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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은 한국의 기업(방송사도 포함)에게 월드컵 특수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 준 모양이다. 돈벌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와서는 거대 통신사끼리 민망한 응원가 경쟁을 벌이게 한다. 온갖 사은품 잔치로 월드컵 판매 전략은 끝이 없다. 기업이 돈 벌겠다는데 짜증부릴 게 뭐냐고 한다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 무엇보다도 낯뜨겁고 민망하고 짜증나게 하는 게 바로 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이다.

 

방송사는 이미 언론 보도의 사회적 기능 따위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4주나 남은 월드컵 관련 보도를 내보내기 위해 이 사회의 '갈등'은 씹는다(<레디앙>'9시 뉴스가 스포츠 뉴스로 바뀌었나'). 사회를 구성하는 제각각의 주체들이 갑론을박, 티격태격 하는 갈등이 있어야 사회는 굴러간다. 사실 갈등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현상이다. 언론 보도는 이에 충실해야 '공익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의 보도를, 그 크기와 중요성에 비추어 누가 왜 무엇을 했는지를 심층적으로 제공해야 언론은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2006년 한국 언론은 핑계 거리가 생겨 아주 노골적으로 '공익성'을 부정하고 있다. 씹쌔들. 공익방송이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내뱉는 MBC와 KBS가 SBS보다 재수없다.

 

 

한국의 월드컵 대표팀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팀이다.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는 듯하고 본선에서 매번 잼나는 경기를 펼칠 것으로 기대한다. 즉, 열렬한 응원을 받을 만한 팀이고 16강, 8강, 쭉쭉 올라가는 것도 무척 익사이팅한 일이 될 것이다. 짜증 만땅 2006년도에 그나마 즐거움을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축구팬에 한해서.

 

하지만 난 요즘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16강에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 G조 리그에서도 시큰둥하게 경기를 해서 일말의 기대도 받지 못한 채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다소간 16강 실패의 원인을 찾아낸답시고 각 언론사들이 개지랄 떨겠지만 얼마나 가겠는가. 그냥 축구가 좋아서 월드컵 좋아하는 사람들만 늦은 밤 다른 나라 경기에 몰두하는 조용한(?) 월드컵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론이 주목해야 할 건 월드컵 16강이 아니다. 6월이면 지방선거 직후이다. 줄줄이 부정선거로 걸려들어 시끄러울 때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권력 재편의 본격적 서막이 오를 시기이다. 6월엔 임시국회도 열린다.  FTA나 평택이 갈등도 깊어질 것이다.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월드컵은 월드컵이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의 태도는 별개일 수 있다.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승승장구한다고 해도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공익적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이 그럴까? 월드컵을 방패 삼아 더더욱 자본과 권력이 숨기고자 하는 문제를 열심히 숨길 것이다. 월드컵이 없다 하더라도 일부러 숨기는 게 있기는 하지만 '뉴스 거리'를 위해 가끔은 소개하지 않던가.

 

 

공중파 방송사들이 공익 보도를 저버리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KBS는 그나마 수신료도 받고 나름대로 '한국방송'이라는 자존심도 있으니 좀 덜 밝히긴 한다. 그러나 KBS가 공익방송에 투여한다해도 부족할 수신료를 거의 독점하고 있으니, MBC는 KBS와 SBS 사이에서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가장 공익적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공중파 방송인 EBS는 수능 교재 팔아서 돈 안되는 프로그램 만들고 있으니, 한국의 공중파 방송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디지털 방송을 미국식으로 합의해준 방송계는 그 때문에 지상파 DMB 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위성 DMB와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위성 DMB의 위험성은 가장 공공성이 보장되어야 할 통신 영역에 가장 상업적인 통신사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이 썩을 만큼 많은 통시사와 DMB로 경쟁해야 할 공중파 방송사들의 운명은 무엇이 될까? 이 바보 새끼들은 이런 경쟁이 한국의 공익 언론의 미래를 갉아먹을 걸 알면서도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공중파 방송사들에게 돈 될 일만한 것들은 되도록 없었으면 좋겠다. 돈이 더 궁해서 피골이 상접할 정도가 되어야 그 쯤 가서 '공익성'을 내걸고 언론 개혁을 얘기할 것 같다. '돈 버는 일 포길할테니 공익 방송은 보장해 달라'며.

 

 

그래서 그 1탄이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졸전이었으면 좋겠다. 실질적 효과도 없는 허망한 기대일 뿐이라도 좋다.

 

 

대추리... 보면서 든 생각

 

트랙팩님의 [대추리에 평화를 ! 릴레이 선언] 에 관련된 글.

대추리... 보면서 든 생각.

 

1. 이 나라의 우파는 자존심도 없다.

 

2. 이 나라의 우파는 애국심도 없다.

 

3. 놈현과 윤광웅은 군대가 뭔지 모른다.

 

4. 윤광웅 살려줬던 민주노동당은 각성부터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밤새 욕이나 할거다.

개새끼들!

 

 

광화문에서

 

5월 4일(목) 오후 7시. 대추리 침탈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가 있었음.

광화문에서.

 

짝꿍하고 저녁 먹느라고 좀 늦게 도착했는데,

정확한 장소를 몰라 교보생명 근처에서 찾음.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길래 따라 갔더니 동아일보 앞.

비염 땜에 치료 받고 있는 말걸기는 최대한 좋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외곽에서 뺀질뺀질.

 

궁금했던 거.

왜 여기서 이러고 집회하고 있지?

 

바로 근처에서는 'Hi 서울 축제' 일환인지 청계천 연등제가 있었고,

저녁부터 사람들은 청계천 근처에 바글바글.

다음날이 휴일이긴 한가 보군.

'Hi 서울 축제' 전야제는 세종로 여기저기 커다란 스크린에서 방송.

효리의 춤도 보이더군.

(효리의 춤은 '퇴폐'보다는 '일상' 혹은 '일상의 적막'으로 느껴졌음.)

 

내 느낌은,

거대한 빌딩 숲 여기저기서 돌아가는 도심 한가운데 시위대가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도심의 일상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수백 명이 모여도 고독, 고립으로 여겨질 뿐 반항이나 거부, 개떼같은 개김과 같은 느낌은 못 받았음.

