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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표상과 개념의 관계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1장 (4) 총명한 유물론 2 여름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CE CF CG CH CI CJ CK CL CM CN CO CP CQ CR CS CT CU CV CW CX CY CZ DA DB DC DD DE DF DG DH DI DJ DK DL DM DN DO DP

표상과 개념의 관계에 대하여

 

인식의 감각적 단계·형태의 인식의 이성적 단계·형태에 대한 관계에 관한 변증법적 접근과 동떨어진 마르크스주의 전의 논리학은 그것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표상(notion)의 개념에 대한 관계의 문제에 있어 깔끔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개념은 수많은 단순 이념(표상)에서 일반적인 것에 대한 언어적 지칭이름/용어라고 정의(로크, 홉스)되었으며; 혹은 단순히 우리의 생각 속의 사물에 대한 어떤 표상으로서(크리스티안 볼프); 혹은 일반적 표상 내지는 직관의 수다한 대상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표상과 같은, 직관에 반대되는 것(칸트), 명확하고, 명료하며, 안정적이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의미의 표상으로서(지그바르트), 혹은 표상에 대한 표상으로서 규정(쇼펜하우어)되어 왔다. 또한, 오늘날에는, “용어의 단순한 의미론적 의미”로서의 개념의 정의가 광범위한 유행을 타고 있다. 신실증주의자들은 개념의 순수 형식적 규정들을 전개하면서개념을 “발화의 기능(the function of an utterance)”, “명제적 기능(propositional function)” 등으로 특징지으면서개념과 표상 간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문제는 현대 부르주아 철학과 논리학에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것으로 존재해 왔다. 헨리히 슈미트(Heinrich Schmidt)의 『철학사전』에서 표현된 관점은 매우 전형적이다. 여기서 개념은 “단어의 유의미한 내용”으로 정의되며, 더 엄격한 “논리적 의미”에서는 그것은 “순간적인 지각에서 해방되어, 그것들의 명칭에 따라 그와 유사한 다른 지각들로 바뀔 수 있는”1 그러한 단어의 유의미한 내용으로 정의된다. 커흐너 미하일리스(Kirchner Michaëlis)의 『철학 기초 개념 사전』은 개념과 표상의 동일시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개념은 단지 닫힌 일반적 지칭(a closed general motion)이 아니다. 개념은 그것들[지칭들]의 공통적인 것의 비교와 추상으로써 표상들로부터 생겨난다.”2

 

러시아의 논리학자 브베덴스키(Vvedensky)는 칸트(Kant)의 추종자로서, 개념과 표상의 차이가 “심리적 경험 방식”에 있음이 아닌, 표상에서는 사물이 “어떠한 특징이든지 상관없이” 고려되는 반면, 개념에서는 오직 “본질적인 특징”만이 고려된다는 점에 있다고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쪽에서 그는 “어떤 관점에서는 특정한 특징이 본질적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특징이 본질적일 수 있다”는 특징적인 주장으로 위의 구별을 폐기한다. 그러나 어떤 특징이 ‘본질적’이거나 ‘비본질적’인지의 문제는 논리학이 형식적 학문으로서 다루는 영역 밖, 즉 인식론, 윤리학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학문에서 해결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브베덴스키에 따르면, 논리학은 언어적으로 기록된 ‘일반적인’ 모든 실체(entity), 즉 그 의미적 측면에서 고려되는 모든 용어를 개념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하다.

 

이러한 주장들은비마르크스주의적이며 반변증법적 논리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궁극적으로, 다소 우회적인 경로를 거치더라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개념’이라는 용어는 언어적으로 표현된 모든일반’, 감각적으로 주어진 다양성으로부터 용어적으로 기록된 모든 추상, 그리고 직접적 직관의 대상들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모든 표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시 말해, 개념에 대한 모든 반변증법적 해석들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고전적 근원으로 귀결된다. 즉, 로크와 칸트의 정의로 되돌아가며, 때로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단어와 개념을 전혀 구분하지 않았던 중세 유명론의 정의에까지 이르게 된다.

 

로크와 칸트의 구상이 지닌 근본적인 약점은, 감각적·경험적 지식의 한 형태로서 표상과 합리적 지식의 한 형태로서 개념을 구별하려는 시도가 일종의 로빈슨 크루소식 인식론 모델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모델에서 인식주체는 사회적 연계의 사슬로부터 고립된, 그 밖의 모든 것과 대립한 개인적 존재로 설정된다. 바로 그렇기에, 의식과 객관적 실재의 관계는 여기서 매우 협소하게오직 의식 밖에 존재하고 의식의 존재와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개인적 의식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서해석된다.

 

