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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다니는 윗층 아이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실내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행동은 제지해야 할까? 그런 행동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약해지는 요즘 세태에 남들이야 괴롭든 불쾌하든 내 아이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키우겠다는 태도도 문제이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윤리 기준 중심으로만 대하는 태도도 큰 문제이다.

 

물론 열 살쯤 먹은 애가 실내에서 쿵쾅 뛰어다니면 잔소리를 해야 한다. 아래층 이웃이 얼마나 괴롭겠냐며, 타인을 위해 너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다섯 살이라면? 애매하긴 한데 살살 타이르면 좋을 듯 싶다. 세 살이라면 집안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기보다는 매트 깔아주는 대처가 바람직하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생명 종 중에서 가장 큰 격차로, 성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불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어느 정도냐면 태어난 지 20년이 지나도 뇌가 다 자라지 못한다. 인간의 뇌는 파충류도 갖고 있는 감정뇌는 상당히 자란 채로 태어나지만 사회 생활을 위해 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도의 사고와 성찰이 이루어지는 부위는 성인에 비해 작다. 윤리적 성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태어나서 서서히 가능해지는 뇌로 성장한다.

 

사회 윤리 의식을 버리고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성인이 해봐야 하는 관찰이다. 이런 관찰을 여러 번, 상당히 긴 시간 해보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그 태도는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윤리 의식의 결여이다.

 

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은 모여 있어도 각자 논다. 각자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조정해서 하나의 규칙에 다수가 참여하는 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성이 취약하다. 사실은 사회성을 지닐 능력이 아직 없는 상태이다. 이런 아이들한테는 성인들이 갖는 윤리 의식이 자리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 성인들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학대가 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로 부모와 상호작용하면서 윤리 의식을 기른다. 그런데 어떤 원리를 받아들인 다음에 이 원리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복하는 경험으로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행동 원리는 타고난 자질에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 타인을 배려하라는 말을 백 날 해봐야 자신의 원리로 삼지 못한다. 뛰면 엄마가, 아빠가 싫어하는구나라고 그냥 그렇게 입력될 뿐이다. 생존 자체를 부모에게 의지한 어린 아이는 부모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얌전해지거나, 부모에게 관심을 더 받으려고 더 뛰어다닌다. 어쨌든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것이 윤리의식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행동의 제재는 타인을 배려하라는 윤리 의식이 아니라,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행동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행동 규범을 만든다. 그런데 그 행동 규범에 사회 윤리 의식이 덧붙여지는 시기는 꽤 훗날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를 대할 때, 특히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행동 방침을 심을 때 포기하는 무언가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집안에서 뛰지 말라는 가르침은 번잡한 식당에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가르침과는 아주 다르게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육아 방식이다. 왜냐하면 세 살 언저리의 아이라면 뛰어다니면서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근육뿐만 아니라 훗날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하는 신경계를 키우는, 반복적인 일상이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면 아래층은 괴롭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생활 구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장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아파트 10층에 사는 세 살 짜리 애한테 나가 놀라고 할 수 없다. 양육자가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놀 때마다 항상 놀이터에 함께 나갈 수 없다. 저렴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층간 소음에 무능하다. 흙마당 단층집에 자기집, 이웃집 아이들이 바글하다면, 뛰어다닐 수 있는 아이는 밖에서 뛰어다니게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 특히 도시에서는 행운이다.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려면 건물의 구조가 층간 소음을 상당히 줄이고 자동차와 사람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파트 단지든 다세대 주택 단지든 공동체가 자리잡아야 한다. 서로 알고 지내고 돌봐주는 동네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집 안팎을 드나들며 자기들끼리 논다. 이러한 지향을 전제로 우리가 지녀야 할 윤리 규범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윗층에 아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윤리 의식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산다. 대부분의 인간 생활은 개인이나 가정에 한정하기 어렵다. 육아를 온전히 부모, 주양육자에게만 책임지우는 분위기는 공동체주의에 반하는 개인주의에 기인한다. 자기에게 불편을 주는 주변의 행동을 일단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육아에서 부모, 주양육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지만 주변 이웃도 육아의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층간 소음이나 공공장소에서 듣는 아이 울음 소리를 꽤 많이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윗집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음을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 참다가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동네 아이들이 즐겁고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도 갖추지 못했다. 성능 좋게 잘 만든 매트는 진동을 상당히 줄여주지만 한계는 있다. 건물 상태나 예민함에 따라서 괴로움도 다르다. 이런 현실에서는 결국 상호 협상이다. 뛰어다니는 윗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윤리 의식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대를 정해 보자. 그리고 윗집 부모에게 이 때는 감당하기 힘드니 신경 써 달라고. 당연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매트를 설치한다거나 늦은 시간에는 뛰어다니지 않게 여러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


2005년도 일이 생각난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 공공연맹 등과 함께 제작했던, 일명 ‘비정규직 포스터’. 카피가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인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김원정 씨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전화 돌리던 기억이 난다. 포스터 배포를 못하게 하려고 당과 노조 여러 단위의 여성위원장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 날의 일과 노동계 포스터에 대해서는 내가 10여 년 전에 글을 쓴 바 있다.


<노동계 뽀스떠(http://blog.jinbo.net/diary/66)>

 

1.


당시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포스터의 이미지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정의당 상무위가 주장하듯이 ‘문예위 논평 및 메갈리아 사태’가 아니다. 사고 친 건 상무위니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남성 중심적 태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왜 표현이 쉽게 남성 중심적으로 흐르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여성 중심적 이미지와 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어렵다. 데보라 카메론의 <페미니즘과 언어 이론>(한국문화사, 1995)에서 인용한다.

 

“<비성차별적> 언어의 지지자들은 언어를 현실을 가능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는, 남성적 단어를 중립적 단어로 환치함(chairman→chairperson 따위: 인용주)으로 해서,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자를 포함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관계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성차별적인 이상, 이 현실에 중립적인 단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란, 이것은 성차별적, 저것은 중립적, 또 저것은 페미니스트적이니 하는 식으로 언어의 국제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최종적 판단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번역이 좀 웃기긴 한데, 어쨌든) 이미 언어도 성차별적으로 물들어 있다는 얘기다. 위의 책에서 계속 인용한다.

