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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시간

예전에 집에 놀러온 k에게 "청소를 해도해도 끝이 없거든..."

뭐 그런 비슷한 말로 어수선한 집풍경을 변명(?)했더니

k가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항상 '얘들아~ 우리 치우는 놀이 할까?' 하며

어떤 노래를 불러줬거든요. 그럼 여동생과 나는 같이 그 노래 부르면서

놀이하듯이 정리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농간이었던 것같아요.. " 

너, 정말 현명하신 어머니를 뒀구나, 어떤 노래인지 빨리 알려줘~~ 하면서 졸랐지만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k는 끝내 노래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여전히 집은 발 디딜틈 없이 어지러운데

어제 아주버님 가족들이 다녀가셨다.

1주일 전부터 예견된 방문이라 청소 때문에 고민하던 중,

기적처럼 청소놀이에 맞는 이 노래를 발견했다.

 

 

어젠 원래 읍내의 도서관에 갈 계획이었으나

애들이 그냥 집에서 놀겠다고 해서 같이 놀았더니 무릎관절이 아프다.

땅따먹기 하는데 너무 많이 열심히 뛴 게 화근인 듯.

땅따먹기, 숨바꼭질, 비석치기, 자전거타고 술래잡기 등등을 하며

틈틈히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나 애들하고 노느라 바쁘니까 가능한 빨리 와서 집 정리 좀~"

하고 요청을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집 깨끗하잖아~ 정리할 게 뭐가 있냐" 하면서

회의니, 음악회 때문에 일이 늦게 끝난다고 안왔다. ㅡ.ㅡ

 

흙바닥에서 뒹굴듯이 놀았던 탓에

씻기고 말리고 한 후에 '치우는 놀이'를 했다.

아, 참 괜찮았다~!

청소는 곳곳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제일 어려운데

하은, 한별에게는 각각 방이 생겼고,

자기는 방이 없다고 투덜대는 은별에게

"나도 방 없어. 대신 너한테 서랍 하나 줄께" 했더니 행복해하는 중이기 때문.

노래를 틀어놓고

나는 잡동사니 무더기 앞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서

주인들에게 자기 영역에 갖다 놓으라고 하면 되었다. 

평소보다 훨씬 빨리 정리를 끝내고 청소기와 걸레로 마무리를 했더니

발 디딜 틈이 조금은 생겼다. ㅋㅋ

뭐, 사실 그렇다고 해봤자 마루의 물건들의 각자의 방과 은별의 서랍으로 위치이동한 것 뿐이지만.

 

결혼하고 첫 해에는 '잡동사니 서랍' 하나를 정해서 그냥 몰아넣기 식으로 정리를 했었는데

1년이 되기 전에 잡동사니 서랍이 두 개로 늘어났다.

그래선 안될 것같아서 가능한한 제 위치로 돌려놓기를 위해 노력하는데

 여전히 집은 물건들로 그득그득 넘쳐난다.

남편이 청소를 하면 집이 금방 말끔해지는데

그 비결은 무작정 버리기이다.

저번에는 하은이가 아빠를 위해 애써서 만든 지우개아트 작품을 버려서

하은이가 운 적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남편은 몽땅 버리기를 하고

그래서 애들은 아빠가 청소를 하고 나면 꼭 쓰레기통을 뒤져서 다시 돌려놓는다.

뭔가 없어진 물건을 찾을 때엔 모두들 버릇처럼 "아빠가 버린 거 아냐?" 하며 투덜대는데

그것도 모르는 남편은 내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건 병"이라며 잘난 척을 한다.

언젠가 있을 쓰임을 위해 많은 물건들이 곳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래서 청소는 정말 어렵다.

 

어제 아주버님이 "친구같은 부모보다는 지도자같은 부모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은, 한별이 가족에 대한 그림을 그리면 애 넷에 어른 하나가 있다.

작년에 1년동안 우리끼리만 살 때, 애들이 너무너무 불안해하고 무서워해서 정말 감당이 안될 정도였다.

남편이 오는 수요일이면 아이들은 안심하고 잠을 잤지만

그 외의 날에는 한별은 매일 내게 "문 잠궜어? 열쇠로도 안 열리게 잠궜어?" 하며 몇 번씩 확인을 하고

세 명의 아이가 양 팔을 각각 베고, 한 명은 배 위에 올라간 채로 매일밤을 그렇게 잠이 들곤 했었다.

사실 나도 무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데 아이들을 위해 항상 씩씩한 척, 문제없는 척 행동하느라 힘들었다.

 

다시 모여살게 된 지금, 가족 내 성역할은 지나치게 고정되어있는 듯 보인다.

