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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채식이야기 두 번째 - 나에게 채식은

 

채식이야기 두 번째, 나에게 채식은



☮ 채식의 시작


신기하게도 아주 자연스러운 시작이었다. 마치 병역거부가 나에게 그러했듯이 채식을 받아들이는 데도 어떤 특별한 계기나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 갔던 친구들이 제대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되어 왔고 (이제는 이 미스테리를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그 조음부터 관계를 맺은 평화운동가들을 통해서 채식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도 채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쉽진 않았다. 세상을 바꾸는 거 보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머리가 아니라 몸이 채식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친구의 조언에 정말 넉 놓고 기다렸고 몸이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채식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세상사는 데 커다란 두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하나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가는 즐거움이고 나머지는 나의 존재가 사람의 관계 속에 충만함을 느끼는 즐거움이다. 채식은 나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고 난 새로운 지식에 행복하며, 또 전혀 새로운 앎의 형태에 감사했다. 그 동안 가려져 있던 불편하고 추악한 진실들-거대한 자본집적의 육식산업이 어떻게 환경을 파괴하는지, 동물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사람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제3세계 농민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생물졸의 다양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지식들이 머리가 아닌 몸에 아로새겨지는 앎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항상 긴장하지 않으면 성찰하지 않게 되는 법. 나의 채식도 어느덧 습관으로 굳어지고 귀찮은 마음에 의미 찾는 것을 게을리 했다. 정말 귀찮았다. 채식이 귀찮았던 것이 아니라 채식을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다. 이상하게도 유난히 채식에 적대적인 사람들(내 경험상 병역거부보다도 채식에 대한 적대감이 더 컸다. 특히 운동권들에게서 그런 적대감(?)을 많이 느꼈다)과 논쟁하거나 하는 것도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정말 별 소리 다 들었다. 채식하는 사람들이 평화 운운하는 거 역겹다. 채식은 고기 먹는 사람들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방식이다. 채식 때문에 GMO(유전자조작식품) 문제가 생긴다 등등. 때로는 이런 가시돋힌 말보다 이해를 가장한 일종의 무시(‘그러든지 말든지’하는 태도들)가 더 가슴 아팠다. 몇몇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채식을 중단(그들이 그렇다고 태도를 돌변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고기를 지양하는, 잠재적인 베지테리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일시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중단’이라는 단어를 썼다)했다. 나 역시 위기라면 위기일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큰 이유는 내 주위엔 그래도 몰이해보다는 나보다 더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감 후 경험들-저번에 밝혔던-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위한 즐거운 상상의 계기를 던져 주었다.


☮ ‘음식’을 생각하다.


보다 넓게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음식은 무엇일까? 5,000원 짜리 설렁탕, 3,000원 짜리 짜장면, 10,000원에 두 마리 통닭, 15,000원에 피자 투 판, 콜라는 서비스. 돈을 주고 구입하는 상품, 자동차나, 컴퓨터, 시계 등과 다를 바 없는 상품에 불과하다. 그보다 조금 높은 가치를 부여해도 우리의 미각을 즐겁게 해주는 기호품에 불과하다. 근데 인간과 음식의 이러한 관계는 사실 그리 오래된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본디 인간에게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환대권 씨의 글을 읽다가 ‘밥모심’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습관처럼 불렀던 “밥은 하늘입니다~”로 시작하는 농활에서의 밥가도 생각이 났다. 지금의 비록 돈 주고 사는 상품, 혹은 좀 더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음식은 본래 우리의 생명활동을 유지시켜주는 것이었다. 뭇 생명만큼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것은 없다. 음식은 비단 우리 몸에 생명의 에너지를 채워줄 뿐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 우리를 이어주었다. 자연에서 식재료를 얻고,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먹고, 다시 배설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행위는 그 과정에 관련하는 모든 생명체를 서로 관계 맺어 주고 또한 그 순환을 통하여 그들을 영속적으로 존재케 한다.


음식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아가면서 나는 보잘것 없는 교도소의 밥과 반찬도 천천히 꼭꼭 씹어 보시기 쇼ㅣ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거룩한 이 생명활동 ‘음식모심’은 음식을 통해서 내 몸과 대화하고, 음식을 통해서 다른 생명과 만나며, 음식을 통해서 지구의 생명공동체와 관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결국 내 몸을 어떻게 바라보며, 지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먹느냐인 것이다.


☮ ‘관계’를 회복하라.