 

“남자의 단어가 힘, 지위, 자유, 독립을 함의하는데, 전에는 그것과 평행해서 쓰이던 여자의 단어는 지금은 열성, 의존성, 부정성, 성을 함의한다.
이를테면, bachelor(독신 남성)(자신가이며 독립해 있고 성적으로 자유로운)의 반어는 spinster(독신 여성)(추하고 성적 매력이 없고 좌절된)이다. (생략)
의미의 불평등의 그 밖의 예로서는, governor(힘센 통치자)와 governess(어린이의 일을 돌봐 주는 가난한 여자)라든지, master(유능한 힘센 남자)와 mistress(성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여자)나 tramp(부랑자)와 tramp(매춘부)가 있다.”

 

언어의 의미 구조가 성차별적으로 공고하므로 몇몇 단어 바꾼다고 언어의 성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 구조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방법은 있다. 그래서 위의 저자는 사람을 총칭하는 모든 대명사는 she(그녀)로 바꾸어 책을 서술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누구지? 생뚱맞게 갑자기 여자가 등장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후에, ‘아차, 그냥 사람이지.’ 한다. 저자는 이러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즉 모든 부정 혹은 총칭적 지시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나 이외에도 몇몇 언어학자들이 항시 이런 실천을 하고 있다. 이것을 기묘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건설적인 언어를 통해 적극적 차별을 실천하고 있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남자에게 he라 말하거나 쓰거나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여자인 나에게 she라 말하거나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남성 중심적 세계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인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처럼 건설적인 언어가 세계를 바꿀 것이라느니 하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가 she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보다 많은 여자들이 과학을 전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she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직면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식을 높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도만큼 현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위 책의 저자야 교양 없어 보이면 안 될 터이니 참으로 얌전한 방식으로 편견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교양 따위는 집어치운 불쾌한 언어를 사용하는 점과는 다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도 단일대오는 아니겠지만, 그들은 왜 상쾌함을 짓밟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장 폭력적인 언어는 성과 관련된 상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친놈’과 ‘미친년’이 다른 의미이듯이, ‘씨발놈’과 ‘씨발년’은 완전히 다르다(내가 자대에 배치되어서 가장 먼저 들은 욕이 ‘씨발년’이었다, ‘씨발놈’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타부어는 남자의 신체보다 여자의 신체를 가리키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cunt(여자 성기)라는 말은 prick(남자 성기)보다도 강하기 타부시 되며, 타부로 되어 있는 유의어도 prick보다 많다. (생략)
여자 전체를 성의 먹이로 보는 ass(엉덩이), tail(꼬리), crumpet(둥근 빵), skirt(치마), flash(섬광)(이런 의미가 전이해서 성교나 성교의 대상으로서 여자를 가리킨다)와 같은 단어들은 있으나 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는 없으며, slag(쓰레기)에서 전이해서 <몸가짐이 나쁜 여자>, tart(<과일이 곁들이 빵>에서 전이해서 <매춘부>), nympho(<님프>에서 전이해서 <여색정증>), pricktease(남성 성기를 조롱하는 의미로, 성교에 있어서 남자를 흥분시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가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모욕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도 없다.
아마도 이것은 남자에게만 관용한 이중 기준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성교가 이성 간에 행해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는 성적 욕망이 없다고 여겨지므로, 여자가 욕망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거나, 남자의 욕망에 응하지 못하면 비난당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들이 한국어에 없을 리 만무하고, 이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보자는 의도가 메갈리아, 워마드의 언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언어로 지목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성적 주체에서 대상으로 바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옆에서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쁠 만하다. 이렇게 기분 나쁜 표현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집단)이 채택할 수는 없겠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반대로 메갈리아의 언어를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를 규탄한다면? 그러니까 우리 언어에 깊이 각인된 성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서 남성을 향해 사용하는 것을 억압하는 것은 어떤가? 이는 우리 언어의 차별적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를 막는 것이다. 우리 언어가 남성 중심적이므로, 그 남성 중심적 언어를 지키는 꼴이 된다.

 

물론 메갈리아와 워마드에는 또 다른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런데 메갈리아에서 시작한 미러링이 다른 소수자들을 모욕하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해서, 메갈리아의 전략이 곧 다른 소수자를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용의 맥락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메갈리아의 유저가 장애인을 심하게 비하했다면, 그리고 그 유저에게 환호하는 여럿이 있다면, 그들의 바로 그 행위를 비난하면 된다. 한편으로는, 소수자들의 경우보다 복잡할 수 있는데, 노인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행위가, 언뜻 생각이 드는 것처럼 아주 질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행위가 아니고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배설 행위라 하더라도, 위대한 남성과 평생 여성을 폄하하며 살아온 늙은 남성을 조롱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실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채택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태도는 결국 메갈리아의 기본적인 언어 사용(남성을 향한)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더 많이 보여주게 된다. 확실히 데보가 케메론보다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정의당 상무위원회는 남성 중심적 언어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행위를 억압하고 있다. 정의당 상무위가 스스로 확인한 입장은 문예위 논평이 메갈리아의 언어를 지지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정의당 문예위는 메갈리아의 티셔츠를 구매한 한 성우의 노력이 게임에서 삭제됨을 비판했다. 그 성우는 메갈리아가 사용하는 SNS의 계정이 삭제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티셔츠를 산 것이다. 정의당 상무위는 메갈리아의 언어 전략이 사용될 수 없도록 열심히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경기를 일으킬까? 그 역겹고 혐오스런 표현이 싫기는 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정 역겹고 혐오스런 말과 행동은 전쟁광과 군국주의자, 신자유주의자와 재벌, 돈에 미친 자들과 별별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는 짓들이 그토록 싫어서 분노하고 데모도 하고 농성도 하고 글도 쓰고 서명도 하지만,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추정컨대, 작은 불의에 더 가혹한 것이 세상 이치라서 그런가 싶다. 전쟁의 언어는 핵실험과 사드 배치로 현실이 된다. 하지만 메갈리아가 떠들어봐야 한국 남자들이 벌레가 되지는 않는다. 메갈리아의 언어는 현실을 폭로하는 언어, 한편으로는 배설의 언어이지 현실을 바꾸는, 의지를 실현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 말고는 힘이 없는 언어이다. 작은 불의에 가혹하면 아주 쉽게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다른 추정은 메갈리아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감정은 쉽게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마련이다. “나 상처받았어!” 진보정당의 윤리는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적인 힘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3.