그러나 개별적 의식과 의지 바깥에서, 그리고 그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 자연뿐만이 아니다. 인류와 사회의 물질적 및 정신적 문화라는 극도로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영역 역시 그러하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의식적 삶에 도달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정신적 환경’, 즉 객관적으로 구현된 정신적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후자는 개별적 의식과는 구별되는 특정한 대상으로 존재하며, 개인은 그것을 지극히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서 고려하여 내면화해야 한다. 사회적 의식의 체계이를 가능한 한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 사회의 정치적 조직 형태, 법, 도덕, 일상생활 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사유 영역에서의 행동 형태 및 규범, 개념의 언어적 표현을 위한 문법적·구문적 규칙, 미적 취향 등을 포함하는 체계는 처음부터 개인의 발달하는 의식과 의지를 구조화하며, 그에게 그것의 형상을 부여한다. 그 결과, 개인의 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감각 인상은 언제나 개인이 내면화한 사회적 의식의 형식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프리즘을 통해 외부 자극이 굴절된 산물이다. 이 “프리즘”은 사회적인 인간 발전의 산물이다. 자연과 홀로 마주한 개인은 그러한 프리즘을 갖지 못하며, 그것은 고립된 개인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식 인식론 모델은 바로 이러한 동화적 상황(fairytale situation) 속에서 의식적 표상과 개념이 생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의식적 표상을 생산하는 모든 행위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행위조차도그 사회적 본성이 처음부터 무시되며, 개인이 먼저 개별적인 감각 인상을 경험하고, 이후 그것들로부터 귀납적으로 어떤 일반적인 것을 추상화한 다음, 그것을 하나의 단어로 명명하며, 그다음에는 이 일반적인 것에 대해 ‘반성(reflection)’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가정된다. 즉, 개인은 자신의 정신적 작용과 그 산물곧, 언어 속에 기록된 ‘일반 이념’(즉, 말로 기록된 일반 표상)을특정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이러한 방식은 존 로크가 그의 저서 『인간 오성론』에서 개괄하고 체계화한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로크는 이러한 관점을 고전적으로 정립한 대표적 사상가이자 체계화한 이론가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문밖으로 내쫓은 개별 의식의 사회적 인간 본성은 창문을 통해 다시 들어온다. 즉, ‘반성(reflection)’, 곧 정신 활동의 산물과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작용들(삼단논법, 오직 개념에만 기초한 추론 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산물들이 개인의 제한된 경험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정한 결과를 포함하고 있음이 즉시 드러난다. 여기서 사회적 인간의 경험이 단순히 반복된 개인적 경험, 즉 개별적인 경험의 총합으로만 해석되는 한(즉, 그것이 인간 전체 문화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단편적인 경험들의 집합으로 간주되는 한), 문화의 길고 모순적인 발전 과정에서 성숙한 모든 형태의 의식은 일반적으로 경험을 통해 해명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것들에는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어떤 방식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이 경험을 규정하며, 그것이 진행되는 형태를 형성한다.

 

이 개념은 궁극적으로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의 통일(unity of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이론 속에서 구현되며, 이에 관련하여 칸트는 개념을 일반적 표상, 즉 잡다의 직관에 내재한 일반적 요소에 대한 표상으로 정의한다. 물론, 칸트의 개념 이론은 이러한 단순한 정의로 환원되지 않지만, 이는 그의 모든 철학적 체계의 기초를 이루며, 그의 사상 전체와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처음 보기에 이러한 정의는 로크가 개념을 일면적으로 경험론적으로 해석한 방식과 일치하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협소한 경험론은 필연적으로 그 반대 개념, 즉 경험을 초월하는 비경험적 기원에서 유래하는 이성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 즉 범주의 개념으로써 보완될 수밖에 없다. 이성의 범주는 인간 사유 문화가 수천 년에 걸쳐 발전시킨 가장 복잡한 산물로서, 단순히 개인적 직관에 주어진 잡다 속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요소에 대한 표상 즉, 일반적 표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보편적 개념들, 범주들(인과, 질, 속성, 양, 가능성, 필연성 등)은 특정한 다수의 대상이 아니라, 예외 없이 모든 관찰의 대상들에 적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범주들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장해야 하며, 이는 인간 경험 속에서 앞으로도 절대 모순적인 사례가 등장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해야 한다(예를 들어, 원인 없는 현상, 속성이 전혀 없는 사물, 또는 양적 측정이 불가능한 사물 등). 그러나 경험 귀납적 추상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보증을 포함할 수 없다. 귀납적 추상은 언제나 “모든 백조는 흰색이다”라는 명제가 겪은 것과 같은 불완전성과 반증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사실상 이러한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정의를 채택했는데, 이는 초월론적 통각의 선험적 형태로서, 전혀 '일반 표상'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바로 이 개념의 개념은 이원론적으로 분열된다. 여기에는 실제로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정의가 존재한다. 한편으로 개념은 단순히 일반적 표상과 동일시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개념과 표상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개념의 ‘순수’(‘초월론적’) 형식, 즉 이성의 범주는 완전히 선험적임이 드러나는 데 반해, 보통의 개념은 단순히 일반적 표상으로 환원된다. 이는 어떤 용어의 의미, 단어의 의미와 개념을 동일시하는 그 어떠한 논리학파도 피할 수 없는, 편협한 경험주의의 죄에 대한 응징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인식의 경험적 단계의 형식을 포함한 인식의 모든 형식과 범주들의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역사적인 성격을 충분히 고려함으로써 개념과 언어로 표현된 표상의 그 관계를 정의하는 어려움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공했다.

 

언어 덕에 개인은 세계를 그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의 눈으로써도 ‘본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표상들을 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사물의 감각적 상과는 다른 무엇으로 해석한다. 사회적 개인을 중심에 두는 인식론의 입장에서 표상 또한 사회적 실재이다. 표상의 내용은 무엇보다 언어로 표상되는 사회적 기억의 형식 속에 보존된 것을 포괄한다. 만약 어떤 개인이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관찰한 개인으로부터 사물의 표상을 얻었다면, 획득된 그것의 의식의 형식은 바로 그가 그 자기의 눈으로 그 사물을 관조했을 때 얻었을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이해된 관찰(즉, 말로 표현되었거나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내가 말로써 혹은 타인의 눈으로써 어떤 사물을 관조한다고 해도, 혹은 타인이 내 눈을 통해 그렇게 한다 해도, 나와 타인 모두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 우리는 표상들의 상호 교환을 수행한다. 표상은 정확히 그것, 즉 언어로 표현된 관찰이다.

