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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주의의 한계
한동백 |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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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인류는 객체와 인식주관 사이의 구체적 관계 구명을 위해 노력해 왔고, 이는 인식론의 논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현대 제국주의 철학 내부에서는 필립 프랭크(Philipp Frank)와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을 주축으로 하는 신실증주의의 한 경향인 물리주의가 인식의 제 문제를 논하기 시작1하였다. 이 신실증주의 학파의 작업은 처음에는 모든 개별 과학적 진술을 감각 인상에 대한 진술로 축소하고 나중에는 개별 학문의 개념적 지반을 물리학적 ‘부호(符號)’나 ‘언어’로 축소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 경향에 기존의 현상론(Phänomenalismus)2이 결합하여 이론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경험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과 동일시하거나 질적 규정을 양적인 규정으로 축소하는, 그리고 구체적 사유의 복잡한 양식을 몇 가지 협소한 논리식으로 대체하는 등의 특수한 요소가 추가되었다.3 물리주의는 현재의 형태를 띠기까지 수많은 부르주아 철학가들의 손을 거쳤다. 그것은 현재까지 부르주아 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물리주의 철학에서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은 환원주의이다. 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은 인식론 영역에서 물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심신 수반 논증의 전개에서 물리계의 인과적 폐쇄성의 원리4와 인과적 배제 원리5가 모두 충족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속성 이원론”을 견지하는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은 인과적 배제 원리가 충분히 직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하는데, 이는 환원론자들이 배제 원리를 고수함에서 그것이 충분히 직관적이며, 그것을 그보다 더 직관적인 반대 논증으로써 무력화할 수 없다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김재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인과적 배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심리적 변칙성에 관한 포괄적인 학설들, 인과 관계의 “엄격한 법칙들”, 인과성에 대한 물리적/기계적 개념, 개별자 물리주의(token physicalism) 등의 숱한 철저한 형이상학(heavy-duty metaphysics)6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인과적 설명 그 자체와 나에게는 인과 관계에 대한 완벽하고 직관적이고 일상적인 이해로부터 나오는 문제이다.”7 환원주의적 경향으로서 인식론을 이와 같은 관점에 기초하여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지엽적인 부위를 제한다면, 허버트 파이글(Herbert Feigl)의 환원주의와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은 과거부터 이보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직관에 호소함으로써, 또는 환원론자들이 애용하는 형식주의적 논증과 동일한 수준의 ‘반대’ 논증을 반복함으로써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파훼’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이 애용하는 다수 실현 가능성 논변은 ‘원인’은 다르나, 추상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결과’를 산출하는 현상을 제시함으로써 동일한 ‘결과’의 ‘원인’이 다수일 수 있음을 다룬다: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은 결과이자 심리적 속성으로서의 인간과 외계인 각자의 “고통”을 추상적으로 동일화한 후 각자의 사례에 대응되는 서로 다른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환원론적 물리주의에 도전한 바 있다.8 이러한 방식으로써 환원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시도는 이후 등장한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등 다수의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인식의 틀에 관한 이러한 속류적 견해들은 1930-40년대 신실증주의자들이 취급하였던 ‘진리의 의미론적 개념’의 내재적 제한성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9 원인과 결과 범주에 관한 단순화와 추상화는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물리주의자들이 주로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의존하는 “상식”의 영역 내부에서 부유한다. 그러나 “상식”과 그에 기초한 직관에 호소함으로써 세워놓은 탑은 과학의 발전사에서 과학 논리의 본질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는 데서 무능을 숨길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현대 부르주아 철학가들은 직접적 표상의 본질적 관계의 자기-복귀 체계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직접적 표상을 개별 학문의 공리로 상정하고, 이러한 공리로부터 여러 추상적이고 일면적인 도식을 도출한다. 학문에 관한 현대 부르주아 철학가들의 논거는 학문의 분지에서 통용될 수 있는 개별 논리 체계를 구축함에서 가장 추상적인 원리의 내재적 비판으로부터 구체로 상승해 나가는 변증법적 사유 전개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직관은 그 본질에 있어 매개된 사유이고, 매개된 사유는 근거 관계를 지니므로, 단지 직관의 외양을 띠는 의식의 내용을 제출함으로써는 논증의 자기 완결적 체계가 성립될 수 없다. 특정한 논증을 지양하고자 한다면 대상이 되는 논증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수행해야 하며, 대상이 된 논증은 지양을 이룬 체계로서의 논증이 지니는 생동성의 내부 계기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발전한 것으로 간주된 논증에 대상으로 된 논증의 자기 발생, 그리고 자기 소멸로서의 한계의 전 측면이 보존되어 있지 않은 것이 되며, 그 논증은 당초에 대상으로 된 논증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즉, 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이 논하는 인과적 배제 원리의 한계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재적 모순을 드러내야 하며, 이로써 배제 원리의 체계를 필연적으로 보증해 주는 논리적 규정이 그 즉자적으로 긍정적인 체계 전체에 배반적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더 높은 체계로의 발전의 필연성, 자기 지양의 필연성이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 함유해 있음을 완결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이 지니는 매개적이며 변증법적인 특성을 탐구할 때 우리는 두 범주의 구체성이 물리주의의 두 견해에서 원인과 결과를 추상적인 것으로 다루는 방식으로써는 온전히 드러날 수 없음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지구 내부에서 각자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이 손에 쥔 물건을 놓았을 때 물건이 아래로 낙하한다는 점에서 ‘결과’는 추상적으로 동일하다. 허나 공기의 저항력과 물건을 놓았을 때 물건이 아래로 가해지는 미세한 힘에 따라 낙하의 속도는 다르며, 그것은 미세한 중력의 차이에 의해서도 달라질 수 있다. 어떠한 원인에 의한 결과는 단지 그 결과 내부에 있는 몇 가지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즉 특수한 결과는 실제로는 수다한 범주의 통일된 체계라는 점에서, 단지 하나의 범주를 추출하여 그것을 결과와 동일시함은 결과에 대한 구체성과 거리가 멀다. 특수한 결과는 다른 것에 대립해 있으면서 상이함을 지님으로써만 특수한 체계로 된다. 그러므로 단지 사태가 어떠한 낙하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다수의 ‘원인’은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결과’로 표지된 심적 속성 간 내용적 차이 역시 ‘원인’인 물리적 속성의 내용적 차이에 의해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살을 꼬집었을 때나 거대한 철물이 팔을 관통했을 때나 고통을 느끼는 것은 같지만, 이때 고찰된 각자 원인의 총체성이 가져온 결과의 총체성은 이 고통과 동일한 영역을 점하지 않는다. 필시 고통의 세기는 다를 것이며, 향후 정신적 트라우마를 일으킨 확률값과 그 증분 수준 역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비환원주의자들이 각자의 “결과”로 여기는 각자의 고통은 실제로 각자의 전체로서 전개된 결과의 부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다수 실현 가능한 속성은 인과적으로나 규범적으로나 이질적인 종류”10임을 지적한 김재권은 주장은 비환원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서 타당하다. 단, 이는 이미 그보다 과거의 환원론자인 데이비드 말렛 암스트롱(David Malet Armstrong)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지적된 바 있다.11
