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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운동 약사: 1945-87년」 『총명한 유물론』 제2집 여름호
김근성 | 회원
✮ 1.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한 투쟁
✮ 2.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 3. 반미투쟁에서 민족통일운동의 복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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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한 투쟁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후 한반도에는 민중·민주적인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파고(波高)가 일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에 꾸려지고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지만, 제국주의 외세는 38선을 그어 한반도를 갈라놨다.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은 ‘유일 합법정부’를 미군정으로 규정하며 인민위원회는 물론이고 해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마저 부정했다. 해방 후 노동자·농민 투쟁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던 미제국주의는 끝내 UN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만 선거를 실시하여 신식민지 정부(‘단독정부’)를 놓는 안을 통과시키고, 꼭두각시 이승만을 이 ‘단독정부’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 이후 1천여 년 동안 하나였던 국가가 분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해방 3년 만에 직면한 분단에 전민족적 항쟁이 발생했다. 우선 정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는 남북협상이 추진됐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38선을 넘어 이북의 김일성을 만났다.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밝혔다.1 1948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는 〈남조선 단독선거 배격운동〉을 통해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고 외국군대를 즉각 철퇴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연석회의 이후에는 뾰족한 성과를 거두진 못하였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극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38선 이남 각지에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대중적인 투쟁이 이뤄졌다. 선거 일정이 알려지자 1948년 2월 7일 남조선로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대규모 파업이 발발했다. 이를 2·7 구국투쟁이라고 하는데 통계에 따르면 2월 20일까지 파업 30건, 맹휴 25건,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총검거 인원 8,479명을 각각 기록하였다.2 전남의 경우에는 3월 말까지 전체 2부 20개 군 중에서 6개 군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투쟁의 현장이었다.3 한편 2·7 구국투쟁을 기점으로 5·10 총선거까지 약 3개월간 〈단선단정 반대투쟁〉이 벌어졌다. 선거 직전인 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지도 아래 총파업이 벌어졌다. 또한 5월 7일부터 11일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경찰지서 습격 23건, 철도 단절 24건, 전화선 절단 23건, 투표함 파괴 9건, 투표소 피습 36건, 체포 인원 393명을 기록하였다.4
분단을 반대하는 가장 큰 투쟁은 제주도에서 터졌다(제주 4·3 항쟁). 1948년 4월 3일 제주도 곳곳에서는 봉화가 솟았다. 이를 신호로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봉기를 주도한 무장대는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무기를 들었다고 밝혔다.5 항쟁의 원인에는 미군정과 친일경찰의 탄압, 해방 이후의 사회모순 등도 분명히 실재했지만, 무장대가 내건 핵심적인 이유는 단독선거 거부였다. 이는 전국적으로 달아오르던 단선단정 반대투쟁의 흐름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무장대와 함께 제주도민들은 단독선거에 대한 대대적인 보이콧을 진행했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한라산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한 마을은 “이번 선거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독립하기는커녕 두 동강이 난다”라는 말을 듣곤 투표소도 설치하지 않은 채 선거일을 넘겼다고 한다.6 이런 식으로 선거 자체가 이뤄지지 못하는 마을들이 속출했다. 또한 투표소·선거사무소·경찰지서·선거관리인 등에 대한 공격, 시위 및 집회, 파업·태업, 동맹휴학 등도 계속 이뤄졌다. 그 결과 제주도의 65개 지역에서 투표 기능이 정지되었고, 북제주군 조천면의 경우에는 모든 투표소가 파괴된 데다 선거 관계 공무원의 절반이 사표를 냈다.7 결국 도내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됐다. 제주도는 38선 이남에서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막아낸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는 단독선거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파쇼정권에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다.
단독선거(5·10 총선거)를 통해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여수·순천 항쟁).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거부한 것이다. 군인들은 〈제주도출병거부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에서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했다”라고 밝혔다.8 또한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각 철수도 요구하였다. 지역 주민과 합세한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장악해 거점으로 삼았으며, 인근의 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등은 물론이고 지리산까지 진출하였다. 항쟁은 10월 27일까지 이어졌다.
