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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을 만나다 - 또다른 나를 만나는 통로, 책읽기

책읽기!
"독서는 타자의 경험을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 지식이든 ㉡ 사물과 현상에 대한 느낌, 감동이든>


"책읽기는 책을 사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책읽기에서 중요한 대목이 있는대 그것은 텔레비젼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싸워 이기느냐이다."

"실존을 만나다" 운운하는 것이 다 쓰잘데 없는 논리를 끌어다 댄 말이지만 개중에 쓸말은 또 있는 거 같다. 첫째는 인류의 지식 전달 체계로서의 독서의 정확한 의미를 비교적 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텔레비젼을 보고 만족하는 생활을 사는 형태를 더이상 지속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째는 문화가치 운운하고 있고 서열 운운하지만 다 쓰잘데 없는 말이고 다만 생활의 중심을 옮길 필요는 있는 거 같다. 삶, 인생의 목표를 자기성찰의 중요성으로 말이다.

실존을 만나다 - 또다른 나를 만나는 통로, 책읽기 - http://www.wamco.or.kr/webzine/02_1.html

경제성장과 행복은 반비례? 독서가 중요하다지만 실제로 양서를 열심히 찾아 읽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 까닭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를 업으로 하는 학자가 아닌 한, 가령 고전명작을 거의 읽지 않았다고, 최근의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또는 지식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지적 동향이 무엇인지에 무지하다고 해서 일상을 사는 데 문제 가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지적이고 박식한 똑똑이는 주변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기가 쉽다.
그저 감정에 솔직하고 적나라한 모습이 이른바 ‘인간적인 태도’라 하여 주위의 사랑을 받는다.
이런 판에 무엇 때문에 힘겨운‘읽기노동’을 사서 하겠는가.
잠시 다른 이야기로 에둘러 가본다.
지난 월드컵 축구중계 때 간략한 국가소개가 화면에 뜨던 것이 기억난다.
그 안에 인구수와 GDP 수치가 나오는데 참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가 결코 아니구나 하는 감탄을 새삼스럽게 했었다.
국가 신장세가 그 작은 통계에서도 그대로 보였던 것이다.
참으로 절치 부심한 노력 끝에 우리도 세계의 중심권에 가까운 나라를 일구어냈는데, 그런데 그 성장의 결과만큼 우리는 행복하던가.
한마디로 전혀 그렇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걷잡을 수 없는 박탈감과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 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이만한 경제적 성공을 일구어냈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 근 80퍼센트에 가까운 청소년이 대학엘 진학하는데도 별로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 평균수명은 놀랍게 늘어났는데 앞으로의 삶은 갈수록 고단할 거라는 예상들...
미래전망으로 평판이 높은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언명이 떠오른다.
드러커는「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책에서 1990년대 이후 출생자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감성과 생각의 체계를 지닌, 다른 인류에 가까운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보화 시대를 앞질러 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드러커의 예상이 어떤 나라보다 빨리 실현될 소지가 높다.
삶은 행복하지 않고 뒤에 오는 세대 와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이자 가까운 미래상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동기에서 출발하는 독서
이제 다시 원래의 논제로 되돌아와 본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독서란 무엇을 하는 행위일까.
한마디로 독서는 타자의 경험을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다.
그 경험은 지식의 세계일 수도 있고 감동이나 재미의 세계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독서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 그것은 일상의 직접경험과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생의 두 번째 문을 여는 행위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가 태어남으로 해서 열어젖히게 되는 첫 번째 문은 일상의 문, 상식의 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을 뜻한다.
하지만 두 번째 문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태어나 성장했다고 그냥 열리는 문이 아니며, 누구나 열 수 있는 문도 아니며, 조금 열었다고 속이 다 보이는 문도 아니다.
그것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심연 속에 가득 들어찬 것은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지식, 감동 혹은 재미 같은 것.
그러한 심연을 체험할 때 사람은 바로 자기의 실존과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문지방을 넘어서 한발 더 들어간 심연의 세계로 인도하는 가장 유력한 통로 가 바로 책읽기다.
타자의 경험이 담긴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심연을 느끼고 그 속에서 어렴풋이 자기의 실존과 대면하게 된다는 뜻이다.
국가 성장 이후 오히려 우리 모두가 더 큰 불행감에 빠져 있는 상황을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더 성장하면 할수록, 더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더 불행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 더 많은 성장, 더많은 풍요에 앞서 이제 절박할 만큼 필요해진 일이 각자 찬찬히 자기의 실존과 대면하는 일, 바로 생의 두 번째 문을 열어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자기 실존과 만난다고 해서 주어진 현실이 변경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행불행의 관념에 대해 다른 차원의 이해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책을 잘, 그리고 많이 읽으며 살 수 있는 것일까.
서둘러 말하자면 절묘한 해법은 따로 없다.
다만 왕성한 독서로 향하게 만드는 하나의 단서는 있는 것 같다.
욕망! 혹은 열망! 바로 그것이다.
자기 삶에 격조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열망, 그것을 지적 허영심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인간에게는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남과 다르고 싶어 하는 차별화의 욕망이 있는데 그것을 집약한 용어가 바로 문화다.
문화란 곧 차별화 욕구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욕구를 채우는 길, 즉 자기 삶을 문화화하는 일이 바로 적극적인 책읽기다.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어떤 실리적인 동기에서보다 문화적인 동기에서 출발하는 독서가 훨씬 의미 있고 내실 있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스로 왕따가 되자.
책읽기는 책을 사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
도서관 운영자들은 싫어할 얘기지만, 책을 사두면 일부라도 읽거나 집을 장식하는 훌륭한 인테리어 소재로 쓰인다.
꼭 읽을 책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관심에 따라 폭넓게 책을 구입하고 그 중의 일부를 읽는 것이다.
아울러 언제나 무언가를 읽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책장에 가지런히 정돈해 꽂아두기보다는 침실, 화장실, 거실 구석 등 곳 곳에 그때 그때 읽을 책을 흐트려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긴 책읽기에서 보다 중요한 대목이 또 있다.
바로 텔레비전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싸워 이기느냐의 문제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사적인 시간을 정말 먹성좋게도 먹어치운다.
그 해결책으로 나는‘자발적 왕따론’을 제창하고 싶다.
모두가 아는 것을 나 혼자 모르고 사는 여유.
그런 여유는 곧 삶의 질적인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이며 산다.
그것은 크게 보아 동물의 왕국이 보여주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동물의 왕국을 벗어나 문명과 문화의 상황 앞에 놓인 인간은 실존이라는 벽앞에서 고뇌하고 무언가를 추구한다.
간혹 주변에 무언가 남다른 지각력이 있어 보이거나 존재의 품격이 달라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 그 배경에 적극적인 독서체험이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봉건 시대에 인간을 구분 짓던 기준은 계급이었다.
산업문명이 그러한 질서를 타파하고 자본의 유무로 인간을 서열짓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털 전자문명의 초입에 진입했다.
인간을 서열화하는 기준으로 경제력의 위력은 점점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가치다.
삶을 문화화하는 일, 문화가치를 획득하는 원천이 바로 자기 실존과의 대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울러 실존과 대면할 수 있는 통로로서 책읽기만큼 효율적인 수단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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