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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비정규인생들에게"

"차별 대신 해고" 비정규직 대량해고 현실로
 [SBS TV 2007-06-05 20:46]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그대에게
- 부르주아 시민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인생들에게~

1.
한 사회를 인지하는 관점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그것은 쉽게 눈치챌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우선 우리사회가 운영되는 형태를 보자.
어떤 사람이 사회에 배출되어 생활을 해가려고 한다.
그는 회사에 가서 일을 하기로 하고 회사는 그를 고용을 한다.
그가 사회적 존재를 얻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 길이다.

우리가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으며 생활해 가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의 사회적 물리적 존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는 더욱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럼에도 좀처럼 사회적 문화적 물질적 존재는 충족되지 못한다.

그는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어째서일까?
열심히 일함에도 휴식을 찾지 못하고,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는 다시 고민을 하게 된다.
혹시 그간 교육을 받아온 것이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참 고심을 하던 그는 이제 국가와 사회(자체!)에 대한 의구심에 다다르게 된다.

(사회는 사회체제를 말한다.)


2.
우리가 이 사회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요근래의 사회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그리고 형성되어 왔는가를 살펴보아야한다.

현사회의 기본 단위는 회사이다.
그런 회사들의 집합이 이 사회체제이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임금을 받으므로서 생활해가는 체제임을 알아야한다.
그것을 자본주의라고한다.

이러한 체제, 즉 사장이 사람을 고용하여 생산을 하고, 또 생산한 물건을 유통시키기 위하여 사람을 고용하는 체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자본주의 산업과 자본주의 상업 등 자본주의적인 생산형태(생산양식)는 언제부터인가?

3.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은 곧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 이전에는 농노를 중심으로 생산을 해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농노는 영주, 귀족의 부속물로서 살아가야만 했었다.

이러한 시기를 마감하게 된 것은 일단의 산업, 상업 부르주아지(시민)들이 농노신분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고용하여 생산을 해감에 의해 점차 이러한 고용을 매개로 한 관계가 확산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힘을 비축한 때문이다.

힘을 비축한 부르주아지(시민)들은 이전의 생산형태였던 - 귀족과 그에 예속된 농노로 이루어진 - 봉건체제와 자신들의 생산양식과 부딪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힘이 더욱 막강해진 부르주아는 이전의 봉건체제를 밀어냄으로써 새 체체를 구축할 수 있었다.

4.
 이제 프랑스에서는 점차 증대된 사회적 힘을 소유한 부르주아(시민)들, 그에 고용된 노동자들에 의해 기존의 질서(봉건체제)를 깨고 새 체제를 구축하려는 '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혁명은 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격발되었지만 점차 부르주아를 위한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고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하여 자신들을 위한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부르주아들에 의해 노동자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심지어 유럽 여러 사회에서는 이제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힘을 합쳐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반동이 휘몰아쳐졌다.

프랑스 혁명은 집단적인 사회성원이 집단적인 방식으로 귀족, 영주 등 기존의 질서를 분쇄하였기 때문에, (비록 그들의 저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곧 새 질서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루이16세와 귀족들의 단두대에 목이 잘리자 전 유럽의 귀족, 영주 등 기존 질서들은 경악하였고, 곧이어 자신들의 사회에서도 벌어지리라 여겨지는 사태를 두려워하였다. 일부는 곧 자신들의 오래된 권리를 앞다투어 내놓게 된다.

 최초의 시민(부르주아지)들은 봉건체제에서보다는 인민들에게 많은 자유를 권리로서 주장하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산형태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은 자유롭게 떠도는 노동력, 그것도 대량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5.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사회는 한단계 발전된 형태를 띄게 되었다.
그럼에도 최초의 시민(부르주아)들은 자신들만이 권력을 가지려고 하였다.
초기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는 일부의 부르주아(시민)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시민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르주아 자신들이었고, 일정한 재산(일테면 50억) 이상을 소유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부르주아들은 모든 인민이 동일하게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면 인민들이 자신을 위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고, 그 점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우려였고 오류임이 곧 밝혀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르주아에게만 권리가 주어지고 있고, 인민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권리없음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편, 영국에서 정치적 권리를 재산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리도록 하자는 차티스트운동이 일어났고 지리하고도 오랜 기간 인민들이 투쟁을 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인민들에게 확산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