산간 지역에서는 빨치산이 결성9되어 유격전을 벌였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불법화되자 탄압을 피해 입산하여 미국과 이승만 파쇼정권에 맞서 무기를 든 것이 빨치산의 시초이다. 1949년 6월 남북의 민전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자 빨치산은 재편성되어 ‘인민유격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빨치산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오대산, 한라산 등 각종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끊임없이 군경과 충돌하였다. 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으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그 세력이 상당히 약해졌다. 그럼에도 빨치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합류 등을 통해 병력과 무기를 충원하였으며, 이현상(李鉉相)의 지도를 받아 계속 싸웠다. 항쟁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鄭順德)이 생포되는 1962년까지 이어진다.
전국 곳곳에서 터진 투쟁에 대해 미군정과 이승만 파쇼정권은 잔인한 진압으로 대응했다. 여수·순천 항쟁 당시 이승만은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할 것을 주문했다.10 그렇게 민족민주 제 세력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불법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군대를 보내 초토화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제주도의 경우 최소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 가운데 최소한 80% 이상이 토벌군에 의해 사살되었다.”11 전남 지역에서는 여수·순천 항쟁 진압 당시 사망자의 95%가 군경에 의해 발생했다.12 빨치산에 대한 공격 과정에서도 문경 석달마을 학살 사건(1949),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1951),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1951) 등 빨치산이 활동하는 지역의 거주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있었다.
대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정점에 달했다. 이승만 파쇼정권은 조선에 밀려 후퇴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원과 그 가족, 형무소 재소자, 파쇼정권에 반대하는 제 세력 등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과 학살을 감행했다. 전국피학살자유족회의 통계에 따르면 38선 이남에서만 113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13 이런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학살은 민족통일운동을 거의 완전히 중단시켰다. 흥사단(興士團)계 민족주의자 최능진(崔能鎭)이 전쟁 중단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활동을 벌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승만 파쇼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2.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1948년에 수립된 이승만 파쇼 권력은 여수·순천 항쟁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 성격은 더욱 짙어졌고 악랄해졌다. 일제강점기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으며, 유숙계(留宿屆)와 국민보도연맹 설립 등을 비롯하여 주민들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무조건 무찔러야 할 존재였으며, 통일 역시 ‘북진통일론’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슬푸른 독재 속에서도 다른 목소리는 있었다. 바로 〈평화통일론〉이었다.
평화통일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정치인 조봉암이다. 그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했고, 북진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허구성을 폭로하였다. 평화통일론은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선거에서 30%에 달하는 지지를 얻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이승만 파쇼정권은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됐으며, 대법원은 재심마저 ‘이유 없음’으로 기각했다.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 파쇼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이자 정적 제거였으며, 동시에 평화통일론에 대한 광포한 공격이자 탄압이었다.
한편 소모임 형태의 움직임도 있었다. 1955년 봄, 대학생들이 비밀조직인 〈구국동지청년회〉를 결성하여 〈평화적인 조국 통일〉을 조직의 원칙 중 하나로 삼았다.14 1956년 5월 말에는 광주 지역에서 민족통일운동가 기세문(奇世文)을 중심으로 〈조국평화통일동지회〉가 구성됐다. 이 조직은 「조국평화통일선언문」, 「민족의 살길」 등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여러 문건을 작성해 유포했다.15 두 조직은 모두 육군 특무대에 의해 핵심 인물들이 잡혀가며 와해되었다.
