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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에 00여고에 가서 미디어교육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요즘에 에이블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참 잘 쓰고 글이 참 좋다.
글쓰기 근육을 키우겠다고 말하는 그 친구에게
"하루에 2천자 쓰기를 하면 좋을 것같아"라고 말한 후에
나도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여러 번, '하루에 2천자' 라고 쓰고 다짐해놓고
며칠 지나면 다시 중단이다.
다시 중단하더라도 다시 시작해봐야지.
1.
2018년에는 월 1회 회의를 하기로 약속했다.
신대방동에 있는 사무실은 나로서는 너무 멀어서
짐을 다 빼왔고
회의 때만 참여하기로 했는데
다들 자기 작업 때문에 바빠서
주1회 회의는 전혀 안되고 있고
주1회 회의를 못 지키니까 아예 회의가 없어져버려서
지난 7개월동안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1월 초에 큰맘먹고 회의를 한 후에
청소당번 이야기며, 매주청소 이야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내 말에 모두 동의하며
월 1회 청소, 월 1회 회의, 를 결의함.
그래서 오늘 2018년 두번째 회의를 하고 왔다.
9명 중 2명은 휴직, 1명은 남미여행
그래서 6명이 모였는데
다들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작업이 하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일짜에게
나도 그랬다는 얘기를 해주다가
8년째 영화를 못 만들고 있는 나의 현실에 직면함.
핑계를 대자면 너무너무 많다.
일단 강화집-서울사무실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몇 년을 허비했고
결국 사무실 짐을 빼서 마당의 컨테이너에 작업실을 차렸다가
전기불안정으로 하드가 세 번이나 소실되었으며
2016년 강화고려역사재단 사무실, 2017년 마니산영농협동조합 사무실 등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여전히 안정화는 멀기만 하다.
게다가 파일방식 촬영이 너무 낯설다.
편집방식 자체가 다른데
나는 아직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손에는 윈도우-프리미어가 익숙한데
사무실 시스템은 맥-파이널 컷으로 일괄변경되었다.
촬영본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맥 os 업그레이드가 떠서 무심코 눌렀다가
파이널컷이 안도는 사태가 발생.
파컷을 업그레이드 시키면 될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새로운 버전의 파컷을 쓰기에는 컴퓨터 사양이 안받쳐주는 거다.
그럼 다시 아이맥을 들고 서울 사무실에 가고
그러면 또 바쁜 동료들이 틈틈히 손봐주느라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그래서 며칠 후에 아이맥을 다시 들고 돌아오면
어디까지 했는지 찾느라 정신이 산만해지고
또 다른 일들이 생기고....
그러다가 하드가 갑자기 먹통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러면서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며 여기까지 왔다.
내가 8년동안 영화를 못 만들었다 하니
사무실 동료들이 깜짝 놀라며 "한 3-4년 정도인 줄 알았어" 한다.
응 나도 놀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통으로 필요한데
나한테는 지금 토막시간밖에 없거든.
작업하기 싫다는 일짜의 마음을 너무나 깊이 이해하는 게
아침에 애 어린이집에 보내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나면
출근이 너무 큰 일이라서 큰 성취를 이룬 것같아서
가방 놓고 책상정리하고 차 한잔 마시면 2시.
아이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이 6시니
또 한 두시간 얼렁뚱땅 보내다가 다시 집으로 가야하는 거다.
그 와중에 2010년 <아이들>을 완성한 건 정말 기적이었다.
다시금 그런 집중력을 발휘하기에는
컴퓨터도, 편집프로그램도, 너무 낯설고
무엇보다 작업에너지를 같이 주고받을 동료 한 사람도 없는 이 강화에서
나는 그냥 혼자 동그마니 놓여있는 거다.
이런 넋두리 한심하지만
2천자를 채우기 위해서는
마음 표면에 있는 찌꺼기들부터 다 걷어내야하기에
어쩔 수 없음.
2.
지지난 주부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봄이 오면 교육과 활동을 시작해야하는데
아무 연고없는 곳에 똑 떨어지는 것보다는
사전답사를 해보고 적당한 곳 몇 곳을 물색해두는 게 필요해서.
사무실에서 꿈의학교 기획서를 쓰기로 했다.