다만,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짜증만이 감성의 영역인 듯.

 

2시간이 넘는 집회 시간,

즉 경찰차가 둘둘 둘러싸고도 남는 시간.

이 시간이 지나서야 진출을 도모.

허리가 잘려 KT와 교보생명 사잇길까지 진출.

이 때는 교통 체증도 없는 깊은 밤 술레잡기 같은 느낌.

솔직히 이때만 잠깐의 긴장과 재미를 느낌.

 

대추리 침탈에 대한 보복, 혹은 그로 인한 격렬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그래도 좋고),

어떤 방식이든 '난리'를 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기냥 2~3백 명 뿐이라도 저녁시간 차들로 엉킨 세종로 일대를 마비시키든가.

30분 안에 다 잡혀가더도.

그럼 나중에 온 1~2백 명이 또 '난리'치면 되잖아.

 

지나가는 시민한테 '니들은 자존심도 없냐'는 말 한 마디 값은 했어야 하지 않나 싶은거지.

이 정도는 되어야 대추리에서 생명과 안전을 위협 받은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아니었는지.

 

하는 것도 없이 블로그와 인터넷과 TV를 보고선 나름대로 부글부글 대다가

간만에 출두한 집회였음.

 

 

&quot;여선생이 너무 많아&quot;

 

突破, 늘 그랬듯이님의 [[이황현아] 왜 '여성노동권'인가] 에 관련된 글.

 

위 글을 읽고 생각난 김에 쓰는 글. 뭐, 꼭 트랙백까지 할 것인가 싶으나 '연상'이 되어.

그리고 진보네 블로그에서 이황현아씨의 글을 읽을 수 있어 무척 반가왔음.

 

 

1.

 

"여선생이 너무 많아."

 

내 짝꿍은 2개월짜리 신입 중등교사다. 직장도 몇 개 옮겨다니면서 결국 교사의 꿈을 키웠고 올해야 그 꿈을 이루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1주일짜리 연수를 갔는데 190명이 넘는 국어과 신규 교사 중 남자는 몇 안되었단다. 그리고 학교로 출근을 했더니 거기도 남자선생이 훨씬 적단다.

 

"여선생이 너무 많다"는 말을 내 짝꿍이 한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세간에 떠도는 말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서도 듣는 얘기다. 더욱 기가막힌 건 "여선생이 너무 많은 건 문제이니 여선생 남선생을 똑같은 수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도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에 남선생이 별로 없어서 문제를 겪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종의 '아빠' 모델이 학교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성장에 장애가 된다나? 뭐 꼭 차별적인 성역할이 아니다 하더라도 여자랑 남자는 다르긴 하니까 어른 여자와 어른 남자의 행동이나 감정을 동시에 배우는 것도 좋다고 할 수는 있겠지. 근데 이런게 뭐지 잘 모르니, 여선생이 다수인 학교에서 정말 학생들의 성장에 어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교사와 같은 공공영역(사립교 빼고)에서 여성들이 훨신 많은 이유가 뭔지 알고는 있으면서 "여선생이 너무 많아" 따위의 말을 뱉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결국 여선생 남선생 동수로 뽑자는 주장을 하기까지 이르는데 난 이 주장은 학생들을 위한 생각이 아니라 공공영역으로 밀려들어오는 여성, 즉 남성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여성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짝꿍이 예전에 다니던 회사도 산업계 성분업상 여성들이 다수인 기업이었는데, 소위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리해고 되었다. 내 짝꿍도 그 중 하나였다. 정리해고로 회사 밖으로 쫓겨난 동료들의 대부분은 '정규직으로 정규직으로'의 강력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으로 고향엘 내려갔다. 그 바닥에서 갈고 닦은 경력으로 훨씬 안정된 동일계 회사로 간 동료도 있다. '아이를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프리랜서'가 된 동료도 있단다.

 

'여성들이 안정적 일자리로 꼽는'(이건 여성들의 생각이라는 뜻이 아니다) 공공영역은 시험을 치러서 얻는 일자리기 때문에 '차별'이 가장 적은 일자리로 볼 수 있다. 기업에서는 채용에서부터 차별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학력이 비교적 높은 여성들이 교사나 공무원시험에 응시한다. 물론 이런 기회는 저햑력, 저소득, 고령 여성은 제외다.

 

모든 다른 영역에서 여성을 밀어내 놓고서 공공부문에서 여성이 많다고 한탄하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다. 진정 학교에서의 교육을 걱정해서 여선생 남성생 똑같이 뽑길 바란다면 모든 기업에서 여-남 모두에게 똑같은 질의 일자리를 똑같은 수로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마 이 얘기하면 '기업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면서 '능력 있는 사람을 우선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걸? 임용고시나 공무원시험(5급은 아니겠지. 이건 또 다른 사회적 배경이 있어야 가능하니까)에서는 확실히 여성이 능력 있어서 통과한 건데 그건 또 아니란다.

 

2.

 

내 후배이기도 한 짝꿍의 친구는 지금 교사다. 근데 비정규직 교사, 즉 기간제 교사다. 사립학교에서 근무하는데, 하는 일은 다른 정규직 교사랑 다를 바가 없단다. 이 친구는 요즘 고민이 많단다. 과연 교사가 자신의 길인가에 대한 고민. 돈을 벌어야 하니까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는데 그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교직사회라는 게 실망스러운 모양이다.

 

이 친구가 겪었을 법한 일상을 나와 짝꿍이 목격한 적이 있다. 신촌에 냉면 잘하는 집이 있어서 가끔 가는데 이곳은 한우전문 식당이다. 진짜 고급스런 음식인데 왕 비싸서 나름대로 주머니 두둑한 사람들이 회식하는 모습을 곧잘 본다. 옆자리에 7-8명이 앉아서 육사시미를 먹으며 술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하나만 여성. 20대 중반 정도. 나머지는 젊은 사람에서부터 아저씨까지 골고루. 분명 직장 회식. 호칭을 '선생' '부장' 따위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교사들 같았다. 공립교 교사들은 이렇게 비싼 데 오길 꺼리기도 하고 남성 비율이 월등한 것으로 보아 사립교 교사들임이 분명했다. 오가는 얘기라고는 듣기 민망한 연애 얘기 따위였는데 그들 눈에는 동료 여교사가 없는 듯했다. 아니면 그 사람 들으라고 더 뻥튀기며 얘기하나? 사립교에서 기간제 교사하는 그 친구도 거절하기 힘든 회식 자리에 불려다닌단다. 임용고시 보려면 공부도 해야 하는데...힘이 없으니 어쩔 수 있나...이렇게 포기하면서도 매번 괴로움과 후회로 학교생활을 해야 한다면 여성으로서는 사립교는 지옥이다.

