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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언니'가 어떨까?

 

말걸기[호칭과 지칭, 그리고 존칭과 존댓말] 에 관련된 글.

 

 

말걸기네 지역위원회의 위원장은 말걸기의 대학 후배이다. 같은 학과는 아니지만 대략 96년 말인가 97년부터인가 함께 활동했던 일군의 무리에서 만났다. 이 일군의 무리는 서대문-마포-은평의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의 바탕이 되었다. 어쨌거나. 말걸기랑 파란꼬리는 고양시로 이사가려고 준비 중인데, 지역위원장은 섭섭한 지 다른이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이 동네에서 오빠, 언니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들인데... 가네..."

 

말걸기 동네 지역위원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교적 어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이 참으로 짧다.' 그러니까 상대 나이야 어떻건 간에 존댓말 별로 안 쓰고 호칭도 대체로 '동지' 아니면 '씨'다. 사람이 뻣뻣하고 오만해서가 아니고 '관계는 평등해야지'라는 생각과 그런 심성의 표현이다. 말걸기는 그게 좋다.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들이 '싸가지 없게' 느끼는 행동은 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칭에 있어서 말걸기와 파란꼬리에게는 오빠, 언니를 사용한다. 아마도 10년 전 학교에서 만난 사이라서 그런가보다. 말걸기가 다니던 학과와 단과대학에서는 선배들에게 대체로 '형', '오빠', '누나', '언니'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한테 '형' 또는 '선배'란 호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빠'라는 호칭이 갖는 부정적 요소를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아마도 여학생의 수가 남학생의 수에 비해 적지 않았고 지위의 차별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오빠' 교육이 잘 되있었거나.

 

이런 문화에서 함께 지냈으니 지역위원장이 말걸기더러 '오빠'라고 부르는 건 그다지 어색한 건 아닌데, 한 여성 당원이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었다고 털어놓았다. 남성의 욕망에 근접한 호칭 아니던가. 그러면서 '형'이나 '선배'라고 부르는 자기의 문화를 들려주었다. 뭐, 다 아는 얘기.

 

 

그런데 몇 일 생각해 보니까, '형'이라는 호칭에 부여한 '무성성' 혹은 '남성 욕망의 제거'가 오히려 환상이겠구나 싶었다. '학형', '학부형' 등과 같이 '형'의 쓰임새로 보아 '형'이 단지 나이 어린 남자가 그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말에 그치지 않는 게 확실하다. 선배나 나이 많은 사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존중을 표현해야 할 상대 일반을 호칭 또는 지칭할 경우에 '형(兄)'을 사용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형'을 호칭으로 사용할 경우 '형'의 '일반성'을 '무성성'의 의미로 해석한 듯하다.

 

면밀히 따져보면 언어에서도 '무성성' 혹은 '성의 중립'을 찾기 쉽지 않다. 특히, 호칭과 지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형'의 일반적 용법이 과연 '무성성' 내지는 '성의 중립'일 수 있을까? 오히려 남성을 지칭하는 말(man, he)이 인간(human)을 대표하듯이, 존중받을 남성 상대를 지칭하는 '형'이 일반성을 획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여성들이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오빠'라는 말이 갖는 성격-성별 관계의 확정-을 피하려다가 '형'이란 말에게 일반적 지위만 부여해 준 꼴이다. 또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인간을 대표하게 되는 언어 현상에 '투항'한 꼴이다.

 

'인간도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다.'는 문장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두번째 '인간'이라는 단어는 'human' 혹은 'man'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마도 'he'라고 할 것이다. 영어권 사람인 어떤 페미니즘 언어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처럼 보통 'he'라고 써야 할 단어를 죄다 'she'로 바꾸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이걸 '그녀'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의도로 단어를 달리 선택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얼마나 어색했던지(물론 그 어색함은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의 특성을 약간은 무시한 번역도 이유일 것이다).

 

그 어색함을 그 언어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천년 동안 여성들이 느낀 그 어색함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언어에서는 '성성'을 제거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성별이 무엇이고 간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건 어떨까. 물론, '씨'나 '동지'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비교적 사적인 관계가 섞인 경우에 말이다. '언니'의 현재 기본 용법은 손 아래 여성이 손 위 여성을 부르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생이 손 위 동성을 부르는 표현이었다. 예전 용례에 성별을 교차해서 사용했던 흔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름의 현대적 용법을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언어에서 '일반성'을 가장한 '무성성'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형'이라는 말에 포섭되기보다는 아예 현재의 상식에 반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도발적이니까 어렵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멋지기도 할 것 같다. 왜냐면 호칭에 있어서 '무성성의 사기'를 고발하는 행동이기도 하니 '전복'이 아니겠는가.

 

 

 

말걸기보다 5살 정도 어린 한 인간은 말걸기를 '선배'라고 부르는데, '선배'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 말걸기는 차라리 '~야'로 부르라고 했건만 절대 못 고친다. '형'도 싫고 '오빠'는 더더욱 싫은 모양이던데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면 그것도 싫다 하겠지? 하기야 뭐라 하든 자기가 좋은 게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