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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학위조작 사건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능력’

  "결국 교육부가 말하는 ‘전인 교육’의 실체는 대다수의 예비 노동자인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서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과 애국심,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리는 자본주의형 ‘인간 양성’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능력과 학벌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에게 특권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재능과 기호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토해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키우고 그 능력껏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32호] 학위조작 사건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능력’
       
노정협       2007-09-29 07:59:48,

불거지고 있는 학위조작 논란들

  뜨거운 무더위를 몰고 온 7월부터 지금까지 각 전공분야의 최고로 일컬어지는 유명인들의 학위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화예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동국대 신정아 교수의 박사학위 조작 사건을 필두로 영어강사 이지영, 만화가 이현세, 배우 윤석화, 종교인 지광스님 등 많은 예술인, 종교인들이 학위조작을 고백했다. ‘인터뷰 중 무의식적으로 학력을 거짓으로 이야기해 버렸다’는 이들의 고백은 각 분야에 찌들어있는 학벌 풍조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학위조작은 단지 문화예술계, 학술계뿐만 아니라 사교육계에서도 분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경찰이 강남에서 일하는 학원 강사 70명을 조사한 결과 31명의 학원 강사가 대학 졸업장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위조작 사건의 여파는 학벌 사회에 대한 반성으로 이슈화되었다. 검찰과 교육청은 학위, 자격증, 국내외 인증 등에 대한 집중 단속과 조사를 벌인다고 발표했다. 정부와 대학은 학위를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역시 ‘학력검증센터(가칭)’을 설립할 계획이다.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학위조작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학벌 사회를 없애서 ‘학위가 아닌 개인의 능력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모순지점을 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력 위조를 조장하는 학벌 사회도 문제지만 거짓말을 한 개인의 도덕성은 더 문제이고 ‘이것은 범죄’라고 이야기하며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학력 사기는 어디까지나 범죄행위다. 실정법 상 문제가 없더라도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동시에 속이는 범죄다. 요즘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국가ㆍ사회 발전의 촉진제로서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학력 사기는 대표적으로 사회적 자본을 허무는 일이다. … 박사 학위가 없어도 자기의 전공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대학에 가지 못했더라도 당당하게 학력을 밝히면서 피나는 노력과 성실함으로 자기 세계를 일군 사람들이다. 학력의 포장과 힘에 기대어 뭔가 얻으려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8월 23일 한국일보 칼럼, 공공의 적 학력사기>

 더 나아가서 학력은 개인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공정한 지표인데 학력이 우대되는 사회를 탓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도 나오고 있다.

 학력을 우대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학력이란 한 사람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중요한 과정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학력이 좋다는 사실은 그만큼 훗날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했다는 증명이 될 수 있다. 좋은 학력은 사람에게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할 동기를 부여해 준다.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나마 한 사람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학력이다. 앞으로 학력 이외에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면 학력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서서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학력은 한 사람을 변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잣대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학력을 우대하는 한국 사회에 돌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8월 24일 동아일보 칼럼, 학력 위조 사회 탓해서야>

 남한 사회에서 학벌 문제는 끊이지 않는 논란거리다. 학벌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의 능력만으로 인정받는 ‘능력 사회’가 학벌 사회의 대안이라면 그 능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왜 학벌이 중요시 되는가? 

 ‘학 벌’ - 이 말은 한 사람이 사회에서 일류로 치는 학교를 졸업했냐는 여부에 따라 개인의 능력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학벌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 학벌사회가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문제라고 부각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학벌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든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로 학벌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프랑스의 교육체제를 들 수 있다. 보통 프랑스의 교육은 국가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비로 교육비를 지원해주며 대학도 평준화 되어 있어 남한과 같은 대학 서열화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저 있다. 하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프랑스의 교육 또한 체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인력들을 양성하고 있다.

 프랑스의 특징적인 교육시스템 중 하나가 ‘그랑제꼴’이라는 고등교육 제도인데 이는 일반 대학이 아닌 한마디로 소수정예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랑제꼴은 각 분야별로 존재하며 ‘대학 위에 대학’으로 프랑스 국민의 약 3%의 인재(?)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랑제꼴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바깔로레아(남한의 수학능력시험과 같은 시험제도)를 합격하고 2년을 추가로 프레파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서류심사로 그랑제꼴에 선발된 학생들은 일주일에 약 60시간을 공부에 쏟아 붓는다. 이들은 자본가 국가의 고급 관료로 양성된다.

 수많은 프랑스 학생들은 그랑제꼴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그랑제꼴을 졸업하기만 하면 그 앞길은 탄탄대로이다. 행정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거의 프랑스의 정치인이 되어 프랑스를 쥐고 흔든다. 국영 프랑스 텔레콘, AFP 통신, 푸조 자동차, 에어프랑스, 루이뷔통과 같은 프랑스 주요 기업 총수들도 거의 이 행정 그랑제꼴 출신들이다. 행정 분야뿐만 아니라 문과, 이공계열 등에서 고급 국가공무원, 간부급 경영인, 엔지니어들을 배출해낸다.