원인과 결과는 모두 서로 대립을 이루는 현실성의 복합체이며, 그러므로 총체성이다. 그러나 이 총체성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다른 범주의 상호작용과는 구별되는, 그러한 것들의 제 규정을 부착한 특수한 총체성이다. 원인과 결과를 특수한 총체성, 즉 전체의 분지로서의 상대적인 총체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두 범주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요구된다. 만약 그렇지 않았을 때 하나의 원인이 서로 다른, 더 나아가 서로 대립적인 사태의 교체 운동으로서 발현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김재권은 비환원주의자들이 제기한 ‘속성 동일론’에 대한 비판을 ‘국지적 환원(local reduction)’ 논변으로써 넘어서고자 하였다. ‘국지적 환원’에 따르면 하나의 결과인 특수한 M은 그 특수성을 규제하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이러저러한 인과적 잠재성을 가진 속성을 지닌 속성이고, 속성 P는 정확히 그 인과적 열거에 적합한 속성”12이다. 어떠한 “인과적/규범적 관계들(causal/nomic relations)”에 의해 “주어진 세계에서 지배적인 규범”13, 즉 수다한 “인과적 잠재성을 가진 속성을 지닌 속성”인 M은 속성 P로 환원된다. 하나의 결과에 대한 ‘다양한 원인’─또는 ‘다수의 실현자’─은 실제로는 하나의 결과인 H를 표지하는 하나의 원인인 속성 P의 총체적인 인과적 힘의 항─“실현 속성”이다. “실현 속성”의 일부만 바뀌어도 P의 동질성이 소멸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H 역시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
그러나 이때 유와 종의 관계에서 보편-특수-개별의 상호 연관적 성격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서로에 대해 동일성을 지닐 수 있는 H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보편적인 ‘개념화’에 전제되는 보편적인 심리적 속성으로서의 H가 존재할 수 없다는 문제로까지 소급된다. 예컨대 서로 다른 모든 P가 단지 각자 대응하는 서로 다른 모든 H를 야기하고, 특정한 H는 특정한 P로 완전히 환원 가능하다면, 그리하여 하나의 결과에 ‘다수의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하나의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대응하는 것이라면, 서로 동일한 P는 물론 H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개개 현상을 ‘실현 속성’이라 간주해보자: 우리는 어떠한 경로로써든 이 ‘실현 속성’ 내부의 항─그것이 가능성을 표지하든, 현실성을 표지하든─의 미세한 변동마저 제시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제시되는 즉시 서로 상이한 질적 규정 간 동일성은 필연적으로 파기된다.
그러므로 종국에 그는 단지 보편적인 것의 지위를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특징을 공유하는 속성을 그룹화함으로써 중요한 개념적 및 인식론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음”14에 제한함으로써, 심리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의 성립을 단지 심리적인 것의 고유한 기능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속성으로서 보편적인 것은 “이종적(heterogeneous)이고 분리적(disjunctive)이며, 우리가 법칙(laws)과 설명(explanations)을 공식화하는 데 유용한 종류와 속성에서 요구하는 인과적 동질성과 투사 가능성(projectibility)이 부족”15하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것으로서 발현하는 보편적인 것은 그 대응 체계로서의 실재적인 측면에서 실존한다고 확정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것이 특수한 유(類)로서의 규정을 내함함을 파악하였을 때, ‘국지적 환원’의 이러한 논리는 환원론적 물리주의의 기반을 상실케 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속(屬)의 고통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고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국지적 환원’에 따르면, 오로지 P에 의해 표지되는 H는 각자 개별적인 속의 고통 자체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별적인 속의 고통은 다시 그 내부 종의 고통으로 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속의 고통은 다시 보편적인 것이다. ‘국지적 환원’에 따른다면 결국 속의 고통은 실재적 측면, 즉 물리적인 계로서 대응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의 고통 역시 개별적인 고통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같다.
이는 명백히 ‘개념화’한 규정으로서 ‘물리적 속성’과 ‘심리적 속성’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어떠한 ‘물리적 속성’은 그것이 여러 분지로서 분화할 수 있는 유로서 기능하며, ‘심리적 속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심리적 속성’은 수많은 개별적인 표상─정신적인 ‘공’, ‘낙타’, ‘자동차’, ‘풍선’ 등─으로 분화할 수 있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공’은 또한 ‘축구공’, ‘배구공’ 등으로, 표상으로서의 ‘축구공’은 ‘금색 축구공’, ‘흰색 축구공’ 등으로 분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규정은 국소적인 종으로 될 수 없다. 누구든지 그가 가장 국소적인 종이라고 취급하는 규정 역시 그 규정이 지니는 상이성의 여하에 따라 그보다 개별적인 것으로 분지를 형성할 수 있다. 즉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의 낡은 금색 축구공’과 ‘해저에서 낡은 금색 축구공’은 각자 그것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존재 방식에 영향을 가하는 중력과 온도, 압력에 따른 내부 기체의 팽창의 정도가 다른데, 이는 모두 엄연히 실제 인과 함수를 구성하는 항이므로, 둘은 이질적이며, 따라서 낡은 금색 축구공은 국소적 종으로 될 수 없다. 즉 ‘국지적 환원’에 따르면 그것은 그 어떠한 실재적인 규정으로서 내세울 수 없는 것으로 된다. 즉 그의 논변은 그의 논변의 성립에서 전제되는 항을 소멸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이는 논리학적 탐구로써 헤겔이 도달하였던 결론 그대로, 보편적인 것의 변증법적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어떠한 보편적인 표상이나 용어, 주관 논리적 범주 등의 ‘심리적 속성’에 있어서 이러한 본성을 확인하는 것은 실재적 보편성의 운동에서 이 실재적 규정의 부정적 본성을 찾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이고, 또 명확한 것이다. 우리가 수다한 대상에 관해 논리적인 규정으로서 보편성을 부착한다는 것은 그 수다한 대상 사이에서 그 어떠한 상이성도 부착되지 않는 순수한 규정, 즉 순수하게 동일한 것을 추려낸 후 전유된 수다한 대상을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수한 동일자는 그러한 부착의 운동으로부터 어떠한 논리적인 설명을 요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부착의 대상으로서의 제 규정은 서로 구별되지만, 보편성은 그 단초적인 규정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동일한 것으로서의 자기 관계로 되어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도출된다. 예컨대 금속의 규정이 포괄하는 수많은 특수한 것들에 관해 논한다면, 그것의 어떠한 종류는 그 소량조차 체내에 유입된 때에 신체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만, 다른 종류인 경우에는 체내에 유입되더라도 신체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리고 보편으로서의 금속 규정은 이러한 차이를 자기 내에 함유하고 있지 않으면 보편이 아니다. 우리가 종전의 보편적인 규정에 더해 이러한 차이를 모두 포괄(“어떤 종류는 체내에 유입되더라도 신체에 문제를 야기하지 않지만, 어떤 종류는 체내에 유입되었을 때 신체에 문제를 야기하는 것”)하는 새로운 보편을 규정하더라도 포괄한 것으로서 보편이 다시 상이성과 접합하면서 같은 양상은 반복될 것이다. 이로써 보편이란 “다른 개념과 병립하는 규정적 내지는 특수적인 개념일 뿐”16이며 “오직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절대적 부정성으로서의 창조적 위력(schöpferische Macht als die absolute Negativität)”17으로서 파악된다.