 

정의당 문예위 논평에 항의하며 정의당을 탈당한 사람들은 정치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메갈리아의 활동에 조력한 그 성우를 배제하는 조치가 게임업체로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그 게임업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쟁적인 주제이므로 문예위 논평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탈당하는 행위는 그 게임업체의 아이디를 삭제하는 것과 똑같다. 돈 냈으니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다오.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으니 더 이상 돈 못내. 이들은 정당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정당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고민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공동체 경험이 일천한데다가 진보정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징징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수 백 명이 넘는다는 것은 정의당이 당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정당임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문예위 논평이 문제가 있다면 박 터지게 싸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조직원은 박 터지게 싸우려는 의지도 없고 조직에는 룰도 통로도 없다면 당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싸울 의지와 방법이 없다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문예위 논평을 내린 상무위를 비판한 사람들이 코너에 몰렸다. 상무위는 자기들이 젠더TF라고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당의 입장을 정해 놓았다. 젠더TF는 상무위의 입장을 사실상 합리화하는 논리 말고는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다. 웃긴다. 이젠 ‘니들이 나가라!’인가?

 

 

이상한 정태인과 대학등록금

 

반값등록금으로 세상이 난리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왠일인지 그다지 관심이 확 쏠리지는 않는다. 등록금 내려면 17년은 있어야 해서 그런가? 아님 요즘에 세상을 너무 쿠~울하게 보나?

 

어쨌든 반값등록금은 소위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 가이드라인, 보수는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악마의 사탕인듯하다. 이런 와중에 깨나 진보랍시는 정태인이 '도발적으로' 반값등록금 반대를 외쳤다.

 

'반값등록금'에 반대한다

 

노동시장에서의 학력, 학벌 차별이 교육을 이상하게 만드는 원인이라 지목하고, 임금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견 없다. 다만 이 사람은 임금시장과 서열화된 대학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임금 "격차를 어떻게든 줄이는 것이 대학 등록금 인상을 막는 가장 근본적 처방"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다. 짧은 칼럼에서 이 사람 생각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이 사람은 노동시장에서의 학력, 학벌에 따른 임금 차별을 해소하면 대학등록금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그게 쉽게 될까? 또 이 사람은 "어떤 정책이 아무리 복지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더라도 양극화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면 그 정책은 올바른 정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학 등록금이 바로 그렇다. 현재도 대학 입시경쟁은 과잉이다. 그런데 대학 다니는 비용을 낮춰 준다면 대학에 가려는 사람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입시 경쟁은 더 격화될 것이다. 결국 현재 대학 등록금 인하가 그 이상의 차세대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도 대학입시 경쟁이 과잉인 건 알겠는데, 이 상황에서 대학등록금이 반값으로 줄면 경쟁이 더 치열하게 된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동안 대학등록금은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되어 왔다. 그러니까 대학졸업장 가격이 계속 상승했는데 그 동안 수요, 즉 대학입시 경쟁률은 떨어졌나? 또 내일 당장 등록금이 반으로 줄었다치자. 2012학년도 대학입시 경쟁률이 올라갈까? 아니면 내년이나 후년에, 그 다음해에 올라갈까?

 

정태인은 자칭 경제전문가답게 대학등록금 문제를 기본적으로 가격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가격 문제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단지, 대학졸업장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격에 따라 수요량이 달라지는 소위 '일반상품'과는 너무나 다른 상품이라는 사실을 쉽게 무시한다. 대학졸업장이 하나의 상품이라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경제교과서에 나오는 수요-공급 법칙하고는 안 맞잖아?

 

서열화된 대학구조와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차별이 동시에 대학으로하여금 배째라 등록금인상을 보장하고 있다. 그걸 대학도 아니까 열심히 현금과 부동산을 축재하면서도 등록금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얘기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니 길게 할 것 없고...

 

가정을 해 보자. 노동시장의 임금차별을 완화하자. 그러면 대학졸업장 수요가 줄어들 것이다. (물론 대학교육에 대한 인식도 변해야 하는데 이 얘긴 그냥 제쳐두자.) 그렇다고 대학등록금이 낮아질까? '아니올시다'가 답이다. 대학졸업장 수요가 줄어들면 정원도 못 채우는, 현금유동성 확보를 위해 이 기업 저 기업이 만들어낸 대학들이 먼저 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살려달라고, 대학을 없애면 안 된다고 야단들을 치면서 말이다. 그 상황에서 연고대가 등록금 내릴까?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가 닥친 대학들은 등록금 내리면 경영 위기가 더 심화되는데 무턱대고 등록금을 내릴까?

 

노동시장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는 건 쉽지 않다. 당연히 자본이 반대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지만 사실 설계 자체가 쉽지 않은 정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근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치자. 대학졸업장 수요가 줄어든다. 서열 맨 아래에 있는 대학부터 파산을 하고 그 위로는 입학정원 조정을 비롯해서 경영상의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다. 등록금도 낮출 수 있는 만큼 낮추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학들은 희망이 없다. 낮은 비용으로는 양질의 교육이 불가하기 때문에 더욱 소비자의 선택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회의 구조상 일정정도의 대학졸업자, 석박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상층의 대학들은 안 망한다.