 

그러므로 관조와 표상은 개인의 심리 상태라기보다 감각의 사회·역사적 본성, 지식의 경험적 형식을 표현하는 범주들로서 나타난다. 표상은 항상 나의 개인적 관조 속에서 사회적인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 즉 말을 통해 다른 개인의 소유로 만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직관하는 개인으로서 나의 소유로도 만들 수 있는 것만을 포함한다. 언어로서 감각적으로 관조된 사실들을 표현할 수 있음은 개인적으로 관조된 것을 사회적 의식으로서 표상의 차원으로 전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을 만드는 능력, 즉 관조와 표상의 논리적 처리를 통해 개념으로 만드는 능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첫째 것, 즉 지식의 감각적 단계에서 논리적 내면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각적 자료의 이론적 처리를 언급하면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료를 개인이 이 논리적 과정을 그의 눈으로 혹은 손으로 직접적으로 보는 것과는 대부분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는 사실적인 경험적 자료와 사회적으로 구현된 관조의 전체 총체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이론가에게 활용 가능한 논리적 활동의 자료, 즉 그의 감각적 자료는 그가 개인적으로 직접 관조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가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대상에 관해 안 것으로 된다. 그리고 그는 오직 말을 통해서만, 오직 사회적 표상 속에 이미 기록된 수많은 사실 덕분에 타인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고와 감각에 대한 유명론적 이해의 관점에서 수립될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인식 과정 이해의 접근방식을 결정한다: 관조와 표상은 마르크스에게서 인식의 첫 번째 감각적 단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로크와 엘베시우스의 추종자들에게 특징적인 인식의 감각적 단계에 대한 해석과는 뚜렷이 다르다. 두 사람(로크와 엘베시우스)은 인식의 주체에 관한 자신들의 추상적인 인류학적 구상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마르크스가 표상(Vorstellung)이라고 부른 인식 형태를 반성에서의 이성적, 논리적 단계로 간주한다.

 

개념, 그리고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 표상 간의 차이는 원래 변증론자 헤겔에 의해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며, 그는 이것을 논리학의 틀 안에서 수행했다(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를 수행한 적 없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논리학에서의 출발점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발전 과정 중에 있는 전체로서 인류였기 때문이다.

 

헤겔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만약 인식 과정이 심리학적 입장에서 고려된다면, 즉 고립된 개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형태로 고려된다면, “우리는 감각과 직관에서 시작하며 지성이 그것의 잡다로부터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인 무언가를 추출한다는 이야기에 머무를 수 있다”3고 지적했다.

 

이러한 발전의 국면을 헤겔은 관조에서 표상으로의 이행이라고 하는데, 즉 [그것은] 특정한 안정적인 의식 형태말이나 용어로 표현된 이름으로서 추상적 일반 이미지이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고는 이러한 의식 형태를 그 목표와 결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의 특정한 활동을 위한 전제, 재료로 간주하지 않는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낡은 논리학은 개념의 심리학적 전제와 개념 그 자체를 계속 혼동하며, 어떤 추상적 일반 표상도 그것이 용어, 단어, 언어로 표현되기만 했다면 개념으로 간주한다.

 

전통 논리학에서는 단어로 기록된 어떤 추상적 일반 표상도 이미 개념이며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 형태이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것은 단지 실제적 개념의 전제조건일 뿐이며, 즉 이는 사물의 실제적 (변증법적) 본성을 표현하는 의식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근대에 이르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개념보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개념은 었는데, 왜냐하면 개념은 대개 추상적 규정성과 착상 내지는 오성적 사유의 일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며, 당연히 그러한 개념으로는 진리의 총체성이나 그 자체로서의 구체적인 미를 의식 속으로 인식적으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4

더 나아가 헤겔은 개념이 이 논리학에서 극단적으로 일면적이거나 편향적인 방식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하는데, 즉 그것은 개념과 일반적 표상 모두에 동등하게 내재하는 측면에서만 고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개념은 본질적으로 단순한 일반적 표상과 동일시되며, 개념을 대상의 구체적 본질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모든 특징은 낡은 논리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 특히 사람, 집, 동물 등과 같은 규정된 개념들은 결코 개념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한 정의이자 추상적 표상에 불과하다개념으로부터 오직 일반성의 요소만 차용하고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개념으로부터 추상 그 자체가 된다.”5

이러한 구별이 논리학과 인식론에서의 형이상학적 접근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개념이 대상의 감각적인 구체적 이미지와 비교할 때 언제나 추상적인 것이라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헤겔은 동시에 단순한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 일반 속성, 특징 또는 일련의 현상들 전체계열에 내재한 관계로 개념을 환원하는 관점의 천박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환원은 관조와 표상보다 더욱 심오하며, 정확하고, 완전한 대상의 본성을 반영할 수 있는 개념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해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구체적인 사태에서 개념에 가져온 것이 단지 하나의 징표나 기호로만 작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실로 단순히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정의가 될 것이다.”6

살아있는 직관의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양적인 차이로 축소된다. 개념은 현상의 감각적 속성 중 하나를 표현하거나 엄밀히 말하자면 지시하는 반면에 감각적 이미지는 그것들의 전체계열을 포함한다. 그 결과, 개념은 살아있는 직관의 이미지보다 더 빈약한 어떤 것으로, 이 이미지의 추상적인 일면적 표현으로서 여겨진다.

 

관조 이미지로부터 개념으로의 이행은 단순히 감각적으로 주어진 구체성의 파괴로, 감각적으로 지각된 수많은 속성들을 그것 중 하나를 위해 제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추상적인 것은 [이것에 관해 헤겔은 말한다] 구체적인 것보다 덜 가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전자로부터 그러한 종류의 수많은 재료가 사상(捨象)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추상 과정이란 우리의 주관적 필요를 위해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혹은 다른 특성이 추출되는 것이며 그러한 풍부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무능력만이 그것을 빈약한 추상으로 만족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7

그 결과, 구체적 관조로부터 사고의 추상으로의 이행은 주어진 직접적 관찰 속에서 주어진 현실로부터 이탈로만 나타나며, 단순히 사고의 ‘무능력’, 허약성으로만 나타난다. 놀랍지 않게도 칸트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레닌은 헤겔의 이 구절에 대해 매우 상세한 노트를 작성하면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본질적으로 헤겔은 칸트와 반대되는 점에서 완전히 옳다.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사고는그것이 올바를 경우 [NB]: (그리고 칸트도 모든 철학자들처럼 올바른 사고에 대해 말한다)진리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진리와 가까워진다.”8

