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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계급협조적 복지국가- 교육기획연재 (5)


 노정협   2007-08-27 18:01:38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계급협조적 복지국가(1940년~1970년)
 
 이번과 다음 호 주제는 194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경제사를 중심으로 한다.
 
 이 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유례없는 활황기라 불리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시기(1940-1970년대)와 그 이후 이윤율을 만회하기 위한 비용절감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1980-현재)가 그것이다. 일부는 최근의 신자유주의가 선택 가능한 정부 정책의 변화처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 이전의 복지국가 시기의 자본주의적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본의 사활을 건 필연적인 선택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더 큰 모순과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이윤율을 기반으로 그 이전 시기의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계급타협적으로 체제내화 한 것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시기라고 한다면, 똑같이 자본의 이윤율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동계급에 대해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한 시기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이다.
 


 1. 2차 세계 대전은 끝나고,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의 세력관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자신의 이전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프랑스는 전쟁의 피해를 아주 심하게 입지 않아서 강대국으로 인정되었고,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은 자신의 패권을 미국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보호하는 상인선단을 잃었고, 미국에서 전시 물자를 많이 공급받았기에 그 대가로 해외 재산의 대부분을 넘기고 상당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전쟁 이후 식량 공급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럽은 1946년 40억 달러의 대미 무역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1938년의 8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대미 무역적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식량과 공산품(특히 수송차량)이었으며, 원료수입은 전전에 비해 1/3정도가 많았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과는 다르게 미국은 완전한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참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 이후 발언권이 높아졌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크게 파손되었지만 미국은 산업을 현대화하고 확장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쟁 전보다 50%나 확장되었다. 미국은 과학적, 기술적 연구를 증진시켜 원자폭탄을 생산했고, 자동화를 통하여, 그리고 원자에너지를 이용하여 생산성 증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군사강국임을 입증하고 최고의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 냉전 시대
 
 소련은 2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사할 정도로 전쟁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력은 상당히 확장되었으며, 동유럽에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소련은 세계에서 주요국으로 부상하였다. 이 상황을 두고 미 국무장관 바이런은 1945년 여름, 사석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전쟁을 통해 힘을 가지도록 만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 미국과 러시아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달라 장기의 협력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라며 당시 미국이 갖고 있던 태도를 보여주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12일에 있었던 의회 연설에서 냉전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촉구했고,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즉 '극소수 무장세력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전복 행위에 저항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의 논리는 소련의 팽창은 체제 위기를 불러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측면에서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적 재건이 추진되었다.
  
 ● 세계적 분업구조의 확립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 국가들 및 전승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 약화와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해방투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 식민지는 정치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일부 제국주의 국가들은 군사적 방법으로 인도네시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세계체제 재편에 내몰렸다. 이는 세계적 분업구조의 확립이었다.
 
 경제적인 방식으로는 핵심기술을 제외한 하청 기술, 산업 부문을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게 자본수출, 기술 이전 등의 형태로 선진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과잉 축적된 자본’을 해외로 유출했다. 이를 통해 일국 내에 고도로 축적되어 있던 자본을 해외로 돌리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비율’을 낮추는 효과와 함께 신생 독립국가들이 자본주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자본의 수출과 신생 독립국들의 경제적 성장은 자본주의 세계 시장을 보다 확대시켰다. 정치적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주권국가를 제국주의에 우호적인 군사, 정치적 동맹국으로 바꾸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존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강화된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가능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이들 신생 독립국들이 친미적인 경향의 정치권력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은 반공정책과 경제지원이라는 무기로 이들 국가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또한 미국은 이들 하청 기지화 된 신생 독립 국가들을 군사블록으로 끌어들여 동남아시아조약기구와 바그다드조약을 만들었다. 당시 신생 독립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친미 정권들에게는 위협이었고, 미국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권의 확산이라는 위기감이 일치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들 블록에 들어온 아시아 국가의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곳에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구식민지국가에 대리정권을 육성하고, 극우적인 반 노동자 계급 세력을 키우는 것은 이 당시 초강대국 미국의 중요한 전략적 방향이었다. 
 
 미국은 가능하다면 직접지배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알제리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기타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과 지역에서 있었던 유혈 식민지 전쟁과 토벌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2. 세계 경제 질서 재편 
 
 전후 세계경제 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미국은 전쟁에 의한 번영을 전후에도 유지하기 위해 환율을 안정시키고, 자유무역제도를 확립하며, 유럽의 부흥을 꾀했다. 그것은 각각 브레튼우즈 체제와 GATT, 그리고 마셜플랜으로 구체화되었다. 
  