 

이 정도라도 지금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상황이다. 이제는 어느 대학을 살리고 죽일 것인가?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 수급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지금보다 정부의 정책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등록금은 별개의 문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으로 일단 살아남은 대학들은, 그 사회적 필요가 더욱 선명해졌으므로 양질의 교육을 명분으로 자신들이 치뤄야할 비용을 정부든, 기업이든, 학생이든, 누구에게든 더 큰 손을 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상황이에서도 공익적 목적을 수행하는 대학교육의 비용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누진적인 방식의 조세와 기업의 직접 투자로 대학의 비용을 부담하는 게 가장 아름답기는 하겠으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

 

만약 대학졸업장에 대한 수요는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대학이 학생들에게 높은 등록금을 요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의 소득과 자산이 크지 않은 학생들은 대학졸업장에 드는 비용과 대학 후 구한 직업으로 얻게 되는 소득을 따져 보고는 대학입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뭐 굳이 대학 안 나와도 돈 벌 수 있으니까. 안타까운 건 공부를 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대학이 좋은 집안 자제들로 가득 찰 것이고 이 사회의 높은 수준의 지식은 부자들에게 독점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태인이 절대 안 된다는 양극화를 촉진하는 매커니즘이 될 것이다. 다시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겠군!

 

 

한국의 교육이 왜곡된 건 임금차별, 즉 노동의 영역에서 큰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노동문제 해결이 곧 교육 문제 해결은 아니다. 대학교육을 포함한 공교육도 그렇고 사교육도 그렇도 이제는 거대한 자원을 흡수하고 통제하는 영역이다. 교육문제는, 그 발단을 제공한 여러 영역의 문제 해결 방법과 함께 그 내부의 해결 방법도 실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지금 상황에서 교육정책 이외의 분야 정책이 대학등록금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라고 얘기하는 건 모자란 얘기다. 또한 당연히도 반값등록금이 교육문제의 상당 부분을, 혹은 아주 긴박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해도 모자라다.

 

욕심을 낸다면 이번 기회에 대학의 비용,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한 양질의 고등교육의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고등교육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등의 정책을 쏟아내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함께!

세습 노동자

 

노예는 신분의 세습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수많은 천민들은 신분 제도를 수용했고 수용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서 신분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세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는 않는다(단, 신분을 거부하려는 당돌한 자식을 말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왜일까? 힘 없이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니 부당한 신분 제도에 항변은 못하지만 신분 세습이 자신들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다.

 

세습은 지킬 게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제도이다. 이 또한 당연한 얘기다. 북한은 권력을 세습하고 남한은 부를 세습한다. 독점적 권력일수록 세습 과정은 유독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김정일은 어떠했을까? 또 김정은의 손엔 누구 피가 가득하게 될까? 이건희의 부가 자식들에게 온전히 이전될 수 있도록 남한의 관료들과 판사들은 열심히 노력해왔다. 각각의 체제를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세습은 이처럼 가진 게 아주 많은 이들에게만 행복한 제도는 아닌 것 같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단협안으로 사실상 정규직 세습안을 채택한 것은 현대자동차 정규직은 지킬 게 꽤 많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그 지킬 게 뭘까? 비정규직이나 실업자에 대비되는 신분으로서 정규직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현대자본주의는 '부'라는 매개 없이 신분 그 자체가 세습되는 방식을 거부하는 체제인데, 이처럼 신분을 세습하겠다는 포부는 대단히 체제 저항적 성격을 지녔다.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놀라운 아이디어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는 아니다. 이 정책은 강력한 노조가 있는 대형 사업장에서는 이미 관행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 아닌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왜 이 시점에 정규직 세습이 부각되는지이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단협에 명시하지 않고서는 이 정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일까? 아니면 바람직한 세습이 극소수에 한정되는 것보다는 좀 더 큰 소수에게 확대되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기 때문일까?

 

보수언론들이 노조의 공공성과 연대를 운운하며 현대자동차노조를 비난하는 꼴이 재수없기 이루 말할 수 없으나, 87년 이후 목숨을 건 노조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20년 넘게 자기들 사업장에 묶어두려 했던 대형 노조의 정치적, 도덕적 타락이 이제는 막장을 향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콤퓨터 고장 퇴치'

 

파주에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데 한강 건너편은 김포이고, 임진강 건너는 황해도이다. 북한 땅을 보고 있노라면 노 젓는 배만 있으면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 북한인데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라 왠지 심비감마저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강 건너 북한 땅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전망대는 민간위탁시설이라는데 이것 저것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전시, 상영하고 있다. 옛날처럼 '북한 괴뢰' 따위의 구호는 없고 북한에 관한 자료를 구해다가 전시하거나 북한 영화를 상영하니 2,500원의 입장료가 그리 바가지는 아니다.

 

주로 풍경이나 구경했는데 전시실에서 재미난 걸 발견했다.

 

 

위 사진은 북한의 학교 교실을 옮겨 놓았다는데 사실 북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 교재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런 저런 책들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대학 교재가 아닐까 싶은데, 제목이 '자체로 처리할 수 있는 콤퓨터 고장 퇴치'인 걸 보아 하니 전공 서적이라기보다는 교양 서적인 듯하다. 결국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용하게 되는 OS가 Window라는 얘기인데... 사실 좀 놀랐다.

 

"리눅스 안 쓰나 보네?"

 

그러던 차에 요그님의 붉은 별을 읽고 배경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삼 북한도 어쩔 수 없이 지구상의 일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나저나 저 책은, window 뒤의 숫자는 사용 중에 다시 설치해야 하는 횟수라는 걸 알려 줄까?

 

 

 

[보너스]

아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학교,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수학 교과서에 실린 문제이다.

 

 

"남조선의 한 거리에 구두를 닦는 소년이 26명 있고 신문을 파는 소년이 38명 있습니다. 구두를 닦는 소년과 신문을 파는 소년이 합하여 몇 명입니까?"

 

문제 참 구리다. 현실감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남조선의 지하철 1호선에서 구걸을 하는 소년은 38명이 있고 지하철 2호선에서 앵벌이 하는 소녀는 26명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에서 구걸하는 소년과 지하철 2호선에서 앵벌이 하는 소녀가 합하여 몇 명입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에휴~.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좀 별로다.

 

 

저질 직딩 영어 사교육

 

얼마 전에 일이 있어 분당에 갔더랬다. 일을 마치고 그 먼 곳에서 전철을 타고 일산까지 오려니 심심하던 차에 괴의한 책을 보게 되었다.

 

옆 자리에 직딩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았는데 책을 펴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직딩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던데... 진짜인가 보다. 심심해서 곁눈질로 공부를 따라하는데...
 