다시 말해, 개념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구체성에 비해 추상적일 수 있으나, 관조에 대한 [개념의] 그 힘과 장점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감각적으로 관조된 구체성에서 그것의 추상적 표현으로의 상승은 단지 더 유의미한 과정관조가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실현되는 형식일 뿐이다. 헤겔에 대해 논평하면서, 레닌은 과학적 (즉, 올바르고 진지하며, 터무니없는 게 아닌) 추상이 생생한 관조나 표상보다 더 깊고 정확할 뿐만 아니라 또한 더 완전하게 자연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변증법적 논리학의 언어에서 “더 완전하게”란 “더 구체적으로”를 의미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헤겔은 레닌이 인용한 구절에서 글을 잇는다] 추상화하는 사고는 감각적 재료를 단순히 제쳐두는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해 그 실재성이 약화된다고 말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 그것[감각적 재료]의 초월이며, 본질로의 (단순한 현상으로서의) 그것의 환원이며, 본질은 오직 표상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9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것은 없어지지칸트가 경험주의자들과 함께 믿었던 바처럼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참된 의미와 내용은 사고에 의해 드러난다. 바로 그 때문에 헤겔은 감각적으로 관조된 구체성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을 현상에서 본질로, 결과에서 그것의 선행 조건으로의 운동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은 관조된 현상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본질은 서로 다른 현상들에서 추상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즉 고립되어 취해진 각각의 현상들에서 관찰되는 동일한 요소들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대상의 본질은 거의 항상 구별되고 대립적인 요소들의 통일 속에, 그것들의 연결과 상호규정 속에 포함된다. 이것이 왜 헤겔이 다음 같이 말하는지에 대한 까닭이다: “개념 자체의 본성에 관해 말하자면, 개념은 현실의 구별과 대립하는 추상적 통일성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그것은 이미 서로 다른 제 규정성의 통일이며, 따라서 구체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사람”, “파랑” 등과 같은 표상들은 개념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그것은 추상적·일반적 표상일 뿐이다. 이들은 오직 그들이 통일성 안에서 구별된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날 때만 개념이 되며, 이때 그 자체 안에서 규정된 이러한 통일은 개념을 형성한다.”10

 

만약 인간의 사고가 단순히 대상의 감각적·구체적 이미지를 추상적 일면적 정의로 환원한다면, 이는 단지 일반적 표상을 생성할 뿐이지 개념을 생성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관조에서 표상으로의 이행으로 해석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과는 다른 것, 즉 개념으로의 이행으로 간주된다면, 이러한 이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지게 된다.

 

레닌은 여러 차례에 걸쳐, 표상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은 논리학에서 우선 피상적 지식에서 더 깊고, 완전하며, 더 정확한 지식으로의 이행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사상을 강조했다.

 

헤겔은 말한다: “사고와 개념 없이 존재하는 대상은 이미지나 이름이다: 그것은 사고와 개념의 규정성 안에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이다.” 레닌은 이곳 여백에 주석을 달았다:

“그것은 정확하다! 이미지사고, 양자의 발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11

레닌은 개념과 사고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이 이 지점과 관련해서는 명백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개념 속, 여기에 (감각적 표상의 사고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 헤겔의 관념론이 존재한다.”12

 

헤겔의 주요 사상은 오성적 추상화가 의식을 인식의 경험적 단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 즉 그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고라기보다는 감각적 경험적·의식의 형태이며, 개념이 아니라 표상이라는 것이다. 둘 다 추상물이라는 이유로 표상을 개념과 동일시함은 논리학에서의 형이상학, 형이상학적 사고의 논리학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이다.

 

그러므로 경험 자료를 개념으로 논리적으로 처리하는 과정관조와 표상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을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논리학의 첫 번째 과제는 개념 및 언어적으로 표현된 표상을 엄밀하게 객관적으로 경계 짓는 것이다.

 

이 경계 [설정]은 결코 이론적 세세함이 아니다. 이것은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교육학에서도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닌다. 추상적 일반 표상의 형성은 그 자체로 충분하게 복잡하고 모순적인 과정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비록 논리학이 아니더라도 특수한 연구 주제를 형성한다.

 

과학으로서 논리학의 과제는 주위 세계의 현상들에 대한 발전하는 인식의 실제적 필요성에서 생겨난다. 사고하는 인간이 논리학을 탐구하며 하는 질문은 결코 일반적으로 추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로부터 일반을 어떻게 추상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코 논리학자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모국어 구사 능력을, 그리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유사성과 차이에 주의를 집중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논리학을 참고하여 논리학에 의해서만 대답 될 수 있는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한 인식적 과제를 포함한다: 주어진 관찰과 표상 속에서 사실들의 객관적 본질을 표현할 추상을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연구 대상이 되는 사물의 실제적 본성을 표현하는 일반화를, 경험적으로 자명한 사실의 잡다를 처리함으로써 산출해 내는 그 방식그것은 그 해결이 추상적 일반 표상과 구별되는 개념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동일한, 실제적인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것의 반영으로 규정되는 개념에 있어, 논리학 속의 유물론은 [인식의] 주체에게 본질적인 것(그의 욕망, 열망, 목표 등), 대상의 본성주관적 열망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대한 객관적 규정에 있어 본질적인 것을 가장 엄격하게 구분하도록 요구한다.

 

신칸트주의 논리학은 구분을 의식적으로 흐리면서 주관적으로 본질적인 것과 대상 자체에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발견될 수도 없고 주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든다. 관점은 실용주의와 도구주의의 개념들 속에서 가장 일관되게 발견되었다. 모든 개념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들의 혼돈에 대한 주관적 욕망, 열망 그리고 충동들의 투사로 해석된다. 분명히, 여기에서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간의 경계뿐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표상과 개념 간의, 경험적인 것과 이성적인 논리적 인식 간의 경계도 완전히 파괴된다.