 ●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
 
 연합국은 전후 세계의 통화와 금융을 재건하기 위해 1944년 7월에 브레튼우즈에 모여 회의를 했다. 이 회의 결과 7월 22일 연합국 통화 회의의 최종 의정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이 회의는 전후 전 세계의 주도권을 어떤 국가가 가질 것인가의 방향을 가늠해주는 자리였다. 이 회의에서는 1943년  영국의 케인즈안(국제청산동맹안)과 미국의 화이트안(연합국 환안정기금안), 그리고 이 두 안의 타협을 위해 캐나다가 발표한 '국제환 동맹안' 등 3안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의 성립 과정에서 미국, 영국의 대립과 타협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영국의 패배로 귀착되었다. 당시 미국은 37.5억 달러의 차관공여를 내용으로 하는 미, 영 금융협정을 체결하는 대가로 영국 측의 양보를 강요하였다. 이 협정의 결과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도(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각국의 환율은 이 달러를 기준으로 설정)가 채택되었다. IMF가 채무국에 고정 환율과 자유로운 무역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기 위해 1947년 3월에 발족되었다.
 
 고정되어 미국 달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당시의 환율은 미국 달러를 제 1의 통화로 간주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의 경제 관계에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한 경제 질서들이 급속도로 침투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더욱 높이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재건 수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초과가 불가피했던 시기에 이러한 과대평가된 환율은 미국 상품들을 싸게 하며, 추후 서독 등 유럽 독점자본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피해국의 부흥과 후진국 개발에 필요한 자본재와 수입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IBRD가 만들어졌다. IBRD는 선진국 독점자본들이 신생독립국들의 개발계획과 채무능력의 심사,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도입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30년대 블록경제의 잔재를 무너뜨렸다. 동시에 외환관리를 축으로 전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장벽을 무너뜨려 미국 독점자본이 활개 칠 수 있도록 했다. 광대한 영국의 지배영역이 개방되었고, 영국에 대한 특혜가 폐지되었다.
  
 ● GATT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는 국제무역의 자유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1947년) 원래 미국이 제안한 자유무역기구는 미국으로서는 영국의 영향권인 파운드 지역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의 제안은 1947년 ITO(국제무역기구)헌장을 통해 국제무역고용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특혜관세의 폐지, 수입관세의 인하를 기본으로 하는 이 헌장은 미국 내부의 대립, 영국의 저항, 신흥 독립국의 비판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ITO의 하부기관이었던 GATT가 무역 문제의 국제협의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GATT는 당초 체결국 대외무역총액의 85%를 점하는 국가들이 협정을 수락했을 때 확정적인 효력을 발생하는데, 협정을 수락한 체결국이 하나도 없으므로 GATT는 '잠정적 적용에 관한 의정서'에 기초하여 잠정적으로 실시되어 왔다.
  
 ● 마셜플랜
 
 마셜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 16개국에 대해 행해진 대외원조 계획으로서, 제 2차 세계대전 중 행해진 미국의 개별적인 각 국별 원조를 유럽의 종합적 부흥계획에 대한 원조로 단일화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RP)이지만, 이 계획을 최초로 공식 제안한 미국 국무장관 마셜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라고 부른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이 계획이 유럽을 미국 자본주의의 이익에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거부했으므로 대상국은 서유럽 16개국으로 확정되었다. 1948년 4월에 미국은 대유럽 경제 원조를 실시하기 위해 경제협력국(ECA)을 설치하고, 마셜플랜이 정식 발족되었다.
 
 이로부터 1952년 6월까지 4년 3개월 동안 마셜플랜에 의한 대유럽 자금 공여는 128억 달러에 달한다. 유럽 국가들은 지원 받은 자금을 투자해서 이윤을 축적해갔지만, 이 이윤에 대한 사용은 미국 정부의 동의하에 사용될 수 있었다. 즉 마샬플랜에 의해 지원된 자금은 형식적으로는 유럽 국가들의 소유이지만 원조국(미국)의 동의 없이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증여가 아니었다. 마셜플랜에 의한 경제원조는 동시에 군사적, 정치적 요구가 뒤따랐다. 1949년 9월 제정된 '상호방위법'에 의거해 소규모 군사원조가 미 국방성에 의해 행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직접적 군사원조의 증대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도 전략목적에 종속되었다.
 
