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내 동무 어디두고...

'해는 져서 어두운데.... 내 동무 어디 두고 ...'

라는 동요를 어릴때 부르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만 하고 학교도 다녀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어린 동생의 죽음을 보고, 누나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며 슬프게 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 온다. 그 동생이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다면 나의 삶도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 같은 동네에서 한 또래로 같이 자라면서 온갖 추억을 간직하며 지내오고, 지금은 어른이 되었지만 같은 동무 중에서는 가장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가며, 또한 믿음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충실히 살아가던 한 동무를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이 노래가 생각나는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때의 농촌은 지금 같이 산업화가 되지 않아 토속적이고 정감이 넘치는 마을이었으며, 시골 마을에도 인구가 많아서 같은 나이의 또래들만 해도 한 동네 일이십명이 될 정도로 많은 동무들이 있었다. 비록, 풍요롭지는 않아서 먹고 살기는 힘들어도 동네에서 동무들끼리 함께 모여 별의별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냈으며, 말로만 '죽마고우' 라고 하는것이 아니고 진짜로 대나무 작대기를 함께 타고 놀았던 불알친구들이었다.

 

지금도 그들을 만나면 어릴때의 추억들을 이야기 하면서 '이자식' 저자식' 하면서도 한바탕 웃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곤 한다. 이제는 나이가 지난날 만큼 열기가 넘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때의 마음은 남아 있어 장난도 치고 어릴때 숨겨 놓은 이야기를 하면서 몇십년전의 기억들을 되살리기도 한다.

 

지난 토요일에 장례를 치른 동무는 학교 졸업을 하고 구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통신사에 오래도록 다니면서 근면 성실하게 살아왔다. 건강도 유지 할려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동무였다. 그런데, 한 이 전 갑자기 대장암에 걸렸다고 하면서 치료를 받아 왔다.

 

처음에는 별로 표가 나지 않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일년의 몇번 모이는 우리들의 모임에 참석을 못하고, 살이 빠지면서 건장하던 체구가 보기 흉하게 되었다. 급기아는, 올해 봄에 나들이에 참석을 하지 못하게 되어 모임을 마친 우리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 갔을때는 더욱더 말라서 보기가 미안 스러울 정도였다.(그 때도 우리가 찾아가는것이 어떻게 생각할지 조심스럽게 찾아 간 것이다.) 사실 마지막 모습 일수도 있다는 마음도 있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때 갑자기 부고를 받고 급하게 고향으로 가서 밤을 세우고, 다음날 고향집 위 양지바른 산에다가 그를 묻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하루종일 비는 내리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친구가 들어가서 누울 땅을 파고 그를 손수 땅 속에 뭍고는 흙을로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혀 묘를 완성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더 많은 고생을 했겠지만, 우리 세대도 잘 먹지 못하고 입지 못했으며,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생을 하면서 지낸 세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살다간 동무를 보내면서....'내 동무 어디두고 ...' 를 읖조려 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충실히 살아온 동무를 먼저 저 세상에서 편히 쉬게 하려고 먼저 간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산 동무야. 저 세상에서 편히 쉬렴~

다시 그 이름을 불러 본다.  최.병.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