물론 여전히 요리를 잘하는 남편이 우리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주긴 하지만

그건 한 탕일 뿐이고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건사하는 일은 주로 내 몫이다.

그나마 서울에 가는 수, 목요일에는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수, 목요일 때문에 나머지 요일은 자연스레, 당연히, 더 강력하게 내 차지가 된다.

최근 엄마가 나의 공부를 미안해하며(왜 엄마가 그걸 미안해하냐고.....~!)

유서방이 안쓰러워서 자발적으로 아이들 돌보기를 돕겠다고 나섰고

우리는 엄마의 우울증이 좀 나아질거라는 핑계같은 걸 더 만든 후에

엄마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내가 독립적인 사람인 듯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뛸 듯이 기뻤다.

머리와 가슴은 항상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러시아언니가 엄마한테 암시를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

"엄마,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미예네 집에 가서 있으면 어때? 걔 힘들텐데" 뭐 그런 전화)

어쨌든 엄마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엄마한테 매주일, 쉬지 않고 고맙다,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엄마는 "엄마한테 무슨 말이냐?"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끝없는 죄책감에 빠져들곤 한다.

이번 주 페미니스트 문화론 수업 주제가 '어머니로 호명된 그녀'인데....

난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남편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맡은 듯 하다.

교회 일에, 직장 일에, 강화 지역의 중요한 이슈는 다 개입해가며 밥상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근의 이슈는 강화의 조력발전소 건이다.

지지난주 목요일 밤, 새벽에 늦게 들어왔는데 엄마가 깨어있었다.

유서방이 지금 들어왔다고 하는데 분노 게이지 상승~!

다음 날 진지하게 협박을 했는데 그 협박의 요지는

"그러다가 엄마 안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애 셋을 노인네가 혼자 보는거 힘들다는 거 몰라?

수,목에 당신 힘들다고 엄마가 도우러 온 거지, 당신 일을 엄마한테 맡기는 건 아니지않아?"'

했더니 알았다고는 하는데 그러면서 변명처럼 강화지역 조력발전소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 이번 주도 수요일은 엄마 혼자 또 애들을 돌본 듯했다.

따져보면 어쩔 수 없는 게

수요일은 '장애인의 날'이라서 큰 행사가 있었고 또 저번 주는 고난주일이라 교회가 대목이었다.

......

이런 식으로 11년이 흘러왔다.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작년의 서울 생활과 운전은 어쨌거나 독립의식을 성장시킨 듯하다.

작년, 내 협박의 주요 레파토리는

"왜 그렇게 일을 많이 맡아? 나는 일이 없어서 안 맡는 줄 알아?

가족들이 변함없이 항상옆에 있을 것같아?

당신이 가족을 위해 시간을 배분하지 않으면

우리도 당신을 기다리지 않으니까 한 번 잘 해보셔.

나중에 자기 자리없다고 눈물 흘리지 말고."

 

그런 협박과 회유와 설득 끝에 일주일에 하루, 일주일에 이틀, 그렇게 내 시간을 따낸 건데

거기에 엄마가 들어오신 거다.

화요일에 엄마를 모시러 가고, 다시 금요일에 엄마를 모셔다드리면서

결국 모든 건 다시 원점으로 되어버렸다는 생각.

또 착한 엄마는, 내가 엄마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 때문에 공부시간이 짧아진다고

버스를 타고 오시겠다고 한다.

쉽지 않다. 남편이 엄마를 모시러 가면 일 바쁜데 근무시간에 시간 뺐다고 송구스러워하고

그나마 내가 모시러 가면 편안해하시고...

남편이 모시러 간다고 하면 엄마는 버스를 타고 말 것이다.

버스를 타면 시간이 두 배나 걸리는데도 엄마는

"할 일도 없는 사람이 그냥 가만 앉아있는 건데 그게 뭐가 문제냐?"하는 식이다.

정말 어렵다. 불편한 엄마 마음을 모른척하고 남편에게 역할을 부여해야하는건가, 아닌가...

  

다음주가 걱정이다.

일단 인권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 한 편의 구성을 맡았고

금요일은 영진위 제작지원 마감이고 대학원 숙제는 여전히 많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은 성직자수련회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주도에 간다.

작가 언니에게 부탁해서 방송녹음을 저번 주에 두 개 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인 상황.

집중력도 예전같지 않아서 더 자고 싶은 걸 참아가며 힘겹게 일어나서

이렇게 책상 앞에 앉으면 얼른 일에 몰입하지 못한다.

일단 머리 속 곳곳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어떤 식으로든 떨쳐버려야한다.

블로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블로그야, 고마워~

 

자, 이제 일을 시작해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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