그렇다면 특수성은 어떤가? 특수성이란 보편의 내부로부터 생성하는 상이성이 부착된 보편, 즉 규정된 보편인데, 이러한 부정적인 보편성 역시 총괄적인 규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역시 다시 보편성의 형식을 가진다. 그리고 특수가 하나의 유로서 보편이라면, 그 역시 보편의 이러한 필연적인 자기 분화 속에 놓일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자기 분화 속에서 개별성이 있게 되는데, 개별 역시 매 상이성이 부착된 제 규정의 총체성으로서의 보편에 지나지 않으므로 순수한 동일성의 자기 부정은 여기서 중단되지 않는다. 국소적인 종으로서의 개별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더 이상 자기-분지화하지 않는 규정이 오로지 물리적 속성에 대응하는 “타당한” 심리적 속성이라면, 그러한 물리적 속성에 대응되는 “타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러한 보편, 더 정확히는 추상적 보편으로 놓음으로써 환원론적 전제 내부에서 성립된 M-P 대응 체계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보편적인 것과 대응되는 실재적인 보편성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이미 특수성과 개별성의 계기로, 결과인 두 규정의 원인 함수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특수성이 규정된 바로 그 논리적 연관은 무화되고, 그 결과 특수성이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별성 역시 도출될 수 없다. 따라서 “개별성은 보편을 자기로부터 배척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보편은 개별성 자체의 계기를 이루기도 하므로, 보편은 여기서 그에 못지않게 본질적으로 개별성과 관계하게 된다.”18 이때 고찰되는 상호 연관, 즉 보편적인 것이 원인의 영역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은 환원론에 대한 비환원론자들의 통속적 견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도 원리적으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그리고 부정의 전개로서의 보편인 개별적인 것은 각자 포괄하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 계기의 범위가 다르므로 구체적인 대상은 오로지 사유 규정으로서 구체적인 것과 대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원론자들과 동일하게 신실증주의적 기초 하에 있는 비환원론자들은 계기의 포괄 범위가 각자 다른 총체성으로서의 규정들을 섣불리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려 한다.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동일한 것을 추려냄으로써 획득한 단초적인 것으로서 보편의 상은 대상이 지니는 운동성을 사상한 속에서 인식 상에 드러난 것이므로 실지의 보편적인 것으로 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상이한 것들 내부에 구체적인 방식으로 동일하게 존재하는 규정─구체적 동일자라고 할 수 없다. 객관적 실재의 보편성 내부에 절대적인 부정이 도사리고 있다면, 유물론적 세계관의 견지 아래에서만 개별 물질이라 여겨질 수 있는 물리적 속성─물리주의자들의 협소한 “의미론적” 틀의 내부에서 규정되어 있는 “물리적 속성”과 대비되는 것─이 과 심리적 속성 사이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단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리적 속성이 심리적 속성의 원인이라면 심리적 속성은, (구체적으로는)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실재적인 그 물리적 속성에 자기 내부로부터 생성하는 상이성이 부착된 보편인 특수한 것으로 성립하는 규정이다.
원인과 결과 범주로 표현되는 합법칙성의 규명은 일차적으로 두 범주에 관하여 일차적으로 파악된 내용의 그 내부에서 보편의 자기 부정적인 전개의 측면을 변증법적으로 추론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물리주의자들이 다루는 여러 범주가 다수의 현상에 관한 하나의 “규범적인 것”으로 되는 공통적인 것을 지시하는 이상, 그들이 활용하는 제 범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이에 관하여 예발트 일리옌코프(Evald Ilyenkov)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문 물리학자의 사고는 물리학 이론의 형태로 그 자체를 발현(‘그 자체로 나타남’)하며, 따라서 물리학자의 ‘사고의 형식과 법칙’에서 현상형태와 법칙(도식과 규칙)이 나타난다. 그것은 물리학에서 알려지는 것이며, 또 알 수 있는 것이다. … ‘논리적’ 형식과 규칙은 현상의 모든 영역에서 변하지 않는 일반적인(보편적인) 형식과 체계로만 식별되고 이해될 수 있다.”19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보편적인 것이 어떻게 관찰된 특수한 것과 연계될 수 있는가가 해명되어야 하는데, 이는 변증법과 논리학의 보조가 없이는 끝맺을 수 없고, 이 두 영역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실재하는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객관적 실재와 항상 연관을 이룬다. 따라서 “철저한 형이상학”은 전혀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물리주의자들은 제기된 난점을 그들 이론의 전 체계에 대해 ‘요청되는’ 내용을 외부로부터 끌어옴으로써 ‘해소’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는 불가피하게 이론의 영역에서 해명해야 할 대상들을 걷잡을 수 없이 증가시킨다. 니나 율리나(Nina Yulina)는 “물리주의가 ‘가정의 자유’와 가정된 요청들과 관련된 ‘절대적 비판’이라는 그 자신의 기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20을 지적하였다. 즉 “물리주의적 패러다임은 상당히 많은 선험주의와 사변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그리고 방법론적인 공리들 위에서 서술”21되고 있으며, “경험적인 방법론은 대상에 대한 단편적이며,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인 계획을 담고 있다.”22 이와 같이, “오랫동안 의식과 인격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과학적 유물론자들’[물리주의자들; 인용자]의 논쟁은 그의 특수하고 협소한 문제의식과 논리-의미론적 접근을 핵심으로 하는 분석철학의 틀 내에서 진행되었다.”23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그들이 억지로 쌓아 올린 체계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다.
II
물리주의의 여러 가지 종류 중 특히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물리주의는 모든 심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 지니는 일련의 물리적 체계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심리철학의 한 견해를 뜻한다. 예를 들어, 물리주의자들은 우리가 낙타(M)를 생각하면, 낙타라는 심리적 속성과 대응되는 물리적 속성으로서의 ‘낙타’를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물리적 체계(P)가 존재하며, M은 물질적 신경 체계인 P로 완전히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경과학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표상을 떠올리게 되면, 당연히 그것을 근거지워주는 임의의 신경학적 반응이 존재할 것이다. 유물론적 관점 아래에서 이 지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탐구 대상으로서 되는 지점은, 물리주의자들이 이를 넘어 심리적 속성의 전 양상이 물리적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이 ‘낙타’라는 심상이 실은 물리학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현존재라는 게 물리주의자의 입장이다.
