경제 계획의 살아있는 내용이 된다.”62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유통·분배 전반에 관한 중앙집중적인 계획의 확대는 곧 상승하는 인식 활동의 전 사회적 표현 형태이다. 인식의 상승은 곧 자유의 확대를 뜻한다.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아래에서 자유는, 생산력의 항구적 발전을 억압하는, 즉 과잉생산과 자본가치의 파괴를 동반하여 생산양식의 내용과 형식의 비조응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조건을 철폐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발현한다. 자본제적 임노동은 소외된 노동으로, 자본의 자기 증식 활동의 피정립태외적 합목적성의 맹목적 작용에 강제된 노동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성(自性)을 통한, 자연과 사회에 대한 개조 활동이 아니라 동물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타성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적대적 분업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전인적 인간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여 사물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규정력을 확보하는 한, 노예적 삶이 필연임을 인식하여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조직적 실천으로 발현된다.63 에드가르 피셔(Edgar Fischer)는 주체-객체 변증법과 혁명 주체의 실천을 연계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르크스에게 객체-주체 변증법은 이제 그 전제가 인간 활동의 결과이자 인간의 필요에 매개되는 급진적인 혁명으로서 실제 객관적 조건에 존재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며, 급진적 요구의 발현인 이 급진적인 혁명은 단순한 정치 혁명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그 물질적 기초의 변혁으로써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혁명의 주체로서의 운반체는 더이상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다.”64

자유란 보편적으로, 객관적 범주로서 자연과 사회의 현실성·가능성, 필연성·우연성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부단히 운동하는 과정이므로, 그것은 인간 활동이 결부된 특수한 필연성이다. 그것은 주체적 인류가 객관적 실재와의 주관-객관적 일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것의 결과로써 현실성 내부의 가능한 현실성을 필연적으로 잇는 특수한 작용력이다: “법칙은 현상의 본질적 내용이므로, 법칙의 본질에 속하는 변증법은 한편으로는 활동 조건(Wirkungsbedingungen)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앞에는 세 가지 차원의 관계가 실재한다. 법칙은 활동 조건과 현상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현상 자체가 활동 조건이다. 왜냐하면 법칙이 현상 속에 실현되어 있으므로 현상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활동 조건과 현상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현상이란 법칙의 운동에 의해 결정되지만, 활동 조건은 이 결정 사항을 수정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지지 않으며, 우연을 포함하는 변증법적 필연성을 가진다.”65

 

*   *   *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영역과 나란히 하여 존재하는 총체성이므로 그것은 필연의 영역을 완전히 소멸하고 그 위에 선 총체성이 아니다. 자유의 왕국은 필연적인 인간 외부를 둘러싼 작용력외적 합목적성의 세계인 필연의 왕국을 거쳐서, 즉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실현된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자유의 영역은 일부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 생산력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속에서 계급이 소멸하면 일반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던 자유의 왕국이 그 전 단계의 사회에서의 그것보다 전면화된다.

 

오늘날 자유에 관한 지배적인 담론은 자유의지론이다. 자유의지론은 필연과 무관한, 즉 이와는 완전히 독립된 선택의지만을 자유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을 것을 강변한다. 이들은 자연과 사회의 필연적 법칙성을 정신적으로 획득함과 무관하게 전 인간이 선택의지를 지닐 수 있다고 한다. 그 논리적 귀결로써 자유의지론자들은 개인에게 닥치는 불행, 부조리 등의 근거를 오로지 개인에서만 찾는다. 즉 개인은 선택의지를 통하여 언제든 불행을 피할 수 있으며, 물적 작용은 의지 행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이 자신에게 온 불행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탓이다. 빈곤 역시 사회 모순·외적인 합목적성의 관철이 아니라 객관적 힘을 초월한 의지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이다. 자유의지론은 생물학, 심리학, 뇌과학 등의 발달로 부르주아 학계 내에서조차 그 이론적 파산을 면치 못하였으나, 대중적으로는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유의지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사회경제적 조건의 전방위적 파산의 책임과 그 뿌리를 발생, 발전과 사멸의 총체적-필연적인 계기를 가지는 역사적인 사회형태가 아니라 개개인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반동적인 의도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것이므로, 이에 대한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이데올로기적 반격이 요구된다.<>

 

2024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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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서울: 동녘, 1989, 1116-7.텍스트로 돌아가기
  2. 위의 책, 1118.텍스트로 돌아가기
  3. 위의 책, 1118-9.텍스트로 돌아가기
  4. “지배하는 개인의 권력이 국가로 구성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지배하는 개인조차 이런 실제 관계[소유관계; 인용자]아래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실제 관계 아래 지배하는 개인은 특정한 물질적 관계를 통해 제약되는 의지에 대해, 국가 의지라는 또는 법률이라는 일반적 표현을 부여해야 한다.” (MEW, Bd. 3, 331;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이병창 역, 서울: 먼빛으로, 2019, 653.)텍스트로 돌아가기
  5.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회에 관해 다룬 볼테르의 서신에서 표현된 ‘자유의 확립’만큼 형식적인 자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적 자유 역시 당대 봉건 통치배들과의 투쟁이라는 근거 관계에 일방적으로 정립되는 규정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철학대사전』, 1989, 1120.텍스트로 돌아가기
  7. 실제로 자유를 단순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기술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외적 합목적성[객관적 실재의 유기적 매개·연관]에 의하여 지시[지배]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K. Marx, 『자본론』, 제III권 (2), F. Engels 편, 서울: 백의, 1989, 1003-4.)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동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 규정자가 있는 한 사라질 수 없으며, 당연히 인간적 생활양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노동함은 그것 자체로 자연 필연성을 이룬다. 자유의 왕국에서 노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의 왕국에서 노동은 비로소 가상의 지위라는 성격에서 벗어난, 인간 유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으로서 노동이 되는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위의 책, 1004.텍스트로 돌아가기
  9. 뮈슬리프첸코는 이 점에 대해서 옳게 파악하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모든 개인의 행위에서부터 성립되고 있지만, 경제적 토대는 이들의 행위를 보통 '궁극적'으로 제약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결의를 위한 일정한 여지가 늘 존재한다는 것,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 그때 사람들은 이 외적 필연성에 반드시 자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외적 필연성을 지지하거나 거기에 반항하거나 하면서, 바로 그것으로써 자신의 의지의 자유와 자각을 표출한다.”(A. Myslivchenko,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진영민 역, 서울: 논장, 1989, 150.)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적 자유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 즉 내적 자유는 상대적인 자립성을 지니지만, 고립적인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즉 일정한 사회환경과 자연적 제 조건에 의해 부과되어지는 양자택일[선택; 인용자]의 연관으로서 고찰되어야 한다.”(위의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10. F. Engels, 『공상에서 과학으로』, 나상민 역, 서울: 새날, 1990, 68.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위의 책, 75-6.텍스트로 돌아가기
  12. F. Engels, 『자연변증법』, 윤형식, 한승완, 이재영 역, 서울: 중원문화, 1989, 223.텍스트로 돌아가기
  13. G. Plekhanov, 『맑스주의의 근본문제』, 민해철 역, 서울: 거름, 1987, 130-1.텍스트로 돌아가기
  14. 『티마이오스』에서 지성은 필연의 외부에서 필연을 설득하는(69a-c) 초월적 존재로 간주(68e)되고 있다. 이러한 지성의 설득이 없다면, 필연은 맹목적인 작용으로서 방황하는 원인에 불과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지성이 필연을 초월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에 관한 중세 종교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5. 『자연학』에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선대의 철학자들이 갖는 몇 가지 모순적 설명 방식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엠페도클레스를 포함한 과거의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결과는 항상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론을 인정하면서도, 어떠한 자연 현상에 대해선 우연을 비판적 태도 없이 운운하였다는 것이다. (김영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우연(tyche)의 문제」, 『서양고전학연구』, 3, 1989: 54-5.) 더 나아가 그는, “어떠한 것도 운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하면서, “[또한; 인용자]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떠한 것이 항상 존재한다”고 하는 식의, 필연과 우연에 대한 자연철학자들의 모호한 태도를 지적한다. (Aristoteles, “Physics”, The Complete Works of Aristotle, Vol. 1, tran. J. Barn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196a1-7.)텍스트로 돌아가기
  16. 에피쿠로스의 원자 이탈은 루크레티오스의 저술에서 소개된다. 오지은(2008)은 루크레티오스의 주장을 검토하며 원자 이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루크레티오스는 이탈이 어떤 위상에서 어떻게 인과 연쇄를 깨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탈 개념에 대한 그의 주장은 상당히 추상적이다. … 키케로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두 원리”를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원자가 “이탈한다(declinet)”는 원리이다. 다른 하나는 원자 이탈이 “원인 없이” 이루어진다는, 그래서 “무에서 어떤 것이 나온다”는, "에피쿠로스 자신도 수긍하지 않을" 원리이다.” (오지은, 「원자 이탈과 에피쿠로스의 자유」, 『철학』, 97, 2008: 76.)텍스트로 돌아가기
  17. 데모크리토스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제 사물의 궁극적인 규정인 원자는 저마다 별도의 형태와 모양, 그리고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심플리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주석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장소를 허공, 아무것도 아닌 것, 한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이름들로 부르는 한편, 실체(ousia)들 각각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그것[실체; 인용자]들은 온갖 모양(morphai)과 온갖 형태(schemata) 그리고 크기의 차이를 갖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역, 서울: 아카넷, 2005, 547.)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에서 원자 사이의 이질적인 형태, 모양, 크기는 단일한 규정으로부터 외화되어 생성된 것이라기보단 저마다 그 궁극적 규정성을 지녔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인용자] 일차적 크기들은 수효가 무한하고 크기를 분할할 수 없으며, 하나에서 여럿이 생겨날 수도 없고 여럿에서 하나가 생겨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이것들의 얽힘(symploke)과 흩어짐(peripalaxis)에 따라 모든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위의 책, 555.) 저마다의 형태, 모양, 크기를 지닌 다양한 원자 간 통일된 동일 규정에 관해 언급한 것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다원론적 성격이 존재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8. Marcus Tullius Cicero, 『키케로의 최고 선악론』, 김창성 역, 서울: 서광사, 1999, 22.텍스트로 돌아가기
  19. Boethius, 『철학의 위안』, 정의채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3, 제5장, 산문6.텍스트로 돌아가기
  2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21. Augustine of Hippo, On the Free Choice of the Will, On Grace and Free Choice, and Other Writings, tran. P. K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III:10.텍스트로 돌아가기
  22. G. W. F. Hegel, Werke, Bd. 15, Berlin: Vollständige Ausgabe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1844, 368.텍스트로 돌아가기
  23. 헤겔은 절대자의 부단한 반성 관계를 내면적인 것, 그리고 그것이 현상적인 것·직접적인 것으로 떠밀려지는 측면을 외면적인 것으로 일컫는다. (G. W. F. Hegel, 『대논리학』, 제2권, 임석진 역, 파주: 자유아카데미, 2022, 318.)텍스트로 돌아가기
  24. 위의 책, 317-8.텍스트로 돌아가기
  25. 위의 책, 318.텍스트로 돌아가기
  26. 위의 책, 319.텍스트로 돌아가기
  27. 위의 책, 321.텍스트로 돌아가기
  28. 위의 책, 321-2.텍스트로 돌아가기
  29. 위의 책, 322.텍스트로 돌아가기
  3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1. 위의 책, 323.텍스트로 돌아가기
  32. K. Marx,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고병권 역, 서울: 그린비, 2001, 46.텍스트로 돌아가기
  3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4. 『대논리학』, 제2권, 2022, 326.텍스트로 돌아가기
  35.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6.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7. 위의 책, 327.텍스트로 돌아가기
  38.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9. 위의 책, 328.텍스트로 돌아가기
  40.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1. 위의 책, 329.텍스트로 돌아가기
  4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44. 위의 책, 333.텍스트로 돌아가기
  45. 위의 책, 339.텍스트로 돌아가기
  46. 위의 책, 343-4.텍스트로 돌아가기
  47. MEW, Bd. 40, Berlin: Dietz-Verlag, 1968, 579.텍스트로 돌아가기
  48.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49. M. Buhr & J. Schreiter, „Erkenntnis - gesellschaftliche Praxis - Handel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6 (6), 1978: 714.텍스트로 돌아가기
  50. 『자연변증법』, 1989, 175.텍스트로 돌아가기
  51. 이와 반대로 헤겔은 『논리의 학』 「본질론」의 「현실성」편 마지막 장에서 형이상학적 인과론으로는 운동성을 확립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다음, 현실성과 가능성, 필연성과 우연성의 변증법을 보편자·특수자·개별자의 매개연관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주체는 개념뿐이며, 개념만이 절대적으로 자기 운동한다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념이 구현하는 세계를 자유의 왕국(Reich der Freiheit)이라고 한다. (『대논리학』, 제2권, 2022, 330-1.) 헤겔의 견해는 추상적인 비물질적 존재의 절대적 자기 운동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물론과 대립된다. G. 슈틸러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종합한다: “[헤겔의; 인용자] 전체성(totalität)은 외부로부터 규정될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형성하고 주관적인 단위로서, 그리고 그 자체의 목적으로서 자신과 관계한다. … 변증법적 전체성만이 스스로를 형성하고 그 자체에 근거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기에, 주관성(subjektivitat)이라는 과정(prozeß)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의 전개로 규정된다. 따라서 전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는 자기 운동의 또 다른 필연적인 계기이다. … 그 운동 과정은 그 체계의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변증법적 자기 운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G. Stiehler, Der Idealismus von Kant bis Hegel, Berlin: Akademie-Verlag, 1970; Leipzig: Verlag Max-Stirner-Archiv, 2014, 20.)텍스트로 돌아가기
  52. G. Stiehler, Dialektik und Praxis, Berlin: Akademie-Verlag, 1968; Leipzig: Verlag Max-Stirner-Archiv, 2014, 61. (약칭, DuP)텍스트로 돌아가기
  53. DuP, 66-7.텍스트로 돌아가기
  54. DuP, 67.텍스트로 돌아가기
  55. “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 자기 운동은 본질적으로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과정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사회발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절대화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기생산을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과정이라고 해석하였다.” (DuP, 80.)텍스트로 돌아가기
  56. DuP, 117-8.텍스트로 돌아가기
  57. 이것은 필연적인데, 주관의 영역 속에 영원히 잠식되어 객관화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심리적 및 실천적 작용을 거쳐 객관화된다. 즉 주관적 형식과 무한히 관계하며 무한한 자기의식으로 되는, 그러한 의식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일정 단계에서 객관화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신성가족』에서 B. 바우어의 비판적 비판주의 일파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체'로부터 또다른 '형이상학적 괴물'인 '주체', '과정으로서 실체', '무한한 자기의식'에 다다랐으며, '완전'하고 '순수'한 비판주의의 최종 결과는 '사변적'인 '헤겔 학파' 형식에서의 '기독교 창조론의 복구'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K. Marx, F. Engels, 『신성가족』, 편집부 역, 서울: 이웃, 1990, 219.) … 바우어의 '자기의식'도 자기의식으로 '고양되어진 실체' 혹은 '실체로서의 자기의식'이다. 즉, 자기의식은 '하나의 인간 속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 변형되었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신학적' 풍자이다.(위의 책, 221.)”텍스트로 돌아가기
  58. V. I. Lenin, 『철학노트』, 홍영두 역, 서울: 논장, 1989, 133-4.텍스트로 돌아가기
  59. 슈틸러는 이를 변증법적 사고(Dialektisches Denken)라고 한다. 이에 관해 슈틸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변증법적 사고는 본질적인 맥락에서 구체적인 사고(konkretes Denken)이다. 현실 그 자체의 관계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옳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는 것은 내적 추동력(innerer Bewegkräfte)에 기초한, 체계의 변증법적 자기 운동(der dialektischen Selbstbewegung des Systems)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규정의 고립(isolierten Bestimmungen)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자기 운동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오히려 운동을 외적인 결합(äußere Verknüpfung)으로만 이해할 뿐, 체계 자체를 매개하는 것(Vermittlung eines Systems)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DuP, 144.)텍스트로 돌아가기
  60. 뮈슬리프첸코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개인은 자기의 자유를 우선 그 자신의 감정으로서, 또한 선택의 자유 가운데 있는 주관적 현상으로서 감지한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제 국면의 하나이다. 그러나 자유의 본성은 이러한 주관적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활동적인 한, 선택의 자유는 계속해서 더 높은 제 단계에서 결의의 자유로 옮겨지고, 이어서 행위의 자유, 즉 객관적 자유로 옮겨간다.”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1989, 165.)텍스트로 돌아가기
  61. “합법칙성은 두 ‘사물’의 감각적-즉각적 연결에서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구체적인 총체로서 내적, 필연적, 본질적 그리고 안정적 연결을 형성한다. 내적 본질로서 그것은 감각으로써 직접 인식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포섭적 사고로써 발견된다.” (G. Stiehler, “Objektive Gesetzmäßigkeit und Freiheit des Handeln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2 (10), 1974: 1284.)텍스트로 돌아가기
  62. DuP, 165-6.텍스트로 돌아가기
  63. DuP, 181.텍스트로 돌아가기
  64. E. Fischer, “Die Entwicklung der materialistischen Objekt-Subjekt-Dialektik in den frühen Arbeiten von Karl Marx 1842-1846”, Beiträge zur Marx-Engels-Forschung Heft 16, IML, 1984, 71.텍스트로 돌아가기
  65. “Objektive Gesetzmäßigkeit und Freiheit des Handeln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2 (10), 1974: 128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