 

반면 짝꿍과 이 친구의 동기 녀석 하나는 사립교 선생인데 그 학교도 뭐 별로 분위기가 좋지는 못한가보다. 학교 생활을 썩 맘에 들어하지 않는 이 녀석은 내 짝꿍을 부러워한다. 임용고시 합격해서 공립학교 갔다고. 근데, 이 녀석은 임용고시 공부하기 싫어서 사립고 갔고, 그것은 남자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약간 도둑놈 심보가 보인다.

 

3.

 

내 짝꿍 옛동료는 애기 땜에 프리랜서가 되었다 했다. 학습지를 만드는 일은 그 과정 중 일부는 집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렇게 되었다. 일이 많은 철과 그렇지 못한 철 사이의 소득 차이는 불안의 원인이 되겠지만 애 키우는 입장에서 그나마 좋은 일거리일 수도 있다.

 

지난 일요일 밤 <위기의 주부들 2>에서 리네트가 겪는 일이 문득 생각난다. 리네트는 결혼 전 나름대로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훌륭한 주부/엄마로 살고 싶어서 직장을 버리고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았다. 여기까지는 시즌1의 내용이다. 남편의 실직과 함께 다시 옛날의 커리어 우먼으로 돌아가 회사일을 한다. 여기에는 부부의 역할 바꾸기 합의도 있었다.

 

셋째 아들 파커가 엄마의 부재에 충격을 받아 엉뚱한 사람을 상상으로 만들어 내더니 유모라 한다. 엄마로서의 자존심도 상하고 경쟁심이 유독 많은 리네트로서는 두고보기 힘든 일이었다. 리네트는 회사일도 일찍 끝내려고 무지 애쓰며 일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와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한다. 지난 회에서는 파커의 유치원 입학식에 가지 못해 안절부절했는데 결국 사무실에 웹캠을 설치해서 파커 곁에 있지 못함을 보상했다.

 

아빠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자주 출장을 갈 때는 아빠의 부재는 별일이 아니었다. 근데, 엄마가 출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는 이 난리다. 어린 아이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유독 엄마만큼은 자기를 챙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어린 아이 때부터 머리와 심장에 새겨지는 건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나레이터는, 일이 많아 늦게 들어와도 아빠는 죄책감이 없고 엄마는 죄책감을 갖는단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

 

 

'활동가'를 정의해 봅시다

 

[초짜 블로거의 도발적 제안]

진보네 블로거 여러분, 함께 '활동가'를 정의해 볼까요?

 

 

자, 이왕 지른 김에 한번 쭈욱 가봅시다. 행인님의 [기냥...] 때문에 얘기가 많이 번졌지요. ["기냥..."에 대한 변명]까지 하시고. 게다가 제가 '활동가의 욕망'에 대해서도 씨부리구요.

 

아마도 여기 진보네 블로거 여러분들은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거나, '활동가'는 어떠하다는 생각들을 이래저래 많이 하고 계실 것 같군요. 뭐, 꼭 스스로 '활동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익적 목적으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하고 계시다면 관심을 가지실만한 주제이기도 하겠군요.

 

'활동가'라는 게 한편으로는 정체성이나 삶의 가치, 이념과 관련한 문제라서 골치 아픈 주제일 수도 있겠군요. '활동가'가 무엇인지, 살면서 각자 정리는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집단적으로 정의해 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는 별달리 '계기'라는 게 따로 없으니 대충 말 나온 김에 해보자구요.

 

 

'활동가'를 정의하기 위해 제가 먼저 화두를 먼저 던지겠습니다. 이 화두에 매이지는 마세요. 기냥 제가 던지는 겁니다.

 

* * * * *

 

1. '활동가'는 '노동자'인가?

 

- 단체나 정당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상 근로자이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가? 혹시 이는 단체나 정당이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인가?

- 퇴직금 문제로 말걸기는 심적, 경제적 고생을 하고 있음. 벌써 민주노동당 상근자들 중 적잖은 사람들이 퇴직금을 요구하는 말걸기 등등을 '활동가도 아니다'라고 하고 있음.

 

2. '활동가' 사이에도 '계급'이 있는가?

 

- 이 사람은 스탭, 저 사람은 대표자.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 보아도 스탭하던 사람은 몇년이 지나도 대체로 스탭질하고 있음. 물론, 그 바닥을 떠나지 않았다면. 한편, 대표자 하던 사람은 새 연대체가 등장할 때마다 수식어 바꾼 대표가 됨.

- 가끔 '활동가'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지 않나 생각됨. (1)큰 의미에서의 활동가=공익적 목적의 활동을 하는 자, (2)작은 의미에서의 활동가=대체로 공익단체에 소속된 자로서 직업적 성격을 띠며, 공익활동의 스탭 역할을 하는 자.

 

3. '활동가'와 '전문가'는 구별되는가?

 

- ㅇㅇㅇ변호나사, ㅇㅇㅇ교수는 활동가인가, 전문가인가?

- 변호사나 교수가 전문가이고, 말걸기나 행인은 활동가인가?

 

4. '활동가'는 직업을 의미하는가?

 

- 먹고 사는 문제는 아르바이트나 단체에서 지급하는 활동비로 해결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공익활동 뿐인 사람들이 '활동가'인가?

- 그럼, '노조 활동가'는 뭔가? 전임자나 해고자만을 의미하는 않는 듯한데.

 

5. '활동가'의 윤리적 덕목은 무엇인가?

 

- '활동가'가 '활동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 '활동가'가 가져서는 안되는 생각은 무엇인가? '활동가'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은 무엇인가?