 

하나의 예시로서, 현대 철학에서 추상과 구체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특징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서독 이론가 루돌프 쇼틀랜더(Rudolf Schottlaender)의 한 논문이 있는데, 이 논문은 마치 거울처럼 변증법적 범주 영역에서 부르주아 사유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13

 

그의 접근법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영역에 속하는 범주로서 추상과 구체의 대립이다. 쇼틀랜더에게 추상은 인식주체의 행동 방식일 뿐이다. 구체는 감각적으로 인지된 살아있는 관조의 이미지 전체와 동일시되는 데 반해, 의식 외부의 대상은 그것의 감각적 경험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주체는 구체로부터 특정한 일반적 추상적 특징들을 ‘뽑아내고’, ‘추출하고’, ‘가져가며’, 이는 순전히 [주체의] 주관적인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된 듯 보이며, [그는]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하나의 개념을 구성한다. 추상된 특징들이 본질적인지 혹은 비본질적인지는 쇼틀랜더에 따르면 전적으로 인식주관의 목표들, 즉 사물에 대한 그의 ‘실천적’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쇼틀랜더는 ‘스콜라적 본질(scholastic quintessence)’, ‘실재적 본질(real essence)’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는 대상 자체의 견지에서 본질적인 것을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추상과 구체는 형이상학적으로 다른 두 세계‘인식주관’의 세계와 ‘인식 대상’의 세계사이에 배분된다. 이러한 근거에서 쇼틀랜더는 논리학적 문제로서 추상의 구체에 대한 관계의 문제를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논리학을 다루기 때문에, 그가 추상에 대립시키는 것은 구체가 아니라 추상을 행하는 주체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제쳐두는 모든 것,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 이미지의 풍부함 중 사용되지 않는 잔여물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감산대상(Subtraliendum)”이다. 더욱이 그는 현대의미론 전통의 정신에 따라 추상적인 것을 “추출대상(Extrahendum)”즉, 개념 속으로 추출되어 통합된 것으로 다시 명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감각적 이미지의 무한한 충만에 상응하는 완전한 추상들의 종합이 불가능한 만큼, 어떤 추상(“Extrahendum”)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도, 인식주관이 그 추출을 실행한 목적이나 가치를 지시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직관적으로 파악된 사물의 풍부함에서 “추출대상”을 뺀 나머지를 “감산대상”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다른 목표들, 가치들, 혹은 열망들에 비추어 ‘본질적인 것’이 정확히 거기에 있을 경우를 대비한 비축물로서 인식주체에 의해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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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표상에 대한 관계의 문제에 접근할 때, 표상이 객관적 실재를 인간의 정신에 반영하는 한 형태이자 단계로서 또한 하나의 추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 추상화는 그 형성이 수많은 요인, 특히 직접적인 실천적 관심, 인간의 요구와 그 필요를 표상적으로 반영하는 목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개념대상의 객관적 본질을 표현하는 이론적 추상과 실천 사이의 연결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으며, 더 복잡하다. 개념 속에서 대상은 특정한 협소한 실용적 목적이나 요구가 아니라 세계 발전의 전체 역사에 걸친 인류적 실천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오직 이러한 관점만이 장기적으로 대상 자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고려하는 것과 일치한다. 오직 이러한 입장에서만 사물의 객관적인 본질 규정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을 분별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개념의 추상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개념 규정[개념 정의]은 결코 해당하는 용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찾아냄을 뜻하지 않는다.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의 입장에서 이 둘은 동일하다. 따라서 유일하게 올바른 정의는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용어의 의미에 대해 관례와 합의를 정립할 수 있지만; 개념의 내용은 매우 다른 것이다. 개념의 내용이 항상 ‘용어의 의미’로 나타나더라도 결코 이 둘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유물론적 변증법(변증법적 논리학)에서 해석되는 개념의 구체성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신실증주의자들은 개념 규정의 문제를 형식적 규칙에 따라 구축된 용어 체계 내에서 용어의 의미를 확립하는 것으로 축소한다. 그리하여 의식, 즉 정의로부터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개념의 대상과 개념의 정의 사이의 대응 관계의 문제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소위 추상적 대상이라는 전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도달한다. 이 명칭은 개인의 직접적 감각 경험에 주어진 개별적 사물에 이름으로 적용할 수 없는 그러한 용어의 의미를 가리킨다. 주목할 점은 개인의 의식 속의 개별적 대상의 감각적 이미지가 여기에서 다시 구체적 대상으로 명명되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극단적 경험론의 오랜 전통과 완전히 일치한다.

 

실제 과학 전체가 감각 경험에서 즉각적 상응물(相應物)이 없는 정의들로즉, 그 의미로서 어떤 ‘추상적 대상’을 가지는구성된 채로 있는 한, 추상과 구체의 관계 문제는 의식 속의 일반적 용어와 개별적 이미지의 관계 문제로 변형된다. 논리학의 문제로서 이것은 무시당하며 부분적으로는 심리학 문제, 부분적으로는 언어학적 문제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는 어떤 일반적 개념의 객관적 진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제의 형성 자체가 답변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때문이다. 신실증주의 ‘논리학’은 한 개념과 다른 개념 사이(실제로는 한 용어와 다른 용어)의 연관과 전이를 연구하는 데 집중하면서, 개념으로부터 의식 바깥(즉 정의와 감각 경험 바깥)의 대상에로의 전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용어가 그와는 다른 용어로 전달되는 데서 이 논리학은, 개인의 직접적 경험 속에 주어진 사물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구체성’으로 향하는 다리, 한 용어에서 또 다른 용어가 아니라 대상으로 향하는 다리를 그 어느 지점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용어에서 대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그리고 되돌아오는, 양자 사이의 확고하고 명확한 연결을 수립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다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여주었듯, 대상을 포함하는 실천적 활동, 즉 사물과 사람의 객관적 존재이다. 순수하게 이론적인 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르크스는 1845년, 논리학 분야에서 최신 실증주의적 발견들이 이루어지기 거의 100년 전에 이렇게 썼다: “철학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의 하나는 사고의 세계에서 실제적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의 직접적 현실성이다. 철학자들이 사고에 독립적 존재를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언어도 독립적 영역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철학적 언어의 비밀이며, 그 안에서는 단어 형태의 사고가 그 자체의 내용을 지닌다.”14 이러한 작업의 결과, “사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내려오는 문제는 언어에서 삶으로 내려오는 문제로 이행”15하는데, 이 경향을 따르는 철학자들은 이를 언어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특별한 마법의 단어를 발명하는 과제로 여기며, 그 단어는 단어로 남아 있으면서도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과제가 단지 언어와 사고가 인간과 사물의 객관적 존재, 실생활의 표현 형식이라기보다는 내재적인 규칙과 법칙에 따라 조직된 별개의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탁월하게 증명했다.