그 아저씨가 보는 책은 영어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책이었다. 펼쳐진 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영어의 전치사 문구는 한국어에서는 하나의 문장처럼 사용된다는 해설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불필요하게 길어지거나 어색해진다는 주장이다. 전치사 'in'을 예로 들고 있다. 'in that hat'이었던가? 이런 문구가 있는 문장을 A처럼 번역하지 말고 B처럼 번역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A: 너, 그 모자 쓰니까 정말 멋있다.

B: 너, 그 모자 인해 정말 멋있다.

 

애초의 영어 원문은 전치사 'in'이 들어간 하나의 문장이었으니 한국어 번역도 하나의 문장으로, 그래야 더 간결하게 번역이 된단다. ('인하다'는 동사이니 B도 사실은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해괴망측한 영어 교재는 누가 썼을까? 한국어를 알고 있을까? 이런 저질 한국어를 '필수 영어 공부'라며 유포하다니 어이가 없다. 영어 공부를 강제로 해야 하는 직딩들은, 넘쳐나는 직딩용 영어 사교육 책들 중 하나를 어쩔 수 없이 고를 것이다. 그 많은 책들 중에 어느 책이 제대로 된 언어(!)를 가르치는지 알기도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한국어를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지.

 

우익들이 언어 감수성, 언어 감각을 민족 정신이나 민족성에 결부시키다 보니 이것들이 대단히 고루하고 재미없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 그럴만한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볼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고는 언어와 깊은 연관이 있고, 그렇게 사고와 깊은 연관이 있는 언어가 바로 '모국어'이다. 그리고 언어는 언어마다의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단어는 뜻만 있는 게 아니고 용법, 다른 단어와 일정한 호응을 한다.

 

영어의 전치사구가 한국어에서 하나의 독립된 문장으로 번역이 된들 무엇이 문제인고? 영어 원문의 의미를 가장 한국어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을 생각은 버려두고 얍삽하게 글자수 줄이는 걸 영어 번역 비법인 양 떠들고 있다. 이런 저질 영어 사교육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빌어먹을... 없을 것 같다.

 

 

'A로 인하여 B하다'는 A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B라는 상황, 사태, 상태 등이 도래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B가 '정말 멋있다'처럼 주관적 느낌이 강하면 어색하다.

 

 

옥션 소송 패소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원고가 참여한 이른바 '옥션 소송'이 패소했다.


1.

 

말걸기도 1만 원 내고 원고가 되어 2년을 기다렸는데 기분 나쁘다.
기분 나쁜 이유는 이렇다.

 

져서 기분 나쁘다.
게다가 옥션이 이겨서 기분 나쁘다.
옥션측 변호인이 김앤장이라는데 김앤장이 이겨서 기분 나쁘다.
1심 판사가 과실은 있어도 위법은 없으니 배상해 줄 필요 없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
세계일보 따위들이 변호사만 돈벌이 시켰다고 원고들 바보 취급해서 기분 나쁘다.
경제지들은 잘못된 판결이라고는 하는데 '보안시장'이 위축될까 걱정되어서 그렇다니 기분 나쁘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 소송대리인 김변호사가 소송원고인들이 모인 카페에 등장하지 않아서 기분 나쁘다.
수만 명의 1만 원들은 분명, 인건비를 포함한 소송 비용에 쓰여졌겠지만 '공익 소송'답게 비용이 공개되지 않아 기분 나쁘다.

 

이 와중에 소송원고인들의 카페에 이런 분석이 있다.
결국 대법에서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하긴 할 텐데
1심에서 원고들 패소시켜야 원고들이 떨어져나가 배상액을 줄일 수 있다고...
1심 원고 14만 6천 명 중 항소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긴 하다.
이 얘기야 그럴듯한 음모론일 뿐이지 싶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2.

 

대한민국에는 기업에 대한, 뭐랄까, 경외심이 가득한 것 같다. '기업이 잘 돼야 너도 좋고 나도 좋다' 따위와 함께 '기업이 흔들리면 큰일난다'는 두려움을 내포한 경외심. 사실 이런 경외심은 사주, 대주주, 몇몇 경영진에게만 100% 이익을 주는 생각일 뿐인데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모토는 이것이 아닌가 싶다.

 

"망해야 할 기업은 확실하게 망해야 한다!"

 

물론, 이 선언과 실현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 법인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서 기업이 망하면 법인이 사라질 뿐이지, 그 동안 엄청난 돈 챙긴 사주, 대주주, 경연진은 안 망한다는 점이다. 이 체제에서 경영진에게 덤탱이 씌울 수 있는 죄목은 배임죄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망할 기업을 살리려고 애쓴다거나, 망하지는 않더라도 기업이 큰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려는 짓은 안해야 한다. 정부 정책이 기업들 배불리는 기획을 하고 국세청과 검찰과 법원이 뒤에서 봐 주고 꼴이란!

 

임금 팍팍 올리고 노동시간 단축하고 이거 어기면 사장 다 감옥에 쳐 넣고, 세금 떼어 먹으면 평생 그 돈의 수천 배 값도록 해서 다시는 기업 못하게 하고, 이상한 물건 팔거나 소비자 물 먹이면 손해배상 하느라 기업 거덜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진정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건 가장 '자본주의다운 나라'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장사 잘하는 기업은 엄청나게 '경쟁력 있는 기업'일 테니까.

 

앞으로 한동안, 아주 오랜 동안 국가 권력은 기업에게 오냐오냐 하겠지만, 그 권력을 변화시켜야 할 인민들은 이제부터라도 기업은 강하게 키우자고 해야 한다. 이 말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인데, 기업이 망하면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 생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민들과 인민들을 대표한다는 정당과 노조는 항상 타협을 한다. 조금이라도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기업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망할 기업을 망하게 하자며, 동시에 실업자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난리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옥션에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특히 '과격한'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그리고 만약 옥션이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면 이번 '옥션 소송'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의식차가 커질수록 국가는 요동치기 마련이다. 지배계급이 그 의식차를 계속 무시하면 혁명이 일어날 테고, 적절히 줄이려고 노력하면 안정적인, 그리고 조금은 살기 좋아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법원도 눈치 보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옥션 소송'에서 지는 일은 없겠지.