개인 차원의 움직임도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낙중(金洛中)은 평소 평화통일의 신념을 지녔던 와중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이라는 독자적인 통일 방안을 소개하였다. 처음에는 이승만 파쇼정권에 제출하였으나 국가보안법 위반도 모자라 정신병원에까지 갇히는 곤욕을 치렀고, 1955년 6월에는 임진강을 건너 월북해 조선에도 자신의 통일안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김낙중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자 이승만 파쇼정권은 그를 간첩죄로 기소하였다.16
이승만의 파쇼 독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이 터져 이승만은 하야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이승만 파쇼정권의 붕괴는 파쇼 체제의 약화를 의미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통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의 실책, 민중의 곤궁, 조선의 평화통일 제안 등의 배경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은 지속적으로 남북협상을 중심으로 한 통일안을 제시하였고, 이는 민중과 지식인에게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고민케 하였다.17 그렇게 고양된 민족통일운동은 4·19 이후 출범한 혁신계 정당들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대 민족통일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하는 〈중립화통일론〉, 다른 하나는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전개하자는 〈남북협상론〉이었다. 그렇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혁신계 정당마다 차이가 있었다. 1961년에 들어서야 조금씩 통합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61년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됐다. 민자통은 “진보적 정당, 사회단체를 민족통일운동의 기치 아래에 통합한 연합체적 조직”18이었다. 10만에 달하는 회원을 보유했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영호남 지역에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민자통은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현 정세의 투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바라봤으며, 〈중립화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협상을 기반으로 한 민족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이런 노선 아래에서 민자통과 소속 정당, 단체들은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투쟁이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악법 반대투쟁〉이다.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은 미국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조항들을 규탄하는 반미 경향을 띠고 있었다. 2대악법 반대투쟁은 민족통일운동을 막기 위하여 장면 정권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여기에 맞서 싸운 운동이었다.
학생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통일운동에 나섰다. 서울대학교의 〈민족통일연맹〉의 경우 4·19 1주년에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었다. 또한 조선의 전기와 한국의 쌀을 서로 교환하자는 “이남 전기 이북 쌀”이라는 구호도 나왔다. 1961년 5월 3일에는 남북학생회담이 제시되었으며, 5월 5일에는 장소를 판문점으로 정하였다.19 장면 정권은 난색을 표했으나, 민자통은 학생들의 회담을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은 1961년 5·16 친위 쿠데타로 인해 된서리를 맞았다. 군대에서 점증하던 극렬 파시스트들의 우두머리 박정희가 이끈 권력은 반공을 제1의 국시(國是)로 공포하며 민주개혁 운동가들을 투옥·처벌하였다. 이 일로 혁신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와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崔百根)이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 민족통일운동은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여야 했다.
3. 반미투쟁에서
민족통일운동의 복원까지
박정희 사망 이후 타오르던 민주화 열기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쿠데타와 계엄으로 인해 좌절됐다. 그에 맞서 광주의 시민들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항쟁을 벌였다. 항쟁의 주요 요구는 조국의 민주화였지만, 통일에 대한 염원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이미 항쟁 직전인 5월 16일 밤에 열린 민족민주화대성회에서 전남대학교 학생회장 박관현(朴寬賢)은 집회의 목적이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라 밝혔다.20 그 연설이 울러퍼졌던 도청 앞 분수대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을 쫓아낸 후 궐기대회를 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다.21
5·18 광주민중항쟁은 침체된 민족통일운동을 되살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에 대한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미국은 전두환을 지지하며 신군부가 광주를 진압하는 것을 묵인하고 방관·조장하는 등 학살에 깊숙하게 개입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주주의 제 세력과 학생들은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깊은 의문을 품게 됐으며,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민주화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화의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던 미국은 이제 〈독재권력의 비호자〉로 규정되었다.22 그렇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이었던 반미구국운동이 시작됐다. 반미의 무풍지대가 비로소 태풍지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5·18의 진실을 알리고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대학가에서 5·18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집회를 열었으며 전시회, 토론회 등 다양한 방식을 이용하였다. 또한 각지에서 미국을 규탄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였다.