 

6. '활동가'는 자신을 위하여 활동하면 안되는가?

 

- '활동가'는 언제나 '이타적'이어야 하는가?

- '활동가'는 자신의 욕망(어떤 종류의 것이든)을 표현하고 분출하고 이를 만족하기 위한 행동은 자제해야 하는가?

 

7. '활동가'는 '정치인'과 무엇이 다른가?

 

- 공익활동은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음. 이들을 '정치인'이라고 함. '활동가'라고 하든 '정치인'이라고 하든 모두 '정치적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데 둘은 정말 다른가?

 

* * * * *

 

열거한 질문은 '활동가'를 정의하기 위한 핵심 개념만은 아닌 듯 하군요. 그러나 현실에서 느끼고 부딪히는 문제들인 것 사실입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저와는 다른 화두를 갖고 계시겠지요. 진보네 블로거 여러분도 한번 펼쳐보세요. 이렇게 마구 던지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선명해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소위 '활동가'에게 싹트는 '정치적 욕망'

 

행인님의 [기냥...] 에 관련된 글.

행인이, "가끔은 내가 기냥 확 변호사고, 교수고, 국회의원이고 해버릴까 그런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그래놓고선, "나약하게도..."라는 말은 붙였다.

 

 

소위 '활동가'라는 직업 혹은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갖는 '정치적 욕망'의 발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건 내 맘대로 구분한거다.

 

'활동가' 직업을 유지하다 보면 죽죽 올라가다 멈추는 시점에 다다른다. 이 바닥에서 해볼 건 다 했다는거다. '교수'나 '변호사' 등 이 사회에서 알아주는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표'까지 해먹기는 어렵고 고작 '처장'이나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이쯤 되면 '미래'를 생각한다. "나도 이 나이에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그래서 한 급수 업그레이드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런 저런 방안을 모색한다. 놀라운 정치적 막후 교섭력으로 힘센 정당들과 거래를 트며 '시민사회의 이너써클'이 된다거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유학을 떠난다거나, 아니면 '공천'에 기웃거린다.

 

두번째는, '전문가' 집단의 그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작태에 치를 떨다가 갖게 되는 욕망이다. "이것들한테 비비느니 내가 차라리 국회의원하겠다." 이쯤 되면 국회의원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도 안다. 행인이라면 변호사나 교수가 되는 방법도 잘 알거다.

 

 

위의 두 가지 경우는 겉보기에는 같은 결과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가 더 '순수한 욕망'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애초의 계획은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옥 구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렇게 둘 사이의 경계가 차츰 흐려진다 해도 두 가지 욕망은 다르다. 동기에서 다른 점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욕망이란 건 '순수'한 게 없으니까, '순수'의 기준은 쓸데없다. 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도 구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자기가 좋은 게 아니면 국회의원이고 나발이고 할 이유가 없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문제 해결의 의지'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고 그 지위를 이용해 사회 문제에 접근하여 정치 활동을 하는 자와, 정치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는 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건 사실 어렵다. 그러나 현실에서 직관으로 정치인들을 평가해보면 선명하다.

 

 

나도 소위 '정치적 욕망'을 갖는다는 건 활동가로서 뻘쭘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당에서 일하다 보니 '정치적 욕망'을 갖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라는 걸 깨닫긴 했지만 나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차라리 내가 국회의원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라는 것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보수정당 국회의원 흉내나 내면서 '정치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아 정치 활동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반세기 이상 국회가 쌓아놓은 부르조아지 정치 문화에 익숙해지는 게 수준높은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뼈속 깊이 새기며 국회를 드나드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저것들은 원래 좌파가 아니었군... 내가 속았다... 쪽팔리게 정치를 저렇게밖에 못하나... 좌파라면 부르조아지 정치 문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지... 쯧쯧... 바부팅이들... 저런 것들보단 내가 훨씬 낫겠다. 내가 국회의원하는 게 낫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행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을거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결코 '나약'한 게 아니다. 지금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피하고 싶어하는 생각이 아니다. 혹은 무엇이든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지위를 얻겠다는 생각도 아니다. 난 오히려 활동가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실제로 일하고 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아내고 조직을 하고 연구를 했던 활동가들이 '정치적 욕망'을 갖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활동가들이 많이 생겨야 진보진영 내의 정치적 경쟁이 합리화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씩 바닥을 박박 기는 활동가들이 '순수성'이나 '고상함'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다 동원해도 활동가들이 국회의원이나 전문가 앞에서 초라해지는 상황(이건 결코 주관적인 초라함이 아니다!)이 반복되는 걸 경험하면서도 그들을 뭉개버릴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게 오히려 어리석게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정치적 욕망'을 키우는 게 별달리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에 어울리지 않는 활동가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욕망'이란 진정 '사회 문제의 해결'일 것이다. 이런 걸 활동가의 자세나 윤리, 정치적 자세 따위와 연관짓지 말고 '성격'이나 '취향'으로, '나름대로의 삶의 선택'으로 연관짓는 문화가 있었으면 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활동을 하는 자와,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는 자를 구별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게 한국 사회, 특히 진보진영이 합리화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치이다. 이 조치를 위해서는 정치의 영역에 손을 많이 대야 한다. 손을 대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정치의 영역에 스스로 끼어들기 하는 것이다. '내가 나서서 저것들 교통정리 해야지'하는 생각, 그 의지, 그 실천.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내가 장관이 된다면'하는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성격과 취향에 맞아 진짜 도전하기도 할테니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름의 활동 방식은 있으니까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가끔 생각해 보시라! 행인이 국회의원 되면 국회가 어찌될까? 재밌겠다~아!

 

 

하인즈 워드의 복수

 

하인즈 워드 열풍이 일고 있다. 워드 덕(?)에 정치권은 혼혈인 차별을 금지하고 복지를 증진하는 법을 만들겠다 한다. 교육부도 다문화, 다인종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한다. 모든 언론이 워드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경복궁에서 신발 벗고 마루에 올라간 일까지 보도한다. 이 난리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워드 열풍도 곧 식을 것이다. 그러나 워드는, 열풍을 일으킨 다른 스포츠 스타와 달리 한국사회의 웃기는 작태를 가장 잘, 그리고 가장 한국사회다운 방식으로 드러내 준다.