“우리는 사고에서 현실로의 이행의, 그리므로 언어에서 생활로의 이행의 전체 문제가 오직 철학적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 물론 이러한 거대한 문제는 … 물론 결국에는 이 떠돌이 기사 중 하나가 하나의 말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낱말은 낱말로서, 문제가 되는 이행을 형성하며, 그 낱말은 낱말로서, 단순한 낱말이기를 멈추며, 그리고 그 낱말은 낱말로서, 신비로운 초언어적 방식으로 언어 내부로부터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대상을 가리킨다.”16

오늘날에도 수많은 부르주아 철학가는 ‘추상적 대상’의 거대한 체계 전체가 개인 인식의 개별적 표상이라는, 즉 다른 모든 것과 분리되어, ‘구체적’ 대상으로 명명되는 ‘단 하나의 개체’라는 불안정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기초에 근거한다는 이 개념에 뿌리박은 이 가짜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이 모든 것은 절대자를 찾는 오래된 탐구에 불과하다. 헤겔이 개념 속에서 절대자를 찾았던 반면, 신실증주의자들은 절대적 규칙에 따라 결합된 단어와 기호의 영역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에서 관념론을 단호히 반대하며, 사고와 언어를 “오직 실제적 삶의 발현”17으로 보았으며, 개념 규정들은 현실의 언어적으로 기록된 규정들로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실은 단순히 개별적 사물들의 바다, 즉 분리된 개인들이 추상의 그물로 추상적 일반 규정들을 잡아내는 개별적 사물들의 바다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조직된 구체성, 즉 자연과 인간 사이 관계의 명확한 체계로 해석되었다. 언어와 사고는 바로 인간과 사물의 이러한 체계에 대한 직접적 표현(발현형태)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관념론 철학(신실증주의를 포함하여)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언어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추상적 대상들’로서 나타나는 그 모든 ‘추상들’의 객관적 의미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관념론 철학에 따르면 의식·사고·언어 속에서만 존재할 그 모든 신비로운 추상들에 유물론적 해명을 제공하였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그 객관적·사실적 상응물들을 찾아내었다. 그에 따라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 문제는 더 이상 개별적이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물에 대한 언어적으로 표현된 추상의 관계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 문제는 구체적 현실 자체의 내적 구분의 문제, 이 현실의 개별 요소 관계의 문제로 출현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견한 문제의 해결책은 겉보기에 매우 단순하다: 개념 규정들은 실제 구체성의 서로 다른 요소들, 즉 인간과 인간, 사물과 인간의 관계 체계의 합법칙적 조직에 관한 규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체적 현실에의 과학적 연구는 그 구조와 조직을 표현하는 개념에 대한 ‘추상적’ 정의들을 산출해야만 한다. 이 해결책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지만, 관념론 철학이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들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다.

 

이 관점에서 추상은 순수하게 표상적인 것, 오직 의식 속에, 단어-기호의 의미 형태로 인간의 두뇌 속에만 존재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마르크스에 의해 의식 바깥의 현실에도 매우 타당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추상적 인간 노동”18, 혹은 추상적-고립적-개인19, “추상적 부의 물질적 측면으로서 금”20 등.

 

이 모든 표현은 추상을 순수한 표상적, 정신적, 지적인 것의 동의어로, 구체를 개별적, 감각적으로 지각된 것의 동의어로 보는 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부조리하고 이해 불가능하게 보일 것이다. 이는 그들의 논리학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구체적 현실이 사고 앞에 제시하는 변증법적 과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논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은 전적으로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예를 들어, ‘추상’이 ‘구체’의 한 측면이나 속성의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니라, 반대로 감각적 구체가 추상적 보편의 단순한 표현 형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전도의 본질은 마르크스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여기에 가치 형태를 이해하는 데서 그 전반적인 난점이 놓여 있다.

“이 전도에서는 감각적 구체가 오직 추상적 일반의 형태로만 나타나며, 반대로 추상적 일반이 구체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가치표현을 특징짓는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이유이다. 만약 내가 로마법과 독일법이 모두 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명하다. 만약 내가 반대로 법이라는 이 추상이 로마법과 독일법이라는 이 구체적인 법들 속에서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한다면, 그 관계를 신비로운 것이 된다.”21

그리고 이는 단순히 언어로 표현되는 신비화한 형식도, 헤겔식 언술도 아니며, 상호연결된 현실 요소들의 실제적 ‘전도’에의 완전히 정확한 언어적 표현이다. 이는 서로에 대해 고립된 사회적 생산의 연결이 가진 보편적 상호의존성이라는 실제적 사실, 사람들의 의식이나 그들의 의지와는 완전히 독립된 사실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이 사실은 필연적으로 ‘추상’이 ‘구체’에 대해 갖는 신비로운 힘, 즉 각각의 (개별적) 대상들과 사람들의 운동을 이끄는 보편적 법칙이 각각의 개별적 사람과 대상에 대해 가지는 힘으로서 나타난다.

 

헤겔의 표현 방식을 연상시키는 이 ‘신비로운’ 어법은 사태 내에 존재하는 ‘사물’과 ‘관계’의 실제적 변증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표현의 신비로운 성격이 정확히 ‘추상’과 ‘구체’를 학교의 논리가 부여한 의미대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만약 ‘구체’가 사물 규정에, ‘추상’이 그것들 사이의 관계 규정에 적용되고, 그것이 사고와 규정의 특수하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취급된다면, 화폐와 같은 사실은 즉시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객관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환상과는 별개로, “화폐는 독특한 성질들을 가진 물리적 사물이지만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나타낸다.”15(강조는 저자). 이러한 이유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하였듯이 “방금까지 사물이라고 장황하게 묘사한 현상이 사회적 관계로 다시 나타날 때 놀라며, 잠시 후 사회적 관계로 규정된 것이 다시금 사물로서 그들을 조롱한다”15는 상태가 이어진다.