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1980),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1982),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 사건(1982), 레이건 방한 반대 투쟁(1983),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1985) 등이 대표적이다. 초기의 반미투쟁은 각광을 받지 못했지만, 서울의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농성하던 학생들은 성명서에서 1. 미국의 광주항쟁 진압 책임 규탄; 2.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 철회; 3. 한미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한 미국 국민의 노력 촉구 등을 주장했다. 이는 독재를 고립시키기 위해 한미 사이의 약한 연결고리를 강타하는 목적의 투쟁이었고 분명 미국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파쇼정권은 반미를 ‘좌경용공(左傾容共)’이라 규정했으며, 학생들도 자신들의 움직임이 ‘반미는 아니다’라며 물러서는 방어적 태도를 보였다.23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반미투쟁은 이론적 측면에서 한층 성장한다. 여러 투쟁을 거치며 학생들은 우리 현대사에서 그리고 현 정세에서 미국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해 갔다. 또한 80년대부터 진보적인 내용의 인문사회과학서적들이 많이 출판되고 여러 선진 사상도 전해지며 미국을 비판적 혹은 적대적으로 보는 시각이 심화됐다. 이제 반미를 일반민주주의 쟁취와의 연계에서만이 아니라 전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민주주의 혁명, 즉 정권 문제와 연계하여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의 인식은 당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김세진(金世鎭)이 부모에게 쓴 편지만 봐도 잘 드러난다. “이 땅의 가난의 원흉은, 뼈아픈 분단의 창출자는, 압살되는 자유의 원인은 바로 이 땅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대소(對蘇) 군사기지화, 식민지화시킨 미제국주의이며, 그 대리통치 세력인 군사파쇼라는 것을. … 대학에 들어와서 읽은 수백 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 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24 그는 이 편지를 쓰고 이틀 후인 1986년 4월 28일 동지 이재호(李載虎)와 투쟁에 나섰다가 분신으로 산화하였다. 김세진·이재호 외에도 여러 학생이 미국을 규탄하고 통일을 염원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대략적인 활동상은 다음과 같다:
6월 항쟁 이전 반미·통일운동에서 산화한 민족민주열사(1986~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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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생몰 날짜 |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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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
1965년 2월 20일 ~ 1986년 5월 3일 |
서울대학교 자연대 학생회장(김세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장 (이재호)으로 각각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28일 오전 9시 30분경 4백여 명의 학우들과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군사파쇼정권이 강요하는 전방입소에 반대하며 “반전 반핵 양키 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교육 결사 반대” 등의 구호를 외차다가 경찰의 폭력진압을 막으려 시나를 몸에 뿌렸으나 진압이 계속되자 분신 후 투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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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
1965년 12월 29일 ~ 1986년 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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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
1962년 ~ 1986년 5월 20일 |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경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분신 후 투신하며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라고 외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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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
1965년 1월 19일 ~ 1986년 5월 21일 |
서울대에 다니며 학생운동에 동참하다 김세진·이재호·이동수의 죽음을 목격하며 “우리 그리고 내 힘이 현 사회를 변혁시키기에 너무 무력하다”라고 괴로움을 토로하던 중 1986년 5월 21일 한강에 투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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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환 |
1967년 9월 ~ 1986년 6월 5일 |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입시를 준비하다가 민주화운동, 반미투쟁에 투신하여 목숨을 잃거나 연행되는 대학생들을 보며 그 죽음들의 원인을 고민하다 그것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외세와 그들에 영합한 군사독재와 매판자본임을 자각하고 서울 청량리에 위치한 어느 호텔 옥상에서 군사파쇼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투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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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일 |
1964년 1월 26일 ~ 1986년 11월 5일 |
건국대 항쟁에 대한 폭력진압에 분노하여 “민족분단 영구화하는 군부독재 물러가라”, “민족의 피 배불리 먹는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담긴 유서를 적고 1986년 11월 5일 밤 12시 45분경 부산산업대학교(현 경성대) 건물에서 분신 후 투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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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
1966년 9월 8일 ~ 1987년 2월 20일 |
서울교대에서 학생운동에 동참하던 중 학내의 비민주적 학사운영과 미제국주의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분노하고 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목을 매 자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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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완 |