 

 

워드의 어머니인 김영희씨는 펄벅재단 방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단다.

"한국 사람 안 쳐다보고, 생각 안 하고 살아온 30년이었어.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 여기선 누가 파출부라도 시켜줬을까?… 이제 와서 우리 워드가 유명해지니 관심을 참 많이 가져준다. 좀 그래. 부담스럽지 뭐. 세상 사는 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

김영희씨의 말이 있는 그대로의 한국사회의 진실이다. 김영희씨가 하인즈를 혼자 키우게 되었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하인즈는 지금 이 땅에서 차별받는 여느 혼혈인과 마찬가지로 하류 국민에도 끼지 못한 채 검둥이 소리나 해대는 사장 밑에서 세상의 온갖 불평불만을 안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초등학교나 졸업했을까?

 

한국사회는 하인즈 워드에게 성공을 위한 경쟁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뻔한 사실이 아닌가. 그랬을 한국사회가 경쟁을 허락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워드에게 '한국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성공하지 못한 혼혈인은 한국인이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이 점은 김영희씨 뿐만 아니라 워드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워드도 한국사회의 추한 모습을 스타다운 여유와 자신감으로 지적하고 있다.

“혼혈인으로 태어난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창피한 것은 혼혈이 아니라 혼혈을 차별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부끄러운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

정말 자랑스러울까? 슈퍼볼 MVP 이상의 관심과 환대를 보내주는 한국사회가 앞으로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거라서? 그럴수도 있다. 그래나 이건 나중 일인대다가 비지니스는 비지니스니까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한국인 이민 사회의 차별, 자신이 의지하는 유일한 가족 어머니의 고통, 부끄러운 자신을 딛고 성공한 워드는, "해 준 게 뭐 있다고 이제와서 지랄이야!"가 아니라, 열광하는 한국사회, 자기를 이용하고 싶어하는 언론과 정치권 등등 앞에서 "자랑스럽다!"는 말로 의연하게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니네가 차별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무시하는 넘들에게 성공해서 복수하리.

 

 

재미있는 건 이 화려한 복수에 한국사회, 한국의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는, '당했다. 쪽팔린다'가 아니다. 이들에게도 여유가 있다. 기회는 찬스다. 적당한 반성의 제스처로 자기 장사에 몰두하고 있다. 이 또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 또한 놀랍다. 사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놀란다.

 

정치권의 혼혈인 차별금지법이나 복지증진법이니 따위가 잘 추진될까? 그거 적당히 만들고 말거다. 어쩌면 정치적 이용을 위해 한 2년 국회에서 뱅뱅 돌릴지도 모른다. 아마 이 법 추진이 반가운 사람들과 이들의 이해를 위해 싸우는 각종 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까지 학교에서 적응 못하고 상처만 깊어가는 혼혈아이들을 위한 실질적 조치도 방기했던 한국의 정부와 정치권, 언론이 주둥아리 놀리는 거 말고 뭘 더 하겠는가. 그리고, 혼혈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금지법이나 복지증진법을 제정한다고 한들, 이 법들은 지속적으로 '혼혈인'이라는 하류 한국민의 딱지를 붙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도 차별 해소에 대한 국가의 정책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혼혈인, 나아가 타인종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열리기는 할 것이다. 하인즈 워드의 성공과 복수가 계기가 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작은 변화가 하인즈 워드에서 시작했다고 봐서는 안된다. 한국사회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싸움은 오랜동안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싸움과 함께 한국의 지배계급 또한 단일민족-단일국가 이데올로기가 앞으로 그들의 지배를 위협하리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저임금으로 착취한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바로 이민이고, 이민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타인종과 혼혈인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배려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인즈 워드의 '금의환향'(한국은 워드의 고향이 아니다!)은 그 자신과 어머니에게는 명예롭고 통쾌한 복수이고,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에게는 장삿거리고, 인종차별이 불쾌했던 자들에게는 민망함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에 분노하고 투쟁했던 자들에게는 무엇이어야 할까.

 

 

스크린쿼터 축소가 내게는 어떤 의미냐면...

 

스크린쿼터의 축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세 가지다.

 

1. 미국에 자존심 상하다 -  미국이 축소하라니까 축소하는 것임.

2. 한미 FTA가 진행된다 - 스크린쿼터 유지는 FTA의 걸림돌이었음.

3. 한국 영화자본에 위험부담을 주다 - 스크린에 대한 최소 독점 지배력이 반으로 줄어듬.

 

 

한국 인민으로 보아 스크린쿼터 자체가 반토막 나는 것은 아무런 손해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국내 영화자본의 최소 보장 독점 지배력이 줄기 때문에 국내외 배급사 간 경쟁으로 오히려 다양한 영화가 상영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온다고 해서 좋다고만 할 것은 아닌 게, 몽창 상.업.영.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건 보장되어야 하지만 상업성만 추구하는 영화는 쓰레기에 가깝다. 뭐, 쓰레기도 나름의 재미를 주지만 그런 쓰레기가 극장의 주류라면 문제가 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문화다양성 보호에 별 악영향이 없다. 한국 영화 생산의 유지.발전은 국제적으로 보면 문화다양성의 보호이다. 그래서 스크린쿼터가 문화다양성을 보호하는 장치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국내영화 쿼터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만 해서 문화다양성이 침해될 리는 없다.

 

국내 영화자본은 스크린쿼터 40% 유지가 자기 자본의 확대(결코 '유지'가 아니라)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보인다. 이런 시각은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과 이의 일부 내용을 담은 법률안에서도 드러난다.  이 협약은 일반적으로 훌륭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영상물(영화)에 대한 조항은 친영화자본의 입장이다.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으나 그 조항 내용의 핵심은 여러 국가의 자본이 함께 영화를 만들면 그 영화에 참여한 자본의 국가에서 모두 자국 영화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소위 '한류'에 편승(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이데올로기)하여 타국의 자본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이 영화를 한국에서는 스크린쿼터 40%를 발판으로 안정적으로 팔아먹고, 타국에서도 무역장벽없이 팔아먹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외국 자본와 적당히 짜옹을 하고.