3.

 

솔직히 1만 원 내고 기다리면 몇 십 만 원 돼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리 되지 않아서 기분 나쁘다. ^^;

 

 

놈현씨에 대한 잡설

 

가끔 해외 뉴스를 보면, '못사는 나라' 정치 돌아가는 소식 전해준다. '잘사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부패한 독재자 소리 듣는 통치자에 저항하는 시위가 벌어졌다고. 꼭 그 소식과 함께 전해지는 장면도 있다. 그 통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서 반대파에 대항하는 시위 모습. 이런 뉴스 보면 '저 나라 꼬라지 하고는...' 생각들 할 것이다. 정치수준 참 저질에다 민주주의의 'ㅁ'도 못 쫓는다고... 그런데 정말?

 

1. 자살

 

대한민국에서 부패한 전직 대통령 중 하나가 자살을 했다. 완벽한 사실이다. 이보다 진실에 가까운 말은 있을 수 없다.

 

왜 자살했냐고 하니 검찰이 갈궈서 그랬단다. 검찰 배후엔 MB가 있단다. 검찰이 갈군 것도 사실이고 그 배후에 MB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사실이다. 이보다 진실에 가까운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갈궜다고 자살했다니 완벽한 거짓이다. 놈현씨가 갈군다고 자살을 해? 쪽팔려서 자살한 것이다. 앞으로는 더 쪽팔릴 것이기 때문에 자살했다. 실은 앞으로 더 쪽팔릴 게 쪽팔려서 자살한 것이다. 그대로 살았다가는 온전한 위선자가 될 테니까.

 

놈현씨 스스로 결백하다면 자살할 이유가 없다. 당장은 검찰과 언론이 짜고 심하게 괴롭히겠지만 어차피 진실은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백한 놈현씨는 고통스러워도 버티기만 하면 더 많은 걸 챙길 수 있었다. 특히 자존심을. 버티기는 놈현씨의 장점이자 특기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측근이 부패한 걸 잘 알고 있었다. 썩은 냄새가 퍼지자 쪽팔렸던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쪽팔린 것 못 참는다. 애초에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는 두화니 따위가 아니라면 말이다.

 

2. 약자

 

또 많은 사람들이 힘센 MB가 갈구니까 놈현씨가 약자라고 한다. 무척이나 어처구니 없는 대목이다. 놈현씨는 '전직 대통령'이다. 한 마디 하면 기자들이 우르르 쫓아가서 9시 뉴시 탑으로 뜬다. 이 글을 쓰는 말걸기나, 읽고 있는 그대나 한 마디 하면 언론이 쫓아 오나? 9시 뉴스는 고사하고 인터넷 신문 귀퉁이에 몇 줄이라고 뜨나?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고 해서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네언니도 MB에게 개기면 약자 되겠네? 부시의 미국이 후세인의 이라크를 밟을 때, 세계의 평화주의자들이 부시의 미국을 비난한 이유가 '약자'인 후세인을 괴롭히면 안되기 때문이었나? 오바마의 미국에 개기며 핵실험한 김정일의 북한은 약자냐? 놈현씨가 약자면 민주노총이나 환경련은 '절대약자'겠다. 이들을 흠잡고 괴롭히는 것들은 다 나쁜시키들 뿐이겠다.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이유는, 약자는 봉착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죽음

 

놈현씨가 '참 안됐다'는 생각은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는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얼굴을 안다면 더더욱 그렇다. 어찌 무덤에 침을 뱉겠냐. 사람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다. 누구나 죽을 것이니 그렇겠지.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이중적 태도도 있다. 이 또한 누구나 그렇다. 놈현씨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놈현씨가 잘 죽었다고 한다. 주목받는 꼴통보수인사 말고 그냥 보통사람들 얘기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란 게 있긴 하지만 그걸 꼭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비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다들 그런 마음을 갖기 마련이니까. 두화니 사망소식 접한다면 좋아라 할 사람 꽤나 있을 텐데 대체로 욕먹을 짓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정치적 지지와 연결되면 이런 현상도 생긴다. MB의 적 놈현씨가 죽자 MB가 죽인 용산 철거민들의 영정이 다시 등장했다. 놈현씨가 패죽인 그 농민의 영정은 어디로 갔을까? 놈현씨가 농민만 죽였던가? 죽음, 죽은 자에게 불경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은 죽은 자가 죽음으로 모든 걸 청산할 때나 통해야 하는 얘기다. 보통사람들 중에 꽤나 지독했던 작자가 죽어 묻힌 무덤에 침뱉는 자가 있을 때나 불경하지 말라고 할만하다. 놈현씨처럼 죽음과 함께 자신의 모든 걸 청산할 수 없는 역사적 인물에게는 죽음도 평가 대상이 된다. 그네언니 아빠처럼 말이지.

 

4. 슬픔

 

이 글 맨 앞에 정치수준 어쩌고 했는데 그렇다면 놈현씨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거대한 물결을 보고 대한민국의 정치수준은 한심하다고 해야 할까? 핍박의 세월을 선사한 그네언니 아빠가 죽었을 때 대한민국 그 자체가 침통해 했다. 독재시대를 살고 있던 국민들은 확실히 정치수준이 낮다고 하면 되나? 그 이후에 민주화가 되었으니 지금의 민주시민들이 침통해 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제3세계 국가의 억압자를 지지하는 그 나라 대중들은 뭐냐?

 

통치자는, 그자가 설령 핵무기를 손에 쥐고 협박질 해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한다 해도 누군가의 이해를 대변하기 마련이다. 이해만 대변하지 않는다. 지지자들은 감정적 동질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면 안타까와 하거나 슬퍼한다. 지지자들이 많다면 그런 분위기는 더 커질 것이다.

 

근조 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그들이 슬퍼하는 게 당연하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민주시민이라면 당연히 슬퍼해야 한다는 식은 곤란하다.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는 아무 상관 없다. 정치적 주장일 뿐이다.

