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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준비

기준은 잘 모르겠는데 주변의 예술인들 중에 서류심사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많다.

예술인 파견 지원사업이 확대되는 것같고 응모하는 예술인 숫자도 늘어나는 것같은데 

선발인원은 줄었다.

 

오늘 면접이다. 

뽑히면 강화에서 광고영상을 만들거다. 

면접준비를 위해 신청서를 뽑았다.

여기 이렇게 갈무리해둬야지...

 

 

나는 동료들에 비해 자기PR을 덜 불편해한다.

내가 매일매일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쳐보고 새로운 뉴스나 새로운 리뷰를 모은다고 하자

푸하하 웃던 동료들이 어느 순간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내가 이런 세상에서 어떠한 수행(PLAYING)을 펼칠지

가능한한 계획하도록 해야해.

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내가 모르진 않으니까.

이번 <추적60분> 사태로 평판은 더 안좋아졌을 것이다.

뭐 어때.......

그래도 나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조심조심 따라오는 동료들한테

가끔 서운하긴 하다.....

근데 그럴 이유가 없어. 앞에 서는 걸 누구도 시키지 않았으니까.

피가 뜨거운 게 이유겠지......

 

어제의 신문기사. 김**과 같이 등장하는 게 싫어.

http://www.hankookilbo.com/v/455cf1ebc0b74b938bdd6e11c5a268d7

 

1. 저는 1997년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오면서 자기표현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삶에 큰 힘을 준다는 것을 제가 미리 겪었고 이후의 활동 과정에서 확인해왔습니다. 박완서선생님의 <그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내가 겪은 것들을 잊지 않고 꼭 글로 쓰겠다"라고 각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박완서선생님은 썼지만 저는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고 그렇게 기록된 촬영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나와 같은 무늬를 가진 사람들에게로 가면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분들에게 이야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왔습니다.

 

2004년 이후 저는 제 영화가 불러일으킨 이야기의 욕구를, 미디어교육을 통해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왔습니다. 교육참여자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에서 자존감이 향상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예술은 밥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이, 자신을 성찰할 시선이 없는 사람이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그 힘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가능합니다. 예술은 성찰의 눈동자를 건네줍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간에만 빠지지 않게, 시간은 통으로 오는 거고 내가 현재 서있는 국면이 전체 통로에서 어디만큼 서있는지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찰이고 예술은 그 눈동자를 건네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성/다큐멘터리감독이라는 저의 위치는 그런 경험을 먼저 겪을 수 있어서 유의미했습니다. 제 첫 작업의 주인공이 발달장애인이라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기본 시야로 확보할 수 있어서 또한 유의미했습니다. 제 세 번째 영화의 주인공이 노년여성이라 노년의 삶, 노년의 사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서 유의미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확장시켜왔고 그렇게 확장된 세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앞선 경험을 나누면서 충만감을 느껴왔습니다.