 

 

그래서, 한미 FTA가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한국 정부는 스크린쿼터 축소로 미국의 양보를 받아냈어야 한다. 쪽팔리게 FTA 협상 테이블에 나가려고 스크린쿼터부터 축소하고... 쪽팔리지도 않나 보다.

 

두번째로는 누구의 말처럼럼 영화자본 독과점에 대한 철저한 규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제작-배급-상영 자본을 철저히 분리하고, 모종의 관계(이를 테면 CJ-CGV)도 못 갖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에 대한 규제도 생각해 볼 거리이다. 한국인 이미 대부분의 영화관이 멀티플렉스인데, 이 상영관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정 비율 이상의 스크린수 혹은 객석수에 같은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한다거나. 이 방안은 당에서 처음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모든 영화관계자들(영화관련 시민단체 포함)이 개거품 물고 반대하는 것으로 보아 잘 다듬어서 정책화하면 당 뜬다.

 

네번째로는 소자본 영화(인디영화)에 대한 지원 체계가 있어야 한다. 제작비 지원이 증액될 필요도 있지만 공동-공공배급망을 구축하고 상영에서도 인디영화(혹은 예술영화/저예산영화) 쿼터를 위의 멀티플렉스 규제와 연동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다섯번째로는 영화제작 구조의 합리화 방안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일단 영화제작 종사자들의 임금 구조 개선, 사회복지 제도로 편입 등이 기본일테다. 아마도, 독점규제와 새로운 쿼터로 규제를 시작하면 자본의 거대 영화에 대한 투자가 위축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다 보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돈을 아껴쓰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이 점은 이미 자기들끼리의 갈등도 겪고 있으니까. 갤런티, 광고비, 프린트비 등등.

 

 

이러한 대안들을 당이 정리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제작년부터 인식은 하고 있었으나 이런 저런 상황(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국익을 앞세운, 그리고 스타를 앞세운 영화자본에 쓴소리 한마디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한미 FTA만 아니라면 그냥 스크린쿼터 줄이는 대신, 한국 영화의 발전, 한국 문화다양성 증진을 위해 이러저런 정책을 펼치라고 떠들면 좋을텐데...

 

영화자본 따위와 함께 열라 싸우고 있는 당과 진보진영은 지금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싼 미묘한 배경이 무언지 진지하게 생각이나 할까...

 

 

[옮김] 당원게시판 선거관련 글 강제 이동 공지에 대한 이의 제기

지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선거 때 작성한 문서이다.

이거 작성할 때 얼마나 씩씩거렸는지 뒷골이 다 땡겼다.

하지만 당 선관위에 들이밀었더니 너무 싱겁게 끝났다.

 

민주노동당은 매번 주요한 선거 때마다 게시판 갖고 장난한다.

2004년 비례대표 후보 선출 선거에서는 게시판 실명화로 성질을 부렸었다.

이런 글은 잘 모셔두어야 한다.

다음에 또 그럴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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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 선거운동본부

 

□ 날짜 : 2006년 1월 4일(수)

□ 발신 : 김정진 선거운동본부

□ 수신 : 중앙선거관리위원장

□ 참조 : 중당선거관리위원회 간사 및 홍보위원회 인터넷실장

□ 제목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당원게시판 선거관련 글 강제 이동 공지에 대한 이의 제기


        1. 당원들의 의사가 올바로 반영되고, 후보들간의 차별성이 드러나며, 안으로는 혁신, 밖으로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거를 위해 애쓰시는 선거관리위원회에 경의를 표합니다.


        2. [김정진 선거운동본부]는, 1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명의로 공지된 <당직선거관련 글쓰기를 선거게시판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3. [김정진 선거운동본부]는 중안선거관리위원회가 위 공지를 철회할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이에 대한 회신을 빠른 시일 안에 해주시어 선거운동에 혼선이 없기를 바랍니다.


        4. 이에 [김정진 선거운동본부]가 판단하는 위 공지의 문제점를 아래와 같이 제시합니다.



-   아   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당원게시판 선거관련 글 강제 이동 방침의 문제점



① 이 방침은 <당규 제24호 선거관리 규정> <선거관리 규정 시행세칙> <2006년 동시당직선거 선거공고(이하 선거공고)>에 위배된다고 판단합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당규 제24호>의 제21조 제1항, 제31조 제1항 및 <선거관리 규정 시행세칙> 제3조 제2항에 따라, 이번 동시당직선거 선거인명부 작성 기준일의 4일 전인 12월 16일에 <선거공고>를 공지하였습니다. <당규 제24호> 제21조 제1항 및 제31조 제1항은 선거운동의 방법을 공고하도록 하고 있고, 이에 따라 “각종 게시판 등을 이용한 선거운동 : 당규 제24호 36조(금지사항)에 저촉되지 않는 한 제한 없음.”을 <2006년 동시당직선거 선거공고>를 통해 공지하였습니다.


<선거공고>에서는 각종 게시판 등을 이용한 선거운동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공지하였으나, 1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명의로 공지된 <당직선거관련 글쓰기를 선거게시판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에서는 중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서의 선거운동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을 공지하여 <선거공고>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당규 제24호> <선거관리 규정 시행세칙> <선거공고>와 위배되는 내용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과정에서 임의로 공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임의로 공지한 내용과 부합하지 않은 행위를 하였을 경우 구체적인 제제 수단을 행사하겠다고 알리는 것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각 선거운동본부와 당원들의 자유로운 선거운동과 의사표현을 심히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



②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한하겠다는 “당직선거관련 글쓰기”는 그 기준이 매우 모호하여 선거과정에서 큰 혼선을 야기할 것입니다.


당직선거는 당원들이 후보들의 정견을 듣고 이해하여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각 후보의 선거운동원과 지지자들은 당원들로부터 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의사표현을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당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표출됩니다.