내가 초안을 잡고 예산은 다른 동료가 쓰기로 했는데
동료가 바빠서 한 군데는 마감시간을 넘겨버렸다.
광명과 김포 두군데를 쓰기로 했는데
광명은 그렇게 포기되었고
김포는 서류심사에 선정되었다.
지난 주 금요일 면접 전에
사업파트너가 필요해서 인터넷 검색 만으로
몇 군데 단체에 전화를 해봤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음.
김포는 글로컬을 컨셉으로 '세계시민영화학교'라는 꿈의 학교를 기획했는데
다문화배경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목표였다.
처음으로 전화를 한 곳은 '김포외국인주민지원센터'였는데
사무국장님의 반응이 회의적이었다.
청소년들은 언어를 배워서 학교에 들어가는 게 급하고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학업을 따라가는 게 급해서
미디어교육은 필요로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유였다.
다큐든 교육이든 뭐든 늘 현실은 짐작과는 다르지.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여행은 가지 못해서
일 다니는 틈틈히 음식이라도 먹어보자 해서
송도 교육갔다가 스와갓인디아를 간다든지
검단 교육 다녀오는 길에 칸마켓에 가본다든지 뭐 그런 식이었는데
스와갓인디아가 있는 동네 송도는 쭉쭉 뻗은 빌딩들이 즐비한
그냥 새로운, 고급도시여서 별 흥미가 없었는데
칸마켓이 있는 곳은 공구가게나 공장들이 많았고
그 사이사이에 아시안식당들이 많아서 관심이 생겼다.
집하고도 가까워서 그 장소들에서 뭔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년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성찬식>을 보면서
나는 나의 '필드'가 있었던 결혼전 생활이 그리웠다.
(<성찬식>의 주인공은 내 초기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발달장애인이다)
안나 자메츠카 감독처럼 나 또한 다이렉트 시네마,
벽에 붙은 파리처럼 그 순간의 공기를 카메라에 담는 방식을 선호한다.
2017년 가을에 혼자 백석의 메가박스에 앉아 <성찬식>을 보면서
다시 나의 필드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칸마켓을 보았고 며칠 후에 '아시안 레스토랑'이라고 써있는 식당에 들어갔다가
대충 데운 판매용 난, 짜디짠 커리에 실망해서
다시는 그 타운을 찾지는 않았지만
매일 오가며 그 공단 안에 깃들어있을 사람들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다 사무실에서 경기 꿈의 학교 기획서를 쓰자는 얘기가 나왔고
사무실과 가까운 광명, 그리고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김포,
두 군데에 꿈의 학교를 쓰기로 했다가
김포만 서류심사를 통과한 상태.
금요일 면접 전에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트너를 찾는데
첫 통화에서 차가운 반응을 접한 나는
안산에서 '지구인의 정류장'을 운영하는 I선배와
이주노동자방송국과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S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다.
s는 "우리도 이주노동자센터는 뚫지를 못한다.
한글교실과 태권도 교실 만으로 시간표가 꽉 차있어서 미디어교육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라고,
외국인주민센터 사무국장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안산의 I는 몇달 전 어떤 사건 때문에 피차 삐져있는 상태였는데
여전히 삐져있음을 감지했으나 모른척하고
나의 상황을 말하고 김포에 아는 단체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늘 친절했던 I는 삐져있었으므로 불친절했고
단체 이름 하나만 알려주었다.
고맙다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마음이 바뀌었는지
부연설명을 했다.
"거기 대표 신부님은 실무는 모르고 열심히 하는 젊은 수사가 있는데 연락처를 알려줄께"
그리고나서 감감무소식이었다.
문자를 보냈는데도 답이 없고 그래서
그래 니가 그렇지, 하고서
그냥 그 단체에 전화를 해서 찾아갔다.
그 단체 사람들은 "당신같은 사람을 기다렸어요" 모드로
나의 계획과 나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다 같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중에 저녁이 되어서야 I는 수사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나는 I에게 벌써 가서 만나고 왔고, 같이 하기로 했다고, 고맙다고 공손하게 말을 했다.
나는 I가 왜 나에게 삐진 줄 안다.
내가 I에게 삐져있었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JP의 장례식장에서 내게 다가오는 I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래놓고 다시 연락하는 내가 뻔뻔한가?