 이처럼 프랑스 고등교육구조는 평준화된 대학 위에 소수 지배계급과 관료를 양성하는 그랑제꼴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사회에 진출해서 국가와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한다. 그리고 일반 대학에 가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대로 노동 시장으로 투입되어 노동력을 팔며 평생 노동자계급으로 살아가게 된다. 학교 출신에 따라 계급이 양분화되어 재생산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교육의 본모습이다.

 남한은 대학서열화로 인해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소위 ‘일류대’ 출신은 학연과 학벌을 통해 출세나 승진, 임금 등에서 중간계급의 특권을 누린다. 그 외의 대학출신이나 대학을 못나온 사람들은 어떠한 곳이라도 ‘취업만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피터지는 취업 경쟁에서 서로를 짓밟으며 결국 비정규직으로 생존권의 지푸라기를 잡아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학벌은 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일어난 학위 조작과 같은 사건이 공공연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에서 20~30대 남녀 2000명에게 실시한 ‘취업이나 성공을 위해 학력 위조를 생각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설문조사에서 19.3%가 ‘있다’라는 응답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직활동을 하면서 학력이나 학벌 때문에 차별을 받은 경험을 묻는 질문에 66.5%가 ‘있다’는 응답을 했다. 학벌사회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설문조사 결과이다.

 학력 위조 외에도 학벌 사회로 인해 발생하는 입시경쟁의 심화, 고액 사교육 열풍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에 대한 비판과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제 개인의 능력, 실력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국가와 자본의 논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누구나 이야기하는 개인의 능력이 사회구성원들과 사회에 발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조건이 과연 가능한가?

누구를 위한 ‘능력’인가? 

  교육부는 ‘전인교육’을 궁극적인 교육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지덕체를 갖춘 전인적 인격 양성이라는 목적도 무색하게 남한 사회의 교육은 더 가혹한 입시경쟁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학과 자본은 그 중에서도 극소수의 엘리트를 양성해서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한다. ‘강남엄마 따라잡기’라는 드라마는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서 가진 돈을 싹싹 쓸어 강남으로 이사를 가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 비판을 소재로 하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드라마 중 자녀는 미술을 하고 싶지만 부모는 과학고를 다니라고 강요를 한다. 결국 그 자녀는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는 남한 사회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였다. 매년 수능시험이 끝나면 시험결과에 대한 비관으로 한 두명의 학생은 꼭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남한 사회의 교육 현실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입시교육’이 지금의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해주고 있는 말이다.

 결국 교육부가 말하는 ‘전인 교육’의 실체는 대다수의 예비 노동자인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서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과 애국심,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리는 자본주의형 ‘인간 양성’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능력과 학벌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에게 특권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재능과 기호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토해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키우고 그 능력껏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자본을 위한 능력을 기르는 것은 청소년기의 국가 의무 교육뿐만 아니다. 이런 교육은 노동현장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자본은 평생 교육과 직업능력학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개별 자본들의 구미에 맞는, 각 자본이 자신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을 노동자에게 요구하며 이를 키우게 한다.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경쟁에서 뒤쳐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교육시간을 투자해서 노동자들에게 교육으로 인한 또 다른 노동강도 강화를 강요하고 있다. 그 예로 삼성자본이 항상 첨단 통신장비를 사주면서 노동자들을 조기 퇴근시키고 학원이나 학교로 교육을 보내고, 또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회사로 호출하는 등 24시간 대기체제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근무시간 외에도 자본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잔업, 특근 수당도 받지 못한 채 꾸준히 자본을 위한 자신의 능력에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이 인정하는 학력과 학벌을 통해 자신의 고용을 유지하려고 부단하게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의무 교육이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순응하는 데 복무한다면 노동 시장에서 행해지는 작업 현장 직업교육 역시, 현장에서의 경영 원리와 구체적인 기업 자본에게 충성하는 교육들이 많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교대노동을 개선한다면서 매주 회사가 교육을 상당시간 할애해서 노동자들에게 기업에 충성하도록 하는 정신교육을 강화하고, 직업능력 개발 교육으로 생산성도 획기적으로 높인 유한킴벌리의 노사화합 사례가 그 대표적이다.

 학위 조작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를 폭로하자! 

 학력 위조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의 출세 욕구로 인해 발생된 문제가 아니다. 학력은 자본의 품에 안겨 특혜를 누릴 극소수 엘리트들에게도, 이 외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꼬리표와 같은 것이다. 이 꼬리표는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마다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부터 임금 수준, 현장에서의 차별 대우가 결정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번듯한 대학 졸업장이라도 하나 거짓으로라도 만들어 놓지 않으면 경쟁에서 사회가 원하는 ‘일류’ 대학 논문과 졸업장을 가진 동료에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학위 조작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 있다. 결국 이는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자본이 행하는 교육이 자본을 위해, 자본주의의 유지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묶어두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버려가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은폐한 체, 개인의 도덕성을 나무라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교육받아온 모든 것들은 단지 자본이 예비 노동자와 노동자들을 지금의 현실에 순종하게 하고 만족하게 해서 보다 손쉽게 착취하고자 하는 시나리오임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의 잣대에 의해 휘둘리는 차별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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