1997년부터 저는 '내가 본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영상물을 제작해 왔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극장을 포함한 상영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기도 했고 그 중 어떤 것은 대변자의 역할에 충실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제작능력은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두번째로는 교육역량입니다.저는 2004년부터 꾸준히 영화제작교육을 진행해왔습니다. 물론 2004년 이전에도 영화제작교육을 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부터는 교육자로서의 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거침으로써 앞선 경험을 나눠주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서로를 자라게 하다는 것을 많은 교육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경험을 주변의 동료영화감독들과 공유함으로써 그 성과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는‘장애인미디어교육 가이드북’을 썼고 아르떼와 시청자미디어센터 등에서 영화교사나 미디어교육사들의 멘토역할을 해왔습니다. 또한 공부방 초등학교에서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까지 카메라로, 영화로 자기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쉼없이 경험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제가 자천하는 저의 예술적 역량 세 번째는 협업입니다. 2016년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서 음악과 무용분야 예술인들을 만났습니다.그동안은 제가 만드는 영상물에 해당 분야의 예술인들의 도움을 받는 방식으로 협업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동등한 비중으로 참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느낌을 나누고, 내가 받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대방이 받은 영감에 대해서 듣고, 충실한 소통과정을 거친 후에 3인이 공유한 느낌을 영상으로, 춤으로, 음악으로 각자 풀어내고 통합하는 과정은 아주 매력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의 예술적 역량도 한걸음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저의 성장은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의 성과이자 예술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작역량,교육역량, 그리고 협업을 통한 새로운 미학적 성취. 이러한 경험과 역량을 가진 저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참여예술인으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2. 저는 강화에 살고 있습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강화에는 수많은 역사적 유적, 유물들이 있지만 현재의 군수는 도시분야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강화경제자유구역이나 강화휴먼메디시티에 대한 청사진을 펼치며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6년에 저는 강화고려역사재단에 예술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은 돈대를 비롯한 해양관방유적의 가치를 증명하고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해야 되었던 일도 이러한 사업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예술인 복지재단에서 파견된 예술인으로서 저는 몇 달동안 강화의 돈대들을 돌아보았고 그 가치에 매료되었습니다. 54개의 돈대는 각각의 사연과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접하는 순간 제 안에서 피어나던 예술적 영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군민들의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규제를 완화하고 재산권을 보호하겠다는 군수, 그리고 강화읍을 고려르네상스특구로 지정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강화고려역사재단의 사무국장. 다행히 저는 강화고려역사재단에 파견된 예술인이었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숨어있는 것들을 발견할 때의 기쁨 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저는 예술의 할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군수가 단지 한 명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군 내의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대변자이기에 저는 예술가로서 돈대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아트필름을 만듦으로써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돈대가 뭔지도 모르는 같은 군민의 한 사람이었던 제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돈대를 돌아보며 느꼈던 감정들, 내가 받았던 영감들, 이런 것들을 예술적으로 표현해낸다면 그 결과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1cm라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바람으로 열심히 답사를 다니고 열심히 스토리보드를 짜고 열심히 콘티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파견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8월 즈음 해양관방유산이 국내에서 유네스코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이 된 순간, 강화군수의 이의 제기로 모든 절차가 중단되었습니다. 군수의 이의제기 뿐 아니라 재단이 처한 상황도 여기에 한몫 했는데 독립조직인 강화고려역사재단을 인천문화재단으로 통합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예술인파견사업 또한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인들의 의지 뿐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 한 달에 30시간을 하는 예술인파견사업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건 아닌가 늘 고민이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우리의 의지 뿐입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로지 우리의 열망과 우리의 바람만이 아트필름의 유일한 동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시고 무용부문 선생님은 고된 촬영에 임해주셨고 저희 퍼실님은 몇 번의 수정사항도 다 받아주시며 음악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가려진 시간:풍경과 역사 사이>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상황을 이제사 고백드립니다. 강화는 교통이 불편해서 지원하는 예술인이 없었습니다. 퍼실리테이터 또한 매칭에 실패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강화를 선택했다는 말을 나중에 해주었습니다. 처음 예술인 발대식 때 기업도, 퍼실리테이터도, 동료 예술인도,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긴 시간을 앉아있으면서 다른 기업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로이 파견된 두 명의 예술인들은 3차 매칭까지 실패하고서 갈 데가 없어서 온 분이었습니다. 나의 열망을 억눌러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퍼실리테이터님의 전작인 댄스필름을 보고 무용부문 예술인이 열망을 가졌습니다. 강화고려역사재단에서 제가 무용, 음악 부문 예술인들과 이룬 성취가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2017년 파견예술인이 된다면 저는 또 새로운 장에서 새로운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이든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예술인의 자존심에 합당한 태도로 활동할 것입니다. 숫자가 놓친 사연과 진심을 대신 변명하는 일이 예술이고 가장 회의적인 자의 속도로 가장 낮은 자의 한숨을 쉬는 사람이 예술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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