그럴수도.
난 여전히 I.한테 삐져있는 어떤 부분이 있는데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건
I에게도, 나에게도 상처가 될 것이라는 걸 안다.
JP가 죽었고 죽기 이틀 전에 우리는 심각한 통화를 했고
나는 그날 I에게 화를 냈었다.
하은이 입원해있는 병원의 계단참에서 소곤소곤 통화를 하던 나는
"형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나 지금 화가 나서 전화를 더 할 수가 없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만났는데 아마 그는 내게 사과를 하려고 다가왔을텐데
나는 그냥 외면하고 말았던 거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냥 쉽게 깨져버리는 뭔가로 이뤄져있는 게 맞다.
I와 나 사이에서 그게 깨져버린 거다.
그래도 I 덕분에 단체 하나를 소개받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은 했다.
감사하다.
그렇게 파트너를 구하고 금요일에 면접을 보는데
6명의 심사위원들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로 면접을 봐서
떨어질 확률이 높다.
학교 관계자들은 자기들만 교육자인 줄 안다.
작년, 재작년 학교 교육을 하면서 여러 번 그런 상황들을 맞고
참고 견디면서 웃으며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지않았다.
교육참여자가 서른명인데 교사 한 명은 절대 안된다,라는 게 내 입장이었고
면접관들은 주교사 한 명에 보조교사를 쓰라고 했고
나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수에 달려있다라고 주장했다.
교사임이 분명한 한 사람이
"이렇게 모둠별로 다 교사가 있으면 학생들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교사에게 의존하게 된다"라고 말하길래
"저희는 제작단 개념입니다. 영화 현장에서는 경력 20년차 감독과 초보 스텝이 같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교사가 아니라 스텝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15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감독이 스텝이 되는 거예요"라고 반박했고
"꿈의 학교 기획안을 써내는 분들은 너무 욕심이 많은데 이거 못해요.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할걸요" 라고 하길래 "이 교육안으로 작년에 영종도서관과 서울에 있는 영상대안학교에서 훌륭하게 교육을 수행했습니다. 학생들은 미디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저는 훌륭하게 잘 지도해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 회의 시간에 면접 본 이야기를 들여주니 다들 왜 그렇게 말했냐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지난 1년 동안 학교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은 나를 영화는 만들줄 알지만 교육에는 문외한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교육이 시작된 이상 학생들이 중요해서 웃으면서 넘겼지만, 지금 나는 기획단계에 있는 거니까. 떨어지면 그만인 거고 엎어진다 하더라도 피해볼 학생들은 없으니까. 그동안은 이미 교육이 시작된 후였다. 내 수업이었고 내 학생들이므로 나는 기분나쁘더라도 담당교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할 필요가 있는 거다.
면접을 보고 돌아오면서 지난 며칠동안 기획안 쓰고, 파트너 구하고, 영업사원처럼 사업 설명하고 그러느라 들인 시간과 에너지가 참 많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면접관들과 대화할 때에도 나는 기분나쁜 상태로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어서 대화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냥 공교육 관계자들이 자기들만 교육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거.
지난 학기에 내 수업을 함부로 평가하고, 담당교사로서 할 일은 하지 않아서 속터지게 했던 00중학교 선생님은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문자로, 메일로 내년에 꼭 다시 하자는 메시지를 주었는데 그건 내가 결정할 바는 아니니까. 어쨌거나 "한 번 일한 데에서 꼭 다시 부르게 일을 하자"라는 프리랜서의 기본 원칙은 지킨 거다.
다만 아쉬운 건 I가 소개해준 단체가 멀다는 거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 지는 잘 모르겠음. 그러나 어쨌든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
4.
몸이 아프다고 생각을 했고 나날이 쇠약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의원 선생님께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점점 근력이 약해지는 거니 매일매일 운동을 하라고 하심.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왔다. 오늘 회의에서 개인보고 시간에 "12월에 교통사고가 나고 1월에 요양한답시고 많이 누워있다가 무거운 거 한 번 들고 몸살이 나서 앞으로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운동을 안해서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놓였다"라고 하니 다들 웃었다. 내 몸이 좋아지는 건지 내 마음이 약해지는 건지 잘 모르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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