 

5. 평가

 

놈현씨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만들고 그 적인 MB 등은 나라 망치는 보수꼴통으로 규정하는 자들은 진정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을까? 부패한 놈현씨가 현직 대통령일 때 대한민국의 빈부격차는 심히 심해졌다.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놈현씨는 민생 아작나는 미국에 대한 굴욕적 외교에 자존심 걸었다. MB의 반동적 교육정책을 입안한 자가 놈현씨다. 아마도 소수의 삽집 아이디어를 빼놓고선 MB의 어처구니 상실 정책은 죄다 놈현씨가 닦아 놓았다.

 

이 대목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균형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진 말자. 이게 정확한 균형이다. MB가 놈현씨보다 더 막간다고 해서 놈현씨가 '잘 한 짓'을 애써 찾는 게 균형은 아니다. 사실 놈현씨는 언론개혁 외쳤지만 개혁된 언론은 하나도 없다. 4대 권력 기관, 특히 검찰 개혁 하겠다더니 달라진 건 없다.

 

놈현씨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정치적 긴장과 적대를 바탕으로 자기 이미지를 관리한 빼어난 정치인이었다. 한국정치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놈현씨가 그네언니 아빠와 동시대에 정치했으면 아마도 그네언니 아빠를 이겼으리란 평가도 받는다.

 

6. 효과

 

어쨌거나 놈현씨는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2년 대선에서 놈현씨가 승리한 사건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이다.  놈현씨는 적대관계를 새롭게 재편했고 이 적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흐름을 이끌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한발짝 더 다가갔을까? Oh, no!

 

놈현씨를 통해 드러난 적대, '민주세력 vs. 보수꼴통' 대결은 많은 문제를 덮어버렸다. 놈현씨가 죽은 지금도 이 적대는 유효하다. 놈현씨 분향소에 등장한 용산 참사 희생자는 MB가 죽였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몬 건 MB인 게 사실이지만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엔 MB와 결탁한, 그리고 MB 이전에도 결탁해 온 개발자본의 탐욕이 있었다. 놈현씨 효과는 이 탐욕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한다. 재임시절 놈현씨는 SS사에 무한한 신뢰와 의지를 보냈었다.

 

놈현씨의 효과는 그런 것이다. 심각한 사회 갈등이 있을 때 그 갈등의 본질적 요소는 배제한 채 표면적 요소를 선택하거나, 본질적 요소들 중 자기 정치에 도움이 될만한 것만 골라 갈등의 양상을 재편한다. 조중동과 열심히 싸우면서 비정규직 양산법은 한날당과 합의했었고 친미자주 한다면서 해외파병, 한미FTA,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국민들 협박까지 해댔다.

 

7. 감정

 

놈현씨에 대한 지지나 그의 죽음에 대한 광범위한 깊은 애도의 물결은 유행을 닮아 있기도 하다. '양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려면 당연히 지녀야 할 태도랄까. 주식 따위 재테크, 자녀 교육 방식, 와인 따위처럼 알고 있어야 무식한 사람 대접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놈현씨에 대한 감정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유행과 닮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MB 집권의 진정한 후원자이자 부패했던 놈현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대단히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그 비상식을 다수가 지니니 상식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종교나 파시즘의 광기가 연상된다.

 

이런 감정을 사람들이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패했든 어쨌든 나름 장점을 지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스스로 초라하다고 여기거나 자존감이 부족하거나 꿈을 이루지 못하거나 자괴감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에게 놈현씨는 자신을 대변한 인물일 것이다. 그가 성공해야 자기가 성공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이 정도라면 놈현씨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놈현씨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하는 자로 여기고 분노를 발산할 것이다. 아마 식자라면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고를 작동시키면서 말이다. 이성이 감정의 노예가 된 것도 무시하면서.

 

8. 관심

 

놈현씨 자살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이때 정치적 관심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놈현씨의 치적과 과오 따지기? MB 일당 말살 프로젝트? 이런 것 필요하긴 할 것 같기는 한데 썩 내키지는 않는다. 왠지 놈현씨 효과 프레임에 갖혀 있는 듯하니까.

 

민주노동당은 여기저기에다 검을 플랭카드를 매달았다. 놈현씨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MB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그 플랭카드를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당 품속에서 살지 못하는 건 북한과 미국에 대한 태도 때문뿐인데, 왠지 이 태도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결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죄진 사람처럼 남의 일에 더 요란하게 앞장선다.

 

놈현씨 프레임에 열심히 쫓는 게 지지자들 빼앗아 오는 기법이라고 민주노동당은 항변할 지 모르겠지만 놈현씨의 정치적 성공과정을 살펴보면 덜떨어진 멍청한 생각일 뿐이다. 놈현씨의 성공은 프레임을 (완전히 뒤집지는 않았어도) 재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비이성적 광기에 휩쓸리는 동기, 양태와 새로운 프레임, 대결 구도 형성 방법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된 듯하다. 물론, 언제나 과제였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새로운 주체형성에도. 얼마나 기댈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없었으면 부패한 전직 대통령에게 사랑을 쏟겠나.

 

9. 기타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 받다가 노무현 자살 소식을 접했다. TV를 켰더니 이 사건으로 도배질 중이더라. 특히 MBC는 장난이 아니었는데 역시 '추모'도 '정치'였다.

 

놈현씨 자살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생각난 자는 두화니다. 두화니는 갈 때까지 가고 갖은 쪽 다 팔렸어도 자살하지 않았다. 뻔뻔함도 장난 아니지만 아마도 숨겨 놓은 돈이 많아선가 보다.

 

지난 1주일동안 이 정도 글도 못 쓸 정도로 정신이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만 맴맴 돌던 말들을 꺼내니 조금 시원하다.

 

그러고 보니 놈현씨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도 유행인 듯하다. 어쨌거나 말걸기처럼 놈현씨 죽음에 전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폭력의 순환

 

1.

 

맞아본 사람들이 남을 때리기 쉽다. 그래서 신체를 구속당하고 삶이 피폐해지면 폭력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치 못한 생활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벌이를 위협당하는 상황'이라면 폭력을 휘두르는 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2.