물리주의에서 (그들 스스로 추상적으로 분류하고 정의한 바) 착상 가능한(conceivable) 것과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 그리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존재론적─분석 철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이라 일컬어지는─으로 가능한 것 간의 차이는 명징한 개념으로서 분류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한 사항를 역이용하는 논변 체계, 즉 세 가지의 구체적인 분류를 사상한 채 이루어지는 가지각색의 논변에 물리주의는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의식을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라고 간주한다. 우리 각각이 지닌 개별적인 주관적 체계와 독립해 있는 객관적 실재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반영된다. 이때 외부의 실재를 의식으로 전화하는 필연적 매개가 바로 뇌이다. 의식은 뇌의 고도화된 기능이다. 이 과정 내부에서 외부 대상을 반영한 현존 의식은, 현존 대상의 과정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존 대상이 지니고 있는 물리적 특질·성격·특성과는 대립적인 존재 양식을 지닌다. 예컨대 어떠한 반영의 결과로서 무언가를 행동하고 욕망하고, 기억해 내는 것의 계기로 되는 관념적인 것들과, 관념적인 것 자체의 계기인 즉자대자적인 대상 사이에는 그 구성 체계에서 차이가 있다.
각종 표상의 내부 구조를 규정하는 요인은 뇌의 구성 요소 외 신경 체계에 입력된 정보들─객관적인 것 총체의 구체성까지 포함한다. 이에 대해 알렉산데르 스피르킨(Alexander Spirkin)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정신현상의 생리학적 메커니즘(그리고 뇌 내부의 생리물리학적, 생리전기학적, 생화학적 과정)은 " … 사고와 뇌의 관계는 담즙과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폭트, 『생리학 서한』, SPB, 1963, 335쪽)라고 주장하는 속류 유물론자들(폭트, 뷔흐너, 몰레쇼트 등)의 경우처럼 정신적인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입장이 갖는 방법론적 오류는 두뇌활동의 산물과 반영대상 간의 분리가 세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에 있다. 해당 인간에 있어 이러한 감각, 사고, 감정, 욕망의 존재원인은 뇌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다. … 사고와 의식은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 현실이기보다는 주관적 현실이다. 뇌 안에는 반영대상의 물리적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뇌의 물질이 붉은 빛의 영향 아래서 붉게 변하지는 않는다. 대상에 대한 인식상은 물질적 대상 자체나 이 상을 야기시키면서 뇌 안에서 진행되는 생리적 과정에로 환원될 수 없다.”24
환원주의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비물리적 마음’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반대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비물리적 마음’은 담을 수 있는 ‘공간’은 물리적으로 규격화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비물리적인 마음’을 담는 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실재적 공간과 인접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동일한 류의 (타자의) ‘비물리적 마음’을 담는 공간과 접점을 찾아서 인과를 이룰 수도 없다. ‘비물리적 마음’을 담는 공간은 규격화되어 있지도 않으며, 물리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기에 그 표적 대상으로 되는 단일한 (인과적 결합의) 대상을 지닐 수 없다. 즉 ‘비물리적 마음’은 다른 마음, 또는 물리적 속성과 짝지어질 수 없다. 부르주아 철학가들은 이를 ‘짝짓기 문제’라고 부른다.
물리주의자들이 ‘비물리적 마음’의 존재 양식에 관해 말할 때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항상 물리적인 것들을 취급할 때 불가분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다름이 아니라 물리적이라서 성립할 수 있는 갖가지 논리적 요소를 ‘비물리적 마음’을 설명하는 데에 동원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그들이 ‘비물리적 마음’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내내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은연 중에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물리적인 것’ 또는 ‘물리적 속성’은 몇 가지 형식 논리적 틀로써 표현되는 문장 형태에 국한되어 있다. 반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사유 규정, 즉 물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심리적 속성’과 비견되는 대상을 논구함에서 어떠한 고정된 ‘공간’을 ‘창조’하지도, 전제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몇 가지 형식적 논제의 형태로 환원하지 않는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의식은 개인적 단위, 또는 일정한 내적 보편성을 취득한 사회집단이라는 단위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의식 연구는 사회적 의식에 관한 탐구이다. 그러므로 의식에서 보편적인 것이고 연속적인 것은 역사적인 사회 형태 그 자신이 필연적인 계기로 재생산하는 사회현상에 의해 정립되는 동시에 그것과 짝을 이루며 추동하는 규정력으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교환의 정립에서 의식은 판매와 구매의 대립에서 요구되는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그것은 교환이라는 사태의 주관적 매개자로 되며, 이 매개자는 교환을 강제하는 역사적 사태의 개시 전에 전제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환을 필연적으로 발생케 하는 사회적 제 규정의 운동 법칙에 의해 정립된 대상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의식 연구는 단지 형식적 논제의 단순한 조작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주어진 역사적인 사회경제적 운동 법칙이 특수한 의식을 발생시키고 또 그것을 발전시키는 작용력에 관한 탐구를 통해 의식의 규정된 형식과 내용을 탐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스피르킨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상(像)의 주관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주체(인간 또는 일정한 보편성에 수준에 있는 사회집단)에 속하지 객관적 세계에 속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상은 주체에 속하기에 반드시 주체의 생생한 경험, 관심, 성격, 사회적, 계급적 입장 등이 갖는 특이성을 반영한다.”25
의식의 규정된 구조, 형식, 내용, 그것의 운동 경향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작용력의 객관적 내용을 반영하므로, 초역사적인 논리적 범주의 일부로써 의식의 전 양상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의식의 구체성을 극도로 추상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의식─심리적 속성은 인식주관의 외부로 부유하며, 어떠한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의 활동 범위에 귀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예컨대 물리주의자들이나, 그 대척점에 선 부르주아 철학가들이 애용하는 논변이 최소한 논리적으로 구성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태를 묘사한 것인데, 이러한 사태의 객관성─논변이 학술적 활동에서 유효한 것으로 되기 위한 요건─은 논변의 구성 이후에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논변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실재적인 것으로 작용하고 있던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각 사회 형태에서 삶을 영위해왔던 인류의 사고 체계가 그 사회 형태의 경제적 조건의 내용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에서 파악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물질적 외피를 입고 객관적인 규정력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에 이르러서는, 의식은 비로소 사유주체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지니게 된다.