1965년 7월 17일 ~ 1987년 3월 27일 |
방위복무 중 사회과학도서와 민족민주운동 관련 자료가 든 가방을 분실하자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우려하여 조직을 지키기 위해 “이 땅의 민중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미제와 파쇼정권은 축출되고 타도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부모와 동지들에게 남기고 자결함. |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외, 『끝내 살리라 1』, 2005.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과 민중의 의식 고양에 힘입어 반미·통일운동은 더욱 앙양되었다. 1986년부터 민족해방 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는다.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과 약칭 자민투라 불린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연세대의 〈반미구국학생연맹〉 등 여러 조직도 결성됐다. 이들은 곧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는데 애학투련은 지난날 단절된 민족해방운동을 계승한 전국적인 학생단체이자 학생운동 조직들이 상호간 지엽적인 차이·반목을 극복하고 결성한 조직이라는 의의를 지닌다.25 한편 1985년에는 각종 사회단체가 연대연합전선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조직하였다. 민통련은 기관지 『민주통일』에서 민족통일운동은 “분단문제와 외세문제를 민중적 쟁점으로 만들어 가는 운동이며, 그렇게 될 때에만 궁극 목표인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자주와 민중해방이 민중주체세력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26
1986년은 반미가 매우 공개적인 투쟁으로 표출된 해였다. 자민투는 5대 투쟁과제로 1. 민주헌법 쟁취투쟁; 2. 반전반핵투쟁; 3. 조국통일촉진투쟁; 4. 민중지원 연대 투쟁; 5. 미국의 경제침략 저지투쟁으로 제시하였다.27 학생들은 한국에 놓인 미국의 핵무기 철수를 요구했으며, 군국주의화와 동족적대를 강요하는 전방입소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5월 3일에는 인천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인천 5·3 항쟁)가 벌어졌는데, 학생 운동권 조직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학생들은 “군사독재 앞장세워 광주민중 학살하고 노동자·농민 피땀짜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친미로 망한 나라 반미로 되살리자”, “민주헌법 쟁취하여 친미독재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또한 5월 21일에는 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을 점거하여 약 한 시간 가량 농성을 벌였다.28 한편으로,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에서도 인권유린 규탄 및 생존권 쟁취를 요구하는 반미 시위가 있었다.
일련의 투쟁들에 대해 전두환 군사파쇼정권은 야만적 진압으로 대응했다. 전방입소 반대투쟁에는 김세진·이재호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인천 5·3 항쟁도 폭력으로 진압하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핑계로 삼았다. 가장 큰 탄압은 1986년 10월 28일의 건국대였다. 이날 애학투련 결성을 위해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 결성식을 치르고 있던 도중 경찰들이 대규모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학생들은 대학 건물로 들어가 농성을 하게 됐고, 나흘만에 폭력적으로 끌려 나왔다(10·28 건국대 항쟁). 1,525명이 연행되고 1,288명이 구속된 이 사건은 ‘단일사건으로 세계 최다 구속자’를 기록하며 학생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29 탄압의 대상은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6년 10월 14일 신민당의 유성환 의원은 제131회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라고 발언하였다.30 하지만 군사파쇼정권은 이 발언을 ‘용공’으로 규정하고 여당을 동원하여 구속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사법기관에서는 해당 발언이 ‘용공’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으나 끝내 유성환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미·통일운동은 꺾이지 않았으며,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일환으로서 상당한 비중을 계속 차지하였다. 민족민주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1차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6월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라는 거대한 투쟁 속에서 반미전선을 활발하게 이끌고 가지 못했다는 한계가 노정되었다. 이는 1980년대 초부터 형태화한 민족민주운동 제 그룹의 분열 속에서 해소되지 못 한 채 오늘날까지 잔존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 후에 미제국주의 및 한 차례 후퇴한 변형으로서 이어진 예속적 지배계급의 가일층 ‘세련된’ 전략·전술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반미구국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민족통일운동의 전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데 있다. 미국에 대한 의문과 규탄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본질을 인식케 했으며, 더 나아가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주목함과 동시에 미국의 마수에 갇힌 한국의 현실을 조명케 했다.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의 자주는 물론이요 외세의 개입이 없는 상태 아래서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바라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그동안 신식민지 파쇼 사회에서 아예 금기시되었던 것들을 깨부수며 더욱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로써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사고와 행동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로 그 점에서 80년대의 반미구국운동은 앞으로는 40년대 중후반 분단을 막기 위한 투쟁, 뒤로는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어진 민족통일운동의 사이에서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끝>
2025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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