 

이러한 ‘신비함’은 자본주의적 생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님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개별적 ‘사물’(즉 ‘구체적 개념’의 대상)과 사물이 바로 그 특수한 사물이 되는 ‘관계’ (즉 ‘추상적 개념’의 대상) 사이 관계의 변증법은 보편적 관계이다. 이는 세계에 보편적 연관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사실사물은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계의 체계 속에서 존재한다의 표현이다. 이러한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체계는마르크스가 구체성이라고 부르는항상 결정적이며, 그러므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개별적 대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관계’가 사물로 여겨지고, ‘사물’이 ‘관계’로 여겨지는 이 특별한 상황은 정확히 이러한 변증법으로 인해 발생한다.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체계, 그것들 관계의 특정한 법칙적 체계(즉 ‘구체’)는 항상 개별적인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로서 관찰 속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직 어떤 단편적이고 특수한 표현, 즉 추상적으로만 나타난다. 이론적 분석의 어려운 점은, 사물 간의 ‘관계’를 추상적으로, 특정한 독립적 대상으로서 취급해서는 안 되며, 역으로 ‘사물’을 다른 사물과의 관계 체계 밖에 존재하는 고립적 대상으로 봐서도 안 되고, 오히려 각각의 사물이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특정한 구체적 체계의 요소나 계기로, 특정한 ‘관계’의 체계의 구체적인 개별적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구체’를 ‘추상’에 종속된 것, 심지어는 산물로 제시하는 어법은이는 보편, 특수 그리고 개별의 문제에 관한 헤겔적 신비화의 근원이다실상 각 개별적 현상(사물, 사건 등)이 항상 그 규정성 속에서 잉태되고 존재하다가 나중에는 특정한 구체적 전체 속에서, 합법칙적 경로(a law-governed way)로 발전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체계 속에서 소멸한다는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사실을 표현한다. 개별적 사물에 관한 법칙의 ‘힘’ 내지는 규정적 작용(그리고 법칙은 자연과 사회에서 보편의 실재성이다), 전체가 부분과의 관계에서 지니는 결정적 중요성은 바로 ‘구체’에 대해 ‘추상’이 갖는 힘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결과가 신비화된 표현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의 실재를 고립된 개별 사물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전체 체계로서, 발전하며 발전으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법칙에 따라 분할된 전체로서 제시함으로써 이 신비화를 걷어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신비화의 그 어떤 흔적도 사라진다.

 

구체(추상이 아닌)그 발전 속에서, 그 법칙적 분할 속에서 전체로서 파악된 실재로서는 항상 추상에 대해 (이 추상이 상대적으로 고립된 실재의 개별적 계기로 해석되든, 언어로 기록된 정신적 반영물로 해석되든) 일차적인 것이다. 동시에 모든 구체성은 오직 그 자신의 개별적 구성요소(사물, 관계)를 통한 그들의 특수한 결합, 종합, 통일로서만 존재한다.

 

바로 그렇기에, 구체적인 것은 그 구조 속에서 실제로 구별·추출된 각각의 계기를 정확히 표지하는 다양한 규정들의 통일로서만, 사유 속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것의 일관된 정신적 재현(再現)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즉 사유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서 특수한 규정들의 논리적 결합(종합)을 통해 현실의 총체적인 이론적 상으로 실현된다.

 

별개의(특수한) 규정들을 특정하여 도출하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 짓는 순서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 순서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들이 보여준 바와 같이, 현실의 구체적 영역의 발생, 형성, 그리고 점증하는 복잡성의 역사적 과정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경우 주어진 현실은 사고 속에서 재생산된다. 이론적 구성이 언제나 시작해야 하는 전체에 대한 근본적이고, 선차적이며, 보편적인 추상적 규정들은 여기서는 예외 없이,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특수자’를 단순히 형식적으로 추상하는 데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본론』의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범주인 가치는 상품, 화폐, 자본, 이윤, 그리고 지대에 똑같이 내재하는 일반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추상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자’, 즉 상품에 대한 가장 정밀한 이론적 규정들로써 규정되며, 다른 모든 특수자는 탐구에서 엄격하게 제외된다.

 

이 기본적인 경제적 구체성인 상품의 분석은 경제적 관계들의 다른 ‘특수한’ 형태에도 적용되는 보편적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추상적인) 규정들을 도출한다. 그러나 핵심은 상품이 어떤 특수자인 동시에 다른 범주들 속에 함유된 여타 특수자의 보편적 존재 조건이라는 점이다. 즉 그것은 그 전체적 특수성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있는, 즉 미발전되고, 초보적이며, 그 안에 내재한 모순들을 통해 다른 것으로, 보다 복잡하고 더욱 발전된 형태로 전개되는 “세포” 형태에 있는 특수한 실체이다.

 

개념 내부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은 사람들 간의 어떤 실제적 관계가 사물에 의해 매개되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다른 관계로 발전하는 객관적 변증법을 매우 정확하게 반영한다. 추상에서 구체로 이행하는 전체적인 사유의 운동은 사실에서 사실로의 절대적으로 엄격한 사유 운동이면서 동시에 어떤 한 사실의 고려에서 다른 사실의 고려로의 이행이지 ‘개념에서 개념으로의’ 운동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이 특수한 특징은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이 『자본론』의 논리에 대한 칸트식 해석을 반박하는 논증들에서 끊임없이 강조하였던 바이다. 이 특수한 특징은 이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순전히 논리적인 과정을 다루는 것만이 아닌, 역사적 과정과 사고 속에서의 설명적 반영, 그리고 그 내적 연관의 논리적 추구도 다룬다"24는 것이다.

