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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현실의 삶.

그냥 현실의 삶.


흔히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해질 때와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해질 때 그 둘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직원이나 사원, 종업원, 점원에 대해 말할 때 사장이나 업주에 대해 말할 때, 퇴근시간, 근무시간에 대해 말할 때와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에 대해 그리고 임금에 대해, 노동시간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별도의 것으로, 후자가 다른 시공간의 일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단순히 온도차만은 아니다.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은 사장과 별개로 일어나는 일이고, 사장은 사장의 일을 하고 직원은 직원의 일을 하는 것으로써 사장은 '중립'의 자리에 있는 것인냥 그 것을 전제로 이해되고는 한다.

하지만 노동자에 대해, 또는 자본가에 대해 말할 때는 뭔가 둘 사이에 끈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상하의 위계가 있고 각자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 둘의 관계에 있어서 뭔가 불편한 상태인 거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의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는 거 같이 생각되고는 한다.

 

그래서 어떤 것에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데

  • 지금 네가 말하는 것은 이론에 관한 내용이쟎아!?
  • 그러니까 네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제도에 대한 거지?
  • 그리고 자꾸 그런 경제(학)에 대해서 말하쟎아.. 현실은 저기 쯤이고!
  • 경제와 정치는 각각 다른 거 아니겠어?
  • 자본주의는 경제고 민주주의는 정치지.. 각각은 다르지!?

헌대 경제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정치와 한 묶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굳이 사회과학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가 이미 도달해 있는 지점이다.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것의 역할은 우리의 그러한 이해를 좀 더 명확하게 하는 측면에 있다.

자연(현상)을 볼 때 우리는 그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구나라고 인식은 하고 있지만 어째서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지, 물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지에 대해 보편화하고 일반화해서 그 원리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회(현상)을 파악한 과학이, 그러니까 사회과학이 그냥 보여지는 것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해서 너무나 당연한 얘기들을 늘어놓는다고 오해를 한다거나 또는 그것을 좀 더 추상화 작업을 통해 개념을 섞어서 말한다고 해서  <실재>하는 현실과 좀 동떨어진 것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되는 것이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다시 추상에서 구체로


현실을 구체(구체적인 현실)라고 볼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유의미한 것을 끌어내는 것을 추상이라고 하게 되는데, 우리가 사물을 볼 때에는 이 추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발휘된다. 일테면 10여 가지의 삼각의 물체를 '삼각형'이란 말로 부를 수 있으며 이 삼각형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는 것은 우리의 <추상하는 능력> 때문이다. 또한 100여 마리의 말이 각각 다름에도 이들을 개나 여타의 동물들과 구분하여 하나로 묶어 '말'이라고 부르고 그 '말'이라는 <개념>을 형성한 것인대 이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족, 사회, 국가, 민족, 선거, 전쟁, 공황, 환경, 계급, 생산관계, 제국주의 등.


사회현상 중에 경제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고, 정치의 영역, 교육, 문화, 역사, 법률, 철학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들은 별개로 상호 중립인 상태로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는대 그것은 맞지 않다. 그렇게 (세계)를 파악해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고, 그런 식으로는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여지(어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광고, 스포츠, 드라마, 뉴스, 토론프로 같은 것도...


드라마를 예로 들어보면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그의 관심은 자신의 삶을 획득하는 것에 오로지 집중되 있다.

  •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해결하며, 자신의 자유시간을 늘릴 것인가!
  • 일을 한다 하면서도 결핍이 만연해 있는 이 만성적인 쪼들림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상태로 어떻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 어떻게 자신의 삶을 획기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헌대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풍경이란 노동자의 삶, 노동자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들 뿐이다. 재벌2세의 연애 행각, 넓다른 집에서의 널널한 삶, 비교적 쉬운 소재인 연예인들의 연예활동을 드라마로 방송하는 등등... 노동자의 삶에 대해 말하고, 또 노동자의 삶을 중심에 놓고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삶의 태도가 이익인가. 어떻게 자신의 동료들과 화해하고 융화하고 그리하여 결집하고 그리하여 현실세계를 변화할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또 교육은 교육하지 않는다.

또 근로감독관은 감독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수가 가장 많고 이 세계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위치가 가장 기본적이고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가장 보편적인 사안임으로 가장 많이 가장 주요하게 다루어져야함에도,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함에도 그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간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과 대립하고, 적대하는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남녀간, 동료간, 부부간, 고부간, 이웃간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들도 보게 된다. 계급간의 모순과 더불어 이러한 갈등도 우리가 풀어야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세계가 물질적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짜여진 것으로서 자본과 노동의 양 진영으로 나눠진 세계임을 볼 때 노동과 자본간의 대립, 적대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다. 헌대 우리가 보는 언론, 법률, 정부, 교육, 철학, 드라마, 광고에서는 대부분의 갈등들과 나란히 병립해서 있는 것처럼 일명 <노사갈등>이라고 치장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착오를 일으키게 하고 왜곡하고자하는 의도에서 행해진다.


물질의 변화에 주목한 변증법, 그리고 물질론(유물론)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으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해 낼 수 있는 과학(과학적 지식)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러한 물질적 토대(경제)위에 정치니, 법률이니, 문화니, 철학이니, 교육이니 따위들이 상부구조로서 그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데 만약 상부구조의 문제에 현혹되어 단지 여타의 모순들을 제도의 문제로 파악한다든지, 교육의 문제로서, 정치(후진적)의 문제로서 파악하는.. 등 증상에 대한 언급에 머문다면 세계의 파악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해결에 대한  실마리는 놓치고야 말 것이다. 결국은 세계에 대해 올바른 인식에 기초하여, 과학적 인식에 따라 세계를 파악해내야만하는 것이고, 이후 그에 따른 행위가, 그러니까 실천이 뒤따른다.


이제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 같이 단단한 벽같았던 우리의 현실 - 억눌린 일상의 삶들은 숨통이 트일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되었다. 과학에 따라!

 

<참고>

 철학 에세이 /조성오, 동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존 몰리뉴,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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