 허나 오늘날의 선거는 초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에게 인민들에 대한 관리를 위임하는 요식적인 관례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4년내지 5년 주기로 단 한 차례 투표소에 가지만 일상에서는 부르주아들에 의한 권력이 집행되는 모습을 우리는 항상 접하고 있다. 시민적 권리를 갖는 부류를 시민이라고 한다.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을 '시민'적 존재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일상적 현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권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6.
오늘날의 억압자인 부르주아는 규율잡힌 근대적 인간형을 양산하기 위한 공교육을 통해, 그리고 의회, 사법, 방송, 언론을 통해 자신들과 피억압 인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맞다!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해야만하는 부류(Class)와 그들의 임금을 줄이고 고용을 줄이고 해고를 통해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짜내야하는 부류(Class)가 하루, 한달을 두고 부딪치는 것이 오늘 우리들 인민의 삶이다.

 이것은 주지하다시피 부르주아들의 이윤이 인민들이 생활을 충족해가기 위해 절대적인 임금과 정확히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들의 이윤이 반사회적이라는 것을 말함에 다름아니다. 결국 이러한 생산의 적대성이 사회시스템을 규정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은 이런 것으로 현실을 채워가고 있게 되는 것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간혹 자주 잊고 잊어버린 채 마치 자신이 시민인양 살아가고 있다.
시 민적 권리를 갖지 못한 자도 시민일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기최면같은 것이다. 권리의 박탈자가 권리를 누리고 있는 시민인양 처신할 때 현실과의 괴리로 정체성을 상실한 채 부유하게 되는 것이고 조여드는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자는 바로 자신인 것이다.
그러한 억압,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실의 무기력함, 소외, 생활의 비참함, 더 할 수 없이 참혹한 주변상황을 타개할 힘이 될 것이다.

 현실을 타개하는 귀결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부르주아가 그들의 권력을 탈취하였듯이 노동자가 그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여 가질 때 가능하다.
 부르주아 그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봉건 귀족과 기존 질서로부터 사회적 물리적 힘으로써 권력을 탈취하였듯이 힘을 축적한 노동자들이 피억압 인민들과 함께 집단적 힘으로써 부르주아 그들로부터 집단적인 방식으로 권리를 탈취할 때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어찌하여야하는가!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생산을 해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하게도 인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편제하고 훈련한다.  그에 비해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자인 인민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스스로를 위해 교육하지 않아 왔다. 교육은 스스로에 의한 교육, 스스로를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노동자들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교육하고 자신들을 훈련하여야한다.

 그것이 노동력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현실적, 실질적, 사회적 행위다.

[참고]
-
철학 에세이 - 개정4판, 동녘선서4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5168
-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책갈피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9660413
- 노동의 역사 /광민사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123&no=779
- 노동자 교양경제학 2006 /노사과연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669519


덧붙임 >>
[ 근대적 규율교육으로서의 제도권교육은 오로지 생산을 해가기 위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들에게 인민은 값싸게 부릴 수 있고 다루기 쉽고 쓸만한 소모품이면 되는 것이다. 모든 상품은 그것을 써먹을 시점에서야 효용을 준다.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도 그것이 사용될 시점에 효용이 발생한다.   자본에 의해 기획되고 집행되는 정규교육과정은 오로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능한다.

 이(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이 왜그리 많은 사람들을 실패한 인간으로 만드는가, 또는 어찌 그리 형편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면 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그에 대한 인민들의 의문과는 달리 가장 멋진(?) 상품들을 사회 - 사무실, 작업장, 매장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장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 출하하기 위해 - 잘 고안되었고 더이상 기대할 수 없으리만치 이상적이며 그야말로 훌륭한 성과를 내며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인민은 이러한 구체적 현실이 "우리에게 응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환상은 달콤하지만 현실이 아니다. 이젠 자신이 마치 부르주아들과는 다른 땅에 발딪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하며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 대해 답해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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