 마셜플랜은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으로부터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각국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조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미국상품 특히 잉여농산물이 유럽시장에 파고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이 계획의 실시 과정에서 서유럽경제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후 EEC로 이어지는 유럽자본주의의 통합 계기인 구주경제협력기구의 조직도 마련되었다. 전후 일본의 자본주의 재건도 같은 의미이다. 당초 비군사화, 민주화라는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은 변화하여 1948년 1월 "일본을 반공의 방벽으로"라는 로얄 성명에 의해 일본은 냉전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마셜플랜의 결과 서구 각국의 공업생산은 1948~1950년 사이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지만  서구에서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현저하게 후퇴했다.
    
 3. 유럽 좌익의 사민주의 정당으로의 노선 변화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기에 그만큼 발언력이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기회주의적 지도부들은 이 힘을 자신들의 정치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고자 했다. 냉전 개시와 더불어 대부분의 공산당은 몰락하고, 노동자의 정당은 사민주의 정당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독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노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추방당한 자들도 귀국이 지체되었다. 특히 반쪽이 스탈린 하에서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연방공화국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독 노동자들은 1948년 11월의 대파업을 통해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49년에 열린 독일노동조합동맹의 창립회의는 경제계획, 주요산업의 국유화 및 노동자들을 위한 완전한 자영체제 등을 요구하였는데 1951년에야 파업 투쟁의 성과로 광업, 철강업에 대한 공동결정법을 쟁취한다. 그러나 1952년 경영조직에 관한 법률을 위한 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구조 변혁 투쟁은 무너진다. 임금인상, 조업시간 단축 및 사회적 지위 향상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사회민주당에 의해 채색된 계급협조 이념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후퇴한다. 1953년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국민의 정당으로 탈바꿈하겠다며 노선을 전환했다.
 
 영국도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열망에서 멀어져갔다. 영국의 경우 체임벌린 내각이 무너지고 1940년 연립내각인 처칠 내각이 들어섰는데, 이 내각은 약간의 지식인의 지원을 받아 사회개혁을 시작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온정주의적 복지국가의 윤곽이 마련되었으며, 교육개혁이 시작되었다. 1945년 노동당은 총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의회에서 절대 다수파가 되었다.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변천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이 유포되었다. 영국은행이 국유화되고, 탄광 및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하지만 이 국유화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으며 소심한 노동당 지도부는 사회의 일정한 개량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결과 빈익빈부익부는 50년대 들어 더욱 증가하는 추세였다.
 
 다만 프랑스 정도만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보여준 태도 때문에 나름대로의 영향력과 급진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후로 영향력은 급속하게 삭감되었다.
    
 4.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황금기, “공황은 사라졌다?” :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 
 
 “1973년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생산은 1950년보다 180%나 성장”(「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했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에서 벗어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달러 우산'의 안정 아래에서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 연평균 5.3%, 1960년대에는 연평균 5.9%로 순조롭게 확대”되었고, “세계무역도 선진국의 수출 확대와 공업제품의 수출 확대를 주축으로 1960년대에는 연평균 10%에 가까이 성장”했다.
 
 ● 지속적 성장의 몇 가지의 요인
 
 1) 국가의 경제과정에 대한 개입이 전면화 되었다. : 국가는 도로나 항만, 건설 등 하부구조 부문, 사회자본 확충, 특정 전략부문의 유효수요 창출이나 직접 융자, 특정 산업의 국유화, 나아가서는 사회보장과 사회개량에 따른 소득재분배 실시 등을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국가는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 경제과정 전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각 국마다 국가의 재정지출의 기조는 조금씩 달랐는데, 미국의 경우 군사지출이 가장 컸다. 1950년대 미국의 군사지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0%를 넘었고, 60년대에 들어와서는 군산복합체제가 미국경제의 기간부분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산업의 국유화와 사회보장, 사회개량의 지출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 국가는 미국에 비해 변혁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비용을 많이 지출해야 했던 것이다.
 
 2)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물적 기반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자원과 원료가 낮은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기술혁신은 항공기, 석유화학, 전자공업 등 새로운 산업분야와 내구소비재 분야, 철강으로 대표되는 중공업분야 등의 광범위한 부문에 걸쳐 진행되었고, 직접적 생산과정, 노동과정의 존재 방식이나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원료와  자원에 대해서는 거의 일관되게 낮은 가격이 유지되었다. 곡물 가격은 턱없이 낮았고, 교역 조건도 공업제품에 비해 점점 악화되었다. 석유시장은 미국과 영국 등이 장악하면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였고, 산업구조는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고효율의 연료자원을 중심으로 산업체제들이 구조화되면서 기업의 이윤율을 높이데 기여했다.
 