무엇보다도 당직선거에서 표명하는 각 후보들의 정견과 이에 대한 토론은 당원들의 일상적인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당의 노선, 당의 재정 문제, 당내 정파 문제, 현안 대응 사업 등은 선거에서 집중적으로 제기되기는 하지만 당원들의 일상적인 관심사와 다르지 않으며, 당원들은 이러한 내용을 꾸준히 당원게시판에서 의견을 밝히고 토론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직선거관련 글”을 후보나 선거운동본부가 게시하는 글로 한정할 수도 없으며, 당원들이 명시적으로 ‘선거’나 특정 후보에 대한 문구를 표현한 글로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즉, “당직선거관련 글”의 기준이 모호하여, 당원게시판으로부터 강제 이동해야 할 대상을 무자르듯 골라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준이 모호한 가운데 강제 이동의 조처를 취할 경우, 이 조처에 대한 갈등이 표출되어 선거과정에서 필요한 의견의 교환과 비판이 오히려 위축되고 불필요한 분란이 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중앙선거관리원회가 밝힌 ‘당원들의 의사가 올바로 반영되고, 후보들간의 차별성이 드러나며, 안으로는 혁신, 밖으로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거’와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③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당원게시판에 선거관련 글쓰기가 본격화하게 되면 당원게시판 본연의 역할이 축소내지 마비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당원게시판의 본래 기능을 심각히 왜곡한 주장입니다.


‘당원게시판 본연의 역할’은 당내 여론의 형성입니다. 2006년도 당직선거는 향후 2년의 당운영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당직선거 시기는 당의 노선을 비롯한 당내 모든 문제가 드러나고 토론하고, 때로는 격론을 벌이는 시기입니다. 다양한 의사표현이 집중적으로 분출되는 시기이고 이것이 바로 당내 여론의 형성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당원게시판에 선거에 대하여, 선거로 인해 집중적으로 제기된 당내 문제에 대한 내용의 글이 무수히 쏟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선거와 관련한 글을 선거게시판으로 한정하게 되면 오히려 다수 당원들의 관심이 쏠리는 주제가 당원게시판에서는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선거 시기가 아닌 때에는 당원게시판에서 오가던 얘기들이 선거 시기라고 하여 당원게시판에서 오갈 수 없다는 것은, 일상적이고 유력한 당내 여론 공간 형성 공간인 당원게시판의 본연의 역할을 상실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선거와 사뭇 멀어져 있거나 무관한 당 안팎의 의제나 목소리가 선거관련 글로 인해 뭍혀버리게 되는 안타까움을 염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난 6년간 당내에 민감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당 홈페이지 게시판(실명게시판과 당원게시판)은 그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폭주하면서 여타의 문제들이 뭍혀버리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 하반기기와 2005년 초에 당원게시판을 달구었던 ‘당직자 폭행 사건’과 관련한 글들로 인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또 다른 주제들의 글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떠한 조치도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는 있으나 ‘게시판이’라는 단선 구조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한국 사회의 그 수많은 게시판 운영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염려는, ‘선거의 과열’으로 보여집니다. ‘선거의 과열’은 게시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시판이 이른 바 ‘지저분해지는 것’은 규제를 통해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당의 정보통신 정책 또한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혐오범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사전에 표현을 위축시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행정적 행위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법적․행정적’ 제제를 가하는 것은 쉽게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표현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④ 당원게시판에서의 “당직선거관련 글쓰기” 제한은 소수파나 조직적 배경이 없는 후보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치로서 <당규 제24호>의 목적인 “당직선거와 공직후보자선거의 민주성을 보장하고 공정한 선거관리”에 위배됩니다.


소수파나 조직적 배경이 없는 후보는 자신의 정견을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고 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습니다. 온라인 상에서 최대의 여론 형성 공간인 당원게시판에서 후보로서의 정견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면, 유력한 선거운동의 공간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공정한 선거관리는 소수파나 조직적 배경이 없는 후보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없더라도, 그 후보의 정당한 선거활동을 제한하는 효과를 낳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1월 3일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지는 소수파나 조직적 배경이 없는 후보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치를 예고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김정진 선거운동본부(직인 생략)

 

 

[펌][심층분석]당원게시판의 실명화의 문제점

 

2004년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당 선관위가 결정한 바에 대한 반론글이다.

갑자기 당게에서 옮기고 싶어져서..

 

ㅇ 쓴 날 : 200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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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게시판의 실명화는
<인터넷 실명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당 정책부장 문성준입니다.

여러 분야 중 정보통신정책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프라이버시권과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권리를 포함하는 정책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2001년 9월 22일, 제2기 4차 중앙위원회가 제정한 <당규 15호 민주노동당 정보통신 운영 규정>을 입안한 당시 실무자이기도 합니다.



비례대표 후보선출 선거를 위해 선관위가 당원게시판을 실명표시화했습니다. 선관위는 '과열', '이런 저런 과장'과 '명예훼손'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렇게 결정했답니다.


1. 선관위는 권한 밖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 형식의 문제



[당규제15호]은 <실명게시판>이라 하더라도 "실명을 확인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제21조 제3항)고 규정하면서, "실명을 이용하여 접근을 제한하는 기술적 조치"를 하려면, "1. 사회적 통념상 온라인상의 소수자와 약자(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들이 구성한 소모임 등이 보호를 요청할 경우. 단, 실제 위협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을 경우로 한한다", "2. 당내 특정 조직/기구의 활동 특성상 구성원 외의 이용자가 접근해서는 안되는 경우", "웹메일, 채팅, 커뮤니티 등의 서비스 특성상 인증을 거쳐야만 하는 경우"(제28조)에만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당규제15호]는, 이를테면, <실명게시판>과 <실명인증게시판>을 내용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실명게시판>은 자율적으로 실명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운영되는(강제이동 가능) 게시판이고, <실명인증게시판>은 게시판 이용 권한을 줄지 판단할 때 실명을 확인하는 기술적 절차를 두는 게시판입니다. 그렇다고 실명이 항상 드러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참고로 당에서 통하는 실명과 주민등록상 실명도 다릅니다)