 

개념 속에서 추상과 구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정확히 이러한 접근의 기초 위에서 해결된다. 모든 개념은 그것이 구체적 현실의 전체성이 아니라 특수한 계기 중 하나만을 명기한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각 개념은 또한 구체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동종 사실들의 형식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방식으로 그것이 속하는 사실의 구체적 규정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특징[구체적 규정성]은 그것이 현실이라는 총체 안에서 이 역할만을 수행하고 다른 역할은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 특수한 기능과 ‘의미’를 지니며 다른 것은 지니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모든 개념은 (만약 그것이 정말로 성숙한 개념이며 언어적으로 고정된 일반적 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구체적 추상이다. 비록 낡은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모순적으로 들릴지라도 말이다. 개념은 항상 그 속에 표현된 사물(즉, 감각적으로,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이지만, 현실의 무규정적 영역에 속한 추상적 사물이 아니라, 사물은 상호작용하는 사물들의 구체적 체계의 한 요소로서 그 사물이 특수하게 지닌 속성에 관해 고려된 사물이다. 다른 것과 상호작용하는 구체적 체계 밖에서 고려된 사물 역시 추상이다그것은 관계나 속성이 그것들의 물질적 담지자인 사물들과 연결되지 않은 채 특정한 대상으로 취급되는 경우보다 나을 바 없다.

 

추상과 구체를 논리적 (보편적) 범주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범주 개념은 레닌의 수많은 철학 저작과 단편들, 그리고 또한 그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을 고민하며 착수한, 논리학으로의 그의 탐구 여정에서 더욱 정교화되었다. 레닌은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견해를 흔들림 없이 옹호했으며, 이론적 추상의 객관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자의적으로 선택된 형식적 유사성, 이질적이며 실지 무관한 현상들의 ‘유사한 특징’을 단순히 언어 형태로 규정하는 공허한 형식적 추상을 날카롭게 거부했다. 레닌에게 ‘추상’은 언제나 항상 생활과 유리된 공허한 수사, 형식적인 단어 만들기,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사실과도 대응하지 않는 공허하고 거짓된 규정의 동의어였다. 반대로, 레닌은 항상 현실을 표현하는 진리와 개념의 구체적 성격, 말과 행위의 불가분한 연결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연결만이 추상과 구체, 보편과 특수 그리고 개별 간의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종합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레닌의 이러한 관점은 논리학에 있어 막대한 중요성을 지니는데, 그것에는 후속의 섬세한 연구, 일반화, 체계화가 요구된다. 이러한 견해가 ‘추상’(개별적 사물들과 사실들의 개념)과 ‘구체’(‘사물로부터 고립된 채’ 고려되는 관계·속성들을 ‘특수한 대상’으로 지칭하는 개념)의 영구적으로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구분법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레닌은 두 유형의 개념을 동일하게 추상적이라고 평가했으며,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실들과 사물들이 그것들의 총체적 응집성과 그들의 ‘관계들’ 속에서의 구체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어떤 고찰도 엄격하게 검증된 사실들과 사물들에 대한 가장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접근에 기반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사회적 관계는 절대로 ‘특수한 대상’으로서 사물과 사실들로부터 분리되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레닌은 모든 경우에 구체적 사고를 주장했는데, 구체성은 그에게, 마르크스에게서도 똑같이 그랬던 것처럼, 개념의 객관적 의미와 진리의 동의어인 데 반해, 추상성은 공허함의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근거를 제공한다: 변증법적 논리와 형식적 논리 모두에서 개념을 영구적으로 두 범주로, 그러니까 추상과 구체로 나누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분리는 철학사에서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최고와는 거리가 멀며,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와 레닌이 그것에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헤겔, 스피노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개념(사고의 형식)과 용어(언어적 기호)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이해한 모든 사상가가 반대한 바로 그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개인에 의해 감각적으로 지각된 개별적 사물들의 명칭 및 그것들의 ‘일반적’ 속성들과 관계들의 명칭으로 용어를 나누는 데에는 특정한 근거가 있지만, 개념에 관하여서는 이러한 분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논리적 구분이 아니다. 논리학에 있어 그것은 어떠한 근거도 없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5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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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 Schmidt, Philosophtsches Wörterbuch, 9. Auflage, Kröner, Leipzig, 1934, 87.텍스트로 돌아가기
  2. Kirchner’s Wörterbuch der philosophischen Grundbegriffe, 6. Auflage, Dritte Neubearbeitung von Dr. Carl Michaëlis, Verlag von Felix Mciner, Leipzig, 1911, 130.텍스트로 돌아가기
  3.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2. Teil, Sämtliche Werke, Bd. 5, F. Frommann, Stuttgart, 1928, 21.텍스트로 돌아가기
  4.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Sämtliche Werke, Bd. 12, 1927, 138.텍스트로 돌아가기
  5. 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Sämtliche Werke, Bd. 6, 1927, 99.텍스트로 돌아가기
  6.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Sämtliche Werke, Bd. 3, 21.텍스트로 돌아가기
  7.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Book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61, 170.에서 재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8. Ibid., 171.텍스트로 돌아가기
  9. Ibid., 170-1.텍스트로 돌아가기
  10.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Sämtliche Werke, Bd. 12, 156.텍스트로 돌아가기
  11.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Book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225.텍스트로 돌아가기
  12. Ibid., 228.텍스트로 돌아가기
  13. R. Schottlaender, Recht und Unrecht der Abstraktion, Zeitschrift für philosophische Forschung, Bd. V II, Heft 2, Meisenheim/Wien, 1953, 220.텍스트로 돌아가기
  14. K. Marx & F. Engels, The German Ideology, Collected Works, Vol. 5,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6, 446.텍스트로 돌아가기
  15.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16. Ibid., 449.텍스트로 돌아가기
  17. Ibid., 447.텍스트로 돌아가기
  18. K. Marx, Capital, Vol. I, 46.텍스트로 돌아가기
  19. K. Marx, Theses on Feuerbach, K. Marx &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5, 5.를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20. K.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24.텍스트로 돌아가기
  21. K. Marx, Das Kapital, Bd. 1, Meissner, Hamburg, 1867, 771.텍스트로 돌아가기
  22.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23.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24. K. Marx, Capital, Vol. III,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4, 895.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