 

국가가 사람들을 갈구면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센 놈이 약한 놈 팰 때 패는 목적을 달성하기 쉬으므로 국가에게서 맞는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약한 사람을 찾아 패기 마련이다.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존나 재섭는 새끼들이 엄청 양산된다. 그래서 사회가 뒤숭숭하고 혼탁해진다.

 

 

3.

 

자꾸 맞다 보면 때린 놈한테 '욱' 할 때가 있다. 국가에 대한 간헐적인 절규, 화염병과 쇠파이프는 그렇게 출현한다.

 

 

4.

 

국가는 자기에게 '욱'하는 '짜식들'을 가만히 둘 리 없다. 노련한 국가는 적절하게 괴롭히지만 서툰 국가는 그냥 마구 팬다. 죽이기도 한다.

 

 

5.

 

멍청한 국가는 자신에 대한 폭력을 조직한다. 소요 내지는 혁명을 부른다. 멍청한 국가가 멍석을 깔아준 폭력 혁명은 성공해도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도 폭력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세운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6.

 

국가는 언제나 폭력적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폭력을 기초로 존재한다. 국가가 언제까지 존속할 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태어나는 세대의 평생 동안에도 국가는 멀쩡할 듯하다.

 

 

7.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폭력적인 국가가 덜 폭력적이도록 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냐, 아니면 폭력적인 국가를 조낸 조질 것이냐. 어느 경우에도 폭력은 순환한다.

 

 

깡패 서열

 

베이징 올림픽 끝났다. 더운 여름에 재미난 구경 많이 했다. 특히, 한국 야구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야구팬을 그만 둔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한국 야구팀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쩜 그리도 재밌게 야구 하냐.

 

'우생순' 여자핸드볼팀이 안타깝다. 준결승전 노르웨이의 마지막 골은 찝찝하기 그지없다. 핸드볼을 두고 언론은 4년만에 한 번씩만 반짝하는 관심이라고 연일 동정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별로 즐기지도 않는 핸드볼이 4년만에 한 번씩이라도 관심을 받는 게 이상한 거다. 그건 순전히 국가 간 힘겨루기 대회인 올림픽 때문인 것이다.

 

 

국가 간 힘겨루기 대회 최종 순위를 보니 거의 깡패 서열이다.

 

● 종합순위 (10위)

 

중국 (51 21 28)

미국 (36 38 36)

러시아 (23 21 28)

영국 (19 13 15)

독일 (16 10 15)

호주 (14 15 17)

대한민국 (13 10 8)

일본 (9 6 10)

이탈리 (8 10 10)

프랑스 (7 16 17)

 

● 메달획득 순위 (20개 이상)

 

미국 (110)

중국 (100)

러시아 (72)

영국 (47)

호주 (46)

독일 (41)

프랑스 (40)

대한민국 (31)

이탈리아 (28)

우크라이나 (27) - 종합순위 11위

일본 (25)

쿠바 (24) - 종합순위 28위

 

( : G8)

 

이번 올림픽에는 204개국이 참가해서 그 중 42.6%인 87개국만 메달을 획득했다. 참가국수의 4.9%에 해당하는 10위까지의 나라들은 전체 메달 958개 중 56.4%인 540개를 챙겨갔다. 3.9%의 G8은 전체 메달수의 39.8%에 해당하는 381개 메달을 거머쥐었다.

 

그 잘난 1등을 해본 선수를 자기 국적으로 둔 나라는 55개국(27.0%)이다. 302개의 금메달 중 196개를 10위까지의 국가들이 차지했다. G9은 121개를 차지했다. 각각 64.9%와 40.1%에 해당한다. 메달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10위까지의 국가들이 메달이라기보다는 1등을 차지하기 위해 무척 애쓴 결과로 보인다.

 

G8 중 캐나다는 19위를 차지했는데 분발 좀 해야겠다. 이스라엘은 동메달 1개로 공동 81위를 차지했는데 이웃들 괴롭히는데 돈발라치기 하느라 운동선수 못 키운 것 같다. 호주는 요즘 부쩍 나라 밖에서 힘쓰는 일 잘하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는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쿠바는 왠지 강해지고 싶은 강박이 느껴진다.

 

어쨌든 '세계질서'를 주무르는 국가들이 올림픽에서도 잘 나간다. 지들이 잘하는 종목에 메달이 더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만 봐도 올림픽은 그들이 '세계질서'를 주무른 결과일 뿐이다. 깡패국가들이 모여서 룰을 정하고 그 룰에 따라 200여 개의 국가를 불러내 경쟁을 시키다니.

 

 

최근 한국 스포츠는 제도화된 종목보다는 개인화된 종목에서 강세를 보이는데, 이는 스포츠 시장에서 투자자들이 비교적 투명하게 성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도 영역이 바보가 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이를 테면 박태환, 김연아, 박세리 이후의 여성 골퍼들과 축구를 비교해 보라.

 

참으로 미스테리한 것은 대한민국이 스포츠 경쟁에서는 대단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나라', '성깔 있는 나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 정도의 성적을 거둘 만큼 돈과 인력을 스포츠에 투자해서 성과를 낼 능력을 지닌 나라가, 어디 딴 데 가서는 자신감에 찬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 않다. 통상이고 외교고 어처구니 없다.

 

한미FTA 협상이나 미쇠고기 수입 협상을 보면 개기는 맛이 전혀 없다. 6자회담에서도 툭하면 따 되는 느낌이다. 당당하지 못해서 그렇다. '쎈놈'한테 살살거리기를 잘하면 떡고물이 떨어지는 줄 안다. '쎈놈'은 살살거리는 놈을 가장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모른다. 약해도 개기는 놈을 어려워 하지.

 

대한민국은 '충분히' 강한 나라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국민국가 질서에서도 어느 수준까지는 인민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스포츠에만 투자하지 말고 정치에도 투자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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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지 꽤 지난 시각에) 졸면서 썼더니 글이 좀 이상하네. 깡패국가 따라잡자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흐흐. 깡패국가만큼이나 '힘쎈 놈'이 깡패국가들에게 마구 휘둘려서 인민을 위태롭게 하는 게 한심할 뿐이다. 힘이 있으면 이로운 데 쓰기를 바라며, 이것은 확실히 정치의 영역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