[당규제15호]는, 이미 실명인증으로 운영되는 게시판에 실명이 드러나도록 하는 조치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실명인증을 거친 당원만 이용하는 <당원인증게시판>을 <당원인증+실명표시게시판>으로 변경하는 것은, "실명을 이용하여 접근을 제한하는 기술적 조치"([당규제15호] 제28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애초부터 필명이 인정된 가운데 운영이 되어 자리 잡았고, 사실상 당원게시판 이외의 게시판에서는 당론 형성을 위한 의사 표현이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 가지 경우(제28조의 예외들)가 아니면 기술적 조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선거기간동안에 한하여 <당원인증게시판>을 <당원인증+실명표시게시판>으로 운영하는 것은 위의 세 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 당의 당규를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실명을 이용하여 접근을 제한하는 기술적 조치" 권한은 선관위에 없으며, 상집이 구성하는 게시판운영위원회에게만 있습니다. 선관위는 선거와 관련한 조치를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부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관위가 <당원인증게시판>을 <당원인증+실명표시게시판>으로 변경할 수는 결코 없는데, 당원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중에 비례대표 선거와 관련이 없는 필명글을 강제로 실명표기글로 바꾸는 조치를 선거와 관련한 조치로 확대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이번 당원게시판의 실명표기화는 <인터넷 실명제>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 내용의 문제



지금으로 봐서는 위의 당규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형식적인 문제에 너무 집착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형식이나 절차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념적이고 내용적인 목표에 적합할 때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가 앞서 말씀드린 형식의 문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당규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해석도 왜 이리 엉망이냐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우선, 국회가 준비한 <인터넷 실명제>와 당원게시판의 실명표시화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인터넷 실명제>는 주민등록번호를 식별자로 하여 주민등록 DB나 신용평가 DB를 이용하여 실명을 확인한다는 면에서 이번 선관위의 조치와는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선관위의 주장을 보고 있노라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결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선관위는 해명글에서,

인터넷 실명제는 실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정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명게시판과 함께 자유게시판을 '동시에' 운영하는 중앙선관위의 결정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실명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의 정책이 견지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부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당의 정책이 견지하는 '표현의 자유'의 핵심은 사전에 표현을 위축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전에 표현을 위축시키지는 않지만 명백한 인권침해 대해서는 사후에 제재를 가해야 하며, 특히 소수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는 미리 강구해야 한다는 게 당 정책의 기본방향입니다.([당규제15호]를 잘 보시면 이러한 입장을 구현하기 위한 고민이 엿보일 겁니다.)

우선, 익명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표현의 자유에서 익명표현은 타협할 수 없는 기본입니다. 인터넷에서 글을 작성할 때, 즉 자기표현을 할 때 실명을 강제하는 것은, 국회 앞에서 데모할 때 누가 데모하는지 경찰에 실명명단을 제공하는 것과 같으며, 책을 출판하거나 신문·잡지에 기고를 할 때 필명을 사용 못하게 하는 조치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국회가 추진하는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가 박정희의 긴급조치와 같은 것입니다.

당원게시판을 실명표시게시판으로 만들어서 자유게시판과 나란히 운영하여 익명성을 보장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것은 사기에 가깝습니다. <당원인증게시판-자유게시판> 체제에서는 자유게시판은 죽은 게시판입니다. 사실상의 여론 형성, 즉, 당원들이 발언하고 듣고 싸우고 논쟁하는 살아 있는 게시판으로는 당원게시판만 남은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당원게시판을 실명표시게시판으로 변경하는 것은 그 조치의 시간만큼 당원들의 표현의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유일한 여론 형성의 공간에서 익명성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적(敵)인 자유주의 사고가 아닙니다.
표현의 익명성은 힘이 불균형한 가운데 정치적·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이번 선거는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입니다. 비례대표 중 일부는 국회의원이 될 것입니다. 즉, 당내에서도 권력자 중의 권력자입니다. 우리당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일반 당원의 권력 차이는 대단히 클 수밖에 없습니다. 선관위는 <당원인증게시판>을 <당원인증+실명표시게시판>으로 바꿈으로써 일반 당원의 익명의 권리보다 당내의 권력자가 흠집 잡히지 않을 권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선관위 조치의 본질입니다. 또 하나 선관위가 행한 건, 비례대표 선거와는 무관한 글을 올리는 당원의 익명권을 무참히 박탈했다는 것입니다.

국회도, 당선관위가 말했듯이, "경선이란 언제나 과열될 수 있으며 이런 저런 과장과 명예훼손 등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 또한 많"다는 이유로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실명표시는 실명의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한테는 표현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면서도, 정작 악랄한 인간의 악랄한 악선동에는 무력합니다. 접속자체가 실명으로만 가능했던 PC통신 시절에도 명예훼손은 만연했고, 소위 부작용으로 폐쇄된 CUG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당원이 특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은 희생하되 목표는 달성해야겠다고 맘만 먹으면 실명표시화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죽어도 싫은 후보가 있다면 시연해 드리겠지만 없어서 못하겠군요.^^

깨끗하고 정책대결이 되는 선거가 바람직합니다. 지저분하고 흠집내기만 만연한 선거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불쾌하지요. 그건 도덕적인 잣대입니다.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불쾌한 모든 걸 사전에 예방하고 제재하고자 하는 게 바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속성입니다.


3. 그렇다면 대안은?



2000년도부터 2001년도까지 <인터넷 내용 등급제>로 긴 싸움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주노동당도 그거 하지 말라고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기자들이 찾아와서 <인터네 내용 등급제>의 대안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없으면 될 걸, 만들면 안될 걸 만드는 놈들한테 만들지 말라고 한 것뿐인데 대안이라뇨.

이번 선관위의 당원게시판의 실명표시화 조치에 대한 대안은 없습니다. 그냥 예전처럼 하면 됩니다. 다만, 앞으로 좀 구상해 볼 만한 아이템은 있습니다. 당은 어차피 1년 내내 선거하는 조직 아닙니까. 지역에서부터 중앙까지. 모든 당직, 공직후보 선거를 위한, 당원들의 시선을 끌만한 통합 컨텐츠를 구성해서 운영하는 것이지요. 지지고 볶고 싸울 인간들 다 모이는 곳. 이곳에 가면 쌈구경도 하지만, 감동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곳 말이지요. 사실 선관위가 당원게시판 실명표시화한 것은,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실명표시로 운영되는 선거게시판 만들어봐야 당원게시판만큼 사람들이 몰리지도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또 하나, 이런 일 생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당규제15호]도 개정해야 할 듯합니다. 더 정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