 3)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다. : 이때는 노동력의 지속적인 추가 흡수가 가능했다. 농업노동력이 배출되고, 여성 취업률이 상승하며, 외국인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대량생산 산업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 고용 확대가 29% 정도 증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생산의 증가가 고용 증가로 직결된 것만은 아니다. 생산 증대의 대부분은 노동자 1인당 생산성 증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1인당 생산성은 연 3.3%의 증가율”(같은 책)을 보였다. 생산수단의 “자본투자량은 1952년에 비해 1973년에는 2.3배”나 되었다고 하니 이는 생산수단의 양적, 질적 성장이 동시에 이뤄진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찾기 힘들어진 자본가들은 낡은 생산수단을 폐기하고, 생산성이 높은 생산수단을 도입해야 했다.
 
 이때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크게 상승했는데, 이것은 소비를 촉진시키면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창고에 쌓이는 것을 막았다.
 
 ● 성장에 따른 각국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변화
 
 1) 안정적 성장과정을 통해 독과점체계가 확대되었고, 초거대독점인 다국적기업이 형성되었고, 군산복합체가 중추적 경제지배체제로 등장했다. : 록히드, 더글라스, 보잉, IBM, GM 등 거대 기업들은 군사기구와 생산, 기술, 시장, 계획을 결합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했다. 이것은 유럽으로 파급되어 세계적인 경쟁을 촉진해서 유럽에서도 기업의 집중과 합병이 계속되고, 군산복합체가 창출되었다.
 
 2)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만성화되었다. :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가격에 전이되었다. 국가는 관리통제 하에서 적자재정에 의한 공공투자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동력 공급이나 자원과 원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때에도 추가적인 성장통화를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과점체제와 군산복합체들은 가격을 올리기는 하지만 내리지는 않는 하방경직성을 만들어내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강화했다.
 
 3) 사회복지(사회개량) 정책이 실시되었다. :냉전의 유지와 변혁 세력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는 사회개량이 필연적이었다. 복지국가는 전후 기간에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복지정책은 좌익정부의 전매특허는 아니었다. 복지지출은 우익 정부들에서도 수행되었다. 이 복지정책은 자본주의의 특성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으나, 복지국가는 결코 빈곤을 제거하지 못했다. 표준화된 빈곤숫자를 토대로 하면 “1970년대 초 독일 인구의 3%, 영국 인구의 7.5%, 미국 인구의 13%, 프랑스 인구의 16%”가 빈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비용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세금이었다. 복지정책은 호황에 기초해 자본주의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노동관리 전략이었으므로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바로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호황의 과정에서 EC 통합으로 유럽과 일본의 지위가 상승하고, 미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이것은 전후 자본주의 세계를 안정시켜온 국제 질서를 동요시켰다.
 
 국가 개입의 확대, 과학, 정보 기술의 발전과 이를 통한 생산성 향상, 노동계급에 대한 임금 상승 등을 통한 떡고물 증가와 노동조합 상층에 대한 광범위한 매수, 나아가 사민당류의 혁명성 포기와 그 대가로 자본주의 의회 정치에서의 지분 인정, 반공주의의 확산을 통한 체제 내적인 사상의 확대, 우익화 등을 통해 자본주의는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사실상 경제 위기가 없을 정도의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런 황금기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국가 개입을 통해 막아왔던 자본주의 경제 체제 자체의 모순이 쌓이고 쌓여 결국 그 어느 시기보다 막대한 폭발력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5. 행복 끝 불행 시작, 더욱 깊은 공황의 수렁으로 빠져들다. 
  
 지속적 성장이 계속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예찬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자본주의의 번영은 끝이 없을 것 같았고, 국가의 개입과 복지국가의 이념은 영원하리라 믿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이 왔다. 호황은 과잉축적을 낳았고, 그것이 세계대공황으로 연결된 것이다.
  
 ● 경기과열 및 이윤율 하락
 
 전후 자본주의에서 급속한 수요의 증가 및 생산수단의 수요 확대는 이윤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과잉축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상승하던 이윤율이 1960년대 들어서서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윤율의 하락은 자본가들에게는 더 이상의 생산 확대를 막는 무서운 재난이었다.
 