오랫동안 우리 인간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지구 생명공동체와 현명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활동인 색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쌀을 주식으로 삼는 것, 섬나라 일본이 다양한 해산물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 유럽의 사람들은 쌀보다 밀에 의존하는 것,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들이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 모두 사실은 같은 모습이다. 자기가 딛고 사는 지구와의 관계를 지속시켜 가는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우리는 음식을 조달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곤 했지만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지구는 신비로운 그 자정능력으로 우리의 허물까지 깨끗이 씻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의 지나친 오만함이 모든 면에서 허용치를 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 대자연인 지구와의 관계 모두 그 파국이 멀지 않았음을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원인과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겠지만 난 ‘음식’에서 새로운 세계가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이야말로 태초부터 맺어온 생명관계망이고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육식산업-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우리의 식생활-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며, 지구를 회복불가능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책이나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채식이이 총체적으로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음식을 넘어서 생명창조와 영속과 지속의 매개체로서 음식을 다시 인식하는 것은 현재 음식산업의 가장 추악하고 거대한 음모, 거대축산업과 육류업계에 대한 거부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제3세계의 농민을 굶주리게 하고, 유전자 변형 작물을 만들고, 가축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고,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음식에서 출발된 악몽은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좀 더 많은 고기를 싸게 생산하기 위해서 파괴되는 열대우림은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효율적인 사료생산을 위해서 점차 단일화 되어가는 농작물은 문화다양성(인간의 많은 문화는 기본적으로 농사일과 연관되어 발전해 왔음을 기억하자)과 연관이 있다. 음식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음식으로 풀 수 있다.


채식은 육식거부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실천의 불발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난 채식이 좀 더 풍성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여러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고기보다는 야채나 곡류를 먹고, 가능하면 유기농을 먹고, 대형마트보다는 재래시장을 이용하고, 음식을 사먹기보다는 만들어 먹고, 더욱 노력하여 간단한 채소는 직접 재배해 먹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채식을 통해서 나는 내 몸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다른 생명들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고,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의 역할을 자각하게 된다.


☮ 즐거운 채식을 위하여.


왜 하필 음식이냐고? 밥 안 먹고 사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모두의 문제이면서, 모두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오해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오해들을 풀어가면서 정리하고자 한다.


채식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바라보거나, 반대로 극단성을 요구하는 시선들이 있다. 채식하는 사람은 뭘 먹고 사냐는 인식이 전자요, 고기만 안 먹는 사람에게 생선은 왜 먹느냐고 하고 생선도 안 먹는 사람에게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반응이 후자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채식을 극단으로 몰아가려는 시각이라는 점에서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채식은 극단적이기보다는 가장 조화를 중요시하는 음식문화이다. 채식주의자는 우리의 모든 먹거리가 생태계의 순환에 가장 조화롭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때문에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라다크 사람들이 야크를 먹고, 훗카이도의 아이누족이 물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알래스카의 에스키모가 육식을 주로 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의 시스템과 가장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진정한 베지테리언이다. 가능한 한 상육하지 않으려고 덩치가 큰 야크로 여러 사람이 먹으며 야크를 위해 기도하고, 저장을 위한 필요 이상의 물고기를 잡지 않는 모습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채식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꾸준한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내가 먹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또 다른 오해는 채식 한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것이다. 즉 채식은 취향일 뿐이며(존중받아야 할 취향이라며 선심을 쓰기도 한다), 운동이라고 해도 그런 나이브(?)한 방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거부는 어떻게 보면 그들의 종교적 취향(?)이었을 뿐이지만 그들의 희생을 밀알삼아 지금의 병역거부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운동은 정치적인 행위이고 결국 어떤 정치성을 부여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채식이 나이브한 방식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거대자본-국가-거대권력은 이미 우리의 가장 사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항상 눈 크게 뜨고 찾아내서 그것들과 결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권력을 진보세력이 획득하는 것보다, 자본가의 권력을 노동자들이 접수하는 것보다, 우리의 삶을 권력이 주는 안락함과 기득권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채식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채식만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동물인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사회는 더더욱 한 가지의 잣대만 가지고는 그 치수를 어림잡을 수도 없다. 그 세상을 바꾸려는데 한 영역에서 한 가지 방식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오만 아니면 무식이다. 채식은 인간이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른 생명과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꾸며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때문에 부족한 인간의 모든 행위 또한 완전할 수 없음을 안다. 채식은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노력 중의 하나일 뿐이고, 다만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따라서 중요한 키워드가 될 가능성을 내표했을 뿐이다.


비록 감옥에 갇혀서 주는 밥 먹고 있을 뿐이지만 난 나의 채식으로 무수한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지금가지처럼 누구에게도 채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권유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뿐이다. 다만 이렇게 글을 쓴다든지 캠페인 등을 통해서 육식의 문제점을 고발하거나 채식의 좋은 점을 선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애시당초 논리적인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채식이 결국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음식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 그것은 우리의 존엄한 생명창조활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셈인데 이것이 인간의 부족한 논리와 이성으로 인식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고기를 먹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줄 것이다. 느리고 더디게 보일지는 몰라도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내가 변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채식은 비폭력시민불복종의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내 주위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고민하고 가능한 한 육식을 지양하려고 노력하고, 하다못해 나와 있을 때는 고기를 안 먹게 되는 변화를 이미 보이고 있다. 죽기 전까지 세상을 뚝딱 바꿔 놓을 것이 아니면-그렇게 빨리 바뀌면 세상 망한다. 사람도 빨리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지 않나 zz- 이 지긋한 변화의 가능성을 즐기는 것이 어떨까? 상추쌈에 풋고추 한 입 물고 천천히 씹어가며 한 번 즐겨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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