의식의 사회적 성격과 관련한 “이러한 변화는 확실히 순전히 생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26 왜냐하면, “두뇌에 저장되어 있거나 두뇌의 도움으로 발전된 생각의 내용과 인간 인식의 내용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세상에 대한 지적 전유의 형태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15 결국 사회경제적 실재에 관한 탐구가 병행되지 않는 의식 ‘연구’는 수많은 해명해야 할 것을 뒤로 남겨 놓은 채 의식을 구성하는 전체 범주에서 극히 제한적인 영역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외부의 물질적 존재와, 인식주관의 ‘비물리적인 마음’ 간 관계는 서로 (변증법적-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으며, 이 대립에 의해 비로소 사유 규정과 대상사물의 규정이 상호작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유 규정은 그 자체로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 형태─‘실체적 속성’으로 존재하면서 대상사물의 규정─객관적인 것으로서 또다른 ‘실체적 속성’을 이루는 것─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사태는 그 정반대이다: 사유 규정은 대상사물, 즉 객관적 실재의 특정한 발전 국면에 의해 생성되는 객관적 실재의 산출물이고, 이 산출물은 자기의 정립 과정에서 다시 외부의 질료적 요인으로서 객체라는 자신의 대립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 존재 양식을 확립해 나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특정한 질적 규정성은 항상 그것의 대립자와 일체를 이루면서 자기 규정을 확보한다. 물질과 의식의 상호 관계 역시 예외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과 마음 간의 상호작용은 그 사이에 외적인 실재 형태로서 드러나는 물질적 매개가 존재해야지만 있을 수 있다.
물리주의자들은 변증논리학에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물리주의에서 심리적 속성과 물리적 체계 간 대응은 불가피하게 두 규정 간 직간접적인 관계 없는 추상적인 대응을 의미하는 것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물리주의자에 의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하였을 때, 그 상상의 결과로서의 표상에 부가되는 모든 관념적 요소가 물리적 체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반드시 물리적 구조로 환원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이 생겨난다: 만약 우리가 터무니없는 것을 상상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러한 터무니없는 사념체가 직접 지시하는 모든 주관적인 요소 역시 물리적 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무언가로 될 수 있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표상은 물리주의자들에 의하면 앞서 언급한 바 그대로 α. 착상 가능한 것; β.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 γ.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다.
이 지점에서 물리주의자들은 흔히 학계에서 칭하는 ‘A-유형 물리주의자’와 ‘B-유형 물리주의자’로 나뉘어진다. ‘A-유형 물리주의자’는 ‘심신 동일론’에 대응하는 여러 논변에서 다루는 심상이 α부터 충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B-유형 물리주의자’는 나머지 두 가지는 충족 가능하나 γ는 충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녔다. 대다수 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은 ‘B-유형 물리주의자’에 속한다. 이 물리주의자들은 논변에서 다루는 심상이 α은 충족하지만, γ은 충족하지 못 한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실은, 물리주의자들이 자주 γ의 예로서 제시하는 표상들 역시 그것이 개념적인 인식임이 엄정하게 입증된 것이 아닌 한, 착상 가능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더 구체적으로, 물리주의자들이 ‘상식’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것”이라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도 물리적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물리주의자들에게는, 우리가 다양한 사이비 논변에서 ‘착상’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여러 표상과, 물리주의자들 스스로가 공인하는 γ로서의 표상을 구분짓는 체계적인 논리-철학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견해에 대해, 그것이 착상에 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또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을 넘어서 객관적인 것의 전개 양상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사유 간의 존재론적 양상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령 “익어가고 있는 고기”, “물 위에 떠 있는 배” 등의 표상이 α, β를 넘어 γ까지 충족함을,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라는 표상이 α는 충족하되, β와 γ은 충족하지 못 하는 표상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해당 표상이 구상하는 것, 그리고 그 표상의 내재적 존재 양식의 구체성이 그것과 연관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주·객관적 요인28들과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물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제에 일절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결과는 물리주의가 그러한 연관성의 원천적인 부정을 전제로 하는 부르주아 인식론의 한 경향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제 물리주의자들이 이론적 틀로 활용하는 M-P 수반 형태에 관한 잡다한 ‘모형’이 인간 인식과 관련해서 지니는 불철저성을 논해야만 하겠다.
가령 우리가 환기하는 ‘6’이라는 수학적 기호는 분명히 어떠한 표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로써 우리는 물리주의자들의 상투적 표현에 따라 심리적 속성으로서 ‘6’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물리적 속성으로서 ‘6’도 그에 수반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덩그러니 ‘6’으로서 존재할 어떠한 객관적 실재 자체를 상상해 본다고 하면 몇 가지 난점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환기하는 심리적 속성으로서의 ‘6’은 항상 그것과 연관된 것이라 간주되는 어떠한 정량화 가능한 타자존재의 실존을 자연스레 전제하고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단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직접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기된 개별 심리적 속성과, 그러한 심리적 개체의 환기에서 불가분하게 요구되는 이와 같은 연관된 타자는 단순히 물리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수반 논제로써 관찰될 수 없다. 수반 논제는 그저 어떠한 규정을 갖는 추상적 관념·표상이 있다면, 그 규정에 대응되는 반대의 방향에서 존재하는 객체가 있음을 말하여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 체계에서 이를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리고 이로부터 온갖 심상에 대응되는 규정이 그 심상이 ‘표현한 바 그대로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순간 온갖 비극이 출현한다. 그 비극은, 우리가 전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상상물의 객관적 존재마저 이제 이 수반 형태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레닌은 신칸트주의파 일군 중 하나인 생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를 논의한 바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일 감각이 사물의 모상이 아니라 사물과 “하등의 유사성”도 갖지 않는 기호 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면 헬름홀츠의 출발점으로 된 유물론적 전제가 전복되고 외적 대상의 존재가 의심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기호 또는 상징은 상상적 대상에 관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러한 기호나 상징의 실례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29 그리고 레닌은 헬름홀츠의 ‘상징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알브레히트 라우(Albrecht Rau)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옳은 것이라 간단히 평가하며 인용한다: “만일, 그가 물체의 성질은 물체 상호간의 관계도 표현하고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도 표현한다고 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면, 분명히 그는 그러한 상징 이론 같은 것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는 간단 명료하게 표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물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감각은 그 사물의 본질의 모상이다.”30
우리 인식의 대상적 구성 요소 중 하나인 물체의 성질이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도 표현한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정신으로써 점취하는 대상의 사유 형태가 단순히 그 대상이 인식주체와의 관계와 무관한 채 실존하는 양식만을 포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인식주체와 연관을 맺는 모든 관계까지 포함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인들이 포함된다면, 우리의 인식 속에 현상하는 사유 구조물이 추상에서 구체에 걸쳐 매우 복잡다단한 주관적 범주로 이루어져 있음을 합리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실제 우리 사유에서 나타나는 오만 가지 상상이 이러한 범주 체계의 필연적인 또는 우연적인 작용의 결과이며, 그것의 내용과 대응하는 실제 객관적 대상이 실존함을 입증하기 위해선 우리 인식에 관한 더 구체적인 분석과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리주의자들이 겪는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단순히 M-P 수반 형태에 관한 잡설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사유 규정의 체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사유 규정의 체계가 올바르게 규명되지 않는 이상, M-P 대응의 가능적 형태만을 표현할 뿐인 가지각색의 수반 논제는 항상 α, β, γ을 혼동케 하는 다양한 논변에 의해 그 성립 토대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주관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의도를 함축한 논변들─‘매리의 방’ 논변 등을 포괄하는 수많은 ‘논변’이 (그들이 이름붙인 바) ‘설명적 간극’과 관련하여 환원주의적 물리주의를 겨냥하고 있음은 아이러니하다. 소위 언급되는 네이글 식의 교량법칙적 환원이나, 김재권 식의 기능적·국지적 환원이라는 것도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III
현대 부르주아 철학에서 특히 객체와 인식주관의 관계를 물리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접점을 이루는 사고실험에 관련한 주제에서 흔히 거론되는 논변 중 하나는 ‘철학적 좀비’이다. 이 논변을 ‘철학적 좀비’라고 명명하여 대중화시킨 학자는 데이비드 존 차머스(David John Chalmers)라는 호주의 분석철학가이다. 전통적인 존재론과 인식론 영역과의 관련 아래에서, 이와 유사한 담론은 이미 고대 로마 스토아 학파가 정신의 구조에 관한 학으로서 다루었던 바 있다.
우리의 감각신경이 외부의 자극에 동하고, 그것이 특정한 전기적 신호를 가진 매체로 되어서 대뇌에까지 전달되었다고 가정하였을 때, 뇌를 이루는 신경세포는 이 전기적 신호 작용에 의해 특정한 심상(心像)을 형성할 것이다. 사유를 통해 떠오르는 것, 기억을 통해 연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심상이다. 과학의 현대적 발전 수준을 승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과정이 신경과학적으로 연속성을 이루는 작용이라고 간주할 것이이다. 의식 행위에서의 이 연속성은 미세한 신체 구조의 각이한 질로의 부단한 상호 이행─예를 들어, 전기적 매체가 활동하는 영역 상 감각 신경세포에서 연합 신경세포로의 이행, 그리고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이 각자 점하는 영역의 변화 등으로 발현되는─이라는 과정을 포함하는 연속성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심상이 동시에 이러한 연속성의 전체로 표지되는 통일물과, 이 연속성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른 규정의 체계를 자기 발생의 필수적인 계기로 가진다는 사실에 있다. 즉 심상 규정은 나열된 과정의 한 부분만으로는 전혀 형성될 수 없으며, 오로지 이 두 규정이 존재할 때에야 형성되며, 그것의 형성은 그 조건이 갖추어지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신경생리학적으로, 감각적 자극으로부터 표상의 형성은 하나의 연속을 이루는 과정이지만, 감각적 자극 자체와, 그 자극이 뇌에 이르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심상이나 의식의 발생이나 발전과 전혀 무관하다.
이러한 입장에 관한 승인은 곧 감각적 자극과 의식하는 활동 사이에 뚫릴 수 없는 벽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진리에 관한 승인이다. 의식이란 생물학적으로 발현되는 신경 활동─사회적인 것의 계기를 내재한 모든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신경 체계의 운동─을 자기의 필연적 전체로 삼는 결과이다. 반대로 신경학적으로, 신경 활동의 각각 분절된 양태에는 이와 같은 신경 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 각자가 자신의 ‘의식’을 따로 지니고 있다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철학적 좀비’의 논증에서 ‘철학적 좀비’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하는 논자들에 따르면, 물리주의를 전제할 경우, 의식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 인간─우리가 흔히 사유 주체라고 간주하는 바로 그것으로서─이 있는 동시에, 감각적 자극에서 의식의 형성까지의 경험을 모두 체험하나, 인간과 같은 의식을 지니지 않는 존재가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이 논자들의 주장이 현실화될 경우, 각 개인에게는 항상 (ⅰ) 그 개인이 행하는 사유 활동의 주체로서 통속적인 ‘나’와 (ⅱ) 사유 활동의 주체로는 되지 않으나, 그 개인의 신체 영역 내에서 사유의 계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또다른 '나'가 공존하는 셈이다. 여기서 (ⅱ)의 ‘나’를 ‘철학적 좀비’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을 대중화시킨 차머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의식의 논리적 수반(logical supervenience)을 조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은 좀비의 논리적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나(또는 다른 의식이 있는 존재)와 물리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의식적 경험이 전혀 존재할 수 없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이다. 총체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좀비 세계(a zombie world)─우리와 물리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의식적 경험이 전무한 세계─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모두가 좀비로 된다.”31
‘좀비’는 의식적 경험을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이 ‘좀비’에는 기능적인 차원에서의 ‘의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ⅰ)에서의 ‘나’는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없고, 또한 이 ‘좀비’가 적어도 기능적 수준에서 갖춘 ‘의식’에 대해서도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 과학이 지시하는 법칙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벌써 차머스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함은, 이러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타당한 학문적 지반의 부재 속에 있으므로, 결국 “논리적으로 가능”이라는 수사는 공허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는 사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관점이 내재하고 있는 한계에 속하는데, (차머스 역시 의도한 것처럼 추정되는) 바로 이러한 한계가 그 스스로를 파괴하는 논리를 야기함이 필연적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차머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좀비; 인용자]는 심지어 앞에서 설명한 기능적 의미에서의 ‘의식’을 지닐 것이다. 그는 잠에서 깰 수 있고, 내적인 상태의 내용을 보고할 수 있으며, 다양한 장소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이 기능 중 그 어느것도 진정한 의식적 경험을 발현하지 않을 뿐이다. 여기에서 현상적인 느낌은 없을 것이다. 즉 좀비로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32
정리하자면, ‘철학적 좀비’는 그 자체로는 의식의 기능적 차원을 지닐 수 있지만,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할 수 없으며, (ⅰ)에서의 ‘나’는 그것에 대해서 경험할 수 없다.
이러한 상은 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물리-심리 수반 논제─이미 위에서 차머스가 “의식의 논리적 수반”이라 칭한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물리-심리 수반 논제란 부르주아 철학의 한 ‘문제’ 영역이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서로에 대해 각이한 두 물리적 상황(속성)이 있다고 하였을 때 두 상황이 일치하면, 그것에 대응되는 심리적 상황(속성), 즉 감각질(qualia)도 반드시 일치한다는 견해에 기초하여 전개되는, 부르주아 인식론 상 문제이다. 예를 들어, 특수한 물리적 속성에 의해 수반되는 특수한 감각질의 내용은, 그것의 원인으로 되는 특수한 물리적 속성의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며, 따라서 감각질 그 자체로서 사유 형식은 역으로 특정하게 규정되어 있는 물리적 속성의 현존성을 보증한다. 물리주의자들을 포함한 영미 부르주아 인식론자들이 심리적 작용(내지 심리적 속성)을 ‘감각질’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그들이 물질과 관념의 양식을 이해하는 그 주관주의적 방식과 직접 연관된다: 특히 환원주의적 물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심리적 작용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객관적인 것들, 제반 질료와는 그 존재 양식에 있어 대립을 이루지 않는 정적인 것, 즉 물리적 속성과 동질의 규정성을 지닌 동일한 질료의 한 형태를 뜻한다. ‘실체 일원론적’으로, 심리적 작용 역시 물리적 실체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주의에서 심리적 작용과 속성은 감각질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감각질이 순수 형식적인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 결과 환원주의적 물리주의자들은 형식 논리 체계 하에서의 판단문이나 추론 구조물을 그들이 ‘물리적 속성’─압도적으로 신경생리학적인 틀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물리-화학적, 더 나아가 생물학적 작용에 한정되어 있는 형태─이라 부르는 대상과 섣불리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놓는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파이글은 “만약 뇌 생리학자가 천 년 뒤에도 활용 가능할 수 있는 지식과 장치를 갖추고 나의 뇌 과정을 조사하고 그것을 아주 자세하게 기술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발견을 신경생리학적 언어로 공식화할 수 있을 것”33이라고 하였다.
차머스는 (환원론적) 물리주의에 반대하여, 물리주의를 전제하는 한에 있어 “‘철학적 좀비’를 사유할 수 있다면 ‘철학적 좀비’는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물리주의자의 물리-심리 수반 논제가 타당하지 않다는 결과를 얻었다. ‘철학적 좀비’는 물리-심리 수반 논제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되지만, 한편으로는 ‘철학적 좀비’ 자체에는 물리-심리 수반 논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사고 실험을 환원론적 물리주의에 관한 타당한 비판으로 여겼다.
물론 물리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사고실험에 대해서 여러 반박을 가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물리-개념적으로 충분히 사유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차머스의 ‘철학적 좀비’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像)─물리적 체계 내지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관해 일말의 상상조차 할 수조차 없는 것임이 지적되었다. 다시 말해, ‘철학적 좀비’란 물론 사유될 수 있으며 어떠한 논증 과정으로서 취급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한 실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특정한 구조─물리적 세계에서 기능하는 바와 같은 것과 동일한 원리를 내포하는 것으로서─를 지닌 무언가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물리주의자는 ‘철학적 좀비’는 물리적으로 사유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유니콘’이나 ‘날아다니는 요정’ 같은 것은 위의 이유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물리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논변은 매우 허술하다: 예컨대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심상으로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총체성을 담아내지 못 한, 하나의 인상(印象)인 이상, 우리는 그 상에 대하여 어떠한 ‘존재론적으로 가능한 실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특정한 구조’를 완비한 ‘물리(물질)적 체계’로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단, 오로지 그러한 표상을 만들어낸 물질적 원인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라는 표상과 실제 물리적 실재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서로 다르다. 물리주의자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철학적 좀비’ 간의 인식론적 차이를 존재론적 차이와 일관되게 통일시켜 설명하지 못 하는 이상,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떤 것으로서의 표상을 근거로 하여 어떠한 것인 실재가 존재함을 당연 전제하는 이상,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철학적 좀비’ 각각에 다른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그들 논리에 과학성이 부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만약 물리주의자가 표상으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하여, 물리적 실재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순간, ‘철학적 좀비’의 실재성도 긍정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물리주의자들이, 수반이라는 논제는 적어도 모든 사유물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상, 적어도 물리주의자라면 이 수반 논제 원칙을 따라야 한다. 특정한 내용의 감각질이 그와 직접적인 동일성을 이루는 어떠한 물리적인 존재로 환원될 수 있다면, 바로 위 논리적 수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수반 논제를 긍정하는 순간, ‘철학적 좀비’라는 사유 형태에 대해서 그것이 전혀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철학적 좀비’에 대해서만 그러한 예외가 적용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동일론 논변 기준으로) 수반이라는 것이 일괄 적용된다는 전제를 포기하는 것이거나, 또는 이른바,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의 논거 형식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비환원론적 물리주의는 사실상 물리주의로부터의 이탈일 수밖에 없다.
상으로서의 ‘철학적 좀비’가 실재와 대응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실재에 요구에되는 자연 필연성이 현대의 과학적 발전 수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좀비 논변의 철학적 유효성은 현대 과학의 성과와 인식의 제 법칙 간 상호 연관성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그릇된 전제 위에서 출발한 환원적 물리주의가 지니는 한계를 비판한다는 점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며, 그 외의 영역에 대한 비판을 위한 논변으로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통해 대상의 구체성을 재현─즉, 객관적 실재와 사유 대상의 진정한 일치로서─해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인상을 사유라는 장(場)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 범주의 구체적인 운동과 과정을 사유라는 장에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그것은 객관적인 현실에서 객관적인 운동을 하며 하나의 (객관적인) 질적인 규정성을 지닌 무언가로 될 수 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단코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서도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 사유의 영역에 유니콘이라는 인상, 즉 특수하게 규정된 표상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곧바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표상을 외적 실재의 형태인 실천을 통하여 표현해낼 수는 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공상 소설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 소설이라는 객관적 사물의 내용 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객관세계에 존재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갖는 심상의 내용과 형식은 객관세계의 반영이지만, 심상을 통해 곧바로 연상되는 ‘내용’이 객관세계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예컨대 임의의 특수한 추론 형태가 객관세계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합당하게 상상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이와 관련하여 모리스 콘포스(Maurice Cornforth)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예를 들어 빨간 연필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러한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다음과 같은 명제로써 그것에 대한 결론을 표현한다. “이 연필은 빨갛다.” 이 명제는 주어와 술어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그 물건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그런 식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빨간 연필은 주어인 연필과 술어인 빨갛다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연필은 빨갛다”라고 말할 때, 그 명제는 그 연필의 객관적인 실재를 반영하며, “사유의 형태로 번역되었음”이 명백하다.”34
레닌이 직접적으로 제출한 바 있는 변증법-인식론-논리학 동일성 테제에 기초하여 인식과 반영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심상으로서 입력되는 모든 관념체는 부득이하게 가장 초보적이고 추상적인 범주와 그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범주 사이의 복잡한 얽힘이기 때문이다. 가령, 언뜻 보아도 비현실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심상의 표현은 그 본질 상 논리적 범주의 다양한 결합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논리적 범주의 결합 양식의 근거는 외적·객관적 실재에 있다. 그러므로 언뜻 보기에 환상적인 상, 즉 도저히 객관세계에서 작동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표상 묶음도 근원적으로는 객관적 사물의 복잡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 작용력은 자신의 원인이나 결과, 구체적인 존립 양식을 의식에 직접적으로나 곧바로 표시하지 않는다. 이때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 주관 영역에 직접적으로 현상하는 것은 대개 수많은 우연적이고 환상적인 상이다. 즉, “감각-지각 심리학의 영역에서 우리는 대상, 사물의 환상적 차원과 실제적 차원이 존재”35함을 안다. “사물에 대한 환상적 차원[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하에서 사물을 지각할 때(예를 들어 시각적으로 볼 때) 실제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차원이다.”15 그렇다면 이제 인식의 제 법칙과 논리적 범주 체계 내부 운동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 범주의 결합에서 근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러 법칙 관계에 관한 것, 심지어 그 결합에 의해 어떠한 표상이 현상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은 모두 의식의 변증법, 즉 주관적 변증법에 의해 규제된다. 특정 심상의 표현과 관련된 모든 인식의 변증법적 발전 법칙은 객관적 의미를 갖추지 못한 표현과 그보다 객관적인 것에 한층 다가간 모든 표현 사이의 구체적인 연관을 근거하고 있다.37
만약 우리가 인식 이론에서 물리주의를 전제하는 한, ‘철학적 좀비’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하는 일련의 논증 과정을 온전히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좀비’라는 표상은 단순히 물리적 체계 내부에서는 해명될 수 없는 의식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속성 동일론’에 기초한다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이와 같은 표상이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지 해명해야 하지만, 이는 인식의 법칙성 내부의 영역에 들어서야만 해소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물리주의로써는 추상화된 ‘물리적 속성’과 ‘심리적 속성’ 사이의 대응 체계가 지니는 형식적인 규칙만을 다룰 수 있으므로 이와 직접 관련하는 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다.38 반대로, 우리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써 그 문제에 접근한다면, ‘철학적 좀비’란 당연히 환상적인 것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시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유물론은 기계론─형이상학적인 유물론─이나 (유물론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제반 과학의 성과의 낱낱을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논증 규칙의 틀에 가두는 논리-실증적 경향의 환원주의의 체계가 아니라 변증법적 체계를 받아들여야만 그 과학적 지위를 확고히 세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끝>
2024년 8월 25일
- I. S. Narsky, Positivismus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Berlin: Dietz-Verlag, 1967, 92-3.