 20여 년의 경제 활황에 따라 갈수록 가변자본(노동력)에 비해 고도로 축적되는 불변자본(생산자본재)은 이윤율을 점차 낮아지도록 만드는 가장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유기적 구성비율 증가)이었다. 국내를 넘어선 국제경쟁도 자본의 이윤율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서독, 일본, 신흥공업국의 상품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윤율 하락에 따라 설비가동률도 하락하면서 또다시 이윤율을 압박하는 악순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료의 가격과 투자재의 가격도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윤율의 하락과 함께 정부의 총수요 정책에 의해 시중에 자금이 지속적으로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 이윤율 하락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노동자들의 투쟁
 정부는 이윤 압박에 대항해 디플레이션 정책과 소득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1963년에 통화정책에 긴축을 가해 1964년부터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963년 안정화계획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 독일도 긴축정책을 사용해 1966년에는 실업자가 취업자수를 초과하기도 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임금을 감축하는 소득정책도 단행했는데, 프랑스는 1964년에 공공부문 임금을 삭감했다. 또한 사용자들은 작업 규율을 강화하고, 공장 단위 교섭에서 공세를 펴서 공장단위 보충교섭을 통해 임금을 삭감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1968년과 70년 사이에 유럽은 파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프랑스에서는 68년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5월 투쟁으로 3주간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다음 해에는 네덜란드와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업이 터졌다. 영국에서도 1969년과 70년에 투쟁이 벌어졌다. 이런 파업은 대부분 노동조합 체계를 거치지 않은 비공인 파업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체계를 잡아왔던 노동조합은 제 2인터내셔널 이후, 전국 조직으로서 산별노조화 되어 있었지만 사민주의의 득세와 자본주의의 장기 활황에 따른 일정한 성과의 분배가 이뤄지면서 상당히 관료화되어 있었다. 노동귀족들은 노사협조주의에 빠져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기 급급했다. 이런 경향이 약 50여 년 지속되는 동안 노동조합은 관료화되었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당시의 산별노조 체계를 통해서 표출되기 보다는 ‘살쾡이 파업’, ‘비공인 파업’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파업투쟁의 물결은 자본주의에 균열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고용, 사회복지 등으로 상이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과거의 명성을 간판으로 걸고 사실상 계급협조주의를 수용한 사민주의가 나팔수 노릇을 했지만, 이제 그것이 결코 성공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석유위기 
 
 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에 의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기후퇴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초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긴축정책을 팽창정책으로 전환시키면서 1~2년 간의 반짝 호황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잠깐의 호황이었을 뿐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의 국제 수지는 계속 악화되었다. 원조와 차관 등의 미국자본 수출은 유럽과 일본의 성장을 끌어 올렸고, 이들 국가의 독점자본들은 미국 시장을 차츰 잠식했다. 미국은 1969년 무역적자가 40억 달러에 달했다. 이미 마셜플랜이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달러는 남발되어 있었고, 실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국제 금시장에서 투기가 성행했다. 미국은 세계화폐로서의 달러를 유지시켜줄 금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금 태환 제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미국은 1971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달러를 평가 절하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73년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아랍 산유국들 간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 산유국들 간의 카르텔인 OPEC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OPEC은 그동안 저유가 정책에 묶여 있었던 석유 값을 인상시켰다. 1973년에서 74년 동안 석유 값은 4배나 인상되었다. 유가 폭등은 각 나라들이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써, 유가 상승은 수익성을 악화시켰고, 수요를 감소시켰다. 전 세계 구매력의 1.5%가 한꺼번에 OPEC로 넘어갔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OPEC이 1970년대 세계 대공황의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과잉축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 유가 인상은 공황에 점화를 한 것뿐이다. 1974년 여름, 마침내 세계 공황이 시작되었다. 
    
 6. 계급 타협 시기는 자본주의 이윤율의 위기로 종말을 고하다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이 막을 내리면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보자.
 
 당시는 가장 노골화된 계급타협 체제였다. 민노당을 비롯한 남한의 사민주의자, 계급협조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있었던 복지국가 모델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앤서니 기든스 등 '제 3의 길' 주창자들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을 다시 꺼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복지국가는 고도의 생산성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것은 노동의 가혹한 착취에 기반 한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라는 명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생산과정에서의 권력은 완전하게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으며, 분배 과정에서 약간의 떡고물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약간의 이윤율 침해가 일어나는 순간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떡고물은 바로 사라지고, 자본의 계급적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일관된 케인즈주의적 계급타협 체제는 1970년대의 경제공황사태가 증명하듯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허상임을 보여준다.
 
 성장이란 결국 노동자에 대한 착취 강화가 핵심이었다.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을 유지하는 기반이었다. 이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는 생성해왔고, 이윤율도 성장해왔다. 자본가들은 노동력에 대한 통제가 이윤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에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데 노력해왔다.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통제되고 사용된다.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 전체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생산에 대한 통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외에 대안은 없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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