- 19세기 말 이후 E. 마흐(Mach)와 H. 바이힝거(Vaihinger)를 선구자로 한 신칸트주의 학파의 경향이었다. ‘사물 자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에 기입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경험적인 것으로 매개된 부수 현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논리실증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H. Horstmann, “Zur weltanschaulich-ideologischen Funktion des Positivismus und der positivistischen Denkweise in der Wissenschaft”,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8 (12), 1970: 1468.
- 원인을 갖는 모든 물리적 사건은 오직 또는 하나 이상의 물리적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원리이다. 환원론적 물리주의자들은 대체로 물리적 결과가 하나 이상의 물리적 원인이 아니라 오직 물리적 원인을 가져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어떠한 사건의 원인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원리이다. 김재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건 e가 t시점에서 c라는 충분 원인을 갖는다면, (인과적 중복결정의 진정한 경우가 아닌 한) c와 구별되는 어떠한 사건도 t시점에서 e의 원인이 될 수 없다.” (Jaegwon. Kim, 『물리주의』, 하종오 역, 사울: 아카넷, 2007, 33.)
- 물리주의자들의 용어로서 ‘형이상학’은 객관적 실재와 논리의 상호 연관 구조를 탐구하는 모든 철학 이론에 무분별하게 적용되는데, 이는 이 사조의 뿌리인 신칸트주의적 전통, 더 가깝게는 논리실증주의의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순수과학과 가장 추상적인 듯이 보이는 이론의 사제(司祭)들은 그저 분노에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들소들(관념론자 파울젠, 내재론자 렘케, 칸트주의자 아디케스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의 이러한 모든 모표에서 하나의 기본 동기가 역력히 들린다: 자연과학의 '형이상학' 반대, ‘독단론’ 반대, ‘자연과학의 가치 및 의의의 과장’ 반대, ‘자연과학적 유물론’ 반대, 그놈의 유물론자다, 쉿쉿! 그놈을 잡아라, 유물론자를 잡아라, 그놈은 솔직하게 유물론자라고 자칭하지 않고 세인을 속이고 있다─바로 이것이 특히 존경할 만한 교수 양반들을 광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하)』, 박정호 역, 서울: 돌베개, 1992, 125-6.)
- Jaegwon. Kim, Mind in a Physical World: An Essay on the Mind-Body Problem and Mental Causation,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1998, 66-7.
- H. Putnam, “Psychological predicates”, Art, mind, and religion, eds. W. H. Capitan & D. D. Merrill,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37-48.
- Positivismus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307-12.
- Mind in a Physical World, 100.
- D. M. Armstrong, 『어느 물질론자의 마음 이야기』,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07, 103-5.
- Mind in a Physical World, 98.
- Ibid., 99.
- Ibid., 110.
- Loc. cit.
- G. W. F. Hegel, Werke, Bd. 6, Berlin: Suhrkamp Verlag, 1986, 273.; 『대논리학』, 제3권, 임석진 역, 서울: 지학사, 1983, 66.
- Ibid., 279.; 위의 책, 74.
- Ibid., 301.; 위의 책, 106.
- E. V. Ilyenkov,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ed. E. V. Pavlov, Boston: Brill, 2018, 213.
- N. Yulina, 「물리주의 철학에서의 인간」, 『마르크스주의 인간론: 현대소비에트철학에서 인간의 문제』, 이종철 역, 서울: 이성과 현실, 1991, 113.
- 위의 책, 127.
- 위의 책, 128.
- 위의 책, 117.
- A. Spirkin, 의식, 『소비에트 철학』, 박성수 역, 서울: 이성과 현실사, 1988, 82.
- 위의 책, 83.
- K. Gößler & M. Thom, Die materielle Determiniertheit der Erkenntnis, Berlin: Deutscher Verlag der Wissenschaften, 1976, 15.
- Loc. cit.
- 여기서 주관적인 요소에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억까지 포함한다. 이에 관해 안드레이 브루실린스키(Andrey Brushlinsky)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신 발달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이미 형성된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동기와 능력을 그 바탕으로 하여 사고 과정을 수행한다. 그것들의 추가 형성은 가능한 모든 순간에 하나의 과정으로서 사고의 모든 현재 및 후속 단계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특히 인지적 동기는 사고 과정에서 추가 진행을 결정하는 과정으로서 명확히 나타한다.” (A. V. Brushlinsky, “The Activity of the Subject and Psychic Activity”, Activity: The Theory Methodology and Problems, Orlando, Helsingki, Moscow: Paul M. Deutsch Press, 1990, 71.)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박정호 역, 서울: 돌베개, 1992, 299.
- A. Rau, 『감각과 사유』, Gießen, 1896, 320.;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300.
- D. J. Chalmers,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95.
- Ibid., 96.
- H. Feigl, The “Mental” and the “Physical”: The Essay and the Postscrip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58, 83.
- M. Cornforth, 『인식론』, 이보임 역, 서울: 동녘, 1984, 28.
- S. L. Rubinshtein, “The Individual and the World (Excerpts from an Unpublished Manuscript)”,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8 (4), 1970: 378.
- Loc. cit.
- Intelligent Materialism: Essays on Hegel and Dialectics, 2018, 226-7.
- 나르스키에 의하면 이는 이미 1930년대에 활동했던 실증주의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로부터 계승되어 온 방식이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노이라트가 제안한 소위 물리주의의 형식적 버전에서는 기호를 경험적 대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 인식론적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 다음 논리 값은 문장의 형식적 특징으로만 간주된다. 이는 논리적 가치에 대한 철학적(인식론적